한준희 목사 “다시 세워야 할 삶의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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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21-03-19 06:32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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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팬데믹이 선언된 지 일 년이 지났다. 일 년 동안 코로나 팬데믹은 교회까지도 흔들어 놓았다. 예배를 드리는 것이 생명과도 같은 교회가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자 교회의 근간이 무너지는 위태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다고 교회가 어떤 특별한 대책을 내 놓을 수 있는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팬데믹 시대에 지금 교회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나, 또 팬데믹 시대 이후의 교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세미나를 하면서 대책 마련에 몰두하지만 결론은 그저 원론적인 말잔치로 끝나버렸다.
과연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의 현재 교회와 미래 교회를 이렇게 무능하게 만들도록 해야만 하나? 정말 대책은 없는 것일까? 분명히 이번 코로나 팬데믹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알리는 어떤 메시지가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모든 목사님들이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그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 솔직한 고백들이다. 그래서일까 속히 코로나가 종식되어 원래의 예배자들의 모습으로 돌아가고픈 간절함만이 우리들의 기도 제목들이다.
이렇게 모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목숨 같은 예배를 중지시킬 수는 없기에 인터넷으로 라도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는 것은 참 감사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런데 처음에는 인터넷 예배에 많은 성도들이 호응을 하며 예배에 들어 왔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서서히 예배 자세는 흐트러졌고 또한 꼭 자기 교회 영상만이 아닌 다른 교회 영상예배로도 들어 갈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인지 성도들은 이제 질 좋은 인터넷 예배를 선호하게 되었으며, 또 내가 시간이 날 때 내 시간에 맞춰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제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성도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예배드리는 성도가 모이지 않게 되자 헌금은 줄어들고, 줄어든 헌금 때문에 교회는 모든 것을 줄여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된 것 아닌가? 문제는 그 줄어듦이 점점 심각한 경제적 위기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위기를 성경은 어떻게 대처했을까?
그 한 가지 예로 다니엘의 예배 모습을 조명해 봄이 어떨까 한다. 다니엘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 바벨론 어느 집에서 창문을 열어 놓고 하루 세 번씩 기도를 드렸다고 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자 매일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면서 삶을 이어갔다는 뜻이다.
비록 예배는 드릴 수 없었지만 그의 예배 자세는 스스로 하는 기도와 삶에서 예배적인 삶을 산 사람이다. 예루살렘 성전이 없어졌기에 예배를 드리는 행위는 없어졌다. 그러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자세는 살아 있었다. 자세가 살아 있으니 당연히 삶의 현장에서 예배적 자세가 들어난 것이 다니엘의 예배적인 삶이다.
예배란 무엇인가? 신학적으로, 언어적으로, 역사적으로, 학문적으로 논하고 싶지 않다. 너무 오래 배우고 익혀 왔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여기는 자세라고 본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실 분이다. 우리가 넘어설 수 없는 분, 그래서 그분 앞에 엎드려 절하는 자세가 예배라고 한다. 만일 그런 하나님을 아버지로, 내 주인으로, 나를 창조하신 분이라고 여기는 자세가 없으면서 엎드려 절을 했다면 그 행위는 가짜다.
하나님께서는 그 가짜 행위를 냉혹하게 몰아치셨다. 무수한 제물의 피를 기뻐하지 않으셨고, 헛된 제물은 가져오지도 말라 하셨고, 정해 놓은 절기마다 성회라고 모인 곳에서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 하겠다고 하셨고, 눈을 감고 기도해도 듣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사1:10-15) 왜 그랬을까? 바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창조주로 여긴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말씀대로 선행을 베풀고,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고 고아와 과부를 위해 변호해야 할 말씀으로의 삶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말씀은 말씀이고 나는 제물만 드리면 모든 것이 사해 진다는 예배의 무지가 만들어 낸 행위라는 것이다. 오늘날 똑같다. 누가 예배 형식에 따라 묵도를 해야 하고, 성시교독을 해야 하고, 사도신경, 기도, 성가대 찬양, 설교, 헌금, 축도를 하도록 정해 놓았는가? 아마도 교회 역사 속에 예배라면 적어도 이런 순서에 입각해서 드려야 참된 예배가 될 수 있겠다는 사람이 만든 제도이지 누가 이렇게 예배드려야만 참된 예배라고 했느냐 말이다.
물론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것이 오랜 교회 역사 속에 검증되어 왔기에 오늘날 예배 순서는 뭐라 할 게재가 못 된다. 다만 이렇게 드리던 저렇게 드리던 문제는 이 예배가 형식화되어 이런 예배 제도에 익숙해져 있는 모든 이들이 오랜 세월 동안 예배를 종교화시켰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종교화 되었다는 것, 즉 삶속에서 말씀대로 살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는 사라지고 종교화된 예배가 되어버렸으니 당연히 우리 시대에 겪고 있는 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예배를 못 드리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마치 종교화된 예배가 무너진 것으로 동일시 할 수밖에 뭐라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종교 형태가 무너지니 인터넷으로라도 성도들을 이 종교적 형태 안에 묶어 두려고 온갖 방법을 다 동원시킨 것 아닌가 한다.
예배의 핵심인 삶! 성도들의 삶 속에 들어 있는 이 예배의 참된 가치를 논하고, 연구하고, 토론해야 참된 예배의 자세가 뭔지 방향을 잡을 수 있을 텐데, 종교적 예배에만 중점을 두고 있느니 이 코로나 팬데믹 안에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 여겨진다.
어쩌면 지금의 예배 형태라면 예배는 안 드려도 된다. 코로나로 인해 이웃에게 병을 옮기고, 내가 코로나에 걸리게 된다면 당연히 안 드려도 된다. 안 드려도 올바른 예배 자세를 알고,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라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얼마든지 예배적인 삶을 살 수 있다.
어쩌면 종교화된 예배에서 탈피하려면, 지금 이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임에 틀림없다. 지금이 기회다. 형식화된 예배로 성도들을 이끌고 가는 것이 해답이 아니라 삶의 예배로 전환하도록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해답이다.
그런데 문제는 삶의 예배가 뭔지 모른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랜 교회역사 속에 이미 굳어져버린 거대한 예배 형태가 우리 신앙 안에도 깔려 있기 때문이다. 즉 드려지지 않는 예배가 어떻게 삶의 예배가 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드려지는 예배가 있어야 삶의 예배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드려지는 예배가 오랜 세월 종교적 형태로만 굳어져 왔기에, 주일에 한번 드려진 예배가 끝나면 삶속에 예배는 성도들 각자가 알아서 살아가라는 무책임함이 지금의 위기를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닌가 본다.
이제는 삶의 예배를 가르치고, 실천해 내고, 만들어 내는 산제사가 필요할 때다. 이것이 지금 이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기도하면서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야 할 숙제라는 것을 제시해 보고 싶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말라기1:10).
[관련기사] 한준희 목사 “팬데믹이 만든 잘못된 예배 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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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준희 목사(뉴욕성원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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