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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자보호교회 5회 심포지엄 “이민자, 그 가치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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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22-04-0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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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뉴스] 이민자보호교회 심포지엄 현장

 

이민자보호교회 네트워크(이하 이보교) 5회 심포지엄이 “이민자, 그 가치를 말하다, 나뉨을 넘어 나눔으로”라는 주제로 3월 31일(목) 오후 8시 줌 화상으로 열렸다. 

 

심포지움은 뉴욕교협, 뉴저지교협, 뉴저지목사회, 시민참여센터 등에서 후원했으며, 각지에서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상으로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특별히 이번 심포지엄은 한인들 삶에 전환점을 가져온 LA 폭동사건 30주년을 앞두고 열려 그 의미를 더했다.

 

1.

 

이보교 법률자문위원 주디장 장로(변호사)가 사회를 보았는데 심포지엄을 시작하며 “아시안에 대한 폭력과 차별이 증가하는 때에 이민자로 한인공동체가 종교적, 사회역사적, 정서적으로 스스로를 성찰하는 동시에 이민자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자리를 마련하기위해 마련한 자리”라며 “심포지움이 소수인종과 이민공동체 사이에 분열과 갈등을 넘어 화해와 연대를 모색하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뉴저지 이보교 위원장 이준규 목사(수정교회)가 인사와 기도를 통해 “화려한 도시 속에 이민자들이 소외되고 무관심에 처해있고 불평등과 인종차별에 무참히 짓밟히고 있음을 보게 된다. 이보교가 하나님의 생명력을 증거하는 이 땅위에 피난처가 되는 진정한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심포지엄에서 이민자를 통해 진정한 가치를 우리 모두가 발견하는 귀한 시간되었으면 좋겠다”라며 인사하고 기도를 인도했다.

 

2.

 

심포지엄에서 3명의 강사가 나와 30여분씩 발표를 했으며, 참가자들과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전후석 감독(영화감독, 변호사)는 “디아스포라, 통합의 가능성”라는 발표를 통해 미국에서 태어나 3세에 한국에 다시 들어가 살다 18세부터 다시 미국에서 살게 되며 변하게 된 자신의 정체성을 소개했다. 전 감독은 한국인 - 재미 한국인 - 디아스포라 - 세계시민으로 변하는 세계관을 흥미있게 소개했다. 특히 전 감독은 2015년 쿠바 배낭여행때 4세대 한국인이자 쿠바인인 된 택시기사를 만나 <헤로니모>라는 영화를 만든 일화를 소개했다. 그리로 영화감독답게 LA 폭동사건 등 각종 영상자료를 사용하여 발표 효과를 극대화했다. 

 

전후석 감독의 발표에 대하여 정청세 박사(빙햄턴대학 한국학연구소)는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을 단순하게 나열하는 데에서 나아가 개인의 성장 경험과 정서적 성숙 단계와 맞물려 4개의 층위에서 해석하려는 시도는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하며, “전후석 감독이 말한 정체성 형성의 “단계성”과 “중첩성”은 특히 이민자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하였다. 

 

김재균 교수(Davidson대학 사회학과 교수)는 “반-흑인 정서의 기원과 전개, 한흑 공동체 화해와 연대”라는 제목의 발표를 했는데 그 내용에 다들 큰 충격을 받았다.

 

김재균 교수는 흑인과 아시안들이 인종주의를 대하는 근본적인 자세를 소개하고 “흑인들은 노예제로부터 시작된, 뿌리가 너무도 깊은 구조적인 인종주의에 대해 싸워 올 수 밖에 없었고, 아시안들은 그 구조적인 인종주의의 틈에서 구조적인 인종주의에 대항해 싸우기 보다는 흑인들의 고통은 남의 일로 생각하거나, 그것을 넘어 백인들과 함께 흑인에 대한 차별에 동참하면서, 구조적인 인종주의는 그대로 놔 둔 채 자신들의 사회적 상승을 어메리칸 드림으로 여긴다”라며 한흑 연대가 어려운 이유를 소개했다. 

 

특히 김재균 교수는 한국인들이 흑인을 보는 부정적인 시각을 역사적으로 소개하여 놀라움을 주었다. 1883년 <한성순보> 기사로부터 소개하고 있다. 특히 발표 도중 손태환 목사는 채팅창을 통해 1887년 6월 24일 <독립신문> 기사를 소개했는데 "...흑인들은 가죽이 검으며 털이 양의 털같이 곱슬곱슬하며 턱이 나오며 코가 납작한 고로 동양 인종들보다도 미련하고 흰 인종보다는 매우 천한지라... 백인종은 오늘날 세계 인종 중에 제일 영민하고 부지런하고 담대한 고로 온 천하 각국에 모두 퍼져 차차 하등 인종들을 이기고 토지와 초목을 차지하는 고로 하등인종 중에 백인종과 섞여 백인종의 학문과 풍속을 배워 그 사람들과 같이 문명 진보 못 하는 종족들은 차차 멸종이 되어야 하며..."라는 내용이었다.

 

김재균 교수는 발표후 질문이 이어졌는데 인종차별적인 요소를 담고 있는 어메리칸 드림 해체에 대한 질문에 “성공에 대한 열망을 정의에 대한 열망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실은 어떤 면으로 인종주의에 기독교가 참여한 부분이 많다”고 하여 충격을 주었다.

 

김재균 교수는 이승만 박사의 관련 발언을 소개했다. 이 박사는 “한국인들이 미국 백인 보다 더욱더 예수를 잘 믿는다면 예수님이 우리를 축복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들은 흑인보다 더 신실하게 신앙심을 보여주어야 하나님께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이런 종류의 발언들이 무수하게 많다”라며 “예수님은 그런 말씀을 하신 말씀이 없는데 믿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상황에서 신분상승을 위해 어떻게 보면 예수님을 이용한 것”이라는 지적을 아프게 했다.

 

뉴욕 이보교 위원장 조원태 목사는 “마치 300년 살아보고 말하시는 것처럼 큰 거울을 우리 앞에 세워주셔서 감사드린다. 구조적 악을 회피한 채 외식적인 연대에 급급했던 우리를 보게 함으로 부끄럽게 하는데도 묘하게 통쾌한 회개를 하게 하는 최고의 강의였다”라고 김재균 교수의 발표를 평했다.

 

김지선 교수(Earlham대학 종교대학원 교수)는 “디아스포라의 성서적 고찰과 연대”라는 주제의 발표를 했다. 장로교 목사이기도 한 김지선 교수는 제시 잭슨 목사와 함께 인권운동을 벌이고 있다. 1975년에 캐나다로 처음 이민을 와 이민자로서 그리고 여성으로 받은 차별을 경험을 가지고 강의를 했으며, 20여권의 책을 냈다. 이번 강의는 아시안 여성 이민자로서 경험한 인종차별, 성차별, 외국인 혐오증에 대해 성서적, 사회학적, 신학적으로 접근하는 <Invisible>라는 제목의 저서를 바탕으로 나누었다. 특히 인종이나 성별을 넘어서 “우리”라는 한인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공동체성을 기반으로, “한,” “정,” “기”라는 감정과 경험을 통해 취급받았던 사람들이 인정받고, 존중받고,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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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김지선 교수, 주디장 변호사(사회), 전후석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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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화상으로 참가했다.
 

심포지엄을 준비한 이민지보호교회네트워크의 김대호 목사(뉴저지 산돌교회)는 이번 심포지엄이 “첫째, 이민자가 겪는 고통이 혁신의 힘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밝혔다. 둘째, 한인 공동체 내에 팽배한 반흑인 정서의 뿌리를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는 길을 제시했다. 셋째, 보이지 않았던 보지 않았던 사람들을 보고 보이게 해야 한다는 실천 방향을 제시하였다”고 말하며 심포지엄의 의의를 정리했다.

 

3.

 

“디아스포라, 통합의 가능성”

전후석 (영화 감독)

 

전후석 감독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 만 3살 때 가족과 함께 들어와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자라났다. 18살 때 미국으로 돌아오며 한국에 있을 때는 자각하지 못하던 자신의 “한국인 됨”을 자각되는 계기가 있었다.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국인 됨”을 되도록 배제하고 최대한 미국화, 주류화, 백인화 되려는 노력을 했다. 

 

대학교 2학년 때 인생을 바꾼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데 1992년 LA 폭동사건이다. 그 전까지 “한국인(Korean)”이 될 것인지 “미국인(American)”이 될 것인지 고민했다면 이제는 “재미 한국인(Korean American)”이 되는 것으로 미국내 소수민족으로서 건강하고 주체적인, 우리들만의 공동체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인”에서 “재미 한국인(Korean American)”으로 바뀐 정체성은 대학을 졸업하고 연변에서 일하며 나는 조선족 친구들을 만나며 세계관이 변하는 경험을 하였다. “한인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전후석 감독은 한국인 - 재미한인 - 디아스포라의 순서로 정체성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전 감독은 “‘디아스포라’라는 개념이 자칫 잘못 발전되어 ‘민족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다. 그것은 자아를 인식하는데 있어 건강한 과정이나 목적이 결여될 때 나타날 수 있는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중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 많은 위인들 - 마틴루터킹 주니어 목사, 간디, 만델라, 도산 안창호 등을 소개하고 “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민족, 인종, 국가적으로 식민지와 피식민지 관계에서 탄압받던 자신들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들은 민족주의적 신념으로 움직인 자들이 아니었다. 해방 혹은 평등을 이룬 이후 그들은 자신들을 억압했던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그들을 포용하였다. 그것은 그들이 민족주의 이상의 이념과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이다. 바로 인본주의에 바탕한 세계시민성이 그것이다”고 말한다.

 

즉 정체성 여정의 끝이 민족주의나 편협한 애국주의, 국수주의가 아닌 이상적인 도착지점은 바로 “사람에 대한 보편적 인류애”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인 - 재미한인 - 디아스포라 - 세계시민으로 발전한 시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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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적인 강의를 한 김재균 교수(Davidson대학 사회학과 교수)
 

4.

 

“반-흑인 정서의 기원과 전개, 한흑 공동체 화해와 연대”

김재균 교수(Davidson대학 사회학과 교수)

 

김재균 교수는 발표를 시작하며 미국 아시안 아메리칸 스터디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1920년대의 두개의 연방대법원 사례를 소개한다. 일본에서 태어났지만 미국에서 오랫동안 생활을 한 오자와(1922년 판례), 그리고 영제국 식민지배 하의 인도에서 태어나서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고 미국 군인으로 참전하기도 하였던 씬드(1923년 판례), 두 명 모두 다 자신들이 시민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을 하지만 모두 미국정부가 승소했다.

 

김재균 교수는 두 케이스들이 진정한 아시안 인권외침으로 보지 않는다. 김 교수는 “그들의 싸움은 아쉽지만 커다란 불평등의 구조에 저항을 한 것이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는 그대로 두되, 그 틀 안에서 자신들도 백인의 범주로 인정되고자 저항을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미주 한인들을 포함한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저항의 역사도 이와같이 대부분의 경우 자신들의 집단의 사회적 상승을 위한 저항의 역사이지만 인종주의의 큰 구조 자체에 대한 저항의 역사라고 보긴 어렵다고 지적한다.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

 

그리고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모델 마이너리티(model minority)”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를 설명을 한다. 그 말을 희생과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성공을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 말에는 그것보다 더 많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모델 마이너리티’라는 단어의 뒤에는 아시안들을 백인과 흑인 사이에 두고 흑인들보다 뛰어나다고 올려주는 대신 백인보다는 부족한 자리에 위치를 시킨다. 또 소위 말하자면 쓸 만은 하지만 미국의 시민사회에 속하기에는 근본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인종들이라는 의미 역시 가지고 있다. 또한 이 말에는 불만을 갖지 말고 조용히 일하라는 암묵적인 강요도 들어있다. 흑인에게도 인종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정치적인 투쟁을 하지 말고 너희들도 이 아시안들처럼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많은 아시안 아메리칸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모델 마이너리티’가 백인우월주의를 더욱 공고히 하는 담론이라고 강하게 비판을 하지만 그만큼 쉽게 없어지지 않는 여전히 강한 담론이라는 것을 역으로 보여준다. 즉 말하자면 ‘모델 마이너리티’ 담론이 사라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는 많은 아시안 아메리칸들이 이 담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나는 인종주의에 피해를 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열심히 노력해서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내가 성공하는 것이 인종주의에 저항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백인들보다 부족할게 뭐가 있느냐,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1992년 LA 폭동사건후 미주 한인 학자인 일레인 킴 박사는 논문에서 소요가 일어난 후 경찰은 한인들의 가게가 있는 곳은 전혀 지키러 오지 않고 백인들의 지역만 지키러 오고, 한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은 한인과 흑인의 분쟁을 무슨 동물원 구경하듯이 지켜보는 백인들의 무책임함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고 말한다. 그리고 한인들은 인종주의가 생기는 것에 하등 기여를 하지 않았는데 백인우월주의 뿐만 아니라 흑인들의 소요에 휘말리며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고, 그 억울함은 한인들의 역사적인 한이 계속되는 것이라며 무조건적인 동화가 아닌 새로운 민족주의를 통해서 백인우월주의에 저항을 해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그렇기에 흑인들도 비이성적인 폭력은 버리고 공통의 적인 백인우월주의를 이겨내고 함께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을 한다. 당시 다른 아시안 아메리칸 학자들도 비슷한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접한 흑인 학자들은 사뭇 다른 견해를 내비쳤습니다. 우선 그들은 아메리칸 드림을 외치면서 ‘모델마이너리티’를 추구하는 아시안들이 인종주의, 특히 반흑인주의를 더 공고히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선 흑인 학자들은 아시안들이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이 있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알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흑인 학자들은 왜 한인들 그리고 아시안들이 흑인들에 대한 인종차별에 동참하는지에 대해 체계적인 분석을 하지 않고 단지 무지라고 축소시켜서 말하고, 자신들을 단지 아무런 죄가 없는 희생자들이라고 얘기하는 것 자체가 아시안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한다.

 

LA폭동사건 당시 한인들은 경찰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경찰들이 한인들을 지켜주지 않은 것이 한인들이 받은 인종차별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한인들에게 경찰은 시민들을 지켜줘야 하는 존재이지 한인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흑인들에게는 최근 ‘블랙 라이브즈 매터’ 운동에서도 잘 알 수 있듯이 경찰이라는 존재는 흑인들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국가의 폭력의 표상과 동일시되는 존재이다. 미국이 오늘날의 강력한 나라가 되기 위해 인종적 노예제가 필수적이었고 흑인들에게 출생 시 부터의 소외, 사회적 불명예, 그리고 아무 이유없는 무조건적인 폭력을 거치게 했으며 이 영향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인종적 노예제로부터 시작된 반흑인주의는 아시안들이 겪는 인종주의와는 조금은 다른 차원이 있다. 그리고 흑인들의 인종주의에 대한 역사적 저항은 뿌리깊은 인종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한인 그리고 아시아인들의 인종주의에 대한 저항은 오자와, 씬드의 판례를 넘어 아시아인들의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열망으로 알 수 있듯이 역사적으로 자신들의 집단의 사회적 상승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최근의 많은 아시안 NGO 들을 살펴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새로운 아시안 이민자들의 미국 적응을 도와주면서 강조하는 것은 어떻게 큰 구조적 인종주의에 대해서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미국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잘 알려진 아시안 아메리칸 학자인 Dina Okamoto 박사의 연구를 보면, 예전과 다르게 많은 아시안 아메리칸 NGO들이 아시안들의 권리를 위해 힘을 합치는 경우가 많지만, 흑인들과의 연대는 흔치 않고 연대가 생겼다 하더라도 그것이 지속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흑인들과 아시안들이 원하는 것과 문제인 것이 너무도 극명하게 다르다고 말한다. 이 말은 흑인들은 노예제로부터 시작된, 뿌리가 너무도 깊은 구조적인 인종주의에 대해 싸워 올 수 밖에 없었고, 아시안들은 그 구조적인 인종주의의 틈에서 구조적인 인종주의에 대항해 싸우기 보다는 흑인들의 고통은 남의 일로 생각하거나, 그것을 넘어 백인들과 함께 흑인에 대한 차별에 동참하면서, 구조적인 인종주의는 그대로 놔 둔 채 자신들의 사회적 상승을 사회적인 동화나 어메리칸 드림이라고 여긴다는 것이.

 

한국인의 반흑인주의의 유래

 

왜 한인들은 그렇게도 쉽게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빠지는 것일까? 혹시라도 한국의 역사에서 뿌리 깊은 흑인에 대한 인종주의의 흔적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몇몇 자료들을 살펴보던 중 구한 말 시대에 서양을 배우고 문명개화를 해야 한다는 담론이 한창이던 1800년도 후반 1900년도 초반에 몇몇 개화파 학자들 사이에 인종적 담론이 잠시 등장한다는 글을 보았다. 개화파 학자들은 중국어, 일본어로 된 글을 통해서 이미 인종담론을 접했지만 이러한 인종담론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소개된 것은 한국 최초의 관용 신문, 1883년 한성순보 기사로 시작한다. 

 

수많은 소위 애국지사들이 인종주의에 기반한 민족적 자긍심을 설파하였지만 결국 5년 뒤에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은 인종주의는 우리의 독립을 가져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아쉽게도 반흑인주의는 더욱 강해지고 지식인들을 넘어 한국인이 공유하는 어떠한 가치가 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일본의 침략행위와 한국인들에 대한 폭력적 대우에 대해 규탄하는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이 한국인을 어리석은 토인처럼 대접한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당시 토인이라 하는 것은 그냥 단지 어떠한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대부분 흑인들 아니면 종종 소위 말하는 홍인 즉 식민을 당한 원주민들을 의미했다. 다시 말하면 우리 한국인 같은 문화 문명인은 이런 흑인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없기에 나는 독립을 선언한다는 의미이다.

 

3.1운동이후 일제는 한국인들을 달래기 위해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미국놈들이 흑인들을 대하는 것보다는 너희들에게 잘해주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그러자 몇몇 한국의 지식인들은 “감히 우리가 너희에게 식민을 당했다고 해도 너희가 우리를 흑인 같은 미개한 존재와 비교를 하느냐”라고 항의를 했다. 한 독립투사는 일본 경찰에게 연행을 당하고 독립모임에 관한 사실을 얘기하라는 일본 경찰의 압박에 “난 그날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한다. 왜냐면 그 모임에 가자마자 누군가 나에게 저 검은 흑인은 누구냐고 모욕을 해서 너무 화가 나서 그 다음 일은 아예 기억을 하지 못한다”라고 대답한다. 

 

물론 많은 분들이 흑인들도 요즘 들어 코로나를 가져왔다고 하며 우리에게 묻지마 폭력을 행사하는데 왜 도대체 우리가 그들과 연대를 해야 하고 그들의 사정을 봐줘야 하냐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분명히 그러한 폭력을 행사하는 흑인들도 있고 그러한 폭력의 기반에는 아시안들의 대한 시민사회에서의 배척이 존재한다. 아마 지금도 누군가는 이 “중국놈 너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들으면서 폭력의 희생양이 되고 있겠지만, 우리가 겪어오는 폭력은 어떤 면으로는 말도 안되는 비논리이지만 어떤 면으로는 어떠한 맥락이 존재하는 조건적인 폭력이다. 하지만 흑인에 대한 폭력은 “흑인이나 총을 쏘았다”라고 말할 정도로 어떠한 이성적인 대답도 필요하지 않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흑인들을 억압하는 인종주의에 사실은 동참해 왔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종간 연대라는 것은 특히 흑인과 한인의 연대라는 것은 말하자면, 자 너희 흑인들 너희들은 이런저런 문제가 있어 너네 그런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폭력성을 버리고 우리를 따라와 라는 마음에서 시작하면 안되고, 그렇게는 연대가 형성될 수도 없다. 그것 자체가 뿌리깊은 반흑인주의를 계속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인종주의에는 아무 상관이 없이 단지 먹고 살려고 이곳에 와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시지 않길 간절히 바라본다.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정의롭지 않은 인종주의를 만드는데 큰 동참을 했으며 그 인종주의를 바탕으로 우리가 어떻게 민족으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그 정체성을 넘어 소위 자긍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것을 통해 어떻게 소위 말하는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깊게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한인들은 적어도 인종주의에 아무런 참여를 하지 않은 인종주의에 핍박만을 받은 희생자들이 아니다. 그렇기에 흑인들과 한인들의 연대는 우리의 존재론적인 성찰과 역사적 반성을 통해서만 시작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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