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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일대 음대 함신익 교수 초청 간증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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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09-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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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한무리교회(김춘실 목사)에서 "함신익 교수와 나누는 삶의 이야기" 간증집회가 9월 26일(토)부터 27일(주일)까지 열렸다. 바쁜 스케줄로 인해 작년 겨울부터 섭외를 했다가 이제야 겨우 모시게 되었다며 김춘실 목사는 함교수를 처음 보는 순간 마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를 보는 듯했다고 소개했다.

'지휘봉을 든 혁명가', '음악계의 엔돌핀', '미국을 이끌어갈 차세대 지휘자 5인' 등으로 불리며, '예일대 명물교수 함토벤'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함신익 교수는 달동네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과 결핍을 삶의 양분으로 삼아 기적 같은 성취를 일구어 낸 인물이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단돈 200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길을 떠나 식당 웨이터와 냉동 트럭 운전기사, 지압사 등을 해 가며 공부했으며, 그는 미국 애벌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그린베이 교향악단, 투스칼루사 필하모닉 상임지휘자로 활동했다.

현재 예일대 음악대학원 교수, 예일 필하모니 음악감독 겸 지휘자로서 건국대를 졸업 후 1983년 미국으로 유학간지 12년만인 1995년, 150대 1 경쟁율을 뚫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예일대 교수가 됐으며, 세계 각국의 메이저 오케스트라로부터 객원지휘자 초청을 받고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함신익 교수는 일단 간증에 앞서 지휘자로서 사람들이 너무 흩어져 있으면 집중이 안된다며 흩어져 앉아있는 참석자들을 가운데 자리로 모으고 민수기 14장 6-15절을 본문으로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제목으로 간증을 했다. 항상 관객을 등 뒤에 두고 무대에 서는 지휘자로서 청중을 마주하면 두려워진다는 함교수는 특이한 목소리와 유머로 감동적인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음은 간증 요약이다.

지휘자는 대체 뭘 하는 사람인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지휘자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다들 뭔가를 연주하고 소리를 내는데 지휘자만 소리가 없다. 근데도 공연이 끝나면 항상 목이 쉰다. 속으로 연주되는 음을 따라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나고 나면 설렁탕을 한 그릇 먹어야 한다. 음악 애호가들을 만나면 이런 질문을 종종 받곤 한다 - '연주자들이 지휘자를 보나요?' 안보면 보게 해야한다. 근데 청중을 보는 것은 두렵다. 지휘자는 뒷모습만 잘 가꾸면 된다.

간증집회를 하다 보면 자랑을 하게 된다. 잘 가려 들으시기 바란다. 아버지도 목사님이셨고, 가족들도 전부 목사 아니면 사모이기는 한데 사실 들은 풍월이 그리 충분하지 못하다.

삼양동의 천막교회에서

아버지는 골통보수시다. 교회에서 드럼치는 사람을 치리하려고 하셨던 분이다. 25년전 김포공항에서 미국으로 올 때 온 교인이 나와서 환송예배를 드렸다. 요즘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아버지께서 주신 말씀이 오늘 민수기 본문이었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는 것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혹시라도 간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말씀에 근거해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말씀을 보면서 간증을 하도록 하겠다.

민수기 13장을 잠시 보자. 가나안 정탐군 12명이 보고를 한다. 10명은 부정적인 보고를 한다. 패배의식에 가득차서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다'고 하며 비참하게도 '우리는 메뚜기 같다'고 포기를 선언한다. 성경에 보면 이 보고를 듣고 사람들이 '밤새도록 참담하게 통곡했다'고 써있다. 그럼 낮에는 뭘 했을까? 아마 내 생각에는 머리에 "가나안 결사반대"라고 쓴 띠를 두르고 데모했을 것이다. 그때 갈렙과 여호수아는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고 하며 '그들은 우리 밥이다'라고 선언한다. 이 어투는 내 어린시절 자주 들었던 것이다.

내가 어릴적 살았던 삼양동은 당시 판자촌이었고 상이군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고 본명이 없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이를테면 삼양동 삼거리 쌍칼, 곰배팔이, 빨랫골 용팔이 같은 것들이었다. 아버지는 거기에서 미군 천막을 가져다가 개척교회를 시작했고 빈 산소통을 두드려 종소리를 대신했다. 시끄럽다며 쌍칼이 와서 천막을 칼로 찢어놓는다. 그러면 아버지는 결투를 하고 패배해서 돌아오신다. 삼거리 쌍칼이나 빨랫골 용팔이의 결투하는 방식은 일단 웃통을 벗고 더러운 '난닝구'를 찢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 "넌 내 밥이야!" 이렇게 일단 기싸움에서 기선을 잡는다.

초등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도시락을 싸간 적이 없었고 고등학교때까지 피아노도 없이 피아니스트를 꿈꿨다. 소풍을 가본 적도 없다. 도시락을 쌀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추석이 가장 좋은 명절이었다. 여전도회에서 산 닭을 한마리 가져다 준다. 그러면 아버지는 바로 물을 끓이고 닭의 목을 친다. 나는 '목사가 저럴 수 있나...'이렇게 생각했었다. 그리고 닭은 끓이고 또 끓여서 껍질까지 싹싹 먹는다. 그때는 소원이 쌀밥을 먹는 것이었다.

바이엘 87번 치며 울었다

당시 충현교회에서 풍금을 하나 보내주었고 나는 곧 반주자로 채용되었다. 8살때부터 수요예배 반주를 했다. 그때 풍금 페달을 밟던 훈련으로 지금도 하체가 튼튼하다. 근데 모든 곡들을 C로 변주해서 연주했다. 그러다보니 원곡과 달리 노래가 너무 높거나 낮다.

당시 성가대 총무가 "신익아 뭔가 이상하다, 왜 이렇게 음이 높지?"하며 의심의 눈길을 주었고 어머니는 차츰 눈치를 채기 시작하셨다. 사실 아버지는 더했다. 나는 그래도 4-5도 차이인데 아버지는 찬송을 부르실 때 한옥타브를 낮게 부르신다. 그래서 삼양교회 전교인의 저음화를 가져오기도 했었다.

그래서 동네에 있는 피아노 학원을 가게 되었다. 선생님은 두 갓난아이의 엄마로 애를 업고, "신익아 그 곡 두 번 치고 있어, 시장에 갔다올께", 아니면 빨래를 하시면서 레슨을 하셨다. 그 때 한번도 내 옆에 앉아 가르쳐 주신 적이 없었던것 같다. 그러면서 진도가 나가 나는 바이엘 87번 곡을 치게 되었고 그 곡은 나를 울게 했다. 음악을 연주하는 그 순간만은 자유였다. 너무 아름다웠다.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음악을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무턱대고 유명한 피아노 교수님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장미원에서 담밖으로 삐져나온 장미 두 송이를 꺾어들고 찾아가 레슨을 부탁했다. 피아노를 쳐보라고 하신다. 연주했더니 '잘 하기는 하는데, 너무 늦었다'고 하신다. 그래도 하겠다고 하니 다음주까지 쇼팽의 소나타를 쳐오라고 하신다. 그때 쇼팽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1주일 내내 열심히 연주해서 갔다. 결국 그 교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음악을 듣고 싶던 나는 연주회 뒷문출입을 시작했다. 표 살 돈이 없었던 나는 당시 이대 강당 등의 뒷문을 통해 들락거렸다. 세종문화회관의 경우 뒷문 수위와 친구가 되기도 했다.

200불 들고 미국으로

어릴때부터 꿈의 나라였던 미국을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도서관에서 미국대학요람을 빌려다가 훑어보기 시작했다. 당시 1983년에 가장 생활비가 안 드는 곳을 보니 텍사스였다. 거기 대학을 찾다보니 텍사스 Southern University라는 곳이 있었다. 신청서를 보냈더니 장학금 줄테니 오라고 한다. 그런데 비자가 안나온다. 당시 비자받기는 하늘의 별따기였다. 3번 인터뷰를 떨어지고 나오는데 미대사관 수위가 공증하는데를 가르쳐주면서 거기서 서류를 해보라고 한다. 그때까지 나는 서류를 손으로 써서 냈었다. 그래서 그곳을 통해 했더니 붙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수위 아저씨와 공증하는데가 동업자였다.

입학 하루 전날 미국에 도착하여 학교를 가보니 100% 흑인학교다. 가르치는 것도 가스펠, 재즈, ㅤㄹㅘㄱ 같은 음악들이다. 나는 거기 1주일 있으면서 천재라고 알려지기 시작했다. 배울게 없었다. 오히려 선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는 1달만에 그만뒀다. 그리고는 학교가는 길에 었었던 Rice 대학엘 가봤는데 꽤 괜찮았다. 그런데 거기서는 지휘 전공자를 1명만 뽑으며, 이미 정원이 찾다는 것이다. 계속 찾아갔다. 그러자 청강생으로 들으라고 한다. 그래서 1학기를 들었는데 교수가 잘한다며 오디션을 보란다. 그래서 그 다음 학기에 정식 학생이 되었다.

아마 정식으로 입학절차를 밟았다면 안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냥 내가 미국 사람인양 뻔뻔하게 나갔고 학교 측 사람들은 내게 토플이나 GRE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지금도 영어를 더 잘하고 싶다. 오케스트라와 연습할 때도 무슨 설명을 해야 할때 길게 하지 않는다. 길게 하면 영어 바닥이 드러난다. 짧게 핵심을 설명한다. 또 미국에서는 주로 이태리 음악용어로 설명을 하고 독일에 가면 영어로, 이탈리아에 가면 불어로 한다. 이렇게 예일대에서 15년을 버텼다.

웨이터, 냉동 트럭운전

돈을 벌기 위해 한국식당에서 웨이터를 했다. 웨이터를 할 때 시간을 때운다는 생각이나 그냥 거쳐가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대강 해서는 안된다. 나는 연미복에 나비넥타이를 메고 일했다. "도라지"라는 그 한국식당에는 테이블이 7개 뿐이었다. 나는 정성을 다해 손님들을 모셨고 팁도 많이 받았다. 근데 시간당 2불이었고 나는 그만두려고 했다. 주인이 매니져로 승격시켜주고 임금도 올려준다는데 단호히 거절했다. 나에게는 트럭운전이라는 다음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말에 식료품 냉동트럭을 운전해주면 당시 100불을 주었다.

1984년에 1971년형 쉐비 자동차를 중고로 구입했다. 마일리지도 별로 안되 25만 마일이고 굴러갈 때보다 서있을 때가 더 많다. 에어콘을 틀면 더운 바람이 나온다. 무더운 휴스턴에서 나는 창문을 닫고 에어컨을 키고 사우나를 한다. 그러나 나는 한번도 하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없다. 지금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경험을 해 볼 수 있겠는가?

근데 하루는 차가 서버렸고 토잉트럭을 불렀다. 50불을 달라고 한다. 주머니에 10불 밖에 없다.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나 도움이 필요할 때 절대 저자세로 부탁하면 안된다. 나는 트럭운전사에게 차를 토잉하는 40분 동안 리사이틀을 해 줄 테니까 10불만 받으라고 했다. 그리고는 내가 아는 모든 노래를 불렀다. 나는 지휘자다. 노래 많이 모른다. 레파토리 금방 떨어졌다. 그래서 삼양초등학교 교가, 군가 등으로 채웠다. 나중에 10불을 주는데 5불을 돌려준다. '너 내일 아침 먹을 것 없지 않냐' 하면서.

이 지구가 나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지구는 누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하루는 누구와 함께 시작되는가? 나와 함께 시작된다. 뭐 이왕 돌아가는 지구, 내가 중심이라고 해보는거다. 나는 지금 50년을 살았지만 100년을 산 것 같이 살았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선 이런 저런 배경이 있어야 한다는 개념은 대체 누가 준 것인지 모르겠다. 사람을 뽑는데 군필인지 군미필인지, 또 나이제한도 있고 학력도 따진다. 남들과 똑같은 개념으로 살아서는 안된다. 남들의 기준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10명이 안된다고 하는데도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우리가 능히 이기리라'고 했다.

간증집회는 토요일 저녁 8시, 주일 1, 2부, 그리고 오후1시 감성세미나로 진행되었다. 한무리교회는 현재 크레스킬 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드리고 있으며 교회부지를 준비해 놓고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한무리교회 (김춘실 목사)
1 Lincoln Dr. Cresskill, NJ 07626 (예배장소 Cresskill School)
201-440-4588 / www.hanmoo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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