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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 장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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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2-02-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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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필그림교회(양춘길 목사)는 2월 24일(금)부터 3일간 안민 장로(고신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 및 교회음악대학원장)을 초청하여 영성 및 찬양사역 세미나를 열었다. 필그림교회 뿐만 아니라 뉴저지 일원의 찬양사역자(성가대원, 지휘자, 반주자, 찬양팀)이 대거 참가해 세미나가 아니라 마치 성회같이 진행됐다.

안민 장로는 "만남, 그 황홀한 신비", "광야의 찬송", "나의 찬송을 부르라", "교회의 핵심 가치"등의 제목으로 4번의 세미나를 인도했다. 안 장로는 서울대학교와 대학원 음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이태리에 유학하여 성악을 공부했다. 현 고신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 및 교회음악대학원장이며 사직동 교회 장로로 25년간 찬양을 인도하고 있다. 또 2장의 음반과 "행복콘서트"라는 책을 냈다.

안민 장로는 참가자를 집중시키는 열정적인 세미나를 인도했으며, 세미나 도중 찬양의 가사가 나와야 하는 순서에는 직접 찬양을 하여 그 은혜를 더했다. 안민 장로는 찬양의 성경적인 의미와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은 무엇인가를 나누었다. 다음은 집회 둘째날 "나의 찬송을 부르라"라는 제목으로 한 세미나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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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민 장로(고신대학교 교회음악과 교수 및 교회음악대학원장)

찬양대가 왜 합창을 하는가. 그 이유가 성경에는 없다. 생각을 해보니 합창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사실 노래 못하는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합창하기가 힘들다. 노래잘하는 사람 몇명이 하면 신경쓸 것 없고 멋진데 왜 합창을 하는가. 합창은 하나하나 별 것 아닌 사람이 모여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낸다. 합창의 목표는 60명이 모여 60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60명이 모여 1이라는 단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이다.

합창을 할때 나는 죽어야 한다. 합창은 60명이 모여 자휘자가 합창의 색을 결정한다. 그런데 자기 생각대로 하는 소신파가 있다. 그런 사람이 많으면 합창은 다른 색이 나온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맞추어야 한다. 합창속에는 각자가 죽어야 한다. 어떤때는 노래잘하는 사람이 합창에 방해가 되는 경우가 있다. 자기가 가진 개성을 안죽이면 합창이 방해를 받는다. 합창의 영적인 의미는 나는 죽고 새로운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합창에는 약한 사람들이 모여 아름다운 새로운 하나를 만들어 내는 영적인 의미가 있다.

꼭 음악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강의를 통해 왜 찬양하는가에 대한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왜 우리는 찬양해야 하는가?

예수 믿는 사람은 노래를 많이 부른다. 항상 모이면 노래를 부른다. 주일예배만 생각해도 시작, 기도, 찬양대, 설교 마치고 계속 찬양한다. 그런 곳이 교회이다. 통계를 보니 전통적인 예배에서 18-23분 정도가 찬양과 음악과 관계된다. 교회 모임마다 노래를 안부르고 시작할때가 없다. 그런데 왜 교회는 노래를 부르고 시작하고 마치는가. 이해가 안되는 것은 일반사람은 노래를 아무리 좋아해도 기분이 나쁘면 못한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람들은 기쁠때와 같이 고난중에도 노래한다. 장례식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예수믿는 사람이다. 기쁘고 즐거울 때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노래할 이유가 없을때도 노래한다. 왜 노래하는가.

그런데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다 이유가 있다. 교회는 목사나 장로 마음대로 하는 곳이 아니라, 성경이 가라는 곳에 가고 서라는데서 선다. 그러면 왜 교회가 노래하는가. 찬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교회가 노래를 부르는지 그 이유가 성경에 나온다.

창세기 4장에서부터 음악과 악기에 대해 나온다. 음악을 전공하고 찬양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결혼식을 할때도 축가를 부른다. 축가가 없어도 결혼을 할수 있다. 교회에서도 찬양대가 없으면 예배를 못드리는가. 그런 고민가운데 하나님께서 찬양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하여 성경을 들었다. 성경을 펴고 음악과 찬양에 대한 모든 구절을 적어 내려갔다. 성경을 읽어가는데 가슴이 뛰었다. 성경에 이렇게 찬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줄을 몰랐다. 수많은 찬양과 노래들이 성경에 가득차 있었다.

교회에서 왜 찬양을 하는가. 첫째, 성경에는 하나님이 찬양을 최고로 좋아하신다고 나와있다. 시편 69편에는 제사보다 우리가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고 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런데 죄와 사단이 우리의 노래를 빼았아갔다. 십자가 예수님의 희생으로 잃었던 찬양을 부르도록 허락받았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고 나아갈때, 하나님은 좋아서 어쩔지 몰라 정신을 못차리신다고 했다. 도무지 노래할수 없을때도 하나님을 찬양할때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임하는 것을 성경에서 볼수 있다. 하나님은 찬양하고 보좌앞으로 나아갈때 가장 기뻐하신다.

둘째, 찬양은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경에는 여러가지 명령이 나온다. 호흡있는 자는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했다. 찬양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고 명령이다. 성경에서 항상 기뻐하고 찬양하라고 했다. 고난의 순간 기뻐하는 것은 그냥 웃으면 되지만 찬양은 잘 안된다. 그런데 예수믿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이미 하나님의 위대한 승리를 가슴에 안고 이기신 싸움을 승리의 노래를 부르면서 싸우는 것이다. 아무리 어려움이 있어도 지금 지고 있어도 역전을 가슴에 안고 노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삼으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영광의 찬미를 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왜 오셨는가. 이사야 61장에 보면 예수가 이땅에 오시면 죽었던 땅에서 싹을 내며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는 말씀이 있다. 의는 무엇인가. 죽었던 사람을 다시 살리는 생명이다. 다시 살리신 이유는 하나님이 즐거워하시고 기뻐하시는 찬송을 회복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찬송이 되어 나가게 하신다. 주님이 너는 내 것이라 말씀하시고 십자가의 사건을 믿어지게 하는 이유는 당신의 영광의 찬미를 부르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은 놀랍게도 주님을 찬양하고 우리가 주님의 노래가 되기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주님께 찬양을 부르기 위해 우리를 지으셨다. 우리는 죽어나 사나 상관없이 계속 찬양을 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요 특권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다.

성경을 보니 아모스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노래하지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임해 슬픔의 노래가 되게 하리라고 하신다. 성경을 보니 하나님은 어떤 찬양은 받으시고 어떤 찬양은 받지 않으신다. 기도와 제물도 마찬가지이다. 아모스 시대에는 교회에 좋은 악기와 찬양대가 멋진 찬양을 드렸는데도 하나님은 그들의 노래를 거절하셨다. 하나님은 찬양을 기뻐하시는 분인데 거절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노래를 무조건 좋다고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시는 곡이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우리 노래를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입맛에도 맞추어야 하지만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몰라주어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노래를 부르면 성공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찬양은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찬양에는 5가지 어원이 있다.

1. 찬양은 칭찬한다는 뜻이 있다.

찬양은 무엇인가. 우리 가슴에서 날마나 주님이 지으신 창조의 세계를 보고 '주님 참 놀랍습니다'라고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부족한 보잘것 없는 인생인데 나를 더 잘아시는 주님이 그냥 우리 모습 그대로 용납해 주신다. 그런 주님의 사랑을 생각할때 찬양이 저절로 나온다. 십자가의 사랑을 설명할길이 없다. 놀라운 생명의 주님사랑이 멋지고 놀랍다고 찬양하는 것이다.

2. 찬양은 경외한다는 뜻이 있다.

찬양에는 경외한다, 무릎을 꿇는다, 두손을 들고 항복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주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라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문제이다. 물론 잘하는 사람도 필요하다. 그런데 문제도 많이 생긴다. 경외하다는 말은 내가 가진 은사가 내 것이 아니라 주인이신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청지기 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찬양은 우리가 가진것이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주님이 주인되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순간마다 자신을 죽이고 모든것이 주님이 선물로 주신것임을 고백해야 한다. 말씀을 들을때마다 자신을 죽이고 하나님에 의지하며 매일이 선물임을 고백해야 한다.

다윗은 일생을 노래하며 살았다. 세상의 왕으로 정상에 서있어도 하나님을 찬양했다. 시편 145편(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었지만 하나님은 소망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왕되심을 노래했다. 즉 보좌를 내어드리는 삶을 살았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고 다윗은 침상을 적시면서 눈물의 노래로 주님에게 나아간다. 시편 51편.

다윗이 쫓겨나 들판을 헤매는 가운데 주옥같은 시편 62편(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소망이 저에게서 나는도다), 63편(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로다. 나의 몸과 마음 주를 갈망하며)을 찬양했다. 세상은 손가락질하지만 들판 가운데에서 한 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찬양했다(내가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생명의 피난처시니 주의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여호와를 찬양하리). 다윗의 노래의 하이라이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내 인생의 목자이심을 고백한다. 찬양은 경외한다, 무릎을 꿇고 주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이다.

3. 찬양은 갈채를 보낸다는 뜻이 있다.

찬양할때 박수치고 손을 들기도 한다. 박수치고 안치고는, 손을 들고 안들고는 싸울일은 아니다. 어린시절 우리 교회는 절대로 손안들고 박수를 안치는 교회였다. 이를 악물고 아멘을 안하는 교회였다. 잊지 못하는 것은 어릴때 엄마와 같이 부흥회에 참가했는데 자다가 얼굴에 떨어진 어머니의 눈물을 잊지 못한다. 어르신 시대에는 예배때마다 눈물이 없이는 예배를 못드렸으며, 정말 노래를 처절하게 불렀다. 부모 시대는 눈물로 박수를 쳤다. 가슴속의 절절함으로 손을 들었다.

90년대 집회가면 찬양을 놓고 젊은이와 장로의 의견이 달랐다. 예배는 하나님의 임재와 성도의 응답으로 이루어진다. 찬양은 응답의 하이라이트이다. 찬양은 십자가 생명에 대한 응답이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는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대한 답이 찬양이다. 찬양은 생명의 감격이 담겨있다. 찬양을 10년했는데 한번도 운 적이 없으면 기적이다. 찬양하려고 하는데 가슴에 밀려오는 은혜의 감격으로 한절도 노래를 못부르고 앉아버린 적도 있다.

워싱톤에서 김원기 목사가 담임하는 휄로우십교회에서 성회를 했는데 40분동안 일어나 찬양하는데 난리가 났다.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를 찬양을 하는데 백발의 어르신이 손을 들고 찬양하는데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여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의 어깨에 손을 얹어 두분이 찬양을 하는데 제 가슴속에 감동이 있었다. 습관이 손을 드는 것이 어색하고 전통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두손들고 주님을 찬양하겠다는 자세로 찬양해야 한다. 이 세상에 박수를 받으실 분은 주님이시다.

우리 교회는 부흥사가 오면 반응이 없어 고생을 한다. 우리 교회가 큰교회가 아니지만 주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데 주님이 기뻐하시는 불꽃같은 예배를 생명이 있는 예배를 드리고 싶다며 교인들에게 박수를 치고 아멘하자고 하여 연습도 했다. 우리 교회는 고신 보수적인 교회인데 25년간 찬양을 인도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아는 곡이 없으면 신경질을 난다. 그래서 3분의 1은 누구나 함께 할수 있는 찬양을 하고, 3분의 1은 새로운 곡인데 한달간 연습한 노래로 악보를 보여준다. 나머지 3분의 1은 새로운 노래이다.

순복음교회에 집회를 가니 심하게 '아멘'하고 박수를 친다. 적절한 것은 '아멘'하고 강사와 성도가 주고 받으면서 말씀을 먹고 가슴에 담고 아멘하는 것이다. 전에는 우리교회 장로님들이 박수치면 지옥 가는 줄 알았다. 드럼은 좋은 악기이다. 못치면 시끄럽다. 잘치면 안시끄럽다. 드럼은 심장박동와 연결된다. 나쁜 악기도 좋은 악기도 없다. 사용에 따라 다르다. 그런데 드럼을 놓을 자리가 없어 장로님들을 설득하여 장로석을 없애고 놓았다.

그러면서 찬양할때 마다 적당한 역동성과 뜨거운 감동을 추구했다. 어떤때는 깊은 묵상과 같이 나갈때도 있고 어떤때는 가슴이 터지도록 찬양한다. 우리 교회안에 전통과 현대가 같이 어우려지며 불같은 가슴으로 주님앞에 나간다. 주님이 나를 살렸는데 멈출수 없다. 어느날 예배가 다 끝났는데 나는 움직일수가 없었다. 그래서 2시간을 그대로 있었다.

찬양사역자들은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예배에 나아갈때 기술이 아니라 온전한 예배자로 주님앞에 전심으로 나아가며 주님께 집중해야 한다. 사역이 아니라 예배로 나아가야 한다. 음악으로 합창으로 나아가지 않고 주님에게 집중하는 마음으로 찬양해야 한다. 주님에게 불같이 집중하여 오늘 예배하다가 확 죽어보리라는 자세가 중요하다.

3. 찬양은 인정한다 믿는다는 뜻이 있다.

찬양은 믿음의 고백이 들어있다. 내가 만난 주님이 구원의 주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이 찬양이다.

4. 찬양은 찬미하고 노래한다는 뜻이 있다.

어제 집회에서 여성중창단이 찬양했는데 가사를 외워 찬양했다. 연습없는 은혜가 없다. 악보도 모르는데 감동이 안된다. 연습을 안하는데 무슨 감동이 있을까. 정성이 있어야 한다. 노래를 가슴에 외우려고 하면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음악적인 훈련을 잘하면 더욱 집중을 할 수 있다. 있는 힘을 다해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의 찬양을 해야 한다. 음악적으로 중요한 것은 열심히 연습하여 음악적인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 그러기위해 최선을 다해 연습해야 한다.

5가지를 종합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은 무엇일까. 하나님은 아모스때 왜 이스라엘 백성의 찬양을 거절하셨는가. 노래도 잘하고 악기도 좋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해 보이는 예배를 드렸지만 부정부패와 타락한 사람이 교회내 가득했다. 예배에서만 찬양하고 밖으로 나가면 부정한짓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웃기는 노래는 그만두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겉과 속이 다른 노래를 안좋아하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찬양은 무엇인가

영적인 찬양을 원하신다. 소록도 나환자 양로원에서 찬양하고 눈물범벅이 되어 나오는데, 어르신들이 귀한 찬양을 받았는데 물한잔 대접을 못했다며 찬양을 선물하겠다고 했다.

그 분들의 찬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무너졌다. "세상사람이 부럽지 않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러 주시니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오네.." 세상에서 천벌을 받았다고 쫓겨나고 온 몸이 썩어 무너지는 사람들이 영혼을 생각하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의 위대한 세계를 향해 부르는 영적인 찬양이다. 손가락 마디가 떨어진 손으로 오르간을 치며 하는 찬양이었다. 어깨춤을 치면서 박수를 치며 찬양을 했다. 이미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 곳에 있었다. 영적인 찬양, 고백적인 찬양, 체험적인 찬양이다.

삶으로 드리는 노래이다. 영적인 찬양과 믿음의 고백뿐만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찬양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찬양이 두렵다고 조심스럽다. 멋진 노래를 하는 만큼 주님은 삶을 요구하고 계신다. 아모스 시대의 노래가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찬양을 원하신다. 음악적인 하모니 보다 사랑의 하모니 그리고 영적인 하모니가 더 필요하다. 삶을 드리는 노래가 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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