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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자 목사 "선교의 불루오션 동 유럽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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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2-10-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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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 한국총회(총회장 이광희 목사)는 9월 11일부터 21일까지 98명이 참가한 가운데 영성수련회를 동유럽에서 열었다. 다음은 한정자 목사가 쓴 방문기이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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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0일-21일까지, 하성 한국총회에서는 동유럽을 돌며 뜻 깊은 영성수련회를 가졌다. 동독을 비롯하여 체코,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돌아보고 특별히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에서 나치의 학살로 고통가운데 죽어간 영혼들과 그 가족들, 그리고 유럽의 영적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선교의 지경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찾기 위해 열렸던 수련회였다.

이 일을 계획하고 추진했던 이광희 총회장님은 이번 영성수련회의 캐치프레이즈를 “역사의식을 통한 새 비전과 꿈”으로 정하고 아우슈비츠 박물관안에 수록되어 있는 말씀을 제시하셨다. “The one who does not remember history is bound to live through it again” 즉 “역사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총회장님은 이번 영성 수련회를 위해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기도했다고 하셨다. 첫째는 역사의식이요, 두 번째는 새 비전과 꿈이다. 역사의식을 통하여 종교개혁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삶과 자유의 가치와 감격을 고취시키며 영적 공황상태에 있는, 불루오션 동구라파에 대한 선교의 비전과 꿈을 되살리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총회장님의 취지에 호응한 회원들과 그 가족들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9월 10일, 베를린(TXL) 공항을 향해 떠났다.

동독방문기

다음날인 11일, 이광희 총회장님은 먼저 공항에 나와 속속 도착하는 97명의 회원들과 가족들을 일일이 반기며 부배 여행사에서 제공한 버스로 안내를 하셨다. 우리는 옛 동독의 Holiday Inn 호텔에 여장을 풀고, 요한계시록 2장의 버가모(페르가모, 현재 터키)에서 통째로 떼어다 놓은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은 페르가몬 박물관(Pergamon museum)으로 향했다. 이곳은 고대 역사박물관 중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박물관이며 이슬람 시대 유물들과 바벨론 느부갓네살 시대의 성과 벽화들도 전시되어 있는 곳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엄청나게 큰 제우스신전이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버가모에는 로마 황제를 아폴로의 화신(化身)으로 떠받들고 제우스 신전을 중심으로 이집트의 신 <세라피스>와 그리스, 로마의 제신(諸神)들, 아데미 신전들이 있었고 기독교인들을 몹시 박해했던 곳이다. 이런 환경에 세워진 버가모 교회였기에 우리 주님께서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시고 버가모 교회를 향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음 방으로 가면 느부갓네살 시대의 성과 벽들이 있다. 조각처럼 잘 짜여진 이슈타르 문(Ischtar tor)이 매우 아름답다. BC 500년경의 성과 벽화들이 이처럼 훌륭하다니! 푸른 벽돌로 만들어진 벽에 부조(浮彫)된 사자들이 그 벽 안에서 유유히 거닐고 있고 그 아래엔 꽃들이 활짝 피어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이 바로 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왕 궁을 거닐면서 왕들을 보필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당대의 강대국 바벨론 장관들의 수장으로 활약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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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의 무너진 장벽 '브란덴브르그 토어' 에서, 한국의 남.북의 장벽도 무너지게 해 달라는 기도하는 모습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버스를 타고 동독의 야경을 관광했다. 동독과 서독을 가르고 있던 벽이 지금은 모두 허물어지고 기념으로 조금만 남은 곳을 보며, 아직도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조국의 현실이 마음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공산화 시절, 발전이 느렸던 동독의 여기저기엔 건축 붐이 일고 있었고, 어떤 곳은 번화가로 변해 통일된 독일의 발전상을 볼 수 있었다.

베를린에는 나치의 홀로코스트로 인해 죽임을 당한 유대인들을 위한 공동묘지가 있다. 독일인들의 기억에 대한 집착은 남다르다. 가해자가 속죄의 의미로 박물관을 운영하는 나라가 독일이며, 그 상징적인 공간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이 공동묘지도 실제로 시신이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했다.”는 고백과 뉘우침, 유대인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만든 가상(假像)의 묘역이라고 했다. 아-, 죄도 저렇게 드러내놓으면 용서가 되는 것을……. 하고도 안했다고 끝까지 우겨대는 일본인들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가 일본인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고백의 차이 때문인 것을.

다음날(12일) 아침, 우리는 감자 부침이와 계란 반숙, 독일 빵으로 아침을 먹고 포츠담 회담이 열렸던 장소로 향했다. 1945년 7월 26일, 미국의 트루먼, 영국의 처칠, 중국의 장제스, 소련의 스탈린, 세계 강국의 거두들이 모여 2차 대전 후의 각국 문제들을 놓고 회담했던 장소였다. 특히 일본이 즉시 항복할 것을 종용하며, “일본이 항복하지 않으면 즉각적이고 완전한 파멸”에 직면하게 될 것을 경고하는 선언문을 작성했다.

또한 1943년 11월에 있었던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는 가운데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 독립국가로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미, 소간 한반도 육상작전 구획선과 항복 접수선으로 삼팔선을 구상했으니 이 포츠담이 오늘 우리 조국의 모습을 만든 장소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우리 조국과 각국의 운명을 거론했던 엄청난 회담을 한 장소답지 않게 아름다운 호수가 바라보이는 예쁜 정원과 아담한 건물로 이루어 져 있었다. 회담을 했던 당시의 탁자와 의자들이 잘 정돈되어 있고 4거두들의 얼굴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전쟁으로 불붙고 있는 세계의 정세를 앞에 놓고 골머리를 앓았을 그들이지만 얼굴엔 미소의 흔적이 있다.

그 후 우리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로 향했다. 1507년 4월, 가톨릭 사제로 성직을 수여받고 신학공부를 시작했던 루터는 1512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서 연구 분야 교수가 된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한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고 1517년, 10월 31일, 교황청의 면죄부 남용에 반대하는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하였고 이후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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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7년 마틴 루터가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비텐베르그' 성당 안에서

우리는 이 반박문을 내걸었던 청동 문이 달린 성(城) 부속교회로 갔다. 반박문은 라틴어로 새겨져 있다. 교회 안은 팔각형의 기둥과 고딕 양식의 둥근 천장으로 되어 있고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여러 인물상과 문장, 메달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곳 설교대 밑 석조 받침대 아래에는 마틴 루터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다. 웅장한 교회 안에는 많은 관람객들이 묵상 또는 기도하며, 진리를 위해, 완강한 기득 세력과 맞붙어 생명을 건 싸움을 한, 루터의 용기와 열정을 되새기고 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루터가 개혁도중 환난에 직면하여 만든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소리 높여 합창하였다. 관람객들 중 몇 명이 합창하는 우리들 사진을 찍기도 하고 함께 합창하며 미소와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이 교회 밖 서편 탑 둘레에도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입니다.”라는 루터성가가 새겨진 다채로운 색상의 모자이크가 있다.

체코 방문기

동독에서의 일정을 마친 우리는 4시간을 달려 유럽의 심장이라는 체코로 향했다. 프라하에는 비가 오고 있었다. 비가 오는 바람에 야경관광은 취소되었지만 내일을 위해 안식할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하며 클럽호텔에서 달콤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13일), 맛있는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1000년을 거쳐 완성하였다는 성 비트 성당으로 갔다. 이 성당은 서기 925년에 성 바츨라프가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을 지음으로 시작되었고 그 후 여러 세기동안 증축, 보수, 또는 화재로 인한 소실 등을 거치면서 1929년, 바츨라프가 사망한지 천년이 지나 완성을 본 건물이다.

건물의 웅장함과 정교한 조각들, 호화로움은 작은 우리를 압도할 것만 같다. 내부에는 14미터의 거대하고 아름다운 스테인 글라스가 다채로운 색깔로 햇빛을 통과시키며 성당 안을 신비하게 비춰준다고 한다. 그러나 은과 금, 보석으로 조각된 예술품의 진수들이 즐비한 성당내부는 아쉽게도 보지 못하였다.(어떤 사정으로 문이 닫혀 있어서) 그 모든 호화로움과 아름다움이 한때 우리 하나님께 바쳐졌던 헌신의 열매였건만, 지금은 유럽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듯 하나의 관광 상품으로 전락하였다. 우리 주님의 영광이 이 유럽에서 다시 한번 찬란하게 꽃피우게 되기를!

성당의 정원에서는 프라하 시내가 한눈에 보였다. 붉은 지붕을 인 오밀조밀한 주택들이 동화의 세계같이 환상적이고 저 멀리 몰다우강변에는 아름다운 성들이 우뚝 우뚝 솟아있다. 그 강 위에는 프라하의 유명한 찰스 브리지(카를교)가 놓여 있다. 이 다리는 14세기에 카를 4세에 의해 건설되었으며 자동차는 다니지 못하고 보행자들만 건너게 되어 있다. 이 다리 난간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상과 세례요한 상등 30개의 동상들과 조각군(彫刻群)들로 장식되어 노상 갤러리 역할을 하고 있고 예술가, 상인, 공예가들이 자신들의 작품을 내걸고 관광객들을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이 다리를 걸으며 프라하의 연인이 되어 본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 있는 구시가의 광장 한복판에는 체코의 종교 개혁자, 얀 후스(Jan Hus)의 우람한 동상이 서있다. 루터보다 111년 먼저 태어난(1372-1415) 얀 후스는 프라하 대학에서 공부하고 이 대학에서 신학부 교수가 되었고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되었다. 1401년에는 철학부 학장이 되었다가 그 후 총장이 되어 체코인들에게 독일의 힘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하였다. 그는 체코어를 개량하고 체코어로 찬송가를 보급하기도 했다. 또한 면죄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등,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면서 교회가 초대 기독교 정신으로 복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프라하 대학 교수들과, 왕실,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고위 성직자들과 독일인들의 반발을 샀고 그들의 핍박에 의해 결국 화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인들에게 강한 반발을 일으켜 혁명의 봉기를 일으키는 신호탄이 되었다. 결국 후스주의와 가톨릭 사이의 갈등이 깊어졌고 후스 주의자들은 보헤미아를 장악하고 후스의 정신을 계승해 나갔다. 후스는 생전에 유명한 말을 남겼는데 그것은 ‘일곱 개로 된 진실의 명제’이다. “진실만을 찾으라, 진실만을 들으라, 진실만을 배우라, 진실만을 사랑하라. 진실만을 말하고, 진실만을 생각하며, 진실만을 지키고 사수하라.” 는 것이다. (허연행 목사님의 세미나중에서)

이 후스파가 후에 모라비안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모라비안 운동은 미국 선교에 실패하고 돌아가던 요한 웨슬리가 회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703년) 후스의 이런 개혁정신은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데 하나의 밀알이 되었다. 진실에 살고 진실을 위해 죽었던 후스의 그 투철한 정신이 이 우람한 동상으로 상징화된 것이리라.

이 광장의 입구 쪽에 있는 성 클리멘트 성당에서는 이날 저녁에 실내관현악단이 연주하는 콘서트가 열린다고 했다. 음악가인 총회장님의 “참을 수 없게 하는 유혹”(?)에 못이겨 우리는 13 유로라는(원래 25 유로를 깍아서) 거금을 주고 줄을 서서 입장했다. 교회 안은 르네상스 시대의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모차르트, 바하, 비발디, 차이콥스키, 드볼작의 감미로운 선율과 체코의 음악의 아버지인 스메타나의 민족혼이 담긴, “나의 조국의 관현악 조곡중 <몰다우>” 의 비장한 생음악은 여행으로 피곤한 몸과 마음에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어 새로운 활력을 찾게 해주었다.

체코는 예술과 문화의 나라이다. 문학으로는 후스가 체코어로 성경과 문학작품을 번역하였고, <변신>을 쓴 프란츠 카프카, <영국 왕을 모셨지>로 노벨 문학상을 탔던 보후밀 흐라발, 그리고 영화 <프라하의 봄>의 원작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쓴 밀란 쿤데라, 극작가인 현 체코 대통령이 있고, 음악가로는 스메타나, 드보르작, 야나체크 등 세계적인 걸출한 예술인들의 고장이다.

우리에게도 꽤 낯이 익은 <참을 수 없는…….>은 1968년, 소련의 침공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의 사랑과 그 사랑을 통해 느끼게 되는 인간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괴로워하는 젊은이들을 그린 소설이다. 이때, 소련은 잠시 승리하는 듯 했으나 자유를 갈망하는 체코인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혀 차츰 체코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지금은 자유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체코는 가톨릭이 39%, 개신교 4%, 무종교 40%, 기타 17%로 선교의 불루오션 지역이다. 우리나라와는 1990년부터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무역 및 경제적 협력을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 방문기

다음날(14일),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로 향했다. 음악과 낭만의 도시, 모차르트가 숨 쉬고 베토벤과 하이든, 슈베르트, 쇼팽을 만나는 곳, 진한 비엔나커피의 향기로 마음을 매혹시키는 곳이다. 유유히 흐르는 다뉴브 강을 끼고 건설된 도시로 고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맑은 공기와 적당한 기후로 유럽 최고의 ‘살기에 적합한 곳’이다. 우리는 비엔나 시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고지까지 버스를 타고 한참을 올라갔다. 숲속에서 바라보는 비엔나 시는 정말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저녁은 순복음 비엔나 교회(나기창 목사님)에서 정성껏 준비한 맛있는 생선찌개와 비빔밥을 먹고(감사해요!) 금요 예배를 드렸다. 총회장님이 말씀을 전했고 멋진 피아노 연주로 모두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셨다.

다음날(15일),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떠나기 전, 오전에 비엔나 시내를 관광하였는데, “오스트리아는 1278년 합스부르크 왕가의 속령이 되었으며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면서 강력한 절대군주 국가를 형성하여 650년 동안이나 중부 유럽을 지배하였다”. 그 후 2차 대전에서 패해 미, 영, 프랑스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가 중립국으로 독립하였다.

이 나라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실시되고 있어 터키 등 제삼 국가 국민들이 이를 이용하기 위해 이 나라로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한다. 가톨릭 90%, 개신교 6%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알프스 산을 끼고 있는 이 나라(오스트리아)는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가들의 묘지, 음악 천재들의 음악 아카데미 등으로 세계의 관광인들을 끌어 모으고 있으며, 이곳 시민들은 음악과 예술을 사랑해서 1년 전부터 음악회의 예약표를 구매해놓고 그것을 기다리며 즐거워한다고 한다.

불후의 명지휘자 카라얀이 비엔나 필하모닉을 지휘했다. 그는 베를린 필을 지휘하기도 했었는데 비엔나 필을 더 사랑했다는 후문이다. 빈 소년합창단의 발생지가 바로 여기라는 사실이 새삼 실감난다. 1498년 막시밀리안 1세에 의해 창단된 빈 합창단은 세계 제일의 미성(美聲)을 자랑하는 합창단으로 성 스테판 성가대와 함께 빈 음악의 산 역사이다.

우리는 먼저 쉘부른 궁전(Schonner Brunnen)으로 갔다. 맑고 드높은 하늘 아래 흰색과 노란 황금색으로 치장된 궁전은 불란서의 베르사이유 궁전에 비견되는 건물이다. 이 궁전은 1619년 마티아스 황제가 사냥도중 ‘아름다운 샘’(Schonner Brunnen)을 발견한데서 그 이름이 유래된다. 황제의 수렵장으로 시작한 이 궁전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후손이며 황제였던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완성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8세기 유럽의 최고 권력자로서 오스트리아를 부강 국으로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던 여 황제였다. 16명이나 되는 자녀를 낳아 그 자녀들을 주변국들과 정략결혼을 시켜 나라를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내었다. 그러나 그녀의 15번째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와 결혼한 후, 불란서 혁명당시 국민의 궁핍을 외면한 채 사치하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불명예를 안고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우리는 궁전 안을 볼 수는 없었으나 아름다운 정원과 언덕위의 우아한 성들을 만끽하며 사진을 찍었다.(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그리고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양식 건물로 하늘을 찌를 듯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는 슈테판 성당(Stephen's Cathedral)<국보 1호>으로 갔다. 가는 도중 버스 창밖으로는 거리마다 세워진 음악가, 예술가들의 동상, 온갖 정교한 장식으로 치장된 아름다운 건물들과 대학 건물들이 보였다. 비엔나의 심장이라고 하는 이 성당은 1304년 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는데 높이 137m의 첩탑이 있는 이 대 성당에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있었다. 무려 500년이란 긴 세월을 거쳐 건축된 이 성당은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함께 숨쉬어 왔다. 바벤버그 왕조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화를 지켜보았고 1,2차 대전을 거치면서도 그 피해를 견디어 온 건물이다.

세인트 슈테판 성당 앞 광장은 만남의 광장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붐비고 있었다. 이곳은 케른트너(Kerntner) 거리로 관광의 명소로 자리 잡은 곳이다. 고품질의 상품들과 모차르트 초콜릿을 파는 상점들, 재미있고 앙증맞은 선물을 파는 예쁜 가게들이 관광객들의 마음을 빼앗는다.

왕궁과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근거리에 있는 이곳이어서인지 우리가 도착한 시각에 멋진 복장을 한 악대가 우리를 반기듯 모차르트의 음악을 연주하며 행진했다. 좀 더 많은 시간이 있었다면 느긋한 마음으로 이 아름다운 도시를 유영(遊泳)하듯 걸어보련만!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가는 도중에 예술가들의 묘지들이 있는 곳에 잠시 들러 그야말로 예술적으로 조각해 놓은 묘비들이 줄지어 선 모차르트(시신은 찾을 길 없어 가짜 묘임)와 슈베르트, 쇼팽, 베토벤 등이 잠든 묘역을 돌아보고 버스에 올랐다.

헝가리 방문기

밤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여 도나우(또는 다뉴브)강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 자리 잡은 그랜드 호텔에 여장을 풀고 시내 중국집에서 만찬을 먹은 후, 야경을 관광하기로 했다. 다뉴브의 진주라고도 일컬어지는 부다페스트는 부다(6개구)와 페스트(17개구)로 구성되어 있고 인구 210만 명이 살고 있는 동 유럽 최대의 문화도시이다. 그러나 지금은 몇 년째 IMF가 계속되고 있고 헝가리 전체 인구 1,000만 명 중 400만이 가난에 허덕이고 있으며 3만 명의 노숙자가 토굴이나 낮은 산 계곡에 살고 있다. 찬란한 문화를 자랑하는 이 나라가 이처럼 가난에 허덕이는 나라가 된 것은 역사의 횡포때문이었다고나 할까?

10세기 말 헝가리 왕국을 수립하여 14세기 무렵에는 중앙 유럽의 가장으로 군림하였던 헝가리는 16세기경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부터 많은 국토를 빼앗기게 되고 제 1차 대전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있다가 종전 직전 제국으로부터 분리 독립하면서 공화국이 되었다. 2차 대전에서는 잃은 땅을 회복하기 위해, 또는 나치의 압박을 받아 추축국(2차 대전에 연합국에 대항하여 전쟁을 한 나라)에 가담하였다가 패전에 의해 소련에 점령되어 공산화 되었다.

이후 파리조약(1947년)에 따라, 전쟁으로 얻은 국토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이 영토에 사는 헝가리 국민들은 루마니아, 우크라이나 등 6개국으로 나뉘어져 살고 있어 동 유럽을 선교하는 전략지로서는 최적의 장소이다. 가톨릭이 60%, 개신교가 20%이며 무종교가 15%를 차지하고 있으며 1980년대 후반에 일어난 헝가리 민주화 운동의 결과 오스트리아 국경에 설치되어 있던, 이른바 ‘철의 커튼’을 철거하고 국경을 개방하였다. 이후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국호를 ‘헝가리 공화국'으로 변경했다.

이스라엘의 건국의 아버지 데오돌 헤즐(Deodor Herzl) 도 1860년 5월2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헝가리 유대인이었다. 헝가리는 세계 유네스코에 등록된 문화유산이 풍부하고 ‘광시곡’을 작곡한 음악가 리스트(Franz Liszt)가 있으며 1936년 대한민국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씨가 다녔던 리스트 아카데미 음악학교가 있다. 헝가리의 애국가와 우리 애국가의 곡, 가사가 비슷한 것도 이런 연유일 것이다. 이곳 시민공원에는 안익태씨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또한 열다섯 살에 아우슈비츠에서 살았던 경험을 자전적인 소설로 쓴 <운명>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임레 케르테스가 있는 문화국이다.

우리 조국과의 인연은 KAL 폭파사건에 주범이었던 김현희가 숨어있었던 곳이고 KBS가 만들었던 ‘아이리스’라는 드라마를 이곳에서 촬영했다. 1989년에 우리나라와 수교하고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거리 곳곳에서 삼성과 LG, 현대 간판들이 눈에 띄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도나우 강과 시가지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겔레르트 언덕(Gellert Hegy)은 부다페스트의 전망대이다. 이곳에 성 겔레르트 수도사를 기념하는 기념비와 커다란 월계수 잎을 들고 있는 소련 병사 위령비가 있다. 이곳에서는 환히 불을 밝힌 성 이슈트반(슈테판) 성당과 반짝이는 전구들의 사슬로 포물선을 그리며 어둠속에 떠있는 세체니 다리의 아름다운 모습, 그리고 왕궁을 볼 수 있다. 이 화려한 야경처럼 부다페스트가 어서 속히 가난을 떨치고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복된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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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브다페스트에서 영성 수련회하는 장면

이날 저녁부터 영성수련회가 시작되었다. 이광희 총회장님은 대회사를 통해, “이번 동 유럽 영성수련회는 어렵게 성사되었지만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동참해주신 회원 여러분께 감사를 드린다.”면서 총회장이 되기 전부터 우리 총 회원들과 함께 동유럽을 꼭 오고 싶다는 바램이 있었고, 지난 6월에 이곳을 답사한 후 3개월 만에 꿈이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아우슈비츠의 비극을 보면 목숨이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를 가지고 사명을 감당하자.”고 말씀을 맺었다.

영성 수련회 개회예배시 이우용 준비위원장(증경 총회장님)이 계2:1-3절 말씀을 가지고 베를린에서 극적으로 주님을 만나게 된 간증과 함께 기도와 찬송이 식은 이때에, 그래도 아멘하고 기도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는 말씀으로 감동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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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브다페스트에서 '밥퍼' 사역하는 김흥근 선교사님의 사역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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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브다페스트에서 '밥퍼' 사역하는 김흥근 선교사님의 사역지에서

그 다음날 주일(16일), 우리는 일찌감치 아침을 먹고 9시 30분, 부다페스트의 김흥근, 서명희 선교사님의 사역장인 밥퍼 현장으로 떠났다. 김선교사님 내외분은 부다페스트의 다섯 곳에서 노숙자들을 위한 밥퍼 사역과 함께 집시들과 교도소 사역을 병행하고 계신다. 그곳에는 약 30-40여명의 노숙자들이 모였고, 김 선교사님과 동역하고 있는 현지 교역자들도 함께 하였다. 김흥근 목사님은 사도행전 2장의 베드로 설교를 가지고 유창한 헝가리 언어로 열정적으로 말씀을 전하셨다.

이 설교를 서명희 선교사님이 한국어로 통역을 해주셨다. 노숙자들도 끝까지 그 자리에 서서 말씀을 듣고 함께 찬양을 불렀다. 예배가 끝난 후, 우리는 선교사님을 도와 노숙자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이 음식과 더불어 복음의 말씀도 먹고 영혼이 살찌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김흥근 선교사님은 이날 저녁 예배에서, ‘부다페스트의 선교사가 되기까지 삶의 역정’을 간증 해주셨고, 서명희 선교사님은 우리가 이틀을 머물며 영성 수련회와 세미나를 하는 동안 식사와 안내 등 내내 우리의 편의를 보아 주셨다.

월요일(17일) 새벽기도회에는 허도윤 전도사님의 “유대인의 존속과 땅의 개념”이란 제목의 말씀과 간증을 통해 은혜를 받았고 오전 집회에서는 허연행 목사님의 “역사를 기억하자”는 말씀으로 중세 유럽의 기독교와 종교개혁 전후에 일어났던 개혁의 정신에 대한 심도있는 말씀으로 이번 여행의 의의를 다시 한번 깨닫게 해 주셨다.

특히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100년 전,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얀 후스는 체코의 민족혼을 일으키고 신앙의 개혁을 부르짖으며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날 수 있는 밑바탕을 그렸던 진정한 개혁자였다고 하셨다. 오후에는 박경애 전도사님의 “Well being Life & well Spirit Life"란 제목의 강의와 저녁 시간에 허도윤 전도사님의 계속되는 말씀과 간증으로 큰 은혜를 받았다.

다음날(18일) 우리는 부다페스트에서 떠나기 전 헝가리 건국 1,000년을 기념하여 만든 <영웅들의 광장>을 들렸다. 이곳 중앙에는 36m의 원주 기동이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에는 십자가를 들고 있는 가브리엘 천사의 동상이 날개를 펴고 앉아 있으며 그 아래엔 헝가리 각 부족을 이끄는 부족장 6명의 기마상이 있다. 원주 양옆의 열주에는 역사적인 헝가리 국왕들 상들이 쭉 늘어서 있고, 헝가리독립과 자유를 위해 싸운 라코치와 코슈트등 근대지도자 14명의 상(像)들도 있다. 그 후 이곳 벼룩시장에서 선물을 산 뒤, 동유럽의 알프스라고 하는 타트라 슬로바키아로 이동했다.

끝없이 펼쳐지는 울창한 산림들은 과연 이곳이 동유럽의 허파라는 말이 실감났다. 거의 하루 종일 버스로 행군한 뒤, 저녁에 산속에 위치한 예쁜 별장 같은 호텔에 짐을 풀고 각자 쉬기도 하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산책을 하는 등의 시간을 가진 후, 꿈의 나라로.

폴란드 방문기

19일, 아침부터 서둘러 폴란드로 향해 갔지만 버스 한 대가 문제가 생겨 잠시 지체되어 예정했던 소금관광은 취소되었고,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주인공이 운영했던 쉰들러(Oskar Schindler) 공장을 견학하기로 했다. 폴란드는 시베리아의 영향을 받아 다른 곳보다 추웠고, 비까지 내려 고통과 슬픔에 짓눌렸던 이 나라 국민들의 삶이 체감으로 느껴지는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동 유럽중에 가장 부강한 나라이며 공산권에서 벗어난 후, 활기차고 생명력있는 나라로 탈바꿈하고 있다는 김상필 선교사님의 말씀이었다.

수백 년간 오스트리아, 러시아, 독일, 프랑스와의 갈등과 점령 등으로 고난을 받았으며 1939년, 나치와 소련의 침공을 받아 폴란드인 1/4이 전쟁에 의해 희생되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공산화가 되었지만 1981년 바웬사가 이끄는 자유노조에 힘입어 민주화가 시작되었다. 러시아와 최악의 관계가 되었으나 지금은 관계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배출한 폴란드는 국민 90% 이상이 가톨릭을 신봉하며 다른 나라보다 사제, 수도사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개신교는 현재 0.5 %에 불과하지만 오순절 계통의 교회는 증가일로에 있다고 한다.

우리는 폴란드의 옛 수도였던 크라코우(Krakow)에 있는 쉰들러 공장으로 갔다. 영화로만 보았던 쉰들러 공장은 좁은 복도가 꼬불꼬불 이어지는 가운데 유대인들의 참혹했던 생활상을 재현해 놓은 조각품들과 그들의 소장품, 쉰들러 공장을 통해 살아난 사람들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쉰들러는 원래 평범하고 좀 거들먹거리는 건달 비슷한 사람이었지만 유대인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한 후, 마음을 바꾸고 그들을 구촐해 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의 공장을 통해 구조된 유대인이 1,000명이나 된다. 위대한 사람만이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나와 너같은 평범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위대한 손길에 붙잡히면 얼마든지 위대한 일을 할 수가 있다.

공장을 견학하고 나오자 밖은 벌써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우리는 전기차에 나누어 타고 크라코우의 야경을 관광했다. 이곳은 500년 동안 왕들이 살던 엄청나게 큰 바벨 성과 교육을 담당했던 괴테 인스티튜트와 유서깊은 성당 등 폴란드의 역사적인 유산들이 산재해 있는 곳이다. 피아노의 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폴란드의 음악가 쇼팽(Fryderyk Chopin)의 이름이 상점이름으로 둔갑하여 한껏 민족의 자부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폴란드는 코페르니쿠스와 퀴리 부인과 같은 지성들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배출한 종교의 나라이다. 이들의 자부심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것이다. 메인 광장에는 한때 공산권으로 인해 폐쇄되었거나 황폐화 되었던 곳들이 젊은이들로 다시 활기를 되찾고 있었고 거리와 골목들도 젊은이들로 북적거렸다. 아, 환한 대낮에 이곳을 돌았다면 백설 공주의 궁전처럼 어여쁜 왕궁들과 건물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을 것을!

우리는 조그만 전기차 안에서 어두운 크라코우 거리에 서있는 컴컴하게 변한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추적거리며 내리는 비속에서도 한국말로 안내방송이 나오자 기분은 훨씬 나아졌다. 이런 우리의 기분을 눈치 챘는지 폴란드의 젊은 기사가 자기가 먹을 빵을 뜯어 나누어주며 우리를 위로(?)해 주었다. 그 조그만 빵조각은 맛있었고 따뜻했다. ^^

1876년에 시작된 가장 유명한 폴란드 식당의 음식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김상필 선교사님은 이 나라의 모든 음식은 올개닉이며 이 나라 사람들은 비료를 친다거나 짐승을 가두어 기른다는 등의 방법을 아예 모른다는 것이었다. 과일 나무들도 그저 자라는 대로 먹는다고. 와! 이런 나라가 존재한다니, 우리는 열심히 먹고 폴란드를 마음껏 칭찬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민족정서가 강한 나라로 다른 민족들이 자기 땅에 와서 사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세계 어디에 가나 식당을 차리는 중국인들이 얼씬도 못하는 곳이 폴란드라는 것이다.

다음날(19일) 우리는 일찌감치 일어나 호텔에서 성대하게 차린 아침을 먹고 (여행 중 가장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다.) 저 참혹한 역사의 현장인 아우슈비츠로 향했다. 이번 여행의 진정한 목적이 바로 이곳을 보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허연행 목사님의 말씀처럼 하지 않으면 , 즉 팔다리가 절단되는 것과 같은 것처럼 역사를 상기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다시 같은 악행을 반복하거나 당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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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만명을 대학살 시켰던 폴란드/ 아우슈비치 제 2 캠프에서

아우스비츠는 원래 오슈비엥침(Oswiecim)의 옛 이름이다. 이곳은 폴란드의 군대막사였던 곳이었는데 교통의 요지인 크라코우가 가깝고(약 50Km) 외진 곳이어서 나치가 수용소로 만들기에 적합하다고 여겼다. 처음에는 폴란드의 정치범이나 나치에 반대하는 사람, 정신질환자 등을 수용하는 곳이었으나 차츰 유대인들을 수용, 학살하는 장소로 변했다.

수용소 입구에는 “ARBEIT MACHT FREI” 즉 “일하면 자유로워진다.”는 문구가 씌어져 있다. 나치의 새빨간 거짓말이지만 어쩌면 이곳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에게는 일 자체가 그들의 휴식이고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나치는 일할 수 없는 노약자들과 어린이, 여성들을 독가스로 죽이고 건장한 사람들은 강제노역을 시켰다. 이 노역으로 인해 죽은 사람도 많지만 이 노역으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정신과 의사이며 상담가로 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그의 책에서 바로 이것을 증명했다. 그 책에서 그는 “사람들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슬픔과 고통만을 얘기하지만 그런 슬픔과 고통의 어느 한 짧은 순간에 아주 작은 휴식이나 평안, 기쁨의 감정도 있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헝가리의 노벨 문학 작가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에서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우리의 인생 또한 그렇지 않을까? 날마다 고통만 연속되는 것 같은 어느 순간 속에서도 잠시 동안의 기쁨과 안식의 순간들이 꿈결처럼 찾아오는 때가 있지 않은가?

모두 28동으로 구성된 이곳은 한 개동에 600-1,000명씩 수용되어졌다. 50명 정도 들어가도 모자랄 것 같은 공간에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수용한 것이다. 그리고 매일 1,500-2천명을 독가스로, 또는 총살이나 교수형으로 죽였다. 수용소는 고압선이 흐르는 2중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수용소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옷을 벗긴 후 여성과 노약자 등을 가스실로 보내 집단 사살했다.

수용소 안은 기록영화와 그 당시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얼굴 사진들, 그들의 잘린 머리카락(모두 잿빛 색깔이었는데 독가스로 인해 색이 바랬다고 한다.)과 그 머리카락으로 만든 카펫, 그들이 쓰던 안경, 옷, 신발, 이불, 그릇, 가방, 그리고 목발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시체를 태우던 가스실과 시체 소각장이 있었다. 이 시체 소각장은 한번에 3구의 시체를 태울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너무 시체가 많아 바깥 야외에서 쓰레기처럼 쌓아놓고 태웠다고 했다. 독일 의사들이 생체실험을 한 건물도 그곳에 있었다.

수용소 밖에는 사람들이 사소한 잘못으로 총살을 당했던 ‘통곡의 벽’과 교수형을 집행했던 곳이 그대로 있었고, 독일 병사들이 심심하면 아무나 끌어다 깔아뭉개 죽였던 커다란 돌 바퀴 두 개가 있었다. 산채로 생체실험을 당한 사람들, 그리고 그 돌 바퀴에 깔려 죽어가던 사람들의 피와 비명소리가 보이고 들리는 듯해서, 그 참혹함에 치가 떨렸다. 아아, 인간이 어찌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이 수용소에서 얼마나 많은 유대인들이 고통의 죽음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회의와 절망을 느꼈을 것인가?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 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시22:1-2) 아마도 그들은 매일, 매 순간 이처럼 절절히 다윗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계신다. <알고> 계신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출3:7) 그러므로 이우용 목사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아멘하고 기도할 대상은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 아닌 어느 누구에게 이 고통의 이유를 물으러 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11동 ‘지하 아사감방’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몸소 실천 하셨던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의 수감되었던 감방은 큰 감동을 주었다. 그당시 1명이 도망한 후 48 시간 안에 안 잡히면, 무작위로 10명을 죽이는 법을 정해놓고 서로 감시하게 했다. 1명이 도망가고 10명이 무작위로 자출될 때에, 한사람이 울루짖었다. “소장님 저는 안됩니다. 저는 노모가 계시고, 부인과 7명의 자녀가 있읍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소장님 제가 저 사람을 대신하면 안되겠읍니까?” “너는 누구냐?” “저는 47세 폴란드 신부 ‘막시밀리안 콜베’ 입니다.” …종배 콜배 신부는 14일만에 아사감방에서 장렬한 대속의 삶을 마감하게되었다.

이때에 내 머리속에 떠오른 말씀은,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 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누군가 안내를 하고 있는 선교사님의 따님인 김사라 양에게 물었다. “독일인들도 이곳에 옵니까?” 그러자 사라양은 “이곳에 가장 많이 오는 사람들이 독일인들입니다. 그리고 독일의 대통령이나 수상에 당선되면 제일 먼저 이곳에 와서 참배를 합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저리고 아픈 마음이 잠시 녹아지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독일인들 역시 이 아픈 광경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으리라. 조상들이 저지른 이 끔찍한 죄에 대한 슬픈 역사가 그 자손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멍에가 될지 마음이 쓰렸다. 돌아오는 길에는 모두 이 비참한 광경으로 인해 가슴 저린 아픔의 침묵이 계속되었다.

서남부의 최영선 목사님은 “한때 나는 본회퍼를 무시했던 적이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그의 신앙을 의심했던 거지요. 하지만 지금 이 장소에 와서 보니, 그런 만행에 총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본회퍼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됩니다.”라며 아픈 마음을 토로하셨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가 “바울이 타고 온 배가 유럽을 변화시켰다.” 고 했던 이 땅, 그러나 지금은 “신은 죽었다”고 말했던 니체이후 휴머니즘에 물들어 하나님을 버리고 영적 공황상태가 되어 있는 이 땅, 나치의 이런 끔찍한 악행이 일어났던 이 땅에 다시는 이와 같은 만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그리고 기독교의 영적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도록 이 땅을 위해 기도하며 선교에 동참해야겠다.

아름다웠고 마음 아프기도 했고, 새로운 각오도 다지게 되었던 2012년 가을 동 유럽 영성 수련회! 오랫동안 이번 여행은 마음에 깊이 남아 있게 될 것 같다.

하성 한국 총회의 이 역사적인 영성 수련회를 위해 기획하시고 하루에 2시간밖에 주무시지 못하면서 애써 주신 이광희 총회장님과 준비 위원장으로 수고하신 이우용 증경 총회장님, 부 준비 위원장 김명옥, 정재성 목사님, 김영재 총무님, 그리고 조직을 이끄신 팀장, 조장님들, 그리고 긴 버스 여행에 자원하여 기쁨조가 되어 게임과 노래, 선물 등으로 회원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땀 흘리셨던 이미선 목사님, 정리부 전도사님과 각 지역에서 사역하시면서 우리를 안내 해주셨던 체코의 유정남, 비엔나의 나기창, 헝가리의 김흥근, 폴란드의 김상필 선교사님 내외분들, 김상필 선교사님의 따님 김사라 양,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일을 위해 아낌없이 물질로 후원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온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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