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섭 목사가 새해 뉴욕교계에 던진 메세지 "용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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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3-01-09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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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목사회(회장 최예식 목사)는 미국과 조국을 위한 신년금식기도성회를 1월 1일부터 3일 정오까지 펜실베니아에 소재한 Pinebrook 수양관에서 열었다. 이규섭 목사(퀸즈한인교회)는 마태복음 18장 21-35절을 본문으로 "천국에서 큰 자"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왜 이규섭 목사는 '용서'를 주제로 설교를 했는가. 복음에서 왜 용서가 중요한가. 다음의 말씀내용에 그 이유가 잘나와있다.
천국은 반드시 가야 할 곳인데 막상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가고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바울은 그렇게 가고싶다고 했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준비하고 살고 있는가. 새해가 시작됐다. 어떤 사람에게는 허락치 않으셨다. 황수관 박사는 12월 30일에 부르셨다. 어떻게 보면 훌륭하고 건강하고 나보다 뛰어난 분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을 안하셨는데 우리에게는 허락하셨다. 그러면 뭔가 하나님의 기대가 있으시다. 새해 우리를 통해 열매를 거두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고, 이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중요한것은 우리는 다 천국백성이고 천국의 시민이라는 것이다.
천국에서 어떤 모습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본문의 시작을 보면 누구 큰 자인가에 대한 말씀이 시작된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데 누가 가장 큰가. 그런데 그 질문에 문제가 있다.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다. 누가 더 우수하고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제자인가 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이었고, 여기서 크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권세와 권위가 있는 모습을 생각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시고 과연 천국에서 정말 큰자가 누구이며,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본문을 통해 소개해주신다.
베드로가 질문을 던졌고 어리석은 토론을 시작했다. 그런 도토리 키재기를 하기전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 16절을 통해 예수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좋은 고백을 했으니 나는 항상 천국에서 큰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있었기에, 지금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께서 마땅히 나를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해주시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물론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귀한 믿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큰것이 좋다. 주님은 믿음이 큰자에게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고, 어떤경우는 믿음이 적은자들에게 핀잔을 주신적도 있다. 믿음에도 사이즈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믿음은 큰것이 좋다. 우리가 더 믿음을 사모하고 산에 가지 올라왔는데, 큰 믿음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천국에서 큰자들이 되라.
왜 용서가 중요한가?
오늘 주제는 '용서'이다. 많은 주제중에 용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시작한것은 그럴만한 동기가 있다. 최근 1년간 뉴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커네티컷에서 수십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엄마와 갈등과 불만으로 자란 청년이 총을 들고 가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해쳤다. 뉴욕 지하철에서 밀려서 떨어져 죽는 일이 한달안에 3번이나 일어났다. 뉴욕에 사는 우리들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메세지를 주시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런일이 벌어지게 된 밑바닥에는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고 총을 쏘고,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 밀어서 죽인다. 이러한 용서하지 않는 모습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여기 있을수 없다. 먼저 우리는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의 삶을 온전히 사는 사람을 천국에서 큰자로 취급하신다. 이땅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겠지만 주님을 기쁘게 하는 참된 용서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복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잘보이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베드로가 7번까지 용서하면 되냐고 말했을때 베드로는 칭찬을 기대했다. 당시 랍비는 3번까지 용서해주라고 권고했다. 랍비보다 2배 그리고 덤으로 하나 더 정도면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베드로는 생각했다. 얼마전에도 칭찬을 받았는데 자신만만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에 대해 칭찬을 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용서해주라는 제한이 없는 용서를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질문과 대답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용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베드로의 7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는 질문속에는 제한을 두고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용서의 횟수를 제한하면 처음부터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제한없는 용서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7번 용서를 질문을 할 필요까지 없었다. 그렇게 질문하는 베드로의 심리속에는 이웃 가족 친지 들을 계속 용서할 마음이 없는 것이 들어있다.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용서의 흉내는 내야겠는데 랍비보다는 더해야겠고 그래서 베드로는 숫자를 제한했다. 예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기에 성도들은 마땅히 용서를 해야 된다는 정도는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도 제한된 용서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베드로는 처음부터 용서를 할 생각이 없었다. 베드로가 7번 용서의 제한을 둔 것은 처음부터 용서를 안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첫번째 문제점이었다.
둘째, 베드로는 나는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없고 잘못하는 일은 남들이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잘못하고 나는 용서를 하고 베푸는 사람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용서가 필요한 사람은 남들이고 나는 용서가 필요없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 문제였다. 지구상에 용서가 필요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다 죄인이다. 예수믿을때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없으면 예수를 믿을수 없다. 신앙인이라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용서가 필요하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만이 신앙인이 될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하여 예수믿고 신앙인이 됐다.
당연히 베드로 자신도 용서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자기는 항상 베푸는 사람이고 잘못은 남들이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지적하고 내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베드로도 역시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고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고, 항상 남들이 잘못이라고 생각한것이 베드로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용서가 필요한 자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새해에는 내가 기도하는 제목이 응답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천국에서 큰자가 되어 하나님에 칭찬받기를 소원한다면 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의식이 날마다 살아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용서는 기분좋을때 하시고 기분나쁠때는 안하는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가 다 쓰러져서 죄인이 되었을때 주님이 십자가를 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렇기에 분명히 믿고 나가야 하는 것은 용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다. 제한없는 용서를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본문을 비유로 소개하셨다. 어떤 주인이 종이 1만 달란트의 빚을 지었지만 탕감해주었다. 감옥에 가야하지만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을 받고 나와 길거리 가다가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서못하고 감옥에 넣었더니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다시 감옥에 넣았다는 이야기이다.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돈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한사람이 하루 일해서 얻을수 있는 소득이다. 일년에 300일을 일한다면 6천 데니리온은 20년 연봉이다. 그것이 한 달란트이다. 계산하기 쉽게해서 연봉이 10만불을 받는 분이라면 20년연봉이면 200만불이다. 한 달란트는 200만불이다.
1만 달란트는 200억불을 빚진것이다. 대단한 엄청난 돈이다. 허리케인 샌디로 인한 뉴욕일원의 재산피해가 사상 두번째로 500억불이다. 그런데 한사람이 빚이 200억불이니 어마어마한것이다. 1만은 최고의 숫자이고, 달란트는 최고의 화폐단위이다. 갚을려고 해도 갚을수 없는 액수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 100일을 일하면 얻을수 있는 돈을 빚진자를 감옥에 넣었다.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니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것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으로 보고 감옥에 넣는 것으로 통해 용서의 참된의미를 가르쳐주시고 있다.
용서라는 주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복음에 연연히 흐르는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이다. 창세기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는데 인간은 범죄하자,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을 통한 용서와 사죄의 은총을 약속하신다. 그것에서 용서가 출발해서 일련의 모든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 십자가는 용서의 결정체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하신다. 십자가는 용서 희생이라는 뜻이다. 가정에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 있고, 교회에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 있고. 민족에 십자가를 지고 조국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있는데 그 삶이 용서의 삶이다.
용서라는 주제가 너무 중요한데, 본문에 있는 세가지 중요한 용서의 원리를 말씀드리려 한다.
용서의 원리 1 - 용서는 받는 것이다.
용서는 먼저 받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용서할 능력이 없다. 200억불을 갚을 능력이 없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나는 용서가 필요하다. 주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 마땅히 죄인이기에 주님에게서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자격이 있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저주시는 것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는 소망이 없다. 불쌍히 여겨 밎을 탕감해준 것 같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시는 사건이 내게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날고 싶었다. 물리학적으로 계산해보니 일초에 손을 5백번 흔들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계산으로는 되지만 실제하려니 안된다. 용서는 계산적으로 될수 있어도 실제로는 안된다. 날고자 했던 사람이 중력이라는 법칙에 의해 눌림을 받기에 중력을 이기지 못하니 못나는 것이다. 죄값은 사망이라는 법칙이 우리를 누르고 있기에 우리는 자유할수 없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면 하늘을 나른다. 대기역학 법칙은 대기속에 들어있는 물체는 대기가 움직일때 같이 움직인다. 비행기안에 있는 공기속에 내가 몸을 실으면 비행기가 날아가면 나도 날아간다. 중력의 법칙에서 대기역학 법칙으로 내몸을 옮기면 나를수 있다. 자유할수 있다. 죄의 삵은 사망이다. 사망의 권세가 나를 누르고 있다. 중력의 법칙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내 몸을 맡기면 내가 자유함을 얻어 죄에서 자유함을 누린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용서를 받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을 보면 새로운 법칙이 믿음의 법칙이다. 믿음안에 있기에 믿음이 승리하는 순간 나도 승리한다. 용서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중요한것은 내가 내 능력으로 무엇을 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하며, 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고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값없이 나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임한것이고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용서의 법칙에 내몸을 담그는 순간 우리는 하늘을 나르는 것 같이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누림이다. 새해에는 그런 축복을 누리기 바란다.
용서는 받는 것이다. 용서받음이 기쁨과 감격이 된다. 세상속에 믿음이 있어서 능력있는 삶을 살고 싶죠. 언제 그것이 가능한가. 용서받은 것이 분명하고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기쁨이 분명히 내속에 거하는 순간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중력의 법칙은 여전하다. 중력이 여전히 누르고 있지만, 비행기를 탄 순간만큼은 하늘을 나를수 있는 것 처럼 우리가 이땅에서 아무리 죄악의 권세가 짓누르고 있어도 우리안에 예수의 복음이 생명의 복음이 용서의 복음이 있는 한 우리는 나르며 자유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라.
용서의 원리 2 - 용서는 체험하는 것이다.
용서가 체험이 안되었을때 내것이 되지 않는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는 용서를 받았는데 용서를 체험하지 못해 능력이 없다. 우리들도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는데 체험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대기역학 법칙으로 하늘을 나르고 있다. 체험이 없는 사람은 중력때문에 힘들게 산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 사랑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체험하며 살아야 할텐데 그렇게 살지못한다. 하나님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 은혜가운데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축복의 삶, 체험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용서를 받은 체험이 너무 중요하다. 신앙생활가운데 매일 체험이 되살아나고 되새김질을 하며 내가 용서받았다는 기쁨의 감격이 날마다 살아있기를 바란다. 처음 예수믿고 구원받은 때를 잊고 시간이 지나면 옛날로 돌아가지 말고 지금도 여전히 그 체험속에 사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소경아이가 입양이 되었다. 양부모가 잘키워냈지만 안타깝게 불치의 병에 걸렸다. 너무 불쌍해 고민하다가 친모를 만나게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을 버린 생모를 만나기 싫어했다. 양부모는 그래도 만나게 해주기로 하고 초청하여 친어머니가 병실에 찾아왔다. 양부모가 친어머니 오셨다고 하자 소경아이는 친모에게 상처를 주려고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침대 가까이에 와서 아이를 안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더듬기 시작했다. 그순간 아이는 생모도 나처럼 소경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며 그 순간 용서가 되었다. 어머니가 소경으로 자신을 키울수 없으니 찢어지는 아픔을 가지고 피덩이를 남에게 맡긴 것이지, 자신을 버린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것이다.
체험이 오니 용서가 일어나고 미움이 사랑으로 바껴진다. 체험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말한다. 아무리 이론으로 이야기를 해도 기독교의 진리를 알수 없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성령님을 만나야 된다. 체험을 해야 그것을 알수 있고 그래야만 하나님의 참사랑을 누리는 삶을 살수있다. 반드시 필요한것은 용서를 체험하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구나, 하나님이 이 죄인을 아무 댓가없이 아들을 보내시고 나를 용서하셨구나를 체험하라. 하나님은 아들은 인간으로 보내셔서 모든것을 체험하게 하셨다. 내가 겪는 여러문제를 주님이 다 경험하신 것 처럼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심을 경험하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체험이 우리에게 너무 소중하다.
어렸을때 주님을 만나 하나님앞에 헌신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해서 약속을 지키기위해 목사가 됐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은 체험이 없었다. 큰아이가 어릴때 아픈적이 있었다. 엉덩이 항문 언저리에 곪아 수술을 해서 움푹 살을 파였다. 치료되는 과정에 아이가 변을 보면 상처에 뭍어 아프다. 나는 목회에 바빠 사정을 잘몰랐다. 아이가 얼마나 아픈지 지식은 있어도 체험은 없었다. 어느날 아내가 아이를 나에게 맡겨놓고 나갔다. 그때 아이가 변을 보았다. 기저귀를 갈아주기위해 엉덩이를 닦아주는데 애가 자지러지게 운다. 깜짝 놀라 보니 상처부분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으로 그 부분을 핱아주었다. 본능적으로 했지만 지각적으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을 하고 화장실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는데 제 얼굴이 보였다.
그순간 "너 이놈 부자집 막내아들로 자라 너만 알고 이기적인 이놈아, 너도 네 아들을 사랑해서 변까지 먹는데 내가 너에게 한 사랑을 알겠는가"하는 말씀이 들렸다. 아들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사건이 체험적으로 온다.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고 목사가 되었지만 그때까지 아들을 주시기 까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었다. 나를 구해주셨지 그 정도였다.
하지만 큰애의 변을 먹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것이구나. 이렇게도 끔직한것이 아들이다. 아이가 우는 것을 못참아서 변을 먹는것이 아버지의 심정인데, 아들을 내어주기로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며 느꼈다. 용서에 대한 새로운 각도를 보았다. 우리가 이땅에서 주님이 내게 행하신 그 용서에 대한 반듯한 체험이 있기를 축원한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던지 주님이 개의치 않으신다. 그저 용서하시고 받으셨다. 바깥은 엄동설한이지만 이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보혈의 체온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체험하지 않으면 용서의 능력이 없다.
용서의 원리 3 - 용서는 나누는 것이다
3번째가 중요하다. 용서는 받는 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체험했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유가운데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악한 종에게 꼭 필요한것은 용서를 나누는 것 이었다. 주님으로 용서를 받았고 체험이 있으면 마땅히 내 마음을 아프게하고 어렵게 하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는 7번까지 용서한다고 했는데 악한 종은 한번도 용서하지 않았다. 성도간의 갈등을 겪다가 '용서못한다'는 말이 튀어 나온다. 만약 하나님이 예수님이 용서못한다고 하셨다면 어쩔뻔 했는가.
어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서점에 가서 도움이 되는 책을 샀다. 부부행복 10계명에 나온대로 아침에 일어나자 아내에게 뽀뽀를 했다. 아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남편은 사랑한다고 하며 분위기를 키워야 하는데 책에 있는대로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그럼 그렇지 하며 반발했다. 책에 있으니 한다는 것은 율법주의이다. 성경에 있으니 한다는 것도 율법주의이다. 오래가지 못하고 작심삼일로 끝난다. 그러나 속에 용서의 체험이 있고 성령님이 오셔서 용서의 능력을 주시면 계속할수 있다.
철부지 자매가 평소에는 엄마를 안도와주다가 남자친구를 집에 초대하자 엄마에게 무엇을 도와줄까를 묻는다. 자발적이다. 책에 있어서 하는것이 아니라 남자친구를 사랑하니 자발적으로 뭔가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한것이다. 사랑이 그런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제 율법주의와 복음의 차이를 아시겠는가. 신앙생활하며 성경읽고 열심히 하는것은 다 좋은데 율법주의적으로 해보려고 하면 작심삼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사랑이 임해야 한다. 용서의 능력이신 성령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자발적인 복음이 되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시편 51편 10절에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고백한다. 다윗이 표현을 그대로 하면 "내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주세요"이다.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달라는 것이다. 자기능력으로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윗이 스스로 노력을 해보았겠지만 시험을 이길수 없었고 사랑할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창조의 능력으로 내영을 새롭게 해주시고 내마음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다윗은 자기의 힘으로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 우리가 새로운 창조물인줄 믿는다. 그 사랑을 나눌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 성경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때 마다 따라오는 동사가 있다. "준다"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사랑하면 주고 싶다. 안주고는 못배긴다. 싫다고 해도 주고싶다. 내게 좋은 것은 꼭 주고싶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주신것이다. 우리도 용서받아서 그 용서를 가지고 이땅에서 살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어야 한다. 사랑과 용서는 나누는 것이다.
용서는 받는 것이다. 용서는 체험하는 것이다. 용서는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의 파워가 새로운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을 장악하셔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한해동안 믿음으로 승리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천국은 반드시 가야 할 곳인데 막상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면 가고싶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바울은 그렇게 가고싶다고 했는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여러분은 죽음에 대해 얼마나 준비하고 살고 있는가. 새해가 시작됐다. 어떤 사람에게는 허락치 않으셨다. 황수관 박사는 12월 30일에 부르셨다. 어떻게 보면 훌륭하고 건강하고 나보다 뛰어난 분이라도 하나님께서 허락을 안하셨는데 우리에게는 허락하셨다. 그러면 뭔가 하나님의 기대가 있으시다. 새해 우리를 통해 열매를 거두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으시고, 이땅에서 해야 할 사명이 있다. 중요한것은 우리는 다 천국백성이고 천국의 시민이라는 것이다.
천국에서 어떤 모습을 하나님이 기대하시는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본문의 시작을 보면 누구 큰 자인가에 대한 말씀이 시작된다. 천국은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인데 누가 가장 큰가. 그런데 그 질문에 문제가 있다. 도토리 키재기를 하고 있다. 누가 더 우수하고 예수님이 칭찬하시는 제자인가 하는 것이 그들의 관심이었고, 여기서 크다는 것은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권세와 권위가 있는 모습을 생각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바꾸시고 과연 천국에서 정말 큰자가 누구이며, 하나님께 인정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본문을 통해 소개해주신다.
베드로가 질문을 던졌고 어리석은 토론을 시작했다. 그런 도토리 키재기를 하기전 베드로는 마태복음 16장 16절을 통해 예수님으로 부터 칭찬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좋은 고백을 했으니 나는 항상 천국에서 큰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있었기에, 지금도 이런 이야기를 하면 예수님께서 마땅히 나를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해주시겠지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가. 물론 그래야 한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귀한 믿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믿음은 큰것이 좋다. 주님은 믿음이 큰자에게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시고, 어떤경우는 믿음이 적은자들에게 핀잔을 주신적도 있다. 믿음에도 사이즈가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믿음은 큰것이 좋다. 우리가 더 믿음을 사모하고 산에 가지 올라왔는데, 큰 믿음의 축복이 있기를 축원한다. 천국에서 큰자들이 되라.
왜 용서가 중요한가?
오늘 주제는 '용서'이다. 많은 주제중에 용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시작한것은 그럴만한 동기가 있다. 최근 1년간 뉴욕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라. 커네티컷에서 수십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엄마와 갈등과 불만으로 자란 청년이 총을 들고 가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이들까지 해쳤다. 뉴욕 지하철에서 밀려서 떨어져 죽는 일이 한달안에 3번이나 일어났다. 뉴욕에 사는 우리들이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떤 메세지를 주시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기도 하고,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런일이 벌어지게 된 밑바닥에는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어머니를 용서하지 않고 총을 쏘고,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을 용서하지 않아 밀어서 죽인다. 이러한 용서하지 않는 모습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용서가 없었다면 우리는 아무도 여기 있을수 없다. 먼저 우리는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용서의 삶을 온전히 사는 사람을 천국에서 큰자로 취급하신다. 이땅에서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겠지만 주님을 기쁘게 하는 참된 용서의 주인공이 되기를 축복한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잘보이려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용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베드로가 7번까지 용서하면 되냐고 말했을때 베드로는 칭찬을 기대했다. 당시 랍비는 3번까지 용서해주라고 권고했다. 랍비보다 2배 그리고 덤으로 하나 더 정도면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베드로는 생각했다. 얼마전에도 칭찬을 받았는데 자신만만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말에 대해 칭찬을 하신 것이 아니라 계속 용서해주라는 제한이 없는 용서를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베드로의 질문과 대답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집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용서는 대단히 중요한 주제이다. 베드로의 7번까지 용서하면 되느냐는 질문속에는 제한을 두고있다. 누군가를 용서하기로 작정을 했는데 용서의 횟수를 제한하면 처음부터 용서할 생각이 없는 것이다. 처음부터 제한없는 용서를 할 생각이 있었다면 7번 용서를 질문을 할 필요까지 없었다. 그렇게 질문하는 베드로의 심리속에는 이웃 가족 친지 들을 계속 용서할 마음이 없는 것이 들어있다.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용서의 흉내는 내야겠는데 랍비보다는 더해야겠고 그래서 베드로는 숫자를 제한했다. 예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기에 성도들은 마땅히 용서를 해야 된다는 정도는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도 제한된 용서를 하고 있지는 않는가. 베드로는 처음부터 용서를 할 생각이 없었다. 베드로가 7번 용서의 제한을 둔 것은 처음부터 용서를 안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첫번째 문제점이었다.
둘째, 베드로는 나는 용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의식이 없고 잘못하는 일은 남들이 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이 잘못하고 나는 용서를 하고 베푸는 사람 그리고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용서가 필요한 사람은 남들이고 나는 용서가 필요없는 사람으로 착각한 것이 문제였다. 지구상에 용서가 필요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다 죄인이다. 예수믿을때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이 없으면 예수를 믿을수 없다. 신앙인이라는 것은 나는 죄인이고 용서가 필요하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만이 신앙인이 될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하여 예수믿고 신앙인이 됐다.
당연히 베드로 자신도 용서가 필요함을 깨달아야 하는데 자기는 항상 베푸는 사람이고 잘못은 남들이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지적하고 내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처럼 베드로도 역시 그런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잘못이 없고 용서받을 필요가 없는 사람이고, 항상 남들이 잘못이라고 생각한것이 베드로의 근본적인 문제이다. 우리의 인생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용서가 필요한 자라는 고백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새해에는 내가 기도하는 제목이 응답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 천국에서 큰자가 되어 하나님에 칭찬받기를 소원한다면 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의식이 날마다 살아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용서는 기분좋을때 하시고 기분나쁠때는 안하는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용서는 우리가 다 쓰러져서 죄인이 되었을때 주님이 십자가를 드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렇기에 분명히 믿고 나가야 하는 것은 용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내가 어떤 환경에 있더라도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다. 제한없는 용서를 주님은 우리에게 주신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은 본문을 비유로 소개하셨다. 어떤 주인이 종이 1만 달란트의 빚을 지었지만 탕감해주었다. 감옥에 가야하지만 주인이 불쌍히 여겨서 탕감을 받고 나와 길거리 가다가 백 데나리온 빚진자를 용서못하고 감옥에 넣었더니 주인이 그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다시 감옥에 넣았다는 이야기이다.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돈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이다. 한 데나리온은 한사람이 하루 일해서 얻을수 있는 소득이다. 일년에 300일을 일한다면 6천 데니리온은 20년 연봉이다. 그것이 한 달란트이다. 계산하기 쉽게해서 연봉이 10만불을 받는 분이라면 20년연봉이면 200만불이다. 한 달란트는 200만불이다.
1만 달란트는 200억불을 빚진것이다. 대단한 엄청난 돈이다. 허리케인 샌디로 인한 뉴욕일원의 재산피해가 사상 두번째로 500억불이다. 그런데 한사람이 빚이 200억불이니 어마어마한것이다. 1만은 최고의 숫자이고, 달란트는 최고의 화폐단위이다. 갚을려고 해도 갚을수 없는 액수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백 데나리온, 100일을 일하면 얻을수 있는 돈을 빚진자를 감옥에 넣었다.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니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것에 대한 체험이 없는 것으로 보고 감옥에 넣는 것으로 통해 용서의 참된의미를 가르쳐주시고 있다.
용서라는 주제는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복음에 연연히 흐르는 가장 중요한 원리중의 하나이다. 창세기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셨는데 인간은 범죄하자, 하나님은 여인의 후손을 통한 용서와 사죄의 은총을 약속하신다. 그것에서 용서가 출발해서 일련의 모든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어진다. 십자가는 용서의 결정체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시고 그렇게 살기를 원하신다. 누군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으라 하신다. 십자가는 용서 희생이라는 뜻이다. 가정에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 있고, 교회에서 십자가를 지신 분이 있고. 민족에 십자가를 지고 조국과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있는데 그 삶이 용서의 삶이다.
용서라는 주제가 너무 중요한데, 본문에 있는 세가지 중요한 용서의 원리를 말씀드리려 한다.
용서의 원리 1 - 용서는 받는 것이다.
용서는 먼저 받아야 한다. 우리는 스스로 용서할 능력이 없다. 200억불을 갚을 능력이 없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나는 용서가 필요하다. 주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 마땅히 죄인이기에 주님에게서 용서받는 것이 필요하다. 자격이 있어서 용서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저주시는 것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나는 소망이 없다. 불쌍히 여겨 밎을 탕감해준 것 같이,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시는 사건이 내게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날고 싶었다. 물리학적으로 계산해보니 일초에 손을 5백번 흔들면 날 것 같았다. 그런데 계산으로는 되지만 실제하려니 안된다. 용서는 계산적으로 될수 있어도 실제로는 안된다. 날고자 했던 사람이 중력이라는 법칙에 의해 눌림을 받기에 중력을 이기지 못하니 못나는 것이다. 죄값은 사망이라는 법칙이 우리를 누르고 있기에 우리는 자유할수 없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면 하늘을 나른다. 대기역학 법칙은 대기속에 들어있는 물체는 대기가 움직일때 같이 움직인다. 비행기안에 있는 공기속에 내가 몸을 실으면 비행기가 날아가면 나도 날아간다. 중력의 법칙에서 대기역학 법칙으로 내몸을 옮기면 나를수 있다. 자유할수 있다. 죄의 삵은 사망이다. 사망의 권세가 나를 누르고 있다. 중력의 법칙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내 몸을 맡기면 내가 자유함을 얻어 죄에서 자유함을 누린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생명이다. 용서를 받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을 보면 새로운 법칙이 믿음의 법칙이다. 믿음안에 있기에 믿음이 승리하는 순간 나도 승리한다. 용서를 받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가운데 중요한것은 내가 내 능력으로 무엇을 하는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필요하며, 나는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고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격이 있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때문에 값없이 나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임한것이고 그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용서의 법칙에 내몸을 담그는 순간 우리는 하늘을 나르는 것 같이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누림이다. 새해에는 그런 축복을 누리기 바란다.
용서는 받는 것이다. 용서받음이 기쁨과 감격이 된다. 세상속에 믿음이 있어서 능력있는 삶을 살고 싶죠. 언제 그것이 가능한가. 용서받은 것이 분명하고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는 기쁨이 분명히 내속에 거하는 순간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다. 중력의 법칙은 여전하다. 중력이 여전히 누르고 있지만, 비행기를 탄 순간만큼은 하늘을 나를수 있는 것 처럼 우리가 이땅에서 아무리 죄악의 권세가 짓누르고 있어도 우리안에 예수의 복음이 생명의 복음이 용서의 복음이 있는 한 우리는 나르며 자유의 축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라.
용서의 원리 2 - 용서는 체험하는 것이다.
용서가 체험이 안되었을때 내것이 되지 않는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는 용서를 받았는데 용서를 체험하지 못해 능력이 없다. 우리들도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았는데 체험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대기역학 법칙으로 하늘을 나르고 있다. 체험이 없는 사람은 중력때문에 힘들게 산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미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푸셨는데 그 사랑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며 체험하며 살아야 할텐데 그렇게 살지못한다. 하나님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는 하나님 은혜가운데 기쁨과 감격을 누리는 축복의 삶, 체험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용서를 받은 체험이 너무 중요하다. 신앙생활가운데 매일 체험이 되살아나고 되새김질을 하며 내가 용서받았다는 기쁨의 감격이 날마다 살아있기를 바란다. 처음 예수믿고 구원받은 때를 잊고 시간이 지나면 옛날로 돌아가지 말고 지금도 여전히 그 체험속에 사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소경아이가 입양이 되었다. 양부모가 잘키워냈지만 안타깝게 불치의 병에 걸렸다. 너무 불쌍해 고민하다가 친모를 만나게 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을 버린 생모를 만나기 싫어했다. 양부모는 그래도 만나게 해주기로 하고 초청하여 친어머니가 병실에 찾아왔다. 양부모가 친어머니 오셨다고 하자 소경아이는 친모에게 상처를 주려고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가 침대 가까이에 와서 아이를 안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더듬기 시작했다. 그순간 아이는 생모도 나처럼 소경이었구나 하는 깨달음이 오며 그 순간 용서가 되었다. 어머니가 소경으로 자신을 키울수 없으니 찢어지는 아픔을 가지고 피덩이를 남에게 맡긴 것이지, 자신을 버린것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것이다.
체험이 오니 용서가 일어나고 미움이 사랑으로 바껴진다. 체험이 이렇게 중요하다. 그렇기에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말한다. 아무리 이론으로 이야기를 해도 기독교의 진리를 알수 없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성령님을 만나야 된다. 체험을 해야 그것을 알수 있고 그래야만 하나님의 참사랑을 누리는 삶을 살수있다. 반드시 필요한것은 용서를 체험하라.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 주셨구나, 하나님이 이 죄인을 아무 댓가없이 아들을 보내시고 나를 용서하셨구나를 체험하라. 하나님은 아들은 인간으로 보내셔서 모든것을 체험하게 하셨다. 내가 겪는 여러문제를 주님이 다 경험하신 것 처럼 나에게 그런 은혜를 주심을 경험하라.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체험이 우리에게 너무 소중하다.
어렸을때 주님을 만나 하나님앞에 헌신하고 목사가 되겠다고 해서 약속을 지키기위해 목사가 됐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깊은 체험이 없었다. 큰아이가 어릴때 아픈적이 있었다. 엉덩이 항문 언저리에 곪아 수술을 해서 움푹 살을 파였다. 치료되는 과정에 아이가 변을 보면 상처에 뭍어 아프다. 나는 목회에 바빠 사정을 잘몰랐다. 아이가 얼마나 아픈지 지식은 있어도 체험은 없었다. 어느날 아내가 아이를 나에게 맡겨놓고 나갔다. 그때 아이가 변을 보았다. 기저귀를 갈아주기위해 엉덩이를 닦아주는데 애가 자지러지게 운다. 깜짝 놀라 보니 상처부분이 빨갛게 되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입으로 그 부분을 핱아주었다. 본능적으로 했지만 지각적으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을 하고 화장실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는데 제 얼굴이 보였다.
그순간 "너 이놈 부자집 막내아들로 자라 너만 알고 이기적인 이놈아, 너도 네 아들을 사랑해서 변까지 먹는데 내가 너에게 한 사랑을 알겠는가"하는 말씀이 들렸다. 아들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의 사건이 체험적으로 온다.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받고 목사가 되었지만 그때까지 아들을 주시기 까지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깊은 체험이 없었다. 나를 구해주셨지 그 정도였다.
하지만 큰애의 변을 먹고 생각이 달라졌다. 이것이구나. 이렇게도 끔직한것이 아들이다. 아이가 우는 것을 못참아서 변을 먹는것이 아버지의 심정인데, 아들을 내어주기로 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며 느꼈다. 용서에 대한 새로운 각도를 보았다. 우리가 이땅에서 주님이 내게 행하신 그 용서에 대한 반듯한 체험이 있기를 축원한다.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던지 주님이 개의치 않으신다. 그저 용서하시고 받으셨다. 바깥은 엄동설한이지만 이시간 예수 그리스도의 따뜻한 보혈의 체온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체험하지 않으면 용서의 능력이 없다.
용서의 원리 3 - 용서는 나누는 것이다
3번째가 중요하다. 용서는 받는 것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체험했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비유가운데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악한 종에게 꼭 필요한것은 용서를 나누는 것 이었다. 주님으로 용서를 받았고 체험이 있으면 마땅히 내 마음을 아프게하고 어렵게 하는 그들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는 7번까지 용서한다고 했는데 악한 종은 한번도 용서하지 않았다. 성도간의 갈등을 겪다가 '용서못한다'는 말이 튀어 나온다. 만약 하나님이 예수님이 용서못한다고 하셨다면 어쩔뻔 했는가.
어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싶은 마음에 서점에 가서 도움이 되는 책을 샀다. 부부행복 10계명에 나온대로 아침에 일어나자 아내에게 뽀뽀를 했다. 아내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남편은 사랑한다고 하며 분위기를 키워야 하는데 책에 있는대로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아내는 그럼 그렇지 하며 반발했다. 책에 있으니 한다는 것은 율법주의이다. 성경에 있으니 한다는 것도 율법주의이다. 오래가지 못하고 작심삼일로 끝난다. 그러나 속에 용서의 체험이 있고 성령님이 오셔서 용서의 능력을 주시면 계속할수 있다.
철부지 자매가 평소에는 엄마를 안도와주다가 남자친구를 집에 초대하자 엄마에게 무엇을 도와줄까를 묻는다. 자발적이다. 책에 있어서 하는것이 아니라 남자친구를 사랑하니 자발적으로 뭔가 만들어 주고 싶은 마음으로 한것이다. 사랑이 그런것이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제 율법주의와 복음의 차이를 아시겠는가. 신앙생활하며 성경읽고 열심히 하는것은 다 좋은데 율법주의적으로 해보려고 하면 작심삼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한다. 사랑이 임해야 한다. 용서의 능력이신 성령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 자발적인 복음이 되고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시편 51편 10절에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고백한다. 다윗이 표현을 그대로 하면 "내정결한 마음을 창조해 주세요"이다.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라 창조해달라는 것이다. 자기능력으로 못한다는 의미이다. 다윗이 스스로 노력을 해보았겠지만 시험을 이길수 없었고 사랑할수도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창조의 능력으로 내영을 새롭게 해주시고 내마음을 깨끗하게 해달라고 한 것이다. 다윗은 자기의 힘으로는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했다.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 되었다. 우리가 새로운 창조물인줄 믿는다. 그 사랑을 나눌수 있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기를 축원한다. 성경에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올때 마다 따라오는 동사가 있다. "준다"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사랑하면 주고 싶다. 안주고는 못배긴다. 싫다고 해도 주고싶다. 내게 좋은 것은 꼭 주고싶다. 아버지가 아들을 주신 것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주신것이다. 우리도 용서받아서 그 용서를 가지고 이땅에서 살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어야 한다. 사랑과 용서는 나누는 것이다.
용서는 받는 것이다. 용서는 체험하는 것이다. 용서는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의 파워가 새로운 복음의 능력이 여러분을 장악하셔서 참된 자유를 누리고 한해동안 믿음으로 승리하는 놀라운 축복을 누리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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