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덕 목사 "제직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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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3-01-22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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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CA 대뉴욕지구 한인교회협의회(회장 송흥용 목사) 연합 청지기 세미나 및 헌신예배가 1월 20일(주일) 오후 4시부터 4시간동안 뉴욕신광교회에서 열렸다. 김종덕 목사(뉴욕실로암장로교회)는 예배학을 주제로 특강을 했다. 김 목사는 구약과 신약의 예배의 역사를 통해 예배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확인했다. 또 예배의 의미와 예배의 준비자세에 대해서도 전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면 예배를 잘드릴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배를 한 단어로 사용한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여러 어휘를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아바드'라는 히브리어으로 봉사와 섬김이라는 뜻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이다. 두번째는 히브리어로 '샤하'으로 굴복하는 것, 엎드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을 가지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입마추다, 절하다, 굽어 엎드리다라는 뜻이다.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는 것이다. 또 '라트레이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섬긴다는 뜻이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예배의 의미를 종합하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으로 엎드려 섬기며 경배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경배해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오늘도 성경으로 우리안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새힘을 주시고, 위로와 평안과 사랑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배를 잘드리면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실것이라고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배는 거래행위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배하는 종교이다. 기독교 예배는 역사속에서 성장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기독교 예배의 근원은 성경이다.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찾아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공적 예배생활은 역사적으로 출애굽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왕국시대로 이어지면서 예루살렘 성전예배가 되었고 민족의 수난과 함께 회당예배로 새로운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인 발전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예배로 나타난다.
구약시대의 예배
예배처소의 경우 다듬지 않은 큰 돌을 그냥 세워놓는 것에서 부터 광야의 성막으로 발전했으며 솔로몬때는 항구적인 성전으로 발전했다. 족장은 직접 제사를 드렸으나, 나중에는 제사장의 고유한 권한으로 확립되어 왕이라도 직접 예물을 드리지 못했다. 이교도의 예배는 자기가 믿는 신들의 총애를 받기위해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에로스적인 예배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것에 대한 응답으로 하늘로 부터 내려온 아가페적인 예배이다.
1. 족장시대
주로 개인과 가족중심의 예배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제단의 필요성이 있을때만 제단을 쌓았고, 제단의 중심은 희생제물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는곳마다 장막을 세우고 단을 쌓았다. 제사장이 없이 족장들이 예배를 집례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계약백성의 구별된 표로 할례제도가 있었으며, 십일조의 실례를 세웠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모형이었다.
2. 율법시대
하나님은 출애굽시키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성막제도를 주셨다. 이방종교로 인해 오염되었던 예배를 새롭게 하신 것이다. 십계명을 주시고, 성막의 내용과 제사제도의 제정을 명하셨다. 또 예배를 위한 성막과 십계명을 간수할 언약궤를 만들게 하셨다. 성막예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등 절기를 중심으로 한 축제에배였다. 또 법궤를 중심으로 한 희생제사 예배였으며, 안식일 제도가 지켜졌다.
3.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후 가나안의 풍요를 상징하는 토속종교 바알신을 접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종교에 호감을 가지게 되고 바알을 하나님과 동일시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는 순결한 형태를 잃게되고 예배가 오염되어 위기를 맞게된다. 사사시대는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근근히 유지되었다.
4. 이스라엘의 왕국시대
왕국시대에 접어들어 이스라엘은 성전을 정착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제물중심의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성전예배와 성막예배는 구조나 내용상 차이가 없었다. 단지 성전예배는 시편과 찬양이 있었고 이를 위한 찬양대와 악기를 사용했다. 특징으로는 예배장소가 성전에 국한되었고, 예배에 대한 모든 요소가 성문화되었고, 제사장이 백성을 대표하여 의식을 집행했으며, 의식적인 예배로 설교와 기도가 없는 예배였다.
5. 포로이후시대
성전예배는 솔로몬 말기부터 타락과 함께 형식화됐다. 아무리 잘못해도 성전이 있으니 괜찮다는 신학이 당시 예루살렘 신학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500년만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지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따라서 더 이상 성전예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간 이방땅에서 회당이라는 예배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났다. 회당예배는 거룩한 예식이 없었으며,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기도하고 예배를 인도할수 있었다.
성전예배 참여자는 구경꾼이었다면 회당예배는 모두가 참여자였다. 단 향을 피우거나 악기사용을 금했다. 이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스룹바벨의 성전을 짓게되지만 회당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회당예배는 기도가 중시되었으며, 율법의 낭독, 구약의 예언서 낭독, 강해와 권면, 축도후 아멘으로 끝났다. 회당예배는 오늘날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말씀중심 예배의 근원이 되었다.
신약시대의 예배
구약시대의 예배가 성전 중심의 예배였다면, 신악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구속역사가 중심이 된 예배이다. 또 구약시대의 예배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역사라고 한다면, 신약시대의 예배는 예수를 믿는 사람 누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역사였다. 신약의 예배는 성전예배, 회당예배, 그리고 가정과 다른장소 예배가 융합된 예배형태가 있었다.
1. 예수님 시대
예수님은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했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입장인 동시에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배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영적인 면을 강조하여 제도화된 예배와의 균형을 잃지 않으셨다.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에게 분노하셨으며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으며, 회당 안식일 예배에도 출석하셨다. 가장 중요한것은 예수님이 친히 다락방 예배를 시행하셨으며, 성찬과 세례식의 기초를 놓으셨다.
2. 사도시대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사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를 더이상 제한하지 않았다. 모이는 시간도 일주일의 첫째날을 주님의 날로 정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날이다. 사도시대 예배는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기도가 시편과 함께 행해지던 회당예배위에, 성찬과 주의 날에 행하는 예배라는 요소가 추가되었다. 사도시대 예배는 구속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라고 하기보다는 복음전파에 비중을 둔 비예전적인 형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다. 신약시대에는 성전예배, 회당예배, 다락방 예배의 요소들이 서로 용해되어 새로운 예배규범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며, 예수님이 모든 예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받으시는 분이심을 나타나는 시기였다.
예배의 신학적인 내용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고 나와있다. 참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다. 기독교의 예배는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대해 사람이 응답하는 것이다.
첫째,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예배자인 인간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예배의 주체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둘째, 예배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담이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길이 막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혔던 예배의 길이 열렸다. 그래서 예배자는 은혜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가게 되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기독교 예배는 무의미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타종교 예배와 구별된다.
셋째, 예배의 원동력은 성령이시다. 성령님은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내적으로는 예배자에게 하나님을 증거하여 깨닫게 하시며,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바른 예배는 성령의 활동으로 시작한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예배에서 기대해야 한다.
넷째, 예배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행위이다. 예배는 개인적인 모임이 아니라 교회전체의 행위이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생각나게 할 뿐 아니라,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갱신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때까지 이르게 된다.
다섯째,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전 삶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께로 부터 사명을 부여받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며 생활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아무리 장엄한 예배를 드린자라도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없다. 예배와 삶은 유리되지 않는 예배의 신학적 연속성을 볼수있다.
회중의 예배준비와 자세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예배를 준비해야 하며, 예배를 드리로 오자말자 기도하고, 가사의 뜻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펴고 본문을 열심히 봉독하고, 주보를 보고 순서에 따라 예배에 참여하며. 기쁜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고, 사도신경으로 진실되게 신앙을 고백하고, 성경을 펴고 필기하며 적극적인 자세로 설교를 들으려고 노력하고, 필요하면 예배진행을 돕는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개 회중은 자기의 태도가 적어도 주변의 20-30명의 예배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찬양과 기도는 내가 공연하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는 어떤가. 설교를 듣는 태도가 공연이다. 설교자의 설교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설교를 통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설교자가 어떻게 말하는 공연을 했는가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듣는 공연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설교도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예배시간 전체는 드리는 시간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하나님
예배가 무엇인지를 알면 예배를 잘드릴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예배를 한 단어로 사용한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여러 어휘를 사용했다. 대표적인 것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아바드'라는 히브리어으로 봉사와 섬김이라는 뜻이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기는 행위이다. 두번째는 히브리어로 '샤하'으로 굴복하는 것, 엎드리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공경심을 가지고 엎드려 경배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는 '프로스퀴네오'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입마추다, 절하다, 굽어 엎드리다라는 뜻이다. 사랑과 존경을 표한다는 것이다. 또 '라트레이아'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섬긴다는 뜻이다.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예배의 의미를 종합하면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과 존경심으로 엎드려 섬기며 경배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경배해야만 하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를 위하여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셨고, 오늘도 성경으로 우리안에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에게 새힘을 주시고, 위로와 평안과 사랑의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은 어떤 보상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예배를 잘드리면 하나님께서 무엇인가를 주실것이라고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배는 거래행위가 아니다. 단지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 합당하신 분이시기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기독교는 예배하는 종교이다. 기독교 예배는 역사속에서 성장발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기독교 예배의 근원은 성경이다. 성경에 기초한 기독교 예배의 역사를 찾아야 한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공적 예배생활은 역사적으로 출애굽에서 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이 왕국시대로 이어지면서 예루살렘 성전예배가 되었고 민족의 수난과 함께 회당예배로 새로운 변화를 거치게 되었다. 하나님의 계시는 점진적인 발전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예배로 나타난다.
구약시대의 예배
예배처소의 경우 다듬지 않은 큰 돌을 그냥 세워놓는 것에서 부터 광야의 성막으로 발전했으며 솔로몬때는 항구적인 성전으로 발전했다. 족장은 직접 제사를 드렸으나, 나중에는 제사장의 고유한 권한으로 확립되어 왕이라도 직접 예물을 드리지 못했다. 이교도의 예배는 자기가 믿는 신들의 총애를 받기위해 무엇인가 하고자 하는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에로스적인 예배이고, 하나님의 백성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해 놓으신것에 대한 응답으로 하늘로 부터 내려온 아가페적인 예배이다.
1. 족장시대
주로 개인과 가족중심의 예배였으며 하나님을 향한 제단의 필요성이 있을때만 제단을 쌓았고, 제단의 중심은 희생제물이었다. 아브라함은 가는곳마다 장막을 세우고 단을 쌓았다. 제사장이 없이 족장들이 예배를 집례했다.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계약백성의 구별된 표로 할례제도가 있었으며, 십일조의 실례를 세웠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의 모형이었다.
2. 율법시대
하나님은 출애굽시키신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성막제도를 주셨다. 이방종교로 인해 오염되었던 예배를 새롭게 하신 것이다. 십계명을 주시고, 성막의 내용과 제사제도의 제정을 명하셨다. 또 예배를 위한 성막과 십계명을 간수할 언약궤를 만들게 하셨다. 성막예배는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등 절기를 중심으로 한 축제에배였다. 또 법궤를 중심으로 한 희생제사 예배였으며, 안식일 제도가 지켜졌다.
3. 사사시대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하고 난후 가나안의 풍요를 상징하는 토속종교 바알신을 접하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종교에 호감을 가지게 되고 바알을 하나님과 동일시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는 순결한 형태를 잃게되고 예배가 오염되어 위기를 맞게된다. 사사시대는 사사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근근히 유지되었다.
4. 이스라엘의 왕국시대
왕국시대에 접어들어 이스라엘은 성전을 정착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제물중심의 예배는 예루살렘 성전을 세우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성전예배와 성막예배는 구조나 내용상 차이가 없었다. 단지 성전예배는 시편과 찬양이 있었고 이를 위한 찬양대와 악기를 사용했다. 특징으로는 예배장소가 성전에 국한되었고, 예배에 대한 모든 요소가 성문화되었고, 제사장이 백성을 대표하여 의식을 집행했으며, 의식적인 예배로 설교와 기도가 없는 예배였다.
5. 포로이후시대
성전예배는 솔로몬 말기부터 타락과 함께 형식화됐다. 아무리 잘못해도 성전이 있으니 괜찮다는 신학이 당시 예루살렘 신학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은 500년만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지고 백성들은 포로로 잡혀갔다. 따라서 더 이상 성전예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포로로 잡혀간 이방땅에서 회당이라는 예배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났다. 회당예배는 거룩한 예식이 없었으며, 누구든지 성경을 읽고 해석하며 기도하고 예배를 인도할수 있었다.
성전예배 참여자는 구경꾼이었다면 회당예배는 모두가 참여자였다. 단 향을 피우거나 악기사용을 금했다. 이후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여 스룹바벨의 성전을 짓게되지만 회당제도는 폐지되지 않았다. 회당에서 안식일마다 예배를 드렸다. 회당예배는 기도가 중시되었으며, 율법의 낭독, 구약의 예언서 낭독, 강해와 권면, 축도후 아멘으로 끝났다. 회당예배는 오늘날 개혁교회가 가지고 있는 말씀중심 예배의 근원이 되었다.
신약시대의 예배
구약시대의 예배가 성전 중심의 예배였다면, 신악시대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의한 구속역사가 중심이 된 예배이다. 또 구약시대의 예배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역사라고 한다면, 신약시대의 예배는 예수를 믿는 사람 누구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역사였다. 신약의 예배는 성전예배, 회당예배, 그리고 가정과 다른장소 예배가 융합된 예배형태가 있었다.
1. 예수님 시대
예수님은 의식적인 제도보다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말씀했다. 예수님은 예배를 드리는 사람의 입장인 동시에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배에 대한 말씀을 주셨다. 영적인 면을 강조하여 제도화된 예배와의 균형을 잃지 않으셨다. 성전을 더럽히는 무리에게 분노하셨으며 성전을 청결케 하셨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으며, 회당 안식일 예배에도 출석하셨다. 가장 중요한것은 예수님이 친히 다락방 예배를 시행하셨으며, 성찬과 세례식의 기초를 놓으셨다.
2. 사도시대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사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성전과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지만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장소를 더이상 제한하지 않았다. 모이는 시간도 일주일의 첫째날을 주님의 날로 정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신 날이다. 사도시대 예배는 성경을 낭독하고 해석하며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기도가 시편과 함께 행해지던 회당예배위에, 성찬과 주의 날에 행하는 예배라는 요소가 추가되었다. 사도시대 예배는 구속주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라고 하기보다는 복음전파에 비중을 둔 비예전적인 형태였으며,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었다. 신약시대에는 성전예배, 회당예배, 다락방 예배의 요소들이 서로 용해되어 새로운 예배규범이 만들어지는 시기이며, 예수님이 모든 예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받으시는 분이심을 나타나는 시기였다.
예배의 신학적인 내용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예배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한다고 나와있다. 참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다. 기독교의 예배는 사람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 대해 사람이 응답하는 것이다.
첫째, 예배의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다.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예배자인 인간은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예배의 주체는 성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배를 드리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둘째, 예배의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담이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길이 막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막혔던 예배의 길이 열렸다. 그래서 예배자는 은혜의 보좌앞으로 담대히 나가게 되었다.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기독교 예배는 무의미하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타종교 예배와 구별된다.
셋째, 예배의 원동력은 성령이시다. 성령님은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내적으로는 예배자에게 하나님을 증거하여 깨닫게 하시며, 감동시키시는 하나님의 영이시다. 바른 예배는 성령의 활동으로 시작한다. 성령의 감동과 인도하심을 예배에서 기대해야 한다.
넷째, 예배는 본질적으로 공동체적인 행위이다. 예배는 개인적인 모임이 아니라 교회전체의 행위이다. 교회는 예배를 통해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을 생각나게 할 뿐 아니라,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임재하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배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갱신되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할때까지 이르게 된다.
다섯째,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전 삶이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 동시에 하나님께로 부터 사명을 부여받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며 생활속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아무리 장엄한 예배를 드린자라도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지 않으면 그 예배는 진정한 예배라 할 수 없다. 예배와 삶은 유리되지 않는 예배의 신학적 연속성을 볼수있다.
회중의 예배준비와 자세
토요일 저녁부터 주일예배를 준비해야 하며, 예배를 드리로 오자말자 기도하고, 가사의 뜻을 생각하며 진심으로 찬송을 부르며, 성경을 펴고 본문을 열심히 봉독하고, 주보를 보고 순서에 따라 예배에 참여하며. 기쁜마음으로 헌금을 드리고, 사도신경으로 진실되게 신앙을 고백하고, 성경을 펴고 필기하며 적극적인 자세로 설교를 들으려고 노력하고, 필요하면 예배진행을 돕는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예배에 참여하는 개 회중은 자기의 태도가 적어도 주변의 20-30명의 예배분위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찬양과 기도는 내가 공연하는 것이다. 그러면 설교는 어떤가. 설교를 듣는 태도가 공연이다. 설교자의 설교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설교를 통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듣는 것이다. 설교자가 어떻게 말하는 공연을 했는가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듣는 공연을 했는지가 중요하다. 설교도 받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다. 예배시간 전체는 드리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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