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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산 목사 "하나님을 조종하려는 현대 성도들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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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3-0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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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늘기쁜교회(김홍석 목사)는 1월 23일(수)부터 3일간 제직세미나를 열었다. 첫 날은 담임목사인 김홍석 목사가 말씀을 인도했으며, 둘째날과 셋째날은 각각 1.5세인 이승한 목사(뉴잉글랜드 은혜장로교회)와 노진산 목사(믿음으로사는교회)가 담당했다.

세미나 마지막날, 노진산 목사는 마가복음 8장 27절-9장 1절을 본문으로 "예수님의 사역"이라는 제목의 세미나를 인도했다. 노진산 목사는 정공법을 택했다. 방법보다는 복음을 전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라며,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과 사역의 장애물과 사역의 부르심이라는 3가지 주제로 말씀을 이어나갔다. 다음은 말씀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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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진산 목사(믿음으로사는교회)

한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것이 무엇인가. 예배, 교육, 선교등 여러가지를 말할것이다. 교회마다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일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

교회를 섬기면서 여러가지 중요한것을 생각할수 있겠지만 교회에서 뭐니해도 가장 중요한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저희들에게 가르쳐주신 핵심적인 말씀이 무엇인가. 그 말씀을 가지고 사역하고 봉사를 해야 한다.

마가복음은 1-16장까지 두파트로 나뉘어있는데, 1장에서 8장 상반절까지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과연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8장 후반절부터 16장까지는 예수님은 무엇을 위해 이 땅에 오셨는지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첫째 파트는 예수님의 정체성이고 두번째 파트는 예수님의 사역이다. 예수님은 누구이시고 예수님이 이땅에 무엇을 하시기 위하여 오셨는가.

마가복음에서 계속 말씀하는 것은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으며, 왕으로 오신 다음에 예수님은 섬기는 사역을 하신다.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지만 왕궁으로 가지 않으셨다. 왕으로 오셨는데 휘황찬란하게 오시지 않으시고,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오셨다. 평생 그렇게 사시다가 왕궁에서 끝내지 않으시고 십자가로 가신다. 왕으로 오신 분이 쓰레기장이 있는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죽으시는 것이 스토리의 마감이다.

분명히 부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수있다. 하지만 마가복음을 보면서 예수님은 누구이시며, 예수님은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를 질문할때 예수님은 왕으로 오셨고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 오셨다.

마가는 계속 이 질문을 하기위해 노력한다. 1-8장까지를 잘읽어보면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을 계속 질문한다. 예수님이 누구이시길래 태풍과 바람도 순종하는가. 병든 사람도 고치시고, 배고픈 사람도 먹이시고, 귀신도 쫓아내시는 예수님은 과연 누구인지를 묻는다. 마가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 계속 증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계속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신 것도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1-8장을 보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을 계속 답하기 위해서 하시는 것이다. 8장 하반절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과연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는가를 물으신다. 내가 이렇게 까지 기적을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내가 누가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과연 사람들은 누구라고 하는가 물으니.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이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약속된 메시야이시며, 왕으로 오신 분이고, 선지자로 오신 분이고, 제사장으로 오신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이루어 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해 우리의 왕으로 오신 그리스도입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다.

'크라이스트(Christ)'는 기름부음을 받은 분이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가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예수님은 3가지 직책을 온전히 수행하시는 분이시다. 마가가 강조하는 것은 사람을 먹이는 것과 병을 고치는 것과 예수님이 행하시는 모든 것이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왜 그렇게 행하셨는가를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데도 우리는 예수님이 메시야로 왕으로 선지자로 제사장으로 오신 것은 별로 관심이 없는것 같다. 나만 축복해준다면, 나만 잘살게 해준다면 다인것 같다. '예수님이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해줄수 있는가 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그런 우리의 질문에 대해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마가복음의 두번째 파트로 가면서, 마가의 촛점이 예수님의 사역으로 옮겨지는 것을 본다. 예수님의 사역에 대해 3가지만 나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과 사역의 장애물과 예수님의 사역의 부르심에 대하여 나누려고 한다. 제직 세미나를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고 생각하는데 교회에서 봉사하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자신의 사역과 비교하며 배울수 있다.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무엇이고, 예수님 사역의 장애물은 무엇이고, 예수님의 사역의 부르심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마가복음 8장 31절)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은 본문 27-31절에 있는데, 31절에 꼭 발견해야 되는 부분이 있다. 한글성경에서는 두리뭉실 넘어간다. 한글이라는 말이 그렇게 체계적으로 과학적으로 된 언어라기 보다는 '거시기'같이 마음으로 통하는 언어이다. 헬라어는 이성으로 충분히 이해하는 과학적 언어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의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데, 그 의도를 보는데 한글성경은 제한이 있다.

31절에서 영어성경에는 한글성경에 없는 '머스트(Must)'라는 단어가 있다. 그러면 이렇게 번역해야 한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머스트 받으시고, 장로들과 대제사장과 서기관에게 머스트 버린 바 되고, 머스트 죽임을 당하게 될것이고, 머스트 부활하실것이다." '머스트(Must)'라는 단어를 통해 반드시 그 일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한 주석가는 '머스트'라는 단어가 온 문장을 설명하는 열쇠라고 말할정도로 머스트를 중요하게 이해해야 한다. 한글성경에는 '머스트(Must)'라는 단어가 없기에 훅 넘어간다. 머스트를 사용한것은 꼭 그일들이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 말씀의 의미를 한번 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예수님은 고난을 받아야 하시고, 배척을 받아야 하시고, 죽임을 당해야 하시고, 다시 살아나야 하시는가. 예수님은 왜 고난을 받으셔야 하는가. 예수님이 고난을 안받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예수님이 고난을 안받으시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안지시고 그냥 우리를 구원하셨다면 예수님도 좋았고 우리도 좋았을것인가. 그런데 왜 예수님은 '머스트'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지금 예언의 사역을 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과연 어떤일이 일어날것이며, 그리고 어떤일이 머스트 일어나야 할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으시다. 성경적인 예언은 앞으로 일어날것을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하나님의 계획가운데 이루심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다. 성경에서 예언을 말할때는 추측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메이비(Maybe)'가 아니라 '머스트(Must)'이다. 꼭 일어날것이라고 예수님이 장담하면서 말씀하고 있으시다. 그래서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머스트 일어날것이다. 꼭 그렇게 될것이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갈망했던 소망이셨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예언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31절에 나오는 말씀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말씀이다. 이사야 52장, 시편 22편과 118편을 통해 모두 예언되었던 말씀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아야 하셨으며,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만 하셨고, 종교 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해야만 하셨다. 구약의 피를 뿌리는 제사와 그 제사로 죄사함을 받는 것은 예수님의 피흘림의 그림자이다. 구약시대에 흠없는 양의 피를 뿌려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장차 오실것이라는 것에 대한 그림자였다. 그리고 정말 하나님의 어린양 아무 흠이 없는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하게 될것이라는 기다림을 가르치는 것이고, 그것의 그림자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꼭 일어나야 한다.

31절의 사건이 일어나야 하는 두번째 이유는 인류구원이 그 사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실패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이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일어난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계획하신 일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당하고 배척당하고 십자가에 죽는 길을 선택하셨다. 만약에 하나님이 그 길이 아니고도 할 수 있으셨다면 그렇게 안하셨을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꼭 이루어져야 한다는 '머스트'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속량하려 하심이라(히브리서 2장 17절)

히브리서 2장 17절에서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아지셔야만 했다. 그래서 우리의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아주셨다. 그리고 함께 공감하실수 있고, 우리를 대신하는 분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모르시는 분이라면 여러분들의 고난을 어떻게 받으시겠는가. 모든것을 손가락으로 움직이는 하나님이, 한번도 어려움과 고난을 모르는 분이, 앞에 장애물이라고는 한번도 없고,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말씀으로 모든것을 묶고 풀게하는 하나님이 우리의 고난을 얼마나 이해하시고 우리와 같이 마음을 아파해 주실것인가.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하셨다. 고난을 당해야만 하셨다. 그래야 우리의 고난을 이해하는 분이 되신다.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아져야만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시고 성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를 대신받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설수있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했고 부활해야만 하셨다. 예수님이 31절의 사건이 꼭 일어나야 한다는 말씀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함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 죄의 문제인데 죄의 문제를 이야기할때 너무 추상적으로 생각할때가 많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단어를 다시 한번 정리했으면 좋겠다.

교회에서 의미도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가 많다. 그 중에 하나가 '시험들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가. 1993년 안수를 받고 20년동안 목사로 사역하며 많은 분들을 만나면서 시험에 들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러면 시험이 들었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험에 들었다는 것을 자꾸 종교적인 언어로 사용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말했으면 좋겠다. 삐졌다.(웃음) 그것이다. 왜냐하면 상태를 보면 시험에 들었다는 헬라어 '스칸달론'을 사용할수 없는 상태이다. '스캔달'은 '스칸달론'에서 나온말이다. 신약성경에서 시험에 들었다는 '스칸달론'을 사용할때는 우리가 경험하는 삐진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할말이 없으니 교회에서 우리끼리 사용하는 말을 만들었다. '시험들었다'라고 하면 고상해 보이는가. 그 상태는 너무나 죄로 인해 추한데, 시험에 들었다는 것으로 포장하면 좀 아름다워 보이는가. 교회에서 다 그렇게 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산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우리는 우리의 죄때문에 죄인이라고 이야기한다. 기도할때 죄인이라고 말한다. 교회에서 모일때마다 죄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죄인 취급하면 기분나빠한다. 자기 입으로 죄인이라고 해놓고 누가 죄인이라고 하면 싫어한다. 그래서 삐진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린다고 말한다.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죄에 대해 이야기를 할때 어떤 의미를 가지고 말하는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은 무슨 말씀인가. 어떻게 여러분의 삶가운데 적용할수 있는 말씀인가. 하나님은 완전히 거룩하면서 동시에 자비로운 분이시다. 완전 거룩, 완전 자비이시다. 어떻게 두가지 성품을 같이 가질수 있는가. 하나님은 어떻게 거룩하면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신실하고 긍휼을 베풀수 있으신가. 어떻게 동시에 그렇게 할 수 있는가. 그런것을 상상하고 개념화 하기는 힘들다.

하나님은 두가지의 성품을 어떻게 소유할수 있으실까. 어떻게 거룩하면서 긍휼을 베풀수 있으실까. 우리의 자녀를 키우다보면 동시에 자비를 배풀고 동시에 공의를 베푸는 일을 할수가 없다. 어떤때는 자비이고 어떤때는 공의이다. 동시에는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그런 성품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으실까. 이러한 하나님의 긴장감이 우리에게 많은 문제가 된다.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이러한 긴장감을 풀기위해 한가지의 성품을 너무 강조하고 치우치게 된다. 어떤 교회는 거룩에 너무 치우치고, 어떤 교회는 사랑에 너무 치우칠때가 있다. 하지만 둘중이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한다면, 우리의 죄를 덮는 분이라고만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에 우리가 순종과 열심을 받는 분이라고 여긴다면 그것도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행위로 조종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라도 내 행위로 열심히 한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피할수 있겠지, 열심히 하고 봉사하고 희생한다면 하나님의 공의가 나에게 적용되지 않고 불쌍하게 여겨주시겠지 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품상 완전 거룩이고 완전 사랑이시다. 자비와 거룩이 함께 있다. 그것은 어떻게 이해할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제대로 볼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항상 묵상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제대로 못하고 있다.

예수님 사역의 장애물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마가복음 8장 32절)

예수님이 사역하실때 32절을 보자. 예수님은 나는 고난을 받을 것이고, 종교지도자들에게 배척을 당할것이며, 십자가에서 죽을것이며, 부활할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드러내놓고 말씀하니 제자들이 마음이 불편하다. 자기들이 모시던 선생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 분이 자꾸만 고난을 받을것이고 죽는다는 이야기만 하면 어떨까. 우리의 리더가 자꾸만 나는 죽을것이다, 나는 배반당할것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을것이라고 하면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불안하다. 그래서 베드로가 불안해서 예수님 그만하세요. 어떻게 그런 말씀을 드러내놓고 하십니까 라고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 영어성경에서는 예수님을 꾸짖었다고 했다.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시는 것은 베드로에게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메시야가 승리하고 정권을 잡아야지, 고난을 당하고 죽는다는 것은 베드로에게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 당시에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로마정권을 뒤엎어서 이스라엘 민중에게 드디어 해방을 주고 그들의 정체성을 회복시켜 주실분으로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자꾸 죽는다고 하니 베드로가 어떻게 생각했겠는가.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메시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꿈꾸워왔던 모습이 아니다. 그렇게 꿈꾸며 몇백년동안 기다렸던 메시야는 배척당하고 무시당하고 고난당하는 메시야가 아니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바로 예수님을 꾸짖었다. 고백은 했지만 우리들의 생각이 다른데 가 있는 경우가 많다. 베드로는 예수님은 메시야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메시야가 고난당하고 무시당하고 죽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니, 그런 말씀은 하지말라고 한다. 그것이 메시야에게 할말인가. 우리는 그럴때가 많다.

우리에게는 바라는 예수님의 상이 있다. 이정도 하면 예수님도 이정도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무시당할것임을 말씀하셨지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당하고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베드로의 불만을 들으시고, 꾸중을 하면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다. 무서운 말씀이다.

우리들의 이민생활은 다 힘들다.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만큼 힘들었던 것 같다. 만만치 않았을것이다. 그래서 메시야가 고난당하는 것을 듣기 싫어했던 것이다. 우리들도 듣기 싫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좀 잘되고 멋있게 되어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도 혜택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되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베드로 같은 생각으로 행동한다. 우리가 계획하고 어젠다를 만들고 하나님은 그 어젠다를 이루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계획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에 끼워 맞춘다. 우리가 계획했으니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셔야 합니다 라는 자세로 신앙생활을 한다.

정말 하나님앞에 당당히 설수 있는 길이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 고난을 통해서도 온다는 것을 우리는 상상도 못한다. 고난을 통해서 그런것이 온다면 그것은 잘못된 기독교라고 말할정도로 우리들의 생각이 비뚤어졌다. 현대인에게는 더욱 상상하기 힘들것이다. 옛날에는 삶이 힘들어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고생을 위로하는 말이 있을정도로 많은 고생이 했는데 지금은 다르다. 어떻게 해서라도 고생을 피하려고 한다.

현대인들에게는 고난과 어려움을 위안으로 생각할수 없고, 어떻게 고난과 어려움이 하나님의 뜻인가 항의할 정도로 생각이 얄팍해졌다. 그 정도로 우리에게 깊이가 없어졌다.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아는것이 나에게 보상이다. 가장 행복한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이제는 촌스러운 사람이 될 정도로 깊이가 없어졌다. 교회에서도 그런 이야기를 하면 싫어한다. 잘되는 이야기만 하는 교회를 좋아한다.

예수님은 그런분이 아니셨다. 현대 기독교인들의 생각과 삶이 얼마나 얄팍해졌는가. 우리는 "어려움이 닥칠때도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수 없다. 망했다"고 하면서 절망한다. 우리도 베드로 처럼 복음을 아직 삶에 적용을 하지 못한 것이다. 메시야라고는 알고 있고 메시야라고 부를수는 있지만 삶에서는 다르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신길을 피하려고 했다. 저도 피했으면 좋겠다. 불편한것이 싫다. 편한것이 좋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을 따르는 삶도 편한것이 좋아지고 효율적인 것이 좋아진다.

그러나 섬김과 사랑은 절대로 효율적이지 않다. 효율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가. 효율적으로 섬기는 사람이 있는가. 섬김은 효율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려움이 있을때면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꾸짖을때가 있다. "하나님 이러시면 안돼죠. 이 정도 했으면 하나님도 저 정도는 해주셔야죠. 이치가 그런것이 아니죠"라고 말할때가 있다.

교회의 섬김의 자리에 있는 우리도 십자가를 피해 영광과 승리를 맛보려고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섬김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예수님의 사역은 고난당하는 사역이고 힘들어지는 사역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역에 장애물이 너무나 많았다. 제자들도 장애물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의 부르심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가복음 8장 34절)

34절을 보면, 이것은 옵션이 아니라 명령이고 사명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오늘하시는 말씀이다. 내자신을 부인하라. 우리는 여기에 토를 달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인으로 왕으로 섬기고 있다면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도 스스로 왕이되려고 할때가 많다. 저희들이 이 유명한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때가 많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오래했는데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내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이 말씀을 생활화하는가. 신앙은 이벤트가 아니라 생활이다. 어떻게 삶에 연결하는가. 여러분들의 가정에서 어떻게 적용하는가. 제직회에서 다른 부서와 집사와 대화할때 어떻게 적용하는가.

내가 하는 사역. 내가 맡은 부서만 가장 중요하다가 생각하는 것이 과연 내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인가. 나를 부인하라는 말씀의 확실히 의미는 모르지만 삶에 적용할때 비스듬히 이해는 갈 것 같다. 내 사역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은 자신을 부인하는 모습은 아닌것 같기도 하다. 여러분은 어떻게 적용할것인가.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여러분들은 어떻게 삶에 적용하는가. 자신을 버린다는 말씀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존재성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둥글게 둥글게 물흐르는 것 처럼 살라는 것도 아니다. 이성과 자유를 버리고 로보트처럼 살라는 것도 아님을 잘알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즐기지 못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궁상맞게 살라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창조물을 즐기도록 허락하셨다.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책을 읽고,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나님의 선물을 즐거워하는 것을 얄미워서 빼앗으려고 하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아버지같은 분이시다. 우리 자녀들이 부모가 사 준 선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 나같은 인간도 기분이 좋은데, 하물며 하나님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즐거워하는 것을 왜 싫어하시겠는가. 우리 개인의 선택을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개인의 선택을 포기하는 것 같이 보여도 자신을 부인하지 않을때가 있다. 새벽마다 교회에 나와서 저녁까지 봉사하고, 많이 헌금하고, 선교에 열심인 사람일지라도 자신을 부인하지 않을수도 있다. 생각해 보았는가.

나는 축구를 좋아한다.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축구팀에 뽑히기도 했다. 각종 축구대회가 열리면 다 참가할 정도로 축구를 좋아했다. 문제는 주일에도 한 것이 문제였다. 갈등이 오기 시작했다. 주일 아침에 축구시합에 나가 시간이 되면 빨리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고 빨리 교육을 마치고 다시 축구장으로 나가 축구를 했다. 그렇게 몇번하니 양심에 찔려 못할것 같았다. 수련회에 갔는데 목사님이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라고 설교했는데 저는 주님을 위해 축구를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들이 제마음속에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축구화는 버렸는데 내 자신은 버리지 못했다. 내 의가 점점 더 살아났다. 자신을 부인한다고 축구화를 버렸지만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을 하나님이 그렇게 대단하다고 생각을 안하실것이다, 차라리 축구화를 잡고 자신을 부인하라는 것이다.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억눌려 자신에 갇혀있는 것은 극도의 이기심이다. 이기적이며 자아중심적인 연민이 작동한 것이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기억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매순간마다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제직회에 들어갈때 마다, 당회를 인도할때 마다, 심방을 갈때마다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안된다. 축구할때도 자신을 부인해야 하는데, 빈사람에게 패스를 해야 하는데 골대가 보이면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제가 골을 넣고 싶어한다.

하나님앞에 나올때 예수님의 제자는 자기의 공로나 실수를 보지않고 온전히 예수님의 공로를 의지한다고 했다. 예수님의 마음과 관심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다른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것이 자신을 부인하는 삶의 모습이다. 무시를 당하는 것 같아도 반대로 존경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를 크게 흔들리지 못한다. 사람들이 알아주어도 흔들리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을 받고 자신을 부인하면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을 순간마다 살아가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못하기에 공동체가 필요하다. 서로 리마인드를 해주어야 한다. 아주 따뜻하게 사랑스럽게 온유하게 자신들을 부인하자고 서로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태도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기에 자주 삐지지 않는다. 자주 삐지는 이유는 자신을 부인하는 연습이 덜되어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어떻게 살수있을까. 자신을 부인하고 무엇을 채워야 하는가.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가라고 했다. 매순간마다 주님을 의지하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말씀읽고 기도하고 계속 주님을 따르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자신이 부인하는 사람은 절대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항상 용서할수 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사람은 모든것이 제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조금 불편해도 불평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아야만 하셨고, 예수님은 배척을 당해야만 하셨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어야 되셨고, 죽어야만 하셨고, 부활해야만 하셨다. 그러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십자가 없이는 안된다.

한 목사님의 이렇게 말했다. "보좌에는 가시를 통하지는 않고는 갈 수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십자가 없이 있을수 없다. 우리들의 영광을 세상에서 다 맛보지 않는다. 이 세상의 영광은 장차 올 영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고난을 당해야 한다. 너무 아프고 함들지만 그래도 우리는 견딜수 있다." 이런 가시밭 길을 가야하기에 서로 섬기는 제직들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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