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교협 직전회장 김종덕목사 파워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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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05-10-26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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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넷은 뉴욕교협 직전회장인 김종덕 목사를 인터뷰하고(2005/10/26) 지난 회기동안의 소감과 그의 목회인생을 듣는 시간을 가졌다. 김종덕 목사는 김종훈 목사(뉴욕예일장로교회 담임)와 김종윤 목사(뉴욕한민교회 부목사)와 함께 뉴욕교계의 3형제 목회자 집안의 맏형이며 3대째 목회자 집안이다.
성공적으로 회장임무를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 김종덕 목사는 지난 회기를 회고하며 "회장을 해보니 회장 스트레스가 있는 것 같다"라고 솔직히 밝혔다. 또 미국으로 와 청과상등 비지니스를 하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과정을 이야기하며 "종훈이와 신학교에 같이 다녔는데 종훈이는 공부를 잘했다. 종훈이는 사촌과 동생들과 같이 놀아도 책을 들고 놀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였다"라며 동생을 칭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임기동안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하셨지만 임기 마지막에 터진 이단방송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다는 지적들이 있는데?
처음 이단문제를 대처하는데 있어 시행착오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여러가지 제보들이 많이 들어 왔다. 나타나지 않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서 작업은 계속됐다. 크고 넓으며 진행하는 흐름이 있었다고 이해하여 달라. 밝힐 수 없는 프로젝트들도 진행되고 있다. 최삼경 목사를 뉴욕으로 초청하는 것도 한 교회에서 하는 것은 강사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전 교회적으로 확대하게 되었다. 이단방송에 대한 대처는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았다.
임기중 어려운 점들도 많았을 텐데
교협회장으로 일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처음에는 선교도 하고 미자립교회를 돕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개척교회를 위한 세미나도 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목회자들이 쉴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보니 생각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내 생각에는 뉴욕교회들의 전체의 협력이 있으면 80만불 정도의 예산이 될 것 같은데 현재 예산이 40여 만 불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 회장에서는 그것도 채 되지 않았다. 밖에서 보기에는 잘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교회들의 협조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가지 사업에 매달리다 보니 정작 하고 싶은 일들을 잘하지 못했다. 개 교회들의 협력이 잘 안되니 에너지만 소비한 꼴이다. 개교회들은 자신의 교회가 생존해야 하니 전체를 섬기는 사명을 등한시 하게 된다. 섬김은 자신의 교회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를 섬기는 것도 필요하다.
임기동안 하신 일을 스스로 평가해 주십시요.
총무 이재덕목사와 서기 조명철 목사는 매일 오전 9시 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하고 휴일에도 출근했다. 사업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임기중 행사들은 대부분 잘 치러졌다. 이번 회기에는 특별히 할렐루야 대회 강사 설교집도 발행했다. 할렐루야대회는 특히 성공적으로 치러진 행사이다. 대회 후원도 좋았고 마지막 날에는 5천여 명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강사의 메세지가 좋았다. 모 신학교에서는 행사 설교비디오를 교재로 사용한다고 한다. 은혜를 받으니 헌금도 대폭 늘어났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매일 아침 예배로 하루 업무를 시작했다.
하용조 목사는 신중히 지원하는 스타일인데 옛날 친구가 부탁하니 5만불을 뉴욕교계를 위해 지원했다. 하용조 목사와는 대학 CCC시절 친하게 지냈다. 하용조 목사 집에서 같이 밥도 먹고하는 사이였으며 내가 미국으로 갈 때는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내가 신당중앙교회 학생회교사로 있을때 당회에서 교육전도사를 복수 추천하라는 부탁을 해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담임)와 하용조 목사를 추천했다. 양쪽에 의사를 물으니 서로를 추천하며 양보하는 것을 보고 크게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김종훈 목사와 김종윤 목사등 삼형제가 목사이신데?
3대 목회집안이다. 할아버지는 192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신 후 안동으로 내려가 "영주 제일교회"을 담임하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루셨다. 그 뒤 의성 삼분교회를 거쳐 안동동부교회를 개척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께서 하도 고생하는 것을 보고 목사를 안한다고 일제 강점기 경찰시험에 합격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하지 못하고 은행에서 일하다 형이 7살때 병으로 죽자 신학을 시작했다. 그 뒤 할아버지가 담임하던 교회의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사를 23년 동안 하다가 미국으로 오셨다.
어떻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셨습니까?
나는 1975년 영주권자인 집 사람과 결혼해서 미국에 와 청과상, 가구점등 여러가지 사업을 했다. 한국에서는 고려대 화학과를 나와 조교생활을 했다. 1980년 아버지를 초청하여 아버지가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평강교회 초청으로 왔지만 나중에 뉴욕시온성교회를 개척하셨다. 아버지를 따라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많이 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는데 가슴에서 소리를 나는 것을 들었다. "주님 제가 목사의 아들이니 목사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아니다. 내가 너를 개인적으로 불렀다"라는 대답이 들렸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30여분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하늘로 부터 빛과 소리를 들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성경 "이사야 40장 9절"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지금은 돌아 가셨지만 한성교회 김권석 목사의 추천으로 종훈이와 둘이서 NYTS에 82년에 입학했다. 종훈이와는 12살 차이가 난다. 영문학과 출신인 종훈이가 역시 공부를 잘했다.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나는 신학교를 86년에 졸업하고 그해 12월 20여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4년 역사의 실로암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되었으며 87년 1월 취임예배를 드렸다. 그해 9월 RCA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성도들이 늘어나고 90년 여름에 단돈 2만불로 100만불 하던 현재 교회당을 구입했다. 상식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안하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당시에는 비지니스를 제대로 하는 성도들도 없는 형편이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으로 믿는다. 현재 건물은 600-700만불 정도한다. 앞으로는 현재 자리에 18층 건물을 세우기 위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동생인 김종훈 목사님에 대해 좀 이야기 해주시죠.
종훈이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사촌과 동생들과 같이 놀아도 책을 들고 놀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였다. 목회를 할 때도 여러가지 많은 것을 하는 것 같은데도 목회의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뉴욕교협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죠?
뉴욕교협은 다른 지역 교협회장들과 이야기를 하면 모범적인 케이스로 뽑힌다. 뉴욕교협의 예산이 40만불이 넘는데 LA교협의 예산은 10만불 정도이다. 그리고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으며 임금을 지급하는 간사가 있는 곳도 뉴욕이 유일하다. 그런 면에서 뉴욕이 다른 곳에 비해 낫지만 더욱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상하게도 미국에 있는 여러 단체들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뉴욕이 장자의 직분을 담당해야 하는데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여러 해외 교협들이 뭉쳐 한국과도 연결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임기중 어떤 것이 가장 후회스럽습니까?
후회스러운 것은 너무 업무에 중점을 두다보니 영적인 면에 대해 소월했다. 각 교파의 색깔은 다르지만 기도, 말씀, 찬송은 같지 않은가? 성령의 바람이 일 년 내내 일어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행위원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행정적인 일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임실행위원회에서 각 교회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회장임무를 시작할 때 직전 회장문제로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처음 교협회장이 된 12월 초, 너무 협조들이 안되고 책임도 무거워서 몸살이 나서 죽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주일의 휴가를 얻어 쉰 다음 일을 다시 할 수 있었다. 어렵고 큰일을 할수록 기도가 많이 필요하다.
교협회장이란 어떤 자리입니까?
회장은 개교회 목사와 같다. 교회는 성도들이 목사를 인정해 주면 힘을 얻고 그렇지 못하면 밟히게 된다. 같은 이치로 교협회장도 교회들의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교협회장으로서 여러 행사에 참가했다. 사회단체장보다 함량 미달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 기도로 말씀을 준비했다. 적어도 다른 종교 대표보다 심도 있게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같은 시간대에 5개의 행사가 겹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부회장등이 대신 참가한다.
이제 증경회장이 되시는데 증경회장들의 역할이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는데?
교협 증경회장은 회칙에 보면 자문기관으로 교협에서 자문을 구할 때 자문한다. 자문을 하지 않았을 때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것은 문제이다. 마치 감독기관처럼 군림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임 증경회장으로 솔선수범하여 교협의 일을 돕겠다.
새 회기에는 사무총장제를 시행하는데 의견은?
사무총장은 회칙에 있다. 하지만 사무총장이 4-5만 불을 봉급으로 가져간다면 10만불 정도의 자금모집에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죠?
전 회장 허걸 목사님은 여러가지 곤란을 겪었는데 회장을 해보니 회장 스트레스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회장이 안된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 허걸 목사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만약 회장이 잘못하더라도 사람이 아니라 교협을 보고 교협을 지원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협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성공적으로 회장임무를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는 김종덕 목사는 지난 회기를 회고하며 "회장을 해보니 회장 스트레스가 있는 것 같다"라고 솔직히 밝혔다. 또 미국으로 와 청과상등 비지니스를 하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과정을 이야기하며 "종훈이와 신학교에 같이 다녔는데 종훈이는 공부를 잘했다. 종훈이는 사촌과 동생들과 같이 놀아도 책을 들고 놀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였다"라며 동생을 칭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임기동안 훌륭하게 업무를 수행하셨지만 임기 마지막에 터진 이단방송에 대한 대처가 미흡했다는 지적들이 있는데?
처음 이단문제를 대처하는데 있어 시행착오들이 있었다. 당시에는 여러가지 제보들이 많이 들어 왔다. 나타나지 않았지만 전혀 움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은 곳에서 작업은 계속됐다. 크고 넓으며 진행하는 흐름이 있었다고 이해하여 달라. 밝힐 수 없는 프로젝트들도 진행되고 있다. 최삼경 목사를 뉴욕으로 초청하는 것도 한 교회에서 하는 것은 강사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전 교회적으로 확대하게 되었다. 이단방송에 대한 대처는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았다.
임기중 어려운 점들도 많았을 텐데
교협회장으로 일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다. 처음에는 선교도 하고 미자립교회를 돕는 일들을 하고 싶었다. 개척교회를 위한 세미나도 열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목회자들이 쉴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해보니 생각대로 하기가 힘들었다. 내 생각에는 뉴욕교회들의 전체의 협력이 있으면 80만불 정도의 예산이 될 것 같은데 현재 예산이 40여 만 불 밖에 되지 않는다. 이전 회장에서는 그것도 채 되지 않았다. 밖에서 보기에는 잘되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 교회들의 협조를 받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여러가지 사업에 매달리다 보니 정작 하고 싶은 일들을 잘하지 못했다. 개 교회들의 협력이 잘 안되니 에너지만 소비한 꼴이다. 개교회들은 자신의 교회가 생존해야 하니 전체를 섬기는 사명을 등한시 하게 된다. 섬김은 자신의 교회만 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회를 섬기는 것도 필요하다.
임기동안 하신 일을 스스로 평가해 주십시요.
총무 이재덕목사와 서기 조명철 목사는 매일 오전 9시 부터 오후 5시까지 일을 하고 휴일에도 출근했다. 사업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임기중 행사들은 대부분 잘 치러졌다. 이번 회기에는 특별히 할렐루야 대회 강사 설교집도 발행했다. 할렐루야대회는 특히 성공적으로 치러진 행사이다. 대회 후원도 좋았고 마지막 날에는 5천여 명이 참가하는 성황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강사의 메세지가 좋았다. 모 신학교에서는 행사 설교비디오를 교재로 사용한다고 한다. 은혜를 받으니 헌금도 대폭 늘어났다. 대회를 준비하기 위해 매일 아침 예배로 하루 업무를 시작했다.
하용조 목사는 신중히 지원하는 스타일인데 옛날 친구가 부탁하니 5만불을 뉴욕교계를 위해 지원했다. 하용조 목사와는 대학 CCC시절 친하게 지냈다. 하용조 목사 집에서 같이 밥도 먹고하는 사이였으며 내가 미국으로 갈 때는 공항까지 마중 나왔다. 내가 신당중앙교회 학생회교사로 있을때 당회에서 교육전도사를 복수 추천하라는 부탁을 해 김지철 목사(소망교회 담임)와 하용조 목사를 추천했다. 양쪽에 의사를 물으니 서로를 추천하며 양보하는 것을 보고 크게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김종훈 목사와 김종윤 목사등 삼형제가 목사이신데?
3대 목회집안이다. 할아버지는 192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신 후 안동으로 내려가 "영주 제일교회"을 담임하다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루셨다. 그 뒤 의성 삼분교회를 거쳐 안동동부교회를 개척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께서 하도 고생하는 것을 보고 목사를 안한다고 일제 강점기 경찰시험에 합격했지만 할아버지의 반대로 하지 못하고 은행에서 일하다 형이 7살때 병으로 죽자 신학을 시작했다. 그 뒤 할아버지가 담임하던 교회의 부목사를 거쳐 담임목사를 23년 동안 하다가 미국으로 오셨다.
어떻게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셨습니까?
나는 1975년 영주권자인 집 사람과 결혼해서 미국에 와 청과상, 가구점등 여러가지 사업을 했다. 한국에서는 고려대 화학과를 나와 조교생활을 했다. 1980년 아버지를 초청하여 아버지가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평강교회 초청으로 왔지만 나중에 뉴욕시온성교회를 개척하셨다. 아버지를 따라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많이 했다.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일어나는데 가슴에서 소리를 나는 것을 들었다. "주님 제가 목사의 아들이니 목사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자 "아니다. 내가 너를 개인적으로 불렀다"라는 대답이 들렸다. 너무나 큰 충격으로 30여분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하늘로 부터 빛과 소리를 들은 것이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성경 "이사야 40장 9절"의 말씀이라고 하셨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목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지금은 돌아 가셨지만 한성교회 김권석 목사의 추천으로 종훈이와 둘이서 NYTS에 82년에 입학했다. 종훈이와는 12살 차이가 난다. 영문학과 출신인 종훈이가 역시 공부를 잘했다.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죠?
나는 신학교를 86년에 졸업하고 그해 12월 20여명의 성도가 출석하는 4년 역사의 실로암교회의 담임전도사가 되었으며 87년 1월 취임예배를 드렸다. 그해 9월 RCA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성도들이 늘어나고 90년 여름에 단돈 2만불로 100만불 하던 현재 교회당을 구입했다. 상식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인데 안하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들었다. 당시에는 비지니스를 제대로 하는 성도들도 없는 형편이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으로 믿는다. 현재 건물은 600-700만불 정도한다. 앞으로는 현재 자리에 18층 건물을 세우기 위해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동생인 김종훈 목사님에 대해 좀 이야기 해주시죠.
종훈이는 어릴 때부터 공부를 잘했다. 사촌과 동생들과 같이 놀아도 책을 들고 놀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는 아이였다. 목회를 할 때도 여러가지 많은 것을 하는 것 같은데도 목회의 초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뉴욕교협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 해주시죠?
뉴욕교협은 다른 지역 교협회장들과 이야기를 하면 모범적인 케이스로 뽑힌다. 뉴욕교협의 예산이 40만불이 넘는데 LA교협의 예산은 10만불 정도이다. 그리고 자체 건물을 가지고 있으며 임금을 지급하는 간사가 있는 곳도 뉴욕이 유일하다. 그런 면에서 뉴욕이 다른 곳에 비해 낫지만 더욱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이상하게도 미국에 있는 여러 단체들은 뉴욕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다. 뉴욕이 장자의 직분을 담당해야 하는데 기회를 놓치는 것은 아닌지? 여러 해외 교협들이 뭉쳐 한국과도 연결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임기중 어떤 것이 가장 후회스럽습니까?
후회스러운 것은 너무 업무에 중점을 두다보니 영적인 면에 대해 소월했다. 각 교파의 색깔은 다르지만 기도, 말씀, 찬송은 같지 않은가? 성령의 바람이 일 년 내내 일어나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행위원을 중심으로 정기적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행정적인 일만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임실행위원회에서 각 교회의 문제를 놓고 기도하는 것도 필요하다.
회장임무를 시작할 때 직전 회장문제로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처음 교협회장이 된 12월 초, 너무 협조들이 안되고 책임도 무거워서 몸살이 나서 죽다가 살아난 적이 있다. 이러다 죽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일주일의 휴가를 얻어 쉰 다음 일을 다시 할 수 있었다. 어렵고 큰일을 할수록 기도가 많이 필요하다.
교협회장이란 어떤 자리입니까?
회장은 개교회 목사와 같다. 교회는 성도들이 목사를 인정해 주면 힘을 얻고 그렇지 못하면 밟히게 된다. 같은 이치로 교협회장도 교회들의 관심과 협력이 필요하다. 교협회장으로서 여러 행사에 참가했다. 사회단체장보다 함량 미달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기 위해 기도로 말씀을 준비했다. 적어도 다른 종교 대표보다 심도 있게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같은 시간대에 5개의 행사가 겹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부회장등이 대신 참가한다.
이제 증경회장이 되시는데 증경회장들의 역할이 지나치다는 의견도 있는데?
교협 증경회장은 회칙에 보면 자문기관으로 교협에서 자문을 구할 때 자문한다. 자문을 하지 않았을 때 이래라 저래라 말하는 것은 문제이다. 마치 감독기관처럼 군림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임 증경회장으로 솔선수범하여 교협의 일을 돕겠다.
새 회기에는 사무총장제를 시행하는데 의견은?
사무총장은 회칙에 있다. 하지만 사무총장이 4-5만 불을 봉급으로 가져간다면 10만불 정도의 자금모집에 영향력을 미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을 해주시죠?
전 회장 허걸 목사님은 여러가지 곤란을 겪었는데 회장을 해보니 회장 스트레스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회장이 안된 사람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한다. 허걸 목사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만약 회장이 잘못하더라도 사람이 아니라 교협을 보고 교협을 지원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교협을 포기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 2005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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