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환 목사 "목사가 버려야 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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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4-02-11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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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례교뉴욕한인지방회(회장 김영환 목사)는 2월 11일(화) 오전 10시30분 새문침례교회(백창건 목사)에서 월례모임을 열었다. 모임은 25개 회원교회중 20개 교회에서 참가한 가운데 진행됐다.
회무에 앞서 열린 경건회에서 신석환 목사(부활의새빛교회)가 마태복음 12:36-37을 본문으로 "버려야할 말"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목사와 말을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다. 목회자는 말로 말씀을 전하고, 섬김의 도구로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버려야 할 말이란 무엇인가? 신 목사는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목사들은 교인들보다 말씀을 잘 해야 한다. 그러나 듣기도 잘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이어진 회무는 회장 김영환 목사의 사회로 진행됐다. 6월 29일부터 2박3일간 열리는 청소년 여름수련회 찰랜지, 8월 11일부터 2박3일간 열리는 목회자가족수양회등의 안내가 진행됐다. 또 다음 주간에는 사모특별기도회가 열린다. 한편 뉴욕지방회의 공지사항은 우선적으로 이메일을 통해 보내고 이메일이 어려운 목회자들에게는 우편메일을 통해 보내는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신안건 토의에서는 침례교회들의 활성화를 위해 장로제 도입이 필요하며, 이를 연구하기 위한 '장기계획분과' 구성이 제안됐다. 이 안건에 대해 임원회에서 회의를 거쳐 다음 월례회에서 보고하기로 했다. 세계한인침례인선교 발기인대회가 4월 21일부터 24일 열리며 뉴욕지방회 회장의 참가를 위해 재정을 지원하기로 했다. 회무를 마치며 지방회와 교회들의 부흥과 성장을 위한 합심통성기도가 이어졌으며, 특히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한 허걸 목사를 위한 특별기도가 있었다.
광고시간에는 특별히 김요한 선교사(SEED USA 부대표)가 나와 2월 17일부터 22일까지 뉴욕충신교회에서 열리는 뉴욕 퍼스펙티브스 집중 강습회를 소개했다. 또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중독>을 감독하고 제작한 김상철 목사가 인사했으며, 점식식사후 영화상영이 이어졌다.
신석환 목사 - 버려야할 말(마12:36-37)
1.
아직 한 해의 초반에 서 있는 이 시점에 우리 목사들은 어떤 것을 이 시작하는 시간에 버려야 하나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그 이유는 버려야 새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늘 말을 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다 보니 말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아가서 2:15 에 보면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큰 포도원도 한 마리 작은 여우가 만드는 틈 때문에 망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우리 목사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상의 언어가 사실은 중요한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작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권투 선수가 무너지는 것도 처음부터 한 방에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작은 잽이 쌓이고 쌓여 나가떨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에 하나가 “말”로 시작 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별로 소용에 닿지 않은 말들이 쌓이고 쌓여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어느 경우 멀쩡한 교회의 문을 닫게 되는 불행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국시대 유명 검객 미야모도 무사시가 한 말입니다. “나는 세 살짜리 어린애가 칼을 들고 섰어도 몸조심을 한다.” 정말 검객다운 말입니다. 세 살짜리 아이가 휘두르는 칼에도 죽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목사가 무심히 던진 한 마디가 바람을 일으키고 교인들이 전화통을 붙들고 재미나게 주고받았던 대화가 졸지에 총이나 칼이 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듣고 심중에 새기면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목회에 큰 동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2.
어느 왕이 신하 두 사람을 각각 불러 명령을 내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구해오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기일이 되어 신하들이 도착 했습니다. 먼저 “가장 아름다운 것”을 구해 온 신하가 상자를 열자 거기에는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혀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혀가 자신을 아름답게 하고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좋은 재료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가장 더러운 것”을 가져온 신하가 상자를 열었습니다. 거기에도 사람의 혀가 들었습니다. 사람의 혀야말로 자신을 더럽게 만들고 가정과 이웃을 교란시키는 물건이니 혀야말로 가장 추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혀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목사들이 듣고 성찰해야할 이야기입니다.
사람이라면 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이 혀가 복의 근원인 동시에 멸망과 실패의 근원이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은 그래도 괜찮은데 남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 말, 남으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말은, 두고두고 사람의 사이를 찢어놓고 갈라놓습니다.
흔히 예수쟁이들은 말을 잘한다고 합니다만 잘 하는 말과 말이 많은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말 내 말은 과연 어떤 종류의 말이며 무슨 말을 하며 살았는가, 돌아 볼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 자기의 말은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을 비판하고 부정적인 언사를 늘어 논 사람도 막상 자기가 뱉은 그 말의 내용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그렇게 깎아내린 사람도 나중에 물어 보면 그 사람을 칭찬 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을 이간하고 없는 말을 보태서 원수로 만든 사람도 자기는 말을 잘못한 게 없다고 주장하기를 마지않습니다. 무심코 뱉은 말의 착각과 오해입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 심판할 때, 네가 한 말로 심판을 받으리라.” 이제 이 세상의 첨단 과학은 머잖아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토한 모든 말을 다 잡아낼 것입니다. 공상소설 같지만 성경은 이미 그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마지막 날 내가 한 말이 나를 심판한다는 근거가 바로 낳아서 죽을 때 까지 말한 내 언어가 보관되었다는 의미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각각 뱉은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나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내가 한 말은 다 저장 되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근거로 채택 되는 증거물 1호가 내가 한 말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의 연륜이 쌓일수록, 늙어갈 수록, 말을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몇 십 년 목사의 경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인들 중에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이 누굽니까? 남 얘기나 하고 수다나 떨고 남을 비판이나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공연히 부정적 언어로 잘 있는 사람을 선동하는 위인들입니다.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더 보태서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3.
그렇다면 목사의 말은 어떤 말이 되어야 합니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목사가 일평생 뱉은 말 중에 과연 몇 %나 유익한 말을 하며 살았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여러분이나 저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기 바랍니다. 어쩌면 명색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뱉은 말이 일반성도보다 더 엄중한 가중처벌의 항목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기 쉬운 게 말이라고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정죄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버릇을 삼가야 합니다. 잠언 6장 2절입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되었느니라.”
어떤 선생님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첫째, 잠은 세 시간 이상 자지 마라. 둘째, 필요 없는 문자를 보지 마라. 셋째, 음식은 건강에 필요한 만큼만 섭취하라. 넷째, 돌아다니지 마라. 다섯째, 이 모든 것을 합친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하지 마라.” 그래야 공부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으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 너무 없는 것도 답답은 하지만 그래도 말을 많이 해서 실수하는 것보다 하지 않고 실수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진리입니다. 잠언 18장 21절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한 말을 나중에 듣고 그 사람이 이를 갈 만한 말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속 시원하라고 다른 사람 마음을 어둡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교인들보다 말씀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나 듣기도 잘해야 합니다. 목사라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가르치려 드는 버릇을 고치고 듣는 편에 있어야 존경도 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남의 어려움, 괴로움을 상담하는 가장 좋은 상담자는 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듣는다는 뜻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나기가 무서운 사람도 있습니다.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이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대화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나 자신이 바로 그런 끔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4.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소경 바디매오가 구걸하며 살아가는 길목을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자기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변의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꾸짖습니다.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였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행동이 나타납니다. 49절입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그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경청의 자세입니다. 말을 듣는 자세입니다. 그 장면을 머리속으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듣는 게 아닙니다. 듣는다는 것은 온 몸으로 듣는 것입니다.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고 내 눈으로 상대편의 눈을 보며 지극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말은 열심히 하는데 남이 말을 할 때는 딴 짓을 합니다. 목사가 경계해야할 1장 1절입니다. 자기가 말을 할 때는 침을 튀기다가도 상대가 말할 때는 창밖을 본다든지 허공을 응시한다든지,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대화의 매너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목사와 마주 앉고 싶은 교인이 있겠습니까?
목사들은 강단에서 설교할 때를 제외하고는 교훈이나 충고를 삼가하고 지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도 하셨지만 이렇게 듣기도 잘 하셨습니다. 주님이 길을 가시다가 소경의 소리에 멈춰 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호소하는 소경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지상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디매오처럼 지금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면 그분은 우리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심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까? 그 경청을 본받아 우리도 이웃의 말을 경청하고 우리도 한 교회를 섬기는 교우의 말을 경청하고 내 가족의 말을 들어주고 더 나아가 같은 동역자의 아픔을 헤집고 소금을 뿌리기 전에 감싸주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경영 컨설턴트 중에 유명한 피터 드러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사소통에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귀를 제 3의 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이 제 3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모든 화의 근원인 입을 닫고 축복의 소통인 귀를 열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면 족하지만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80년이 걸린다.”
특히 목사들은 가장 잘하는 말을 조심하고 두려워해야합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과거에 내가 뱉은 말의 결과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진단입니다. 내 실패, 내 아픔, 내 고독, 다 내가 뱉은 쓸데없는 말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라, 교회에 와라, 말하기 전에 그의 필요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소리를 다 들으신 후,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교회는 그저 왔다가 그저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냥 한번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런 사람은 거절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실패를 일으켜 세우고, 그 쓰라린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하고 인생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열정적인 진리가 살아서 숨을 쉬는 곳이 이 교회임을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뜻밖에 목사들이 준 충고나 긴 설교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목사님이 정성으로 귀 기울여 들어 준 모습을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그를 사로잡는 게 아니라 들어준 그 시간과 귀가 전도의 문을 열어줄 줄로 믿습니다.
시편 35:28절입니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심장에 담아 의로운 말로 주님과 이웃을 기쁘시게 하시는 사명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많이 들어줍시다. 은근히 남을 비방하고 비판하는 말을 삼가하고 진리의 말, 영생과 구원을 소개하는 말이 우리의 주제가 되고 남을 올리고 위하고 이해하는 주님의 종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회무에 앞서 열린 경건회에서 신석환 목사(부활의새빛교회)가 마태복음 12:36-37을 본문으로 "버려야할 말"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목사와 말을 떼어서 생각하기 힘들다. 목회자는 말로 말씀을 전하고, 섬김의 도구로 말을 사용한다. 그런데 버려야 할 말이란 무엇인가? 신 목사는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목사들은 교인들보다 말씀을 잘 해야 한다. 그러나 듣기도 잘해야 한다"라고 전했다.
이어진 회무는 회장 김영환 목사의 사회로 진행됐다. 6월 29일부터 2박3일간 열리는 청소년 여름수련회 찰랜지, 8월 11일부터 2박3일간 열리는 목회자가족수양회등의 안내가 진행됐다. 또 다음 주간에는 사모특별기도회가 열린다. 한편 뉴욕지방회의 공지사항은 우선적으로 이메일을 통해 보내고 이메일이 어려운 목회자들에게는 우편메일을 통해 보내는 합리적인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신안건 토의에서는 침례교회들의 활성화를 위해 장로제 도입이 필요하며, 이를 연구하기 위한 '장기계획분과' 구성이 제안됐다. 이 안건에 대해 임원회에서 회의를 거쳐 다음 월례회에서 보고하기로 했다. 세계한인침례인선교 발기인대회가 4월 21일부터 24일 열리며 뉴욕지방회 회장의 참가를 위해 재정을 지원하기로 했다. 회무를 마치며 지방회와 교회들의 부흥과 성장을 위한 합심통성기도가 이어졌으며, 특히 교통사고로 부상을 당한 허걸 목사를 위한 특별기도가 있었다.
광고시간에는 특별히 김요한 선교사(SEED USA 부대표)가 나와 2월 17일부터 22일까지 뉴욕충신교회에서 열리는 뉴욕 퍼스펙티브스 집중 강습회를 소개했다. 또 기독교 다큐멘터리 영화 <중독>을 감독하고 제작한 김상철 목사가 인사했으며, 점식식사후 영화상영이 이어졌다.
신석환 목사 - 버려야할 말(마12:36-37)
1.
아직 한 해의 초반에 서 있는 이 시점에 우리 목사들은 어떤 것을 이 시작하는 시간에 버려야 하나 생각하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그 이유는 버려야 새 것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들은 늘 말을 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그러다 보니 말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아가서 2:15 에 보면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를 조심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름답고 큰 포도원도 한 마리 작은 여우가 만드는 틈 때문에 망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우리 목사들이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일상의 언어가 사실은 중요한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작게 생각하지만 사실은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권투 선수가 무너지는 것도 처음부터 한 방에 떨어지는 게 아닙니다. 계속해서 날아드는 작은 잽이 쌓이고 쌓여 나가떨어지는 것입니다. 많은 교회가 어려움을 겪는 이유 중에 하나가 “말”로 시작 되는 것을 목격합니다. 별로 소용에 닿지 않은 말들이 쌓이고 쌓여서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어느 경우 멀쩡한 교회의 문을 닫게 되는 불행한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전국시대 유명 검객 미야모도 무사시가 한 말입니다. “나는 세 살짜리 어린애가 칼을 들고 섰어도 몸조심을 한다.” 정말 검객다운 말입니다. 세 살짜리 아이가 휘두르는 칼에도 죽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목사가 무심히 던진 한 마디가 바람을 일으키고 교인들이 전화통을 붙들고 재미나게 주고받았던 대화가 졸지에 총이나 칼이 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듣고 심중에 새기면 이 말씀이 여러분들의 목회에 큰 동력이 될 줄로 믿습니다.
2.
어느 왕이 신하 두 사람을 각각 불러 명령을 내렸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구해오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기일이 되어 신하들이 도착 했습니다. 먼저 “가장 아름다운 것”을 구해 온 신하가 상자를 열자 거기에는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사람의 혀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혀가 자신을 아름답게 하고 가정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좋은 재료라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가장 더러운 것”을 가져온 신하가 상자를 열었습니다. 거기에도 사람의 혀가 들었습니다. 사람의 혀야말로 자신을 더럽게 만들고 가정과 이웃을 교란시키는 물건이니 혀야말로 가장 추한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혀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목사들이 듣고 성찰해야할 이야기입니다.
사람이라면 다 하나씩 가지고 있는 이 혀가 복의 근원인 동시에 멸망과 실패의 근원이라는 교훈입니다.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은 그래도 괜찮은데 남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힌 말, 남으로 하여금 실족케 하는 말은, 두고두고 사람의 사이를 찢어놓고 갈라놓습니다.
흔히 예수쟁이들은 말을 잘한다고 합니다만 잘 하는 말과 말이 많은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정말 내 말은 과연 어떤 종류의 말이며 무슨 말을 하며 살았는가, 돌아 볼 일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 자기의 말은 정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남을 비판하고 부정적인 언사를 늘어 논 사람도 막상 자기가 뱉은 그 말의 내용을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남을 그렇게 깎아내린 사람도 나중에 물어 보면 그 사람을 칭찬 했다는 것입니다. 두 사람을 이간하고 없는 말을 보태서 원수로 만든 사람도 자기는 말을 잘못한 게 없다고 주장하기를 마지않습니다. 무심코 뱉은 말의 착각과 오해입니다.
오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 심판할 때, 네가 한 말로 심판을 받으리라.” 이제 이 세상의 첨단 과학은 머잖아 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토한 모든 말을 다 잡아낼 것입니다. 공상소설 같지만 성경은 이미 그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마지막 날 내가 한 말이 나를 심판한다는 근거가 바로 낳아서 죽을 때 까지 말한 내 언어가 보관되었다는 의미인지 모릅니다. 사람이 각각 뱉은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진리입니다. 나는 그 말씀을 믿습니다. 내가 한 말은 다 저장 되어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의 근거로 채택 되는 증거물 1호가 내가 한 말이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목사의 연륜이 쌓일수록, 늙어갈 수록, 말을 조심하며 살아야 합니다. 몇 십 년 목사의 경력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인들 중에 가장 골치 아픈 사람이 누굽니까? 남 얘기나 하고 수다나 떨고 남을 비판이나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공연히 부정적 언어로 잘 있는 사람을 선동하는 위인들입니다. 그보다 더 위험한 일은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더 보태서 전파하는 사람입니다.
3.
그렇다면 목사의 말은 어떤 말이 되어야 합니까?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이 사명이라는 목사가 일평생 뱉은 말 중에 과연 몇 %나 유익한 말을 하며 살았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 여러분이나 저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말기 바랍니다. 어쩌면 명색이 목회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뱉은 말이 일반성도보다 더 엄중한 가중처벌의 항목이 될지도 모릅니다. 하기 쉬운 게 말이라고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기분이 나쁘다고 정죄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버릇을 삼가야 합니다. 잠언 6장 2절입니다.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되었느니라.”
어떤 선생님이 공부를 잘 할 수 있는 비결을 학생에게 말했습니다. 첫째, 잠은 세 시간 이상 자지 마라. 둘째, 필요 없는 문자를 보지 마라. 셋째, 음식은 건강에 필요한 만큼만 섭취하라. 넷째, 돌아다니지 마라. 다섯째, 이 모든 것을 합친 것 보다 중요한 것은 “말을 하지 마라.” 그래야 공부를 잘 한다는 것입니다.
말이 많으면 반드시 실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이 너무 없는 것도 답답은 하지만 그래도 말을 많이 해서 실수하는 것보다 하지 않고 실수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진리입니다. 잠언 18장 21절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은 반드시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한 말을 나중에 듣고 그 사람이 이를 갈 만한 말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속 시원하라고 다른 사람 마음을 어둡게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교인들보다 말씀을 잘 해야 합니다. 그러나 듣기도 잘해야 합니다. 목사라고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가르치려 드는 버릇을 고치고 듣는 편에 있어야 존경도 받고 사랑을 받습니다. 남의 어려움, 괴로움을 상담하는 가장 좋은 상담자는 들어 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듣는다는 뜻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만나기가 무서운 사람도 있습니다. 말을 시작하면 끝이 없이 자기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대화가 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나 자신이 바로 그런 끔찍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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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바디매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소경 바디매오가 구걸하며 살아가는 길목을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라면 자기의 눈을 뜨게 하실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변의 사람들이 바디매오를 꾸짖습니다.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였습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행동이 나타납니다. 49절입니다.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다시 말하여 예수님은 바디매오의 소리를 듣기 위해 그 자리에 섰다는 것입니다. 경청의 자세입니다. 말을 듣는 자세입니다. 그 장면을 머리속으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듣는다는 것은 귀로만 듣는 게 아닙니다. 듣는다는 것은 온 몸으로 듣는 것입니다. 몸을 기울이고 귀를 기울이고 내 눈으로 상대편의 눈을 보며 지극한 관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말은 열심히 하는데 남이 말을 할 때는 딴 짓을 합니다. 목사가 경계해야할 1장 1절입니다. 자기가 말을 할 때는 침을 튀기다가도 상대가 말할 때는 창밖을 본다든지 허공을 응시한다든지,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대화의 매너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목사와 마주 앉고 싶은 교인이 있겠습니까?
목사들은 강단에서 설교할 때를 제외하고는 교훈이나 충고를 삼가하고 지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도 하셨지만 이렇게 듣기도 잘 하셨습니다. 주님이 길을 가시다가 소경의 소리에 멈춰 섰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향하여 호소하는 소경에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양이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지상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바디매오처럼 지금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기도하면 그분은 우리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경청하심을 믿는 믿음이 아닙니까? 그 경청을 본받아 우리도 이웃의 말을 경청하고 우리도 한 교회를 섬기는 교우의 말을 경청하고 내 가족의 말을 들어주고 더 나아가 같은 동역자의 아픔을 헤집고 소금을 뿌리기 전에 감싸주는 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경영 컨설턴트 중에 유명한 피터 드러커라는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의사소통에 제일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말하지 않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귀를 제 3의 귀라고 말했습니다. 우리 목사들은 이 제 3의 귀가 열려야 합니다. 모든 화의 근원인 입을 닫고 축복의 소통인 귀를 열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말을 배우는 데는 2년이면 족하지만 듣는 것을 배우는 데는 80년이 걸린다.”
특히 목사들은 가장 잘하는 말을 조심하고 두려워해야합니다.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은 과거에 내가 뱉은 말의 결과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정말 의미 있는 진단입니다. 내 실패, 내 아픔, 내 고독, 다 내가 뱉은 쓸데없는 말의 결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전도를 잘 하지 못하는 것도 들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라, 교회에 와라, 말하기 전에 그의 필요가 무엇인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소리를 다 들으신 후, 주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교회는 그저 왔다가 그저 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냥 한번 들리는 곳이 아닙니다. 차라리 그런 사람은 거절하는 게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 실패를 일으켜 세우고, 그 쓰라린 상처를 싸매주고 치료하고 인생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는 열정적인 진리가 살아서 숨을 쉬는 곳이 이 교회임을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뜻밖에 목사들이 준 충고나 긴 설교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목사님이 정성으로 귀 기울여 들어 준 모습을 잊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말이 그를 사로잡는 게 아니라 들어준 그 시간과 귀가 전도의 문을 열어줄 줄로 믿습니다.
시편 35:28절입니다.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우리 모두 이 말씀을 심장에 담아 의로운 말로 주님과 이웃을 기쁘시게 하시는 사명 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제부터는 말을 많이 하기 보다는 많이 들어줍시다. 은근히 남을 비방하고 비판하는 말을 삼가하고 진리의 말, 영생과 구원을 소개하는 말이 우리의 주제가 되고 남을 올리고 위하고 이해하는 주님의 종들이 되시기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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