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리 애커맨 미 연방하원의원 “북한의 종교 및 인권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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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06-07-25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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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통이자 친한파로 한인사회에도 널리 알려진 뉴욕 민주당 출신 개리 애커맨 미 연방하원의원은 2006년 7월 24일(월) 오전 10시 효신장로교회내 KCS 경로센터에서 한인사회를 상대로 북한의 종교 및 인권탄압에 대한 ‘타운 홀’ 미팅을 열었다.
타운 홀 미팅에는 펠리스 가에 미 연방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 대표, 북한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조사한 데이빗 호크, 워싱턴DC에 있는 자유아시아라디오방송(RFA) 북한 담당 디렉터 안재훈씨가 패널로 참석해 북한내 종교 자유 탄압과 인권 억압 실태에 대해 발표했다.
국제종교자유위원회는 이날 미팅에서 지난해 한국내 탈북자 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인터뷰 내용등을 담은 보고서인 "어버이 김일성 수령님 감사합니다(Thank you Father, Kim Il Sung !)를 참석자들에게 배포했다.
2005년 11월 작성된 보고서는 40명의 탈북자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북한 내의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탄압 중대 사례 증언록이다. 아래는 주요내용 요약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 68조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제 68조에는 “종교는 외국의 영향력을 끌어들이거나 국가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데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 또한 포함하고 있다. 그 조항은 ‘종교적 신념의 자유’에 대한 조항을 자의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까지 김일성 정권은 북한 내에서 주체사상/김일성주의를 체계화하면서 사실상 여타 모든 공식 종교 의식을 억압하고 폐지했다. 1970년대에는 변화된 국제환경 때문에, 북한 정부는 고도로 제한되고 통제된 조건 하에서 공식 종교 활동을 재허용 하기로 결정했다. 북한 당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불교,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최근에는 그리스 정교까지 포함된 일련의 종교 ‘연맹(또는 협의회)’을 통해서 고도로 감시 통제된 종교 활동을 허용하고 있다.
기독교인 처참하게 처형당해
1997년 여름 함경북도 무산에서 성경 소지죄로 인한 공개 처형이 있었다. 20대의 젊은 여성이 빨래를 하다가 품속에서 작은 성경책이 떨어졌는데, 그것을 주위에 있던 아줌마 한 분이 보고 신고를 해서 바로 잡혀갔다. 약식 재판은 죄명 낭독과 판결이 간단히 이루어지고 바로 처형이 집행된다.
1996년 11월 20일 평안남도 용강군(남포 근처)에서 기독교인 5명 공개 처형됐다. 건물의 지하실을 부수는 공사과정에서 벽돌사이에 감추어 놓은 성경책과 작은 노트 한권이 발견되었다. 그 노트에는 목사 1명, 전도사 2명, 장로 2명과 20명의 신도를 포함하여 25명의 지하교회 교인의 이름과 직업이 적혀 있었다. 처형된 목사, 전도사, 장로 5명 모두는 손과 발이 묶여 로울러 앞에 누워 있게 했다. 이 로울러는 일제인데 콘크리트를 붓기 전에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머지 20명은 옆에서 보게 하였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 스파이와 체제 전복에 가담한 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보위부 사람이 엎드린 5명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을 버리고 수령님을 따르겠느냐? 수령님을 따르겠다면 너희들을 살려주겠다.” 5명 모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총을 머리에 대고 사살하고 옆에 있던 로울러 기계로 다섯 명을 깔아뭉갰다.
오늘날의 북한의 기독교인
오늘날 북한 기독교의 종교 및 신념의 자유에 관한 정책과 실태를 검토하는데 있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류의 기독교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첫 번째 부류는 노동당과 북한 정부가 후원하는 조선 종교 협의회의 구성원이거나 인가 받은 교회와 가정 예배 처소의 신자들이다. 가정 교회 또는 가정 예배 처소는 해방 이전 구 기독교인들과 그 후손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두 번째 부류는 해방 이전 기독교 신자였고 현재 공개적으로 신앙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가 후원하는 교회의 존재를 모르고 있거나, 이들 중 일부는 국가 후원 교회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신앙 노출을 꺼려하는 사람들이다.
셋째 부류는 탈북한 뒤 중국에서 조선족 교회의 영향을 받거나 한국 또는 재미 교포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1995년 이후 중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로써 북한 내에서는 처벌 대상이다.
가정 교회/가정 예배 처소
1974년부터 북한은 기독교 신자들이 가정 예배 처소에서 회합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한다. 물론 예배 중 노동당원이나 경찰들의 입회가 있어야 한다. 가정 교회에 대한 가장 초기의 통계는 1981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 고기준 목사가 재미, 재유럽 교포들에게 했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북한에 500개의 가정 예배 처소가 있으며 5,000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존재한다고 밝혔지만 믿을수 없다.
북한의 4대 교회
1950년대 후반과 1988년 이전 북한에는 개신교 및 카톨릭 교회 건물이 전혀 없었다. 1988년 11월 평양 교외의 한 동네 이름을 딴 봉수 교회가 세워졌다. 알려진 대로 그곳에는 250~350명의 신자들이 있다.
역시 1988년에 장충 성당이 문을 열었다. 북한은 유엔에 800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으나 신부는 없다고 보고했다. 장충 성당은 바티칸 교황청과 직접 관계는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교황청은 북한의 천주교를 교회로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천주교 서울 교구 산하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으로 간주한다. 물론 북한은 이러한 교황청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과거에 없었던 이 두 개의 새로운 교회가 문을 연 사실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되었다. 인터뷰에 응했던 한 재미 교포 교회 간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언급했다. 하나는 예배에 참석하고 싶다는 외국 방문객들의 요구였고, 다른 하나는 중국정부의 영향인데, 중국은 1977-78년 문화대혁명 당시 몰수한 교회 건물들을 공식 인가된 교회 조직에 모두 반환하였다.187 북한인들은 중국을 자주 방문했었기 때문에 모택동 사후에 일어난 이러한 중국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한 고위 탈북자는 이러한 정책변화가 1988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축전은 한국의 1988년 올림픽 게임에 대항해서 생긴 것으로, 이 축전 행사 기간 많은 외국인들이 평양을 찾을텐데 교회나 사찰이 전혀 없다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칠골 교회는 두 번째 생긴 교회로 봉수 교회보다 규모가 좀 더 작다. 1992년에 건립되었고 평양에 있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데,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김일성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터에 세워졌다고 한다. 90명의 신자가 있고 예배는 봉수 교회보다는 덜 형식적이라고 한다.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는 이유 외에 북한의 다른 도시도 아닌 평양에 또 다른 교회를 세운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2005년 중반 러시아 정교회 건축이 거의 완공단계에 있다. 한 인터뷰 응답자는 김정일이 러시아 기차 방문 길에 하바로프스크에서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본 뒤 평양에 이와 같은 교회가 있으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라 추측한다.
평양에 있는 교회들이 여러 한계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교회의 상징적 중요성이 있다고 탈북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것은 북한에 존재하는 제단 형태로 생긴 건물 중에 교회에만 단상 정면에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현존 교회에서의 예배 현황
평양의 교회들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냐 하는 문제가 줄곧 제기되어 왔다. 한국의 한 NGO는 “봉수, 칠골 교회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참석 지시를 받은 노동당 당원이라고 주장했다.”191 “지방 주민들은 교회 참석이 금지되어 있으며 예배는 오직 외국인들의 방문이 있을 때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본 보고서 작성을 위해 획득한 정보들은 위 주장과는 다르다. 봉수, 칠골 교회의 신자가 되는 것이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노동당이 통제하고 있는 듯 하다. 또 그 교회의 신자 등록 승인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여전히 사회, 정치적 부담 요인이기 때문에 평양의 시민들은 단순 호기심에서 교회에 출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정보에 따르면 가정 교회 신도들처럼 평양의 세 교회 신도들도 해방 이전부터 교회에 다닌 구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결정적 증언은 평양 출신이자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서 한국 전쟁 후에 도미한 이승만 교수로부터 나왔다. 그가 봉수 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전쟁 전 교회 청소년부에 다니던 사람들을 보았다고 한다.
분명 교회 신도들 몇 명은 평양의 가정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평양의 구호지원 활동가에 따르면 몇몇 가정 교회 신자들은 가정 교회에서 격식 없이 예배드리는 것을 선호하여 봉수 교회를 나가지 않고 따로 소 그룹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과거에는 봉수, 칠골 교회의 예배가 간헐적으로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95년 이후부터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국제 구호 활동가들은 정기적으로 봉수, 칠골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교회는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인 방문단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참석하면 예배 때 정치적 메시지가 들어간다. 그리고 없을 때는 정치적 메시지 없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내용을 설교한다고 한다.
데이빗 호크는?
이 사례집을 만든 데이빗 호크는 저명한 인권 조사관이자 운동가이다. 그는 1996년에서 1997년까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캄보디아 사무소 책임자로 근무했다. 1980년대 초, 중반에는 콜롬비아 대학 인권연구센터와 함께 크메르 루즈의 인종 학살 문제를 조사했다.
1994년 가을 미국난민위원회 위촉을 받고 르완다에 가서 대학살을 조사했다. 그리고 1995년에 국제사면위원회 활동을 위해 키갈리를 방문했다. 그는 미국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총장과 이사를 역임했고 휴먼 라이츠 와치 아시아 지부 자문위원회 활동도 했다. 2003년 그는 미국 북한인권위원회의 이름으로 「감춰진 수용소- 수감자 증언과 위성 사진」을 발표했다.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타운 홀 미팅에는 펠리스 가에 미 연방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 대표, 북한 정치범 수용소 문제를 조사한 데이빗 호크, 워싱턴DC에 있는 자유아시아라디오방송(RFA) 북한 담당 디렉터 안재훈씨가 패널로 참석해 북한내 종교 자유 탄압과 인권 억압 실태에 대해 발표했다.
국제종교자유위원회는 이날 미팅에서 지난해 한국내 탈북자 4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심층 인터뷰 내용등을 담은 보고서인 "어버이 김일성 수령님 감사합니다(Thank you Father, Kim Il Sung !)를 참석자들에게 배포했다.
2005년 11월 작성된 보고서는 40명의 탈북자의 증언으로 만들어진 북한 내의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 탄압 중대 사례 증언록이다. 아래는 주요내용 요약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제 68조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제 68조에는 “종교는 외국의 영향력을 끌어들이거나 국가나 사회 질서를 해치는데 사용할 수 없다”는 조항 또한 포함하고 있다. 그 조항은 ‘종교적 신념의 자유’에 대한 조항을 자의적으로 침해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1960년대까지 김일성 정권은 북한 내에서 주체사상/김일성주의를 체계화하면서 사실상 여타 모든 공식 종교 의식을 억압하고 폐지했다. 1970년대에는 변화된 국제환경 때문에, 북한 정부는 고도로 제한되고 통제된 조건 하에서 공식 종교 활동을 재허용 하기로 결정했다. 북한 당국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불교, 천도교, 기독교, 천주교, 최근에는 그리스 정교까지 포함된 일련의 종교 ‘연맹(또는 협의회)’을 통해서 고도로 감시 통제된 종교 활동을 허용하고 있다.
기독교인 처참하게 처형당해
1997년 여름 함경북도 무산에서 성경 소지죄로 인한 공개 처형이 있었다. 20대의 젊은 여성이 빨래를 하다가 품속에서 작은 성경책이 떨어졌는데, 그것을 주위에 있던 아줌마 한 분이 보고 신고를 해서 바로 잡혀갔다. 약식 재판은 죄명 낭독과 판결이 간단히 이루어지고 바로 처형이 집행된다.
1996년 11월 20일 평안남도 용강군(남포 근처)에서 기독교인 5명 공개 처형됐다. 건물의 지하실을 부수는 공사과정에서 벽돌사이에 감추어 놓은 성경책과 작은 노트 한권이 발견되었다. 그 노트에는 목사 1명, 전도사 2명, 장로 2명과 20명의 신도를 포함하여 25명의 지하교회 교인의 이름과 직업이 적혀 있었다. 처형된 목사, 전도사, 장로 5명 모두는 손과 발이 묶여 로울러 앞에 누워 있게 했다. 이 로울러는 일제인데 콘크리트를 붓기 전에 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나머지 20명은 옆에서 보게 하였다. 이 사람들은 기독교 스파이와 체제 전복에 가담한 죄명이 붙었다. 그럼에도 보위부 사람이 엎드린 5명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하나님을 버리고 수령님을 따르겠느냐? 수령님을 따르겠다면 너희들을 살려주겠다.” 5명 모두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총을 머리에 대고 사살하고 옆에 있던 로울러 기계로 다섯 명을 깔아뭉갰다.
오늘날의 북한의 기독교인
오늘날 북한 기독교의 종교 및 신념의 자유에 관한 정책과 실태를 검토하는데 있어서 세 가지 서로 다른 부류의 기독교 신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첫 번째 부류는 노동당과 북한 정부가 후원하는 조선 종교 협의회의 구성원이거나 인가 받은 교회와 가정 예배 처소의 신자들이다. 가정 교회 또는 가정 예배 처소는 해방 이전 구 기독교인들과 그 후손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이다.
두 번째 부류는 해방 이전 기독교 신자였고 현재 공개적으로 신앙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여전히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들은 국가가 후원하는 교회의 존재를 모르고 있거나, 이들 중 일부는 국가 후원 교회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신앙 노출을 꺼려하는 사람들이다.
셋째 부류는 탈북한 뒤 중국에서 조선족 교회의 영향을 받거나 한국 또는 재미 교포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신앙을 가지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1995년 이후 중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로써 북한 내에서는 처벌 대상이다.
가정 교회/가정 예배 처소
1974년부터 북한은 기독교 신자들이 가정 예배 처소에서 회합하는 것을 허용했다고 한다. 물론 예배 중 노동당원이나 경찰들의 입회가 있어야 한다. 가정 교회에 대한 가장 초기의 통계는 1981년 조선그리스도교련맹(조그련) 고기준 목사가 재미, 재유럽 교포들에게 했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북한에 500개의 가정 예배 처소가 있으며 5,000명의 기독교 신자들이 존재한다고 밝혔지만 믿을수 없다.
북한의 4대 교회
1950년대 후반과 1988년 이전 북한에는 개신교 및 카톨릭 교회 건물이 전혀 없었다. 1988년 11월 평양 교외의 한 동네 이름을 딴 봉수 교회가 세워졌다. 알려진 대로 그곳에는 250~350명의 신자들이 있다.
역시 1988년에 장충 성당이 문을 열었다. 북한은 유엔에 800명의 천주교 신자가 있으나 신부는 없다고 보고했다. 장충 성당은 바티칸 교황청과 직접 관계는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교황청은 북한의 천주교를 교회로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천주교 서울 교구 산하에 있는 ‘신자들의 모임’으로 간주한다. 물론 북한은 이러한 교황청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과거에 없었던 이 두 개의 새로운 교회가 문을 연 사실에 대해 여러 가지 이유가 제시되었다. 인터뷰에 응했던 한 재미 교포 교회 간부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언급했다. 하나는 예배에 참석하고 싶다는 외국 방문객들의 요구였고, 다른 하나는 중국정부의 영향인데, 중국은 1977-78년 문화대혁명 당시 몰수한 교회 건물들을 공식 인가된 교회 조직에 모두 반환하였다.187 북한인들은 중국을 자주 방문했었기 때문에 모택동 사후에 일어난 이러한 중국의 변화를 잘 알고 있었다.
한 고위 탈북자는 이러한 정책변화가 1988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축전은 한국의 1988년 올림픽 게임에 대항해서 생긴 것으로, 이 축전 행사 기간 많은 외국인들이 평양을 찾을텐데 교회나 사찰이 전혀 없다면 문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칠골 교회는 두 번째 생긴 교회로 봉수 교회보다 규모가 좀 더 작다. 1992년에 건립되었고 평양에 있는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데, 김일성의 교시에 의해 김일성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터에 세워졌다고 한다. 90명의 신자가 있고 예배는 봉수 교회보다는 덜 형식적이라고 한다.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는 이유 외에 북한의 다른 도시도 아닌 평양에 또 다른 교회를 세운 이유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2005년 중반 러시아 정교회 건축이 거의 완공단계에 있다. 한 인터뷰 응답자는 김정일이 러시아 기차 방문 길에 하바로프스크에서 러시아 정교회 건물을 본 뒤 평양에 이와 같은 교회가 있으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한 것이라 추측한다.
평양에 있는 교회들이 여러 한계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교회의 상징적 중요성이 있다고 탈북자들은 입을 모은다. 그것은 북한에 존재하는 제단 형태로 생긴 건물 중에 교회에만 단상 정면에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십자가가 걸려 있다는 것이다.
현존 교회에서의 예배 현황
평양의 교회들에서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정확히 누구냐 하는 문제가 줄곧 제기되어 왔다. 한국의 한 NGO는 “봉수, 칠골 교회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들이 아니라 교회 참석 지시를 받은 노동당 당원이라고 주장했다.”191 “지방 주민들은 교회 참석이 금지되어 있으며 예배는 오직 외국인들의 방문이 있을 때만 이루어지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본 보고서 작성을 위해 획득한 정보들은 위 주장과는 다르다. 봉수, 칠골 교회의 신자가 되는 것이나 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노동당이 통제하고 있는 듯 하다. 또 그 교회의 신자 등록 승인을 받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에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여전히 사회, 정치적 부담 요인이기 때문에 평양의 시민들은 단순 호기심에서 교회에 출석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재의 정보에 따르면 가정 교회 신도들처럼 평양의 세 교회 신도들도 해방 이전부터 교회에 다닌 구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신념을 공개적으로 표명하고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기회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한 결정적 증언은 평양 출신이자 장로교 목사의 아들로서 한국 전쟁 후에 도미한 이승만 교수로부터 나왔다. 그가 봉수 교회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는 전쟁 전 교회 청소년부에 다니던 사람들을 보았다고 한다.
분명 교회 신도들 몇 명은 평양의 가정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렸던 사람들이라고 한다. (평양의 구호지원 활동가에 따르면 몇몇 가정 교회 신자들은 가정 교회에서 격식 없이 예배드리는 것을 선호하여 봉수 교회를 나가지 않고 따로 소 그룹으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과거에는 봉수, 칠골 교회의 예배가 간헐적으로만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1995년 이후부터 평양에 거주하고 있는 국제 구호 활동가들은 정기적으로 봉수, 칠골 교회에 출석하고 있고 교회는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그러나 외국인 방문단이 있을 때와 없을 때에 큰 차이가 있다고 한다. 외국인들이 참석하면 예배 때 정치적 메시지가 들어간다. 그리고 없을 때는 정치적 메시지 없이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내용을 설교한다고 한다.
데이빗 호크는?
이 사례집을 만든 데이빗 호크는 저명한 인권 조사관이자 운동가이다. 그는 1996년에서 1997년까지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 캄보디아 사무소 책임자로 근무했다. 1980년대 초, 중반에는 콜롬비아 대학 인권연구센터와 함께 크메르 루즈의 인종 학살 문제를 조사했다.
1994년 가을 미국난민위원회 위촉을 받고 르완다에 가서 대학살을 조사했다. 그리고 1995년에 국제사면위원회 활동을 위해 키갈리를 방문했다. 그는 미국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총장과 이사를 역임했고 휴먼 라이츠 와치 아시아 지부 자문위원회 활동도 했다. 2003년 그는 미국 북한인권위원회의 이름으로 「감춰진 수용소- 수감자 증언과 위성 사진」을 발표했다.
ⓒ 2006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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