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선 자매 간증집회 "내 안에 있는 천국을 나누어 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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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6-12-26 20:4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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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음식: 매운탕, 우동, 쌀국수
좋았던 영화: 유브갓메일, 인어공주
별명: 이다짐양, 이작가
나이: 거의 30세
잘하는 음식: 미역국, 북어국
평범한 한 여성의 소개이다.
제일 부러운 사람: 입 크게 벌리고 비빔밥 먹는 사람
지금 가지고 싶은 것: 눈썹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절망을 희망으로, 이지선 자매
이지선 자매. 기독교인이라면 전신화상을 입고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끝에 골방으로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이지선 자매의 이야기는 한번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지선 자매가 좋은이웃교회, 뉴욕한인중앙교회를 거쳐 3월 11일(주일) 오후 2시 뉴욕장로교회 집회로 뉴욕일정을 마쳤다. 이 자매는 이어 14일 뉴저지 하나임교회, 23일 워싱턴한인교회에서 집회를 가진다.
이지선 자매는 현재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재활상담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며 봄방학을 맞아 인근 지역의 간증집회에 나섰다.
이제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보스톤에서 그녀의 별명은 '하숙지선'. 오히려 친구들을 불러 밥먹이고 도와주어서 얻은 별명이다. 그녀는 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공부를 하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메세지가 되리라 믿고.
이지선 자매의 모습 자체가 간증이다. 아무리 삶이 어려운 사람도 지선 자매의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이제 이지선 자매의 제2의 간증이 기대가 된다. 꿈을 펼쳐 당당히 이루어 냈다는.
다음은 이지선 자매의 간증 요약이다.
23살이던 2000년 이화여대 재학 중 타고 있던 차가 음주운전자가 운전하던 차와 충돌하여 화재가 일어나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2일에 한번 옆자리에 누워있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눈코입만 빼고 붕대로 싸여있으며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매일 아침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타버린 피부를 소독하는 것.
겉은 탔지만 속은 멀쩡하기에 어머니는 회복을 위해 억지로 밥을 먹였다. 밥 한숫가락 한숫가락이 기도였다. 어머니를 위해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두 달 후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얼굴의 피부가 상해 7개월을 눈을 감지 못하고 지냈다. 하루에 마약과 같은 진통제 3대를 맞고 고통을 참아냈다. 마음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감사의 제목을 찾자고 했다.
이제 내 발로 화장실로 가는 것,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 수 있는 것, 숫가락을 잡고 밥을 먹을수 있는 것 등 감사의 제목이 많았다. 그러자 진통제가 줄 수 없는 평화가 몰려왔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부끄러운 손이 아니라 쓸 수 있는 손이 되도록 기도했다. 이식한 피부가 수축하여 손을 사용할수 없었다. 내손인데도 내가 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날 오른손을 움직이자 다같이 울었다. 피부가 당겨져 턱이 이상해지고 침을 흘리게 했다.
밤의 유리창과 숫가락에 비친 나의 모습은 외계인 같았다. 하나님은 나의 이런 모습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셨다. 23살의 여대생으로 살 수 없는 현실을 보고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자살하거나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께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대책을 달라고 했다. 다음날 "너를 바로 세우고 희망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다음부터 나를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겨 스스로 "안녕 이지선"하고 인사를 하고 지냈다. 자주 보면 정이 드는 얼굴이다.
수술을 받고 엄지로 컴퓨터로 타자를 칠 수가 있었다. 전과는 다른 마음 안에 평안이 있었다. 그런 감사를 모아 2003년 책을 냈다. 그래서 '이 작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식한 목피부 때문에 척추를 당기자 일본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 16시간 수술을 받고 다시 12시간을 수술을 받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천국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수님도 나보다는 안 아플 실 것이라는 투정도 생겼다. 고난주간 묵상기도를 하는동안 "너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내가 다 안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을 듣고 상처난 마음이 다 풀렸다.
눈물만이 눈물을 닦아 줄수 있고, 아픔만이 아픔을 안아줄 수 있다.
<지선아 사랑해> 와 <오늘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을 내고 일본어와 대만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엄마보고 나와 인생을 바꾸어 달라고 했는데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하겠다는 엄마의 대답을 들었다. 부모의 사랑이 이럴진대 아들을 죽음의 길로 보내신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에 어떤 사람이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는데 안돌아 간다고 대답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중요하고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없어질 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인생을 드리고 싶다.
가난해서 제 안에 있는 천국이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흘러갔으면 한다.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누리는 것은 큰 복이다. 천국을 매일 이루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좋았던 영화: 유브갓메일, 인어공주
별명: 이다짐양, 이작가
나이: 거의 30세
잘하는 음식: 미역국, 북어국
평범한 한 여성의 소개이다.
제일 부러운 사람: 입 크게 벌리고 비빔밥 먹는 사람
지금 가지고 싶은 것: 눈썹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절망을 희망으로, 이지선 자매
이지선 자매. 기독교인이라면 전신화상을 입고 사람으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끝에 골방으로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이지선 자매의 이야기는 한번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지선 자매가 좋은이웃교회, 뉴욕한인중앙교회를 거쳐 3월 11일(주일) 오후 2시 뉴욕장로교회 집회로 뉴욕일정을 마쳤다. 이 자매는 이어 14일 뉴저지 하나임교회, 23일 워싱턴한인교회에서 집회를 가진다.
이지선 자매는 현재 보스턴대 대학원에서 재활상담학 석사과정을 공부하고 있으며 봄방학을 맞아 인근 지역의 간증집회에 나섰다.
이제 누구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혼자의 힘으로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 보스톤에서 그녀의 별명은 '하숙지선'. 오히려 친구들을 불러 밥먹이고 도와주어서 얻은 별명이다. 그녀는 장애인의 재활을 돕는 공부를 하고 있다. 장애인들에게 희망의 메세지가 되리라 믿고.
이지선 자매의 모습 자체가 간증이다. 아무리 삶이 어려운 사람도 지선 자매의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는다. 이제 이지선 자매의 제2의 간증이 기대가 된다. 꿈을 펼쳐 당당히 이루어 냈다는.
다음은 이지선 자매의 간증 요약이다.
23살이던 2000년 이화여대 재학 중 타고 있던 차가 음주운전자가 운전하던 차와 충돌하여 화재가 일어나 얼굴뿐만 아니라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2일에 한번 옆자리에 누워있던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있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눈코입만 빼고 붕대로 싸여있으며 무엇보다 고통스러운 것은 매일 아침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타버린 피부를 소독하는 것.
겉은 탔지만 속은 멀쩡하기에 어머니는 회복을 위해 억지로 밥을 먹였다. 밥 한숫가락 한숫가락이 기도였다. 어머니를 위해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두 달 후 중환자실에서 나왔다.
얼굴의 피부가 상해 7개월을 눈을 감지 못하고 지냈다. 하루에 마약과 같은 진통제 3대를 맞고 고통을 참아냈다. 마음이 죽어가고 있었지만 어머니는 감사의 제목을 찾자고 했다.
이제 내 발로 화장실로 가는 것,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 수 있는 것, 숫가락을 잡고 밥을 먹을수 있는 것 등 감사의 제목이 많았다. 그러자 진통제가 줄 수 없는 평화가 몰려왔다. 그리고 내일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부끄러운 손이 아니라 쓸 수 있는 손이 되도록 기도했다. 이식한 피부가 수축하여 손을 사용할수 없었다. 내손인데도 내가 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어느날 오른손을 움직이자 다같이 울었다. 피부가 당겨져 턱이 이상해지고 침을 흘리게 했다.
밤의 유리창과 숫가락에 비친 나의 모습은 외계인 같았다. 하나님은 나의 이런 모습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을 주셨다. 23살의 여대생으로 살 수 없는 현실을 보고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자살하거나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밖에 없었다.
아무도 없는 교회에 가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께 어떻게 살 수 있는지 대책을 달라고 했다. 다음날 "너를 바로 세우고 희망이 되게 하겠다"는 말씀을 들었다. 다음부터 나를 볼 수 있는 용기가 생겨 스스로 "안녕 이지선"하고 인사를 하고 지냈다. 자주 보면 정이 드는 얼굴이다.
수술을 받고 엄지로 컴퓨터로 타자를 칠 수가 있었다. 전과는 다른 마음 안에 평안이 있었다. 그런 감사를 모아 2003년 책을 냈다. 그래서 '이 작가'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식한 목피부 때문에 척추를 당기자 일본에 가서 수술을 받았다. 16시간 수술을 받고 다시 12시간을 수술을 받았다. 너무나 고통스러워 천국에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수님도 나보다는 안 아플 실 것이라는 투정도 생겼다. 고난주간 묵상기도를 하는동안 "너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내가 다 안다"라는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을 듣고 상처난 마음이 다 풀렸다.
눈물만이 눈물을 닦아 줄수 있고, 아픔만이 아픔을 안아줄 수 있다.
<지선아 사랑해> 와 <오늘도 행복합니다>라는 책을 내고 일본어와 대만어로도 번역이 되었다.
엄마보고 나와 인생을 바꾸어 달라고 했는데 할 수만 있다면 당연히 하겠다는 엄마의 대답을 들었다. 부모의 사랑이 이럴진대 아들을 죽음의 길로 보내신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4년 전에 어떤 사람이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으냐고 물었는데 안돌아 간다고 대답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정말로 중요하고 영원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없어질 것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해 인생을 드리고 싶다.
가난해서 제 안에 있는 천국이 지금 이 순간 여러분에게 흘러갔으면 한다. 이 땅에 살면서 천국을 누리는 것은 큰 복이다. 천국을 매일 이루는 여러분이 되었으면 좋겠다.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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