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스토리, 목양장로교회 vs. 베이사이드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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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07-05-21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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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고은교회 정석기목사가 <세계속의 한인교회 10>를 쿰란출판사에서 출간했다.
정석기 목사는 "세계속의 한인교회"등 64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유명하다. <세계속의 한인교회> 시리즈는 제목그대로 세계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한인교회를 찾아 교회와 담임목사를 소개하고 있다. 정석기 목사는 현재 엘림문화선교회 대표와 뉴욕 미주고은교회 담임 목사로 사역중이다.
<세계속의 한인교회 10>에는 뉴욕소재 한인교회중 베이사이드 장로교회(이종식 목사)와 목양장로교회(송병기 목사)를 소개하고 있다. 책의 구입은 각 한인서점에서 할 수 있다.
두 목회자는 많은 비슷한 점이 있다. 송병기 목사는 교협회장까지 지내고 미주 최대교단인 미주장로회 총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계활동보다 초야에 뭍혀 목회에 힘쓰는 이종식 목사는 오는 6월 열리는 교단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된 예정이다.
교회의 규모도 비슷하며 성격이 소탈하여 성도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것도 비슷하다. 이종식 목사는 교회교육을 통해 교회의 성장기반을 마련했으며, 송병기 목사도 2세 뿌리교육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다른점도 있다. 이종식 목사는 불교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송병기 목사는 4대째 믿음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종식 목사의 신앙발전 과정과 송병기 목사의 난지도 개척이야기는 관심을 끈다.
다음은 두 교회 관련내용중 일화를 소개한다.
베이사이드 장로교회 (이종식 목사)
이종식 목사는 불교가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70년대의 이민붐을 타고 남미이민을 가게 됐다. 수속를 담당하는 남미에서 살고있는 친척이 교회의 이민증서가 필요하다고해 할수없이 교회에 첫발을 들이게 됐다.
6개월을 억지로 교회를 다녀 교회 이민증서를 얻자 남미로 이민을 갔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진하자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들어가 살게되고 경찰에게 쫓겨나는일도 벌어진다. 딱한 사정이 알려지자 목사가 찾아와 위로금을 전했다. 그후 이종식 목사의 가족은 그리스도인이 됐다.
하지만 불교학생회에서 열심히 활동도 하던 청년 이종식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변하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그때 갑자기 전도한 사람의 얼굴이 생각났다. 청청년 이종식은 내일 눈을 뜨게 해주면 교회에 다니겠다고 약속하고 결국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출석한 교회의 부흥집회의 결단의 시간에 청년 이종식은 신학교에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국으로 온 청년 이종식은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다. 그는 교회개척을 위해 미국 전역과 캐나다까지 돌아보았고 베이사이드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좋은 자리이지만 그때 베이사이드 지역에는 한인교회가 단하나 뿐이었다.
개척멤버도 없고 예배드릴 공간도 없어 주택의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다 경찰과 소방차가 출동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두번째는 태권도 도장을 빌려 주일에만 예배를 드렸다. 간판이 없어 골판지에 교회이름을 적은 간판을 만들었다.
교회를 개척한지 5년이 지났지만 돈이 한푼도 없었다. 임대료는 밀리고 시청에서 차압용지를 붙이겠다는 통보가 왔다. 이종식 목사는 작정하고 금식기도,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이런 기도가 싸이면서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종식 목사는 소탈하고 사랑이 많은 목사로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교회에서 좋은차를 권하나 아직도 부부가 미니밴을 타고 다니며 성도를 픽업하는 일을 직접한다.
목양장로교회 (송병기 목사)
송병기 목사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송병기가 어릴때 고열로 전신마비가 되자 부모는 아들을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했다. 건강을 회복한 송병기는 장성해 연대 신학과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가 정한 첫 사역지는 난지도. 난지도에 사는 사람들은 쓰레기 매립장에서 일하거나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군으로 생활이 처참했다. 총각 전도사는 6년동안 사역하는 동안 주민중 80% 이상이 교인이 되었다.
교회를 아담하게 짓고 후임에게 넘겨주고 교목을 하다 1982년 뉴욕으로 왔다. 당시 뉴욕과 뉴저지에는 합해 90여개의 교회가 있을 정도였다. 그는 브롱스 잡화가게에서 일했으며 신문사 업무부장을 하기도 했다.
송 목사는 청소년 시절 성가대원으로 있을때 성가대장에게 음치라는 이야기를 듣고 노력을 한다. 오르간 기타등 여러 악기를 만지며 음을 익히고 찬송을 했다. 노력끝에 뛰어난 성량으로 찬송을 부를수 있게 되었다.
목양장로교회의 특징은 자녀의 뿌리교육이다. 어린이 예배나 중고등학부 예배는 철저히 한국어를 사용한다.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목회철학이다.
송병기 목사는 천여명이 되는 전교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목회자이다. 생일에는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한다. 성도들은 "우리교회는 분위기가 좋지요. 목사님이 사랑과 섬김의 자세로 목회를 하셔서 교회가 평화스럽다. 목회자와 성도간에 신뢰성이 있으며 격의가 없다. 목사님이 귄위의식이 없으니 친구처럼 사이가 좋다"고 말한다.
송병기 목사는 지난해 5월 미주한인장로회 총회 31대 총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그의 몸은 철근처럼 강하다. 새벽부터 달리기를 하는 선수처럼 일하는 일꾼이다. 그는 황소처럼 수걱수걱 일한다. 그의 모습을 보고 성도들도 교회를 섬기며 일심히 일한다.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정석기 목사는 "세계속의 한인교회"등 64권의 책을 쓴 작가로도 유명하다. <세계속의 한인교회> 시리즈는 제목그대로 세계속에서 성장하고 있는 한인교회를 찾아 교회와 담임목사를 소개하고 있다. 정석기 목사는 현재 엘림문화선교회 대표와 뉴욕 미주고은교회 담임 목사로 사역중이다.
<세계속의 한인교회 10>에는 뉴욕소재 한인교회중 베이사이드 장로교회(이종식 목사)와 목양장로교회(송병기 목사)를 소개하고 있다. 책의 구입은 각 한인서점에서 할 수 있다.
두 목회자는 많은 비슷한 점이 있다. 송병기 목사는 교협회장까지 지내고 미주 최대교단인 미주장로회 총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계활동보다 초야에 뭍혀 목회에 힘쓰는 이종식 목사는 오는 6월 열리는 교단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된 예정이다.
교회의 규모도 비슷하며 성격이 소탈하여 성도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것도 비슷하다. 이종식 목사는 교회교육을 통해 교회의 성장기반을 마련했으며, 송병기 목사도 2세 뿌리교육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다른점도 있다. 이종식 목사는 불교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송병기 목사는 4대째 믿음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종식 목사의 신앙발전 과정과 송병기 목사의 난지도 개척이야기는 관심을 끈다.
다음은 두 교회 관련내용중 일화를 소개한다.
베이사이드 장로교회 (이종식 목사)
이종식 목사는 불교가문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1학년이 되자 70년대의 이민붐을 타고 남미이민을 가게 됐다. 수속를 담당하는 남미에서 살고있는 친척이 교회의 이민증서가 필요하다고해 할수없이 교회에 첫발을 들이게 됐다.
6개월을 억지로 교회를 다녀 교회 이민증서를 얻자 남미로 이민을 갔다. 아버지의 사업이 부진하자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들어가 살게되고 경찰에게 쫓겨나는일도 벌어진다. 딱한 사정이 알려지자 목사가 찾아와 위로금을 전했다. 그후 이종식 목사의 가족은 그리스도인이 됐다.
하지만 불교학생회에서 열심히 활동도 하던 청년 이종식에게 그리스도인으로 변하는 것은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그때 갑자기 전도한 사람의 얼굴이 생각났다. 청청년 이종식은 내일 눈을 뜨게 해주면 교회에 다니겠다고 약속하고 결국 교회에 출석하게 됐다. 출석한 교회의 부흥집회의 결단의 시간에 청년 이종식은 신학교에 가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국으로 온 청년 이종식은 봉제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신학교에 다녔다. 그는 교회개척을 위해 미국 전역과 캐나다까지 돌아보았고 베이사이드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은 좋은 자리이지만 그때 베이사이드 지역에는 한인교회가 단하나 뿐이었다.
개척멤버도 없고 예배드릴 공간도 없어 주택의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다 경찰과 소방차가 출동하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두번째는 태권도 도장을 빌려 주일에만 예배를 드렸다. 간판이 없어 골판지에 교회이름을 적은 간판을 만들었다.
교회를 개척한지 5년이 지났지만 돈이 한푼도 없었다. 임대료는 밀리고 시청에서 차압용지를 붙이겠다는 통보가 왔다. 이종식 목사는 작정하고 금식기도, 철야기도에 들어갔다. 이런 기도가 싸이면서 교회는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종식 목사는 소탈하고 사랑이 많은 목사로 자신을 꾸미지 않는다. 교회에서 좋은차를 권하나 아직도 부부가 미니밴을 타고 다니며 성도를 픽업하는 일을 직접한다.
목양장로교회 (송병기 목사)
송병기 목사는 4대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송병기가 어릴때 고열로 전신마비가 되자 부모는 아들을 살려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서원기도를 했다. 건강을 회복한 송병기는 장성해 연대 신학과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그가 정한 첫 사역지는 난지도. 난지도에 사는 사람들은 쓰레기 매립장에서 일하거나 농사를 짓는 가난한 농군으로 생활이 처참했다. 총각 전도사는 6년동안 사역하는 동안 주민중 80% 이상이 교인이 되었다.
교회를 아담하게 짓고 후임에게 넘겨주고 교목을 하다 1982년 뉴욕으로 왔다. 당시 뉴욕과 뉴저지에는 합해 90여개의 교회가 있을 정도였다. 그는 브롱스 잡화가게에서 일했으며 신문사 업무부장을 하기도 했다.
송 목사는 청소년 시절 성가대원으로 있을때 성가대장에게 음치라는 이야기를 듣고 노력을 한다. 오르간 기타등 여러 악기를 만지며 음을 익히고 찬송을 했다. 노력끝에 뛰어난 성량으로 찬송을 부를수 있게 되었다.
목양장로교회의 특징은 자녀의 뿌리교육이다. 어린이 예배나 중고등학부 예배는 철저히 한국어를 사용한다.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어야 한다는 목회철학이다.
송병기 목사는 천여명이 되는 전교인의 이름을 알고 있는 목회자이다. 생일에는 이름을 부르며 기도를 한다. 성도들은 "우리교회는 분위기가 좋지요. 목사님이 사랑과 섬김의 자세로 목회를 하셔서 교회가 평화스럽다. 목회자와 성도간에 신뢰성이 있으며 격의가 없다. 목사님이 귄위의식이 없으니 친구처럼 사이가 좋다"고 말한다.
송병기 목사는 지난해 5월 미주한인장로회 총회 31대 총회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그의 몸은 철근처럼 강하다. 새벽부터 달리기를 하는 선수처럼 일하는 일꾼이다. 그는 황소처럼 수걱수걱 일한다. 그의 모습을 보고 성도들도 교회를 섬기며 일심히 일한다.
ⓒ 2007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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