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목사 세미나 "구속사적인 설교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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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4-10-26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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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목사회(회장 황동익 목사)는 10월 25일(토) 오전 10시 뉴욕효신장로교회(문석호 목사)에서 정성구 목사를 강사로 "목회와 설교"라는 주제로 목회자 세미나를 열었다. 효신교회 성회인도차 뉴욕에 온 정성구 목사는 한국 총신대학교 총장과 대신대학교 총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칼빈주의연구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정성구 목사는 설교학 교수였다. 그래서 초교파적인 목사회에서 "목회와 설교"라는 주제를 잡았지만, 만약 칼빈주의에 대한 내용의 세미나를 했다면 큰 목소리의 정성구 목사의 목소리가 더 커졌을 것이다. 칠순 중반의 정 목사는 설교에 대한 세미나를 인도하기 보다는 설교보다 더 큰 것을 전하기 원했다. 쉽게 말하면, 골프를 배우려고 왔는데 골프 공을 치는 것을 안가르쳐 주고 자세에 대한 강의만 내내 했다. 정성구 목사는 성경과 복음에 대해 전했으며, 구속자적인 설교를 하는 법을 강조했다. 설교의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설교의 본질을 가르쳐 준 것이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세미나를 인도하는 정성구 목사
▲세미나 참가자 단체사진
박윤선 목사를 모시고 평생을 함께 했다. 임종하는 직전까지 저를 위해 기도해 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처음 21살때 박윤선 목사를 만났을 때 확신이 넘치는 복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외치는 그 설교에 제가 녹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저의 뿌리를 말하자면 그때 박윤선 목사를 스승으로 우리교회 담임목사로 평생 목사님의 도움자로 산 것하고, 신대원 졸업하기 한 달전에 농촌교회에 들어가서 개척하며 정열을 다 쏫아서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던 것이 내 총밑천이다.
목회 그리고 영혼사랑
어떻게 목회하고 어떻게 설교하는가 대한 것은 책에 보면 좋은 말 다 나와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될줄 믿는다. 제가 개척 농촌교회를 한 지역은 전임자가 총각하고 눈이 맞아서 야반도주했기에 얼마나 박해가 심했겠는가. 빈정되는 그들에게 우리 교회만 목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내 목양지였다. 1966년, 48년 전에 "목양일심"이라는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 정말 젊은 가슴을 쥐어짜서 심장을 쥐어짜서 주의 제단에게 붓는 것이 목사이다.
저는 헝가리를 무척 좋아한다. 헝가리 개혁교회를 1986년부터 다녔다. 헝가리 개혁교회에 가면 강대상 앞에 펠리간이라는 새가 조각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비둘기를 조각한다. 왜 강단앞에 펠리간을 조각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분들이 말하기를 어미 펠리간이 어린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다가 맨 마지막에는 자기 부리로 자기 심장을 쪼아서 피를 다 내어서 새끼들에게 더 주고 그 다음 쓰러져 죽는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 것을 다 쏫아서 심장을 쪼아서 피를 내서 다 새끼들에게 나누어주고 죽는 펠리간 처럼 그것이 목사의 생애이다. 저는 여러 크기의 교회에서 목회를 했지만, 1천명 모이는 교회나 10명 모이는 교회나 설교준비는 똑 같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그렇다.
목사는 참 섬세해야 한다. 남의 세정을 잘 알아야 한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고, 남의 아픔을 잘 아는 목사가 참 좋은 목사이다. 총신대학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다른 교수들도 설교했지만 어쩌다 보니 내가 할 수 없이 담임이 됐다. 이왕에 하면 제대로 목회를 해야겠다고 해서 천마산에 40일 기도를 떠났다. 기도하고 내려오니 교인들 가운데 몇사람이 "목사님의 뒤에 광채가 나는 듯 합니다"라고 말했다. 목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목사가 매일 다방에 있으면 성도들이 눈을 들어 다방을 본다. 산에서 기도하면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목사가 나를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해도 교인들에게 메세지가 된다. 꼭 말로해야만 메세지인가.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자체에서 메세지가 계속 나간다. 당시 미국에 가끔 부흥회를 오면 모든 성도들에게 안부의 카드를 빠짐없이 보낸다. 성도들은 목사가 우리 가정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구나 하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심방을 가보면 2-3년이 지나도 카드를 집에 붙여놓고 있다. 결국은 영혼사랑에 대한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목회가 판가름이 난다.
복음에서 복음으로
최근에 "복음에서 복음으로"라는 조그마한 책을 하나 냈다. 그런 책을 쓴 이유가 있다. 내가 목사된지 46년이 되는데 가만히 묵상을 해보니 결국은 복음이다. 결국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복음이다. 서점에 가서 복음에 대한 책이 얼마나 있을까 찾아보았다. 한국사람이 쓴 책이 두어권을 보았다. 그런데 그 책들은 신학 전문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써 놓았지 가슴에 울림이 없다. 가슴에 울림은 없이, 맨날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하는 내용으로 가득채웠다. 외국사람이 쓴 책을 번역한 것도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한번 복음에 대해 한번 써 보겠다고 작정했다. 학자들의 유혹은 남의 책을 참고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만권 장서가 있지만 다 팽개치고 오직 신구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신학교에서 복음을 이렇게 가르친다. 복음이란 '유앙겔리온'이다. 그것은 곧 기쁜 소식이다. 좋은 소식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 곧 복음이다. 그것이 다이다. 그것이 복음일까? 글자 풀이는 된다. 신학적으로는 맞다. 복음에 대한 해석이 분명히 맞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아니다 싶다. 복음은 그냥 기쁜 소식인가? 저는 아니라고 본다. 미치도록 기쁜 소식이다. 까무러치도록 기쁜 소식이다. 뒤집어지도록 좋은 소식이다. 호랑이 그림을 보는 것과 직접 호랑이를 보는 것과 같은가? 헬라어 글자 풀이하는 것과 정말 복음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나를 텃치해서 이 복음이 내 속에 들어올때 감격과 감사와 확신과 엄청난 동력이 파급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설교가 정말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의 역전골의 환호보다 복음이 못하겠는가? 복음이 탁 때렸을 때 성도들의 가슴에 전율이 일어나고 전기가 통할 수 있도록 그 복음의 기본을 탁 때려야 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제가 깨닫은 복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로마서에 복음이 나오고, 4복음서가 복음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누가 뭐라 하는가. 그것들이 복음이 맞지만 내가 성경을 잘살펴보니 복음은 4복음서만 복음이 아니라 창세기도 복음이다. 출애굽기도 복음이다. 역사서도 복음이다. 선지서도 복음이다. 4복음서도 복음이다. 바울서신도 복음이고 요한계시록도 복음이다.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위대한 복음의 복된 소식이다. 아무것도 없는 흑암이 덮여져 있고 무질서와 혼돈속에 있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위대한 메세지가 우리들의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하는 복음이다.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도 중요하지만 성경읽는 봉독이 참 중요하다. 어떤 분은 창세기 1:1을 읽으면서 '태초'나 '천지'를 강조한다. '태초'는 부사인데 왜 부사에 강조하는가? 핵심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강조해서 읽어야 한다. 영어에도 제일 중요한 것은 주어와 동사이다. 주어와 동사를 바로해야 상대방에 알아듣고 내가 들을 수가 있다. 그래서 '태초'가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강조하고 '창조하셨다'를 강조해야 한다.
신구약 성경을 훝어보니 하나님의 창조의 기사는 성경에 장강대해(長江大海)를 이룬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이다. 그렇지만 헬만 바빙크라는 위대한 칼빈주의 학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몰라서는 하나님의 구속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나온다. 하지만 미국사회는 진화론적인 세계관이 다 잡고 있다. 한국의 교육도 따지고 보면 존 듀이의 사상을 그대로 배낀 것이다. 즉 휴머니즘이다. 그런 바탕속에 '휴머니즘'이라는 말 대신에 '홍익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지금 미국사회에서 비뚤어진 모든 사상은 인본주의 사상을 기초를 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위대한 선포는 오늘날 미국사회에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창조는 복음이다. 계시록 맨 마지막에도 하나님의 창조가 나온다.
복음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물론 바울서신에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다 나와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창세기에 벌써 나온다. 출애굽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다. 선지서에도 복음서에도 바울서신에도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다.
한 30년전 국방부에서 3개종단 대표들을 불러서 세미나를 했다. 저는 기독교측의 대표였다. 카톨릭 대학의 총장이 나왔고, 불교 대표는 동국대학교 이기영 총장이었다. 이기영 총장은 벨기에의 탑클래스인 루방대학에서 원효사상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이다. 이 총장이 나와 "여러분,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모두 놀라 집중하여 경청했다. 이 총장은 "'은혜'라는 말, '은총'이라는 말은 가장 증오하고 싫어하는 단어이다. 이유는 인간은 자기 노력여하에 따라 구원을 받는 것이지 자기 노력은 하나도 없이 공짜로 받겠다니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 그 자리가 논쟁의 자리가 아니기에 제가 응답하지 않았지만 30년이 지난후에도 그의 말이 기억네 남는다. 나는 "저 위대한 학자가 복음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헤를 알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은총의 교리이다. 창세기에서 부터 계시록 까지 "아하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구나. 오직 하나님의 그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다"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의 큰교회 목사님들, 조엘 오스틴이나 로버트 슐러같은 사람들은 성경이 아니라 노만 빈센트 필의 심리학을 도입해서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된다.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고, 내가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심리학이다. 불교철학이다. 왜 불교철학을 말하고 복음을 교회에서 증거하지 않는 것인가?
인터넷에 들어가면 한국에서 뜨는 이지성이라는 젊은 작가가 나온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힛트를 한번 치려고 노력을 했지만 아무도 그의 책을 출판하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출판사에서 그의 책을 출판하자, 그 책이 대박이 나서 30만부가 팔려서 돈더미에 올라 앉았다. 그 책의 내용이 조엘 오스틴이나 로버트 슐러나 미국에서 잘알려진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방법을 그리고 삶의 방법을 그리고 유명한 여자 앵커인 오프라 윈프리같은 유명인들의 예화를 나열한 책인데 30만부가 팔렸다. 그는 통합측 교회 집사인데 작가이니 여러 교단 교회를 순회해 보니 목사들의 설교가 자기 책을 다 배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는 돈을 벌려고 한번 해 본 소리인데 그 내용들을 다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년반동안 여러곳을 다니면서 한국에 진짜 목사가 없을까를 찾아 7명의 목사를 택해서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번에는 망했다. 목사들이 그들만 진짜이고 나는 가짜인가 해서 책을 안사보았다. 성경은 복음인데 그 복음가운데 하나님의 그저주시는 은총이 복음의 핵심이다.
복음은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
또 있다.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 복음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로마서 1:17에만 있는 것인가? 아니다. 신구약 66권 전부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렇게 구조가 되어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성경의 구조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3:16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기에 다 나와있고 출애굽기에도 나와 있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도 나와있다. 역사서에도 선지서에도 복음서에도 바울서신에도 요한계시록에도 나와있다. 그러니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에게 명쾌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도록 성경이 그렇게 구조가 되어 있다. 성경을 볼때 이렇게 해석을 해 나가는 것을 "구속사적 강해설교"라고 한다. 설교에는 많은 스타일이 있다. 제목 설교도 본문 설교도 있다. 다 좋다. 그런데 제가 선호하는 설교방식은 "구속사적 강해설교"이다. 즉 성경을 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볼줄 아는 눈을 열자. 그렇게 저는 말씀을 드릴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사상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본래 칼빈이 사용하던 방법이지만 이것을 다시한번 크게 재생산 한 것은 1930년대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 즉 헤르만 도헤베르드나 홀렌 호건 박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의 목사들은 성경을 해석해서 설교할 때 구속사적인 방법으로 설교했다. 그러다가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좀 시들해졌다가 다시 부흥하는 추세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는 설교할 때 제목 설교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령 제목 설교를 할 경우에 성경의 인물을 하나 택해서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잘나누어서 장점은 우리가 권고하고 받아들여야 할 교훈으로, 그 사람의 약점은 경고해야 할 그런 교훈으로 전해야 한다.
구속사적인 설교 - 아브라함
예를 들면 우리가 제일 많이 설교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가라시는 곳으로 순종하여 갔다. 아브라함에 대해 설교할 때 그런 주제로 설교를 많이한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은 우상공장 공장장 집의 아들이고, 이방인이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는 75살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 지게하겠다고 하셨다. 굉장히 불합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 사라는 아들을 생산할 수 없는 나이의 불임여성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빨리주시던가 완전히 늙게하시고 99세에 천사를 통해서 내년 이맘때 아들하나 주신다고 하셨다.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사라가 장막뒤에서 웃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이것을 선을 죽 그으면 예수님까지 간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나온다. 바둑을 잘두는 사람은 몇 수를 내다보고 한 수를 둔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의 우상공장 공장장 집 아들 75세 먹은 노친네를 불러내신 것은 바둑으로 말하면 어떤 목적을 위해 한 점을 놓은 것이다. 이것을 통해 위대한 구속운동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위대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이 저희들을 구속하시기위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야 하겠는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주시고 장차 이 백성을 통해 메시야가 날 것을 확고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을 구속자적으로 보자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해서, 좋은 사람을 모델로 해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삽시다 그렇게 설교하면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아브라함 링컨으로 갔다가 조지 와싱톤으로 조시 부시로 클린톤으로 오바마 까지 간다. 아브라함의 위대성을 예찬하기위해 여러가지 예화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구속자적인 안목은 성경이 아브라함의 위대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위대한 구속사역을,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져야 할 줄 믿는다. 우리가 보통 설교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아브라함이 순종했으니 여러분도 순종을 잘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모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다.
구속사적인 설교 - 야곱
야곱처럼 간사한 사람의 이야기에 왜 창세기 내용중 절반을 할애했을까? 잘 믿었다는 에녹은 성경에 3줄밖에 안 나온다. 장가가서 아들딸 놓고 잘살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가 전부이다. 우리는 에녹을 좀 알고 싶다. 그러나 성경은 침묵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위대함을 예찬하는 것이 성경기록의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떤가? 야곱은 아주 사기치는데 도사이다. 거짓말을 잘하고 재테크에 도사이다. 간사한 사람이다. 형 에서는 사나이 답고 통이 크다. 그런데 왜 성경은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고 했을까? 나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그런 야곱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택하여 주셔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나오도록 하시고 그래서 그 후손들을 통해 메시야가 나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프로젝트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설교가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는데 우리도 씨름해서 축복받자고 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야곱처럼 볼품없는 인생을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실패할 때 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일어나라. 베델로 올라가라" 그렇게 말씀하신다. 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다. 하지만 잘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투성이의 야곱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이루시는 것이다.
구속사적인 설교 - 삭개오
신약으로 한번 가보자. 우리들은 삭개오 이야기에 대해 설교를 많이 한다. 흔히 삭개오는 키가 작았지만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 보려고 하는 것 처럼 주님을 보고싶어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 설교도 맞다. 그리고 삭개오처럼 철저한 회개에 대해 전하는 것도 맞는 설교이다. 그러나 당시 뽕나무에 올라간 것은 삭개오만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애들이 다 올라가 있었다. 최근 판교에서 연예인 공연을 다 잘보려고 환풍기 위에 올라갔다가 무너져 17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해가 된다. 예수님도 당시에 인기가 대단하셨다. 그래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
그러나 성경 메세지의 핵심은 삭개오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무대에 올라가 연극을 해도 주인공이 조명을 받도록 되어 있다. 조연자는 조명을 안 받는다. 성경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고,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시고, 심판주이신줄 믿는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삭개오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삭개오에 촛점을 맞추어 설교한다. 그것도 좋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 중심 시각에서 그리고 개혁주의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져 있어야 성경이 바로 보일줄 믿는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동영상 / 정성구 목사 뉴욕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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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동영상에는 기사에 나오지 않는 농촌교회 개척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성구 목사는 설교학 교수였다. 그래서 초교파적인 목사회에서 "목회와 설교"라는 주제를 잡았지만, 만약 칼빈주의에 대한 내용의 세미나를 했다면 큰 목소리의 정성구 목사의 목소리가 더 커졌을 것이다. 칠순 중반의 정 목사는 설교에 대한 세미나를 인도하기 보다는 설교보다 더 큰 것을 전하기 원했다. 쉽게 말하면, 골프를 배우려고 왔는데 골프 공을 치는 것을 안가르쳐 주고 자세에 대한 강의만 내내 했다. 정성구 목사는 성경과 복음에 대해 전했으며, 구속자적인 설교를 하는 법을 강조했다. 설교의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 설교의 본질을 가르쳐 준 것이다. 다음은 세미나 내용이다.
▲세미나를 인도하는 정성구 목사
▲세미나 참가자 단체사진
박윤선 목사를 모시고 평생을 함께 했다. 임종하는 직전까지 저를 위해 기도해 줄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처음 21살때 박윤선 목사를 만났을 때 확신이 넘치는 복음,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주권을 외치는 그 설교에 제가 녹아져 들어가고 있었다. 저의 뿌리를 말하자면 그때 박윤선 목사를 스승으로 우리교회 담임목사로 평생 목사님의 도움자로 산 것하고, 신대원 졸업하기 한 달전에 농촌교회에 들어가서 개척하며 정열을 다 쏫아서 황무지가 장미꽃같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던 것이 내 총밑천이다.
목회 그리고 영혼사랑
어떻게 목회하고 어떻게 설교하는가 대한 것은 책에 보면 좋은 말 다 나와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될줄 믿는다. 제가 개척 농촌교회를 한 지역은 전임자가 총각하고 눈이 맞아서 야반도주했기에 얼마나 박해가 심했겠는가. 빈정되는 그들에게 우리 교회만 목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 전체가 내 목양지였다. 1966년, 48년 전에 "목양일심"이라는 제목으로 쓴 시가 있다. 정말 젊은 가슴을 쥐어짜서 심장을 쥐어짜서 주의 제단에게 붓는 것이 목사이다.
저는 헝가리를 무척 좋아한다. 헝가리 개혁교회를 1986년부터 다녔다. 헝가리 개혁교회에 가면 강대상 앞에 펠리간이라는 새가 조각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비둘기를 조각한다. 왜 강단앞에 펠리간을 조각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분들이 말하기를 어미 펠리간이 어린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다가 맨 마지막에는 자기 부리로 자기 심장을 쪼아서 피를 다 내어서 새끼들에게 더 주고 그 다음 쓰러져 죽는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길이 바로 그것이다. 자기 것을 다 쏫아서 심장을 쪼아서 피를 내서 다 새끼들에게 나누어주고 죽는 펠리간 처럼 그것이 목사의 생애이다. 저는 여러 크기의 교회에서 목회를 했지만, 1천명 모이는 교회나 10명 모이는 교회나 설교준비는 똑 같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그렇다.
목사는 참 섬세해야 한다. 남의 세정을 잘 알아야 한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고, 남의 아픔을 잘 아는 목사가 참 좋은 목사이다. 총신대학 교회를 처음 시작할 때는 다른 교수들도 설교했지만 어쩌다 보니 내가 할 수 없이 담임이 됐다. 이왕에 하면 제대로 목회를 해야겠다고 해서 천마산에 40일 기도를 떠났다. 기도하고 내려오니 교인들 가운데 몇사람이 "목사님의 뒤에 광채가 나는 듯 합니다"라고 말했다. 목사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목사가 매일 다방에 있으면 성도들이 눈을 들어 다방을 본다. 산에서 기도하면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목사가 나를 위해서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해도 교인들에게 메세지가 된다. 꼭 말로해야만 메세지인가. 기도원에서 기도하는 자체에서 메세지가 계속 나간다. 당시 미국에 가끔 부흥회를 오면 모든 성도들에게 안부의 카드를 빠짐없이 보낸다. 성도들은 목사가 우리 가정에 이렇게 관심을 가지구나 하면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심방을 가보면 2-3년이 지나도 카드를 집에 붙여놓고 있다. 결국은 영혼사랑에 대한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에서 목회가 판가름이 난다.
복음에서 복음으로
최근에 "복음에서 복음으로"라는 조그마한 책을 하나 냈다. 그런 책을 쓴 이유가 있다. 내가 목사된지 46년이 되는데 가만히 묵상을 해보니 결국은 복음이다. 결국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복음이다. 서점에 가서 복음에 대한 책이 얼마나 있을까 찾아보았다. 한국사람이 쓴 책이 두어권을 보았다. 그런데 그 책들은 신학 전문가만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써 놓았지 가슴에 울림이 없다. 가슴에 울림은 없이, 맨날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고 인용하는 내용으로 가득채웠다. 외국사람이 쓴 책을 번역한 것도 있는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그래서 내가 한번 복음에 대해 한번 써 보겠다고 작정했다. 학자들의 유혹은 남의 책을 참고하는 것을 좋아한다. 나도 만권 장서가 있지만 다 팽개치고 오직 신구약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신학교에서 복음을 이렇게 가르친다. 복음이란 '유앙겔리온'이다. 그것은 곧 기쁜 소식이다. 좋은 소식이다. 예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선포하는 것이 곧 복음이다. 그것이 다이다. 그것이 복음일까? 글자 풀이는 된다. 신학적으로는 맞다. 복음에 대한 해석이 분명히 맞다. 하지만 저는 이것은 아니다 싶다. 복음은 그냥 기쁜 소식인가? 저는 아니라고 본다. 미치도록 기쁜 소식이다. 까무러치도록 기쁜 소식이다. 뒤집어지도록 좋은 소식이다. 호랑이 그림을 보는 것과 직접 호랑이를 보는 것과 같은가? 헬라어 글자 풀이하는 것과 정말 복음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나를 텃치해서 이 복음이 내 속에 들어올때 감격과 감사와 확신과 엄청난 동력이 파급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설교가 정말 생명을 살릴 수 있을까?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안정환의 역전골의 환호보다 복음이 못하겠는가? 복음이 탁 때렸을 때 성도들의 가슴에 전율이 일어나고 전기가 통할 수 있도록 그 복음의 기본을 탁 때려야 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제가 깨닫은 복음이란 무엇인가? 사람들은 로마서에 복음이 나오고, 4복음서가 복음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다. 누가 뭐라 하는가. 그것들이 복음이 맞지만 내가 성경을 잘살펴보니 복음은 4복음서만 복음이 아니라 창세기도 복음이다. 출애굽기도 복음이다. 역사서도 복음이다. 선지서도 복음이다. 4복음서도 복음이다. 바울서신도 복음이고 요한계시록도 복음이다.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가 위대한 복음의 복된 소식이다. 아무것도 없는 흑암이 덮여져 있고 무질서와 혼돈속에 있는데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이 위대한 메세지가 우리들의 가슴을 두근두근하게 하는 복음이다. 여러 목사님들의 설교도 중요하지만 성경읽는 봉독이 참 중요하다. 어떤 분은 창세기 1:1을 읽으면서 '태초'나 '천지'를 강조한다. '태초'는 부사인데 왜 부사에 강조하는가? 핵심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강조해서 읽어야 한다. 영어에도 제일 중요한 것은 주어와 동사이다. 주어와 동사를 바로해야 상대방에 알아듣고 내가 들을 수가 있다. 그래서 '태초'가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강조하고 '창조하셨다'를 강조해야 한다.
신구약 성경을 훝어보니 하나님의 창조의 기사는 성경에 장강대해(長江大海)를 이룬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속이다. 그렇지만 헬만 바빙크라는 위대한 칼빈주의 학자는 "하나님의 창조를 몰라서는 하나님의 구속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 나온다. 하지만 미국사회는 진화론적인 세계관이 다 잡고 있다. 한국의 교육도 따지고 보면 존 듀이의 사상을 그대로 배낀 것이다. 즉 휴머니즘이다. 그런 바탕속에 '휴머니즘'이라는 말 대신에 '홍익인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인간이 주인이라는 것이다. 지금 미국사회에서 비뚤어진 모든 사상은 인본주의 사상을 기초를 한다. 그러니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위대한 선포는 오늘날 미국사회에 먹혀들어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하나님의 창조는 복음이다. 계시록 맨 마지막에도 하나님의 창조가 나온다.
복음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총이다. 물론 바울서신에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다 나와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창세기에 벌써 나온다. 출애굽기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다. 선지서에도 복음서에도 바울서신에도 요한계시록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나온다.
한 30년전 국방부에서 3개종단 대표들을 불러서 세미나를 했다. 저는 기독교측의 대표였다. 카톨릭 대학의 총장이 나왔고, 불교 대표는 동국대학교 이기영 총장이었다. 이기영 총장은 벨기에의 탑클래스인 루방대학에서 원효사상을 전공해서 박사학위를 받은 석학이다. 이 총장이 나와 "여러분,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라고 말하자 모두 놀라 집중하여 경청했다. 이 총장은 "'은혜'라는 말, '은총'이라는 말은 가장 증오하고 싫어하는 단어이다. 이유는 인간은 자기 노력여하에 따라 구원을 받는 것이지 자기 노력은 하나도 없이 공짜로 받겠다니 말이 되는가?"라고 말했다. 그 자리가 논쟁의 자리가 아니기에 제가 응답하지 않았지만 30년이 지난후에도 그의 말이 기억네 남는다. 나는 "저 위대한 학자가 복음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은헤를 알 수 있겠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의 핵심은 하나님의 그저 주시는 은총의 교리이다. 창세기에서 부터 계시록 까지 "아하 인간은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구나. 오직 하나님의 그저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다"라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의 큰교회 목사님들, 조엘 오스틴이나 로버트 슐러같은 사람들은 성경이 아니라 노만 빈센트 필의 심리학을 도입해서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서 된다. 내가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되는 것이고, 내가 저렇게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심리학이다. 불교철학이다. 왜 불교철학을 말하고 복음을 교회에서 증거하지 않는 것인가?
인터넷에 들어가면 한국에서 뜨는 이지성이라는 젊은 작가가 나온다. 그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힛트를 한번 치려고 노력을 했지만 아무도 그의 책을 출판하는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출판사에서 그의 책을 출판하자, 그 책이 대박이 나서 30만부가 팔려서 돈더미에 올라 앉았다. 그 책의 내용이 조엘 오스틴이나 로버트 슐러나 미국에서 잘알려진 대형교회 목사들의 설교방법을 그리고 삶의 방법을 그리고 유명한 여자 앵커인 오프라 윈프리같은 유명인들의 예화를 나열한 책인데 30만부가 팔렸다. 그는 통합측 교회 집사인데 작가이니 여러 교단 교회를 순회해 보니 목사들의 설교가 자기 책을 다 배끼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자기는 돈을 벌려고 한번 해 본 소리인데 그 내용들을 다 설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1년반동안 여러곳을 다니면서 한국에 진짜 목사가 없을까를 찾아 7명의 목사를 택해서 "한국의 진짜 목사를 찾아서"라는 책을 출판했는데 이번에는 망했다. 목사들이 그들만 진짜이고 나는 가짜인가 해서 책을 안사보았다. 성경은 복음인데 그 복음가운데 하나님의 그저주시는 은총이 복음의 핵심이다.
복음은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
또 있다. 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이 복음이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로마서 1:17에만 있는 것인가? 아니다. 신구약 66권 전부가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렇게 구조가 되어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성경의 구조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렇다. 그리고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요한복음 3:16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기에 다 나와있고 출애굽기에도 나와 있다.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도 나와있다. 역사서에도 선지서에도 복음서에도 바울서신에도 요한계시록에도 나와있다. 그러니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에게 명쾌하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믿도록 성경이 그렇게 구조가 되어 있다. 성경을 볼때 이렇게 해석을 해 나가는 것을 "구속사적 강해설교"라고 한다. 설교에는 많은 스타일이 있다. 제목 설교도 본문 설교도 있다. 다 좋다. 그런데 제가 선호하는 설교방식은 "구속사적 강해설교"이다. 즉 성경을 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선으로 볼줄 아는 눈을 열자. 그렇게 저는 말씀을 드릴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사상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본래 칼빈이 사용하던 방법이지만 이것을 다시한번 크게 재생산 한 것은 1930년대에 화란의 칼빈주의자들 즉 헤르만 도헤베르드나 홀렌 호건 박사를 중심으로 한 그룹의 목사들은 성경을 해석해서 설교할 때 구속사적인 방법으로 설교했다. 그러다가 2차대전이 발발하면서 좀 시들해졌다가 다시 부흥하는 추세에 있는 것이 사실이다. 저는 설교할 때 제목 설교를 비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가령 제목 설교를 할 경우에 성경의 인물을 하나 택해서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을 잘나누어서 장점은 우리가 권고하고 받아들여야 할 교훈으로, 그 사람의 약점은 경고해야 할 그런 교훈으로 전해야 한다.
구속사적인 설교 - 아브라함
예를 들면 우리가 제일 많이 설교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다.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가라시는 곳으로 순종하여 갔다. 아브라함에 대해 설교할 때 그런 주제로 설교를 많이한다. 잘못된 것은 아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은 우상공장 공장장 집의 아들이고, 이방인이고,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을 때는 75살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땅의 모래처럼 많아 지게하겠다고 하셨다. 굉장히 불합리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 사라는 아들을 생산할 수 없는 나이의 불임여성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빨리주시던가 완전히 늙게하시고 99세에 천사를 통해서 내년 이맘때 아들하나 주신다고 하셨다.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사라가 장막뒤에서 웃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얻었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셨다.
이것을 선을 죽 그으면 예수님까지 간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고 나온다. 바둑을 잘두는 사람은 몇 수를 내다보고 한 수를 둔다. 하나님께서 이방나라의 우상공장 공장장 집 아들 75세 먹은 노친네를 불러내신 것은 바둑으로 말하면 어떤 목적을 위해 한 점을 놓은 것이다. 이것을 통해 위대한 구속운동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이다. 그러니 아브라함의 위대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성경의 목적이 아니고 한 분 하나님이 저희들을 구속하시기위해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야 하겠는데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주시고 장차 이 백성을 통해 메시야가 날 것을 확고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성경을 구속자적으로 보자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경에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난다.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있다. 그래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분해서, 좋은 사람을 모델로 해서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삽시다 그렇게 설교하면 아브라함에서 시작해서 아브라함 링컨으로 갔다가 조지 와싱톤으로 조시 부시로 클린톤으로 오바마 까지 간다. 아브라함의 위대성을 예찬하기위해 여러가지 예화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구속자적인 안목은 성경이 아브라함의 위대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위대한 구속사역을, 그 배후에 계신 하나님을 볼 줄 아는 눈이 열려져야 할 줄 믿는다. 우리가 보통 설교하는 것과 조금 다르다. 아브라함이 순종했으니 여러분도 순종을 잘하라고 설교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 모범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다.
구속사적인 설교 - 야곱
야곱처럼 간사한 사람의 이야기에 왜 창세기 내용중 절반을 할애했을까? 잘 믿었다는 에녹은 성경에 3줄밖에 안 나온다. 장가가서 아들딸 놓고 잘살다가 하나님이 데려가셨다가 전부이다. 우리는 에녹을 좀 알고 싶다. 그러나 성경은 침묵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위대함을 예찬하는 것이 성경기록의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야곱은 어떤가? 야곱은 아주 사기치는데 도사이다. 거짓말을 잘하고 재테크에 도사이다. 간사한 사람이다. 형 에서는 사나이 답고 통이 크다. 그런데 왜 성경은 내가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한다고 했을까? 나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 그런 야곱같은 인생을 하나님이 택하여 주셔서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나오도록 하시고 그래서 그 후손들을 통해 메시야가 나오도록 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프로젝트이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설교가는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을 하는데 우리도 씨름해서 축복받자고 하는데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야곱처럼 볼품없는 인생을 하나님의 거저주시는 은총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지고 자빠지고 실패할 때 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찾아오셔서 "일어나라. 베델로 올라가라" 그렇게 말씀하신다. 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이다. 하지만 잘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투성이의 야곱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이루시는 것이다.
구속사적인 설교 - 삭개오
신약으로 한번 가보자. 우리들은 삭개오 이야기에 대해 설교를 많이 한다. 흔히 삭개오는 키가 작았지만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 보려고 하는 것 처럼 주님을 보고싶어하는 열망이 있어야 한다고 설교한다. 그 설교도 맞다. 그리고 삭개오처럼 철저한 회개에 대해 전하는 것도 맞는 설교이다. 그러나 당시 뽕나무에 올라간 것은 삭개오만 올라간 것이 아니라 애들이 다 올라가 있었다. 최근 판교에서 연예인 공연을 다 잘보려고 환풍기 위에 올라갔다가 무너져 17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해가 된다. 예수님도 당시에 인기가 대단하셨다. 그래서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갔다.
그러나 성경 메세지의 핵심은 삭개오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무대에 올라가 연극을 해도 주인공이 조명을 받도록 되어 있다. 조연자는 조명을 안 받는다. 성경의 핵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고,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시고, 심판주이신줄 믿는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지 삭개오가 아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설교자들이 예수님이 아니라 삭개오에 촛점을 맞추어 설교한다. 그것도 좋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하나님 중심 시각에서 그리고 개혁주의적인 시각에서 성경을 보는 눈이 열려져 있어야 성경이 바로 보일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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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 정성구 목사 뉴욕세미나
순서대로 보시면 됩니다.
첫 동영상에는 기사에 나오지 않는 농촌교회 개척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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