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규 목사 "그리스도인들이 왜 넘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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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ㆍ2008-05-29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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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규 부르크린제일교회 목사
예수를 믿은 후에 하나님을 항상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왜 죄의 능력을 정복하지 못하고 빈번하게 실패하는가? “그 이유가 뭔가?”라고 넘어질 때마다 자주 자문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은 넘어지는 이유를 그냥 쉽게 생각해 버린다. 믿음이 부족해서 넘어지는 거라고... 혹은 천성적인 연약함 때문이나 사단의 속임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때로는 신앙의 거장들이 크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게 된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도 한 때에는 남의 아내를 빼앗고 충성된 부하를 전장 일선에 보내어 죽게 하는 야수 같은 이중적인 면을 볼 수가 있다.
성경은 이렇게 성도들이 넘어지는 보다 더 깊은 이유를 가르치고 있다. 엔드류 머레이가 잘 지적한대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넘어지도록 만드는 최대의 적은 바로 우리의 ‘육체’(혹은 ‘육신’)이다 (그리스도의 영, 213). 머레이는 말하기를 육체가 “어떻게 작용하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지를 아는 자는 정복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육체’란 뭔가? 이는 단순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타락한 인간성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타락한 지성, 타락한 감성, 타락한 의지를 포함한 우리의 전인을 말한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육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앙의 대가가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육신을 입고 사는 자이다.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 육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노니...” (롬 7:1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롬 8:7). 비록 믿는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원수로 행하고자 하는 육신이 우리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타락한 죄성을 지닌 우리의 육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아야 한다.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함께 거하심으로 우리의 육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타락한 육신도 함께 갖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의 육신은 마치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방심하고 손을 놓는 순간 폭발하여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상이나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위험한 적이 바로 우리 속에 함께 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육체의 위험을 모르고 있거나 혹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육체의 지혜, 육체의 의(자기 의), 육체의 행위, 육체의 욕망과 정욕을 신뢰하는 것은 십자가와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여기서 단순히 “그 정욕과 탐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육체와 함께” 이를 못 박았다는 점을 유의하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나의 가치, 나의 철학, 나의 야망, 나의 꿈, 나의 뜻은 십자가에 매달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내가 죽은 그곳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내가 죽는 역사가 예수 믿는 순간에 일어나야 할 일인데, 이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날마다 죽이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말한 것이다. 내가 온전히 죽은 곳에 온전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를 실감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탁구 자세를 교정받기 위해서 국가 대표급 선수의 지도를 한번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틀린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그런데 최고의 선수가 손을 잡고 코치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습관을 고집하고 내가 여전히 힘을 빼지 않을 때에는 자세가 전혀 교정되지 않았다. 공이 여전히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코치는 손에서 힘을 완전히 빼고 자기에게 맡기라고 강조했다. 손에서 힘을 빼고 그에게 손을 맡겼더니 공이 정확하게 들어갔고, 코치의 가이드에 따라서 새로운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
성령의 인도하심도 마찬가지이다. 내 육신이 살아 있는 한은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가 없다. 내가 나의 의지와 나의 힘과 나의 욕망을 내려놓을 때에 성령님은 나를 자신이 원하신 뜻대로 이끌 수가 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그렇게도 힘들어 보이던 율법의 모든 요구도 능히 이룰 수 있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롬 8:4).
ⓒ 2008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예수를 믿은 후에 하나님을 항상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넘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왜 죄의 능력을 정복하지 못하고 빈번하게 실패하는가? “그 이유가 뭔가?”라고 넘어질 때마다 자주 자문하곤 한다. 많은 사람들은 넘어지는 이유를 그냥 쉽게 생각해 버린다. 믿음이 부족해서 넘어지는 거라고... 혹은 천성적인 연약함 때문이나 사단의 속임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때로는 신앙의 거장들이 크게 넘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주고, 극단적인 경우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크게 가리게 된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도 한 때에는 남의 아내를 빼앗고 충성된 부하를 전장 일선에 보내어 죽게 하는 야수 같은 이중적인 면을 볼 수가 있다.
성경은 이렇게 성도들이 넘어지는 보다 더 깊은 이유를 가르치고 있다. 엔드류 머레이가 잘 지적한대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넘어지도록 만드는 최대의 적은 바로 우리의 ‘육체’(혹은 ‘육신’)이다 (그리스도의 영, 213). 머레이는 말하기를 육체가 “어떻게 작용하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지를 아는 자는 정복자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육체’란 뭔가? 이는 단순이 우리의 눈에 보이는 육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타락한 인간성 전체를 말하는 것이다. 타락한 지성, 타락한 감성, 타락한 의지를 포함한 우리의 전인을 말한다. 우리가 믿는다고 할지라도 타락한 육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앙의 대가가 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땅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육신을 입고 사는 자이다. 이 사실을 한 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바울은 성령의 영감으로 이 육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노니...” (롬 7:1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롬 8:7). 비록 믿는 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 원수로 행하고자 하는 육신이 우리 속에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한다. 타락한 죄성을 지닌 우리의 육신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잘 알아야 한다. 예수 믿은 후에 달라진 것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함께 거하심으로 우리의 육신을 통제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다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타락한 육신도 함께 갖고 있는 존재이다. 우리의 육신은 마치 안전핀이 뽑힌 수류탄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가 방심하고 손을 놓는 순간 폭발하여 우리에게 치명적인 손상이나 죽음으로 이끌고 가는 위험한 적이 바로 우리 속에 함께 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육체의 위험을 모르고 있거나 혹은 육체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육체의 지혜, 육체의 의(자기 의), 육체의 행위, 육체의 욕망과 정욕을 신뢰하는 것은 십자가와 원수로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 안에서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여기서 단순히 “그 정욕과 탐심”이라고 말하지 않고 “육체와 함께” 이를 못 박았다는 점을 유의하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이미 우리의 옛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성령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나의 가치, 나의 철학, 나의 야망, 나의 꿈, 나의 뜻은 십자가에 매달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이다. 내가 죽은 그곳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이다. 내가 죽는 역사가 예수 믿는 순간에 일어나야 할 일인데, 이것이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나 자신을 날마다 죽이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31)고 말한 것이다. 내가 온전히 죽은 곳에 온전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를 실감하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날 탁구 자세를 교정받기 위해서 국가 대표급 선수의 지도를 한번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내 손을 잡고 틀린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그런데 최고의 선수가 손을 잡고 코치를 해주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습관을 고집하고 내가 여전히 힘을 빼지 않을 때에는 자세가 전혀 교정되지 않았다. 공이 여전히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코치는 손에서 힘을 완전히 빼고 자기에게 맡기라고 강조했다. 손에서 힘을 빼고 그에게 손을 맡겼더니 공이 정확하게 들어갔고, 코치의 가이드에 따라서 새로운 자세를 배우게 되었다.
성령의 인도하심도 마찬가지이다. 내 육신이 살아 있는 한은 성령님이 역사하실 수가 없다. 내가 나의 의지와 나의 힘과 나의 욕망을 내려놓을 때에 성령님은 나를 자신이 원하신 뜻대로 이끌 수가 있다. 그리하여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성령을 따라 행할 때에 그렇게도 힘들어 보이던 율법의 모든 요구도 능히 이룰 수 있게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롬 8:4).
ⓒ 2008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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