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원 목사 "우리는 다 고슴도치와 같다"
페이지 정보
성회ㆍ2009-07-13 00:00관련링크
본문
뉴욕교협(회장 최창섭 목사)이 주최하는 개신교 최대의 연합행사인 할렐루야대회가 30주년을 맞아 개막됐다. 대회는 7월 10일(금)부터 3일간 순복음뉴욕교회(김남수 목사)에서 열렸다.
강사 이동원 목사는 첫날 "거듭남(요 3: 1-7, 14, 15)", 둘째날 "선물(엡 2: 8-9)", 셋째날 "상처입은 치유자 (마 9:35-10:1)"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동원 목사는 첫날 한시간, 둘째날과 셋째날은 40여분 말씀을 전하고 결신과 헌신을 인도했다.
다음은 마지막날 "상처입은 치유자 (마 9:35-10:1)" 라는 설교내용이다.
많은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하지만 고슴 도치는 혼자 산다. 고슴도치가 고독을 즐겨서 혼자 사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을 느끼면 무리에게 다가가지만 그들은 의도하지 않는 상처를 서로에게 주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다 고슴도치와 같다. 북미산 고슴도치만 해도 3만개의 바늘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30년만 산다고 해도 3만개 정도의 상처를 갖고 살아 간다고 볼수 있다. 옆사람을 한번 쳐다 보라. 세월의 상처가 느껴지는가?
왜 인생이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살다가 끝이 나는지. 상처의 치유자 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도 많은 상처를 받고 배반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통을 당한 분이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상처를 안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돌보신 '상처의 치유자'라 불리울 수 있다.
자신의 상처만을 주야로 묵상하며, 주일 예배가 끝나면 내려 놓은 자신의 상처를 다시 들고 나가는 분들이 있다.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의 상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치유의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치유자의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한다.
1. 상처 입은 이웃들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9장 36절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의 무리를 주목하여 보셨다.
우리는 이웃의 방황하는 자와 어려운 자들을 보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보이는가. 안보인다면 왜 안 보일까? 왜냐하면 내 상처에 빠져 살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보스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몰든 맥도날이라는 사람은 우리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두가지로 분류했다. 그 한 부류가 '쫓겨다니는 사람들'이다. 허둥지둥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사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 종류는 '소명에 의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향해 일관성있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련한 유명한 의학자이자 난치병 운동을 일으킨 에리자베스 피보로스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다. 그녀의 베스트 셀러인 '인생수업'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녀가 뉴욕에서 강연을 마치고 책의 싸인회를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렸지만 그녀는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 싸인을 하던 도중 양해를 구하고 비행장으로 향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 순간 누군가 화장실 바닥으로 책 한권을 밀어넣으며 싸인을 요청했다. 수녀님이었다. 황당해 하는 그녀에게 수녀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어이없는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그녀의 강연은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가장 친한 친구가 제일 듣고 싶어했던 강연이었으며. 수녀가 대신 듣고 책싸인도 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줄이 길어 싸인을 받지 못해 안타까웠고, 이렇게 화장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간과한 한두시간 동안에도 자신이 죽어가는 생명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한 평생 이웃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 할 수 있도록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를 기도해야 한다.
2. 상처 입은 고통을 더불어 느낄수 있는 가슴이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구절이 있다. '민망히 여기시니'를 개정판으로 보면 '불쌍히 여기시니' 이다. 이웃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통이 나의 것처럼 내 상처로 더불어 함께 느끼는 가슴이 있어야 한다.
이웃의 고통을 볼 수는 있지만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불쌍히 여기 셨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내에게 두 가지를 감사했다. 하나는 아내가 기도를 많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내의 원만한 대인관계였다. 나는 목사지만 좋은 사람은 좋고 싫은 사람은 싫은데, 아내는 싫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날 아내도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난히 많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안에 들어 있는 이름들은 아내의 스트레스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아내의 이런 기도를 듣기도 했다."우리 목사님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불쌍하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옆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라. 그리고 '불쌍하시군요'라고 말해보라. 소경의 기도를 기억하는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응답받은 세리의 기도는 어떤가. "저는 죄인이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요."
어려운 이민 생활이지만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목회자는 교우의 입장에서, 자식은 부모의 입장에 서야 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전도를 많이 하시는 미국 목사님을 알고 있다. 그분은 전도를 하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그 사람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를 먼저 한다고 했다.
어느날 식당에 갔는데 여 종업원의 형편없는 써비스를 받게 되었다. 화가 났지만 성령의 인도대로 거액 10불을 팁으로 테이블에 놓고 억울한 심정으로 나오는데 그 여인이 뒤따라 나오면서 액수가 많은데 팁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종업원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는것 같아 위로하는 마음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지난 밤에 남편이 집을 나간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마음이 가난한 여인을 위해 기도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영접을 권유했고 은혜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3. 상처 입는 이웃들을 제자 삼는 삶이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9장에 이어 10장 1절에 이어지는 중요한 본문을 보면
'추수할 것들은 많은데 일꾼이 없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불러 상처받고 방황하는 이들을 품에 안으시며 그들과 같이 계셨다. 이것이 제자의 미션이고 진정한 그리스도 제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많은 제자훈련 코스가 있다. 그 과정이 끝나면 제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예수님이 제자를 불러 함께 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을 보내어 그들도 예수님처럼 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살면서 열두사람만 제자로 삼을 수 있다면,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 아픔을 함께하며 섬길 수만 있다면 성경을 몰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이다.
열둘이 많다면 세사람, 아니 세 사람도 많다면 한 사람이라도. 성경은 한사람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만약 지구상에 자신만 혼자 살았더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 주셨을거라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감각있는 목사가 되려면 영화도 봐야 한다는 성도님의 권유로 가끔 영화를 본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유태인을 구출하는 독일인의 이야기였다. 그 독일인은 자신의 시계를 보면서 그것을 팔수 있었다면 몇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수 있었음을 자책하자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답변을 듣는다.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한사람을 만나는 것이 제자훈련의 시작이자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인 것이다.
우연히 썬데이 스쿨이라는 잡지를 사무실에서 읽게 되었다. 탐슨 선생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녀는 알라바마의 한적한 시골 중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 학교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잃어버린 한 양을 진정으로 보살피는 일을 하고 싶다는 기도를 했었다.
그녀는 반에 장기결석을 하는 학생이 있음을 알았다. 그냥 제적처리를 해도 되었지만 그녀는 장기 결석생인 학생의 집을 찾아 나선다. 바비는 엄마 없이 약물과 알콜로 쪄든 아빠와 엉망으로 살고 있었다. 한 달을 넘게 그녀는 바비집을 찾아갔고 바비에게 한 번만이라도 출석체크 시간에 바비의 대답을 들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어느 날 탐슨 선생님이 Babby라고 부르자 "Sir, I'm here" 라는 놀라운 대답을 듣게 된다. 그렇게 한 달여동안 행복한 바비의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그리고 바비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집을 찾아간 선생님은 바비가 간암의 선고를 받은 사실과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음도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 선생님은 매일 거르지 않고 병원을 찾아가 바비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러던 중 바비에게 천국과 예수님을 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수업중에 비상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병원에는 이미 가족이 다 와있었다. 탐슨 선생님은 바비를 안았고 무의식 상태속의 바비는 갑자기 눈을 뜨며 이렇게 말하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Jesus, I'm here."
ⓒ 2009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강사 이동원 목사는 첫날 "거듭남(요 3: 1-7, 14, 15)", 둘째날 "선물(엡 2: 8-9)", 셋째날 "상처입은 치유자 (마 9:35-10:1)"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이동원 목사는 첫날 한시간, 둘째날과 셋째날은 40여분 말씀을 전하고 결신과 헌신을 인도했다.
다음은 마지막날 "상처입은 치유자 (마 9:35-10:1)" 라는 설교내용이다.
많은 동물들이 무리를 지어 살아간다.. 하지만 고슴 도치는 혼자 산다. 고슴도치가 고독을 즐겨서 혼자 사는 것은 아니다. 외로움을 느끼면 무리에게 다가가지만 그들은 의도하지 않는 상처를 서로에게 주기만 할 뿐이다.
우리는 다 고슴도치와 같다. 북미산 고슴도치만 해도 3만개의 바늘이 있다고 한다. 사람이 30년만 산다고 해도 3만개 정도의 상처를 갖고 살아 간다고 볼수 있다. 옆사람을 한번 쳐다 보라. 세월의 상처가 느껴지는가?
왜 인생이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살다가 끝이 나는지. 상처의 치유자 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자. 예수님도 많은 상처를 받고 배반을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통을 당한 분이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상처를 안고 다른 사람의 상처를 돌보신 '상처의 치유자'라 불리울 수 있다.
자신의 상처만을 주야로 묵상하며, 주일 예배가 끝나면 내려 놓은 자신의 상처를 다시 들고 나가는 분들이 있다.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우리도 예수님처럼 나의 상처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치유의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오늘 마지막 시간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치유자의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한다.
1. 상처 입은 이웃들을 바라보는 눈이 열려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상처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9장 36절을 보면 예수님은 모든 약한 자들과 병든 자들의 무리를 주목하여 보셨다.
우리는 이웃의 방황하는 자와 어려운 자들을 보면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들이 보이는가. 안보인다면 왜 안 보일까? 왜냐하면 내 상처에 빠져 살고 있어서 다른 사람의 상처를 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보스톤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몰든 맥도날이라는 사람은 우리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두가지로 분류했다. 그 한 부류가 '쫓겨다니는 사람들'이다. 허둥지둥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사는 사람들이다. 다른 한 종류는 '소명에 의한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적을 향해 일관성있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는 것이다.
죽음에 관련한 유명한 의학자이자 난치병 운동을 일으킨 에리자베스 피보로스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다. 그녀의 베스트 셀러인 '인생수업'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그녀가 뉴욕에서 강연을 마치고 책의 싸인회를 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렸지만 그녀는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 싸인을 하던 도중 양해를 구하고 비행장으로 향했다. 공항 화장실에서 숨을 돌리고 있는 순간 누군가 화장실 바닥으로 책 한권을 밀어넣으며 싸인을 요청했다. 수녀님이었다. 황당해 하는 그녀에게 수녀님은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어이없는 답변을 하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그녀의 강연은 시한부 생명을 선고받은 가장 친한 친구가 제일 듣고 싶어했던 강연이었으며. 수녀가 대신 듣고 책싸인도 받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줄이 길어 싸인을 받지 못해 안타까웠고, 이렇게 화장실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하나님의 은혜일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간과한 한두시간 동안에도 자신이 죽어가는 생명을 도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한 평생 이웃의 아픔과 상처를 함께 할 수 있도록 바라보는 눈이 열리기를 기도해야 한다.
2. 상처 입은 고통을 더불어 느낄수 있는 가슴이 있어야 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라'는 구절이 있다. '민망히 여기시니'를 개정판으로 보면 '불쌍히 여기시니' 이다. 이웃의 고통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들의 고통이 나의 것처럼 내 상처로 더불어 함께 느끼는 가슴이 있어야 한다.
이웃의 고통을 볼 수는 있지만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다. 불쌍히 여기 셨다는 것이다.
결혼을 하고 아내에게 두 가지를 감사했다. 하나는 아내가 기도를 많이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내의 원만한 대인관계였다. 나는 목사지만 좋은 사람은 좋고 싫은 사람은 싫은데, 아내는 싫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느날 아내도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유난히 많은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안에 들어 있는 이름들은 아내의 스트레스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어느날 아내의 이런 기도를 듣기도 했다."우리 목사님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불쌍하지 않은 인생이 있을까? 옆사람을 가만히 쳐다보라. 그리고 '불쌍하시군요'라고 말해보라. 소경의 기도를 기억하는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응답받은 세리의 기도는 어떤가. "저는 죄인이옵니다. 불쌍히 여겨주십시요."
어려운 이민 생활이지만 아내는 남편의 입장에서, 목회자는 교우의 입장에서, 자식은 부모의 입장에 서야 한다. 상처를 치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고통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여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전도를 많이 하시는 미국 목사님을 알고 있다. 그분은 전도를 하게 해달라는 기도보다는 그 사람을 알게 해달라는 기도를 먼저 한다고 했다.
어느날 식당에 갔는데 여 종업원의 형편없는 써비스를 받게 되었다. 화가 났지만 성령의 인도대로 거액 10불을 팁으로 테이블에 놓고 억울한 심정으로 나오는데 그 여인이 뒤따라 나오면서 액수가 많은데 팁이 맞는지를 확인했다.
종업원에게 좋지 않은 일이 있는것 같아 위로하는 마음이라고 말하자, 그녀는 지난 밤에 남편이 집을 나간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고 한다. 그 목사님은 그 자리에서 마음이 가난한 여인을 위해 기도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영접을 권유했고 은혜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고 한다.
3. 상처 입는 이웃들을 제자 삼는 삶이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9장에 이어 10장 1절에 이어지는 중요한 본문을 보면
'추수할 것들은 많은데 일꾼이 없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열두제자를 불러 상처받고 방황하는 이들을 품에 안으시며 그들과 같이 계셨다. 이것이 제자의 미션이고 진정한 그리스도 제자의 의무이기도 하다. 많은 제자훈련 코스가 있다. 그 과정이 끝나면 제자가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예수님이 제자를 불러 함께 하신 궁극적인 이유는 그들을 보내어 그들도 예수님처럼 하시길 원하셨기 때문이다.
살면서 열두사람만 제자로 삼을 수 있다면, 그런 공동체를 만들어 아픔을 함께하며 섬길 수만 있다면 성경을 몰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닮은 삶을 사는 것이다.
열둘이 많다면 세사람, 아니 세 사람도 많다면 한 사람이라도. 성경은 한사람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성 어거스틴은 만약 지구상에 자신만 혼자 살았더라도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 주셨을거라는 놀라운 고백을 했다.
감각있는 목사가 되려면 영화도 봐야 한다는 성도님의 권유로 가끔 영화를 본다.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었다. 유태인을 구출하는 독일인의 이야기였다. 그 독일인은 자신의 시계를 보면서 그것을 팔수 있었다면 몇 사람의 생명을 더 구할수 있었음을 자책하자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온 세상을 구하는 것이라는 답변을 듣는다.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한사람을 만나는 것이 제자훈련의 시작이자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인 것이다.
우연히 썬데이 스쿨이라는 잡지를 사무실에서 읽게 되었다. 탐슨 선생은 독실한 크리스챤이었다. 그녀는 알라바마의 한적한 시골 중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그 학교에서 누구를 만나든지 잃어버린 한 양을 진정으로 보살피는 일을 하고 싶다는 기도를 했었다.
그녀는 반에 장기결석을 하는 학생이 있음을 알았다. 그냥 제적처리를 해도 되었지만 그녀는 장기 결석생인 학생의 집을 찾아 나선다. 바비는 엄마 없이 약물과 알콜로 쪄든 아빠와 엉망으로 살고 있었다. 한 달을 넘게 그녀는 바비집을 찾아갔고 바비에게 한 번만이라도 출석체크 시간에 바비의 대답을 들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다.
어느 날 탐슨 선생님이 Babby라고 부르자 "Sir, I'm here" 라는 놀라운 대답을 듣게 된다. 그렇게 한 달여동안 행복한 바비의 학교생활이 이어졌다. 그리고 바비는 다시 보이지 않았다. 집을 찾아간 선생님은 바비가 간암의 선고를 받은 사실과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음도 알게 되었다.
그 후부터 선생님은 매일 거르지 않고 병원을 찾아가 바비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러던 중 바비에게 천국과 예수님을 전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후 선생님은 수업중에 비상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간다.
병원에는 이미 가족이 다 와있었다. 탐슨 선생님은 바비를 안았고 무의식 상태속의 바비는 갑자기 눈을 뜨며 이렇게 말하고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Jesus, I'm here."
ⓒ 2009년 아멘넷 뉴스(USAamen.ne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