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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표상, 전 연세대 총장 박대선 목사 추모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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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10-05-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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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연세대학교 총장, 감리회 동부연회 감독 고 박대선 목사 추모기도회가 5월 17일(월) 오후 8시 후러싱제일교회(김중언 목사)에서 열렸다. 박 목사는 지난 4월 29일 94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고 박대선 목사는 연세대 총장 재임시절, 정부의 압력에도 유신을 반대하던 학생과 교수 징계에 대한 문서에 사인하지 않고 자신의 사직서에 사인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 목사는 총장직을 퇴임한 후 가난하여 거처할 집이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또 죽어서도 시신을 연대 의대 교육과 연구를 위해 내놓았다.

추모기도회는 고인과 관련된 감리교신학대학교 미동부동문회(회장 장철우목사), 연세대학교총동문회 뉴욕동문회(회장 박상수), 연세대학교신과대학동문회(회장 노순구목사), 연세대연합신학대학원동문회(회장 김정국목사), 평양성화신학교동문회(회장 함성국목사)등 5개 단체에서 공동주관했다.

1부 기도회는 인도 민병렬 목사(감신대 미동북부동문회 부회장), 성경봉독 강정숙 권사(연세대 간호대 동문), 기도 유천형 목사(협성대 미주동문회장), 특송 동문과 제자 목회자 일동, 말씀 김상모 목사(연세대 동문 목회자 회장), 축도 방지각 목사(선명회 미주회장, 연세대 동문)으로 진행됐다.

2부 추도식은 사회 윤사무엘 목사(연세대 동문목사회 총무), 고인에 대한 묵념, 약력소개 김영호 목사(연대신과 동문), 추모사, 조가 박명숙 동문(연세대 음대), 광고 송성모 목사(감신대 미동북부 동문회 총무대리), 축도 박정찬 감독(UMC 뉴욕연회 감독, 감신대 동문)으로 진행됐다.

추모사는 김한중 총장(연세대) 노순구 목사(연대신과대 동문회장) 대독, 김해종 목사(전 UMC 펜실바니아 연회 감독, 감신대 동문), 김관선 목사(육군 군종감, 평양성회신학교 동문), 함성국 목사(전 연대신과대학장, 평화성화신학교 동문)가 했다.

1.
말씀 김상모 목사(연세대 동문 목회자 회장)

성경은 핵심은 부활과 영생이다. 박 목사는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곳에서도 부활과 영생의 복음을 전하고 헌신의 흔적을 남기신 분이다.  박 목사의 부활과 영생의 정신으로 추모하고 미래에 대한 도전과 비전을 기념하는 것이 후배가 할일이다. 박 목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6개 단체 후학들이 모였다.

2.추모사 노순구 목사(연대신과대 동문회장)

박대선 총장이 김찬국 교수와 김동길 교수와 15명 학생을 복직과 복학을 시키는데 사인하고 자신은 사임서에 사인을 하고 대학을 나왔다. 김찬국 교수는 시험때 부정행위를 하던 학생을 데리고 학적과에 가서 제적을 시켰다. 김동길 교수 부정행위를 하던 학생을 나오라고 해서 보고하던 노트로 머리를 몇차례 치더니 들어가라고 했다. 불의를 보고 대하는 모습이 달랐지만 참으로 의로운 분들임을 느꼈다.

박대선 총장의 아들이 경영대학원에 시험을 쳤는데 작은 차이로 떨어졌다. 교수회의에서 총장의 아들을 합격시키자고 건의했으나, 박대선 총장은 거절했다. 그래서 아들은 다른 대학을 다녔다. 연대를 사임하고 거처할 곳이 없었다. 그래서 원일한 연세대학교 재단이사가 자택을 구해주었다. 소천한 박 총장은 자신의 육신을 연대 의과대에 연구하도록 주셨다. 그래서 영정사진만 가지고 장례식을 했다.

평상시에 목사가 되는 것이 대통령이 된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 당장 그만두라고 말했다. 항상 의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의인의 강력한 영향력이 연대 학생들에게 알게 모르게 퍼져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의를 감사하고 박대선 총장을 아쉬워 하는 마음이 있다.

3.
추모사 김해종 목사(전 UMC 펜실바니아 연회 감독, 감신대 동문)

개인적으로 친밀한 관계에서 얻었던 몇가지를 말하겠다. 박대선 교수님은 55년도 박사학위를 마치고 감신에 왔는데 내가 55학번으로 감심에 들어갔던 해이다. 부부가 둘이다 제자가 되어 많은 것을 배웠다. 유학을 와서 공부를 했는데 백대선 목사의 영향이 컸다.

총장과 감독으로 알기보다는 선생으로 아는 관계이다.  그래서 박 목사님이 소천하자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은 외람되게 교수님을 모시고 영화구경을 갔다. 나중에 보니 교수님이  주무시고 있었다. 따뜻하고 친근하고 겸손하신 분이다.

그분의 특징이 구원의 복음으로 예수를 증거하시는 분이다. 강의를 하다가 구원이라는 말을 할때 '쌀베이션'이라고 발음하던 것이 떠오른다. 그소리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박대신 목사가 현직에 있을때 축도를 할때 자꾸 손이 내려가 늙어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대선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요.

4.
추모사 김관선 목사(육군 군종감, 평양성회신학교 동문)

박대선 목사님의 수제자라고 나서는 사람도 많았지만, 나도 못난 제자임을 밝힌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49년 이른봄에 평양 남산의 성화신학교의 문을 두들겼다. 그곳에서 내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두분을 만았다.

당시 교장이었던 배영덕 목사와 박대선 목사였다. 박 목사는 당시 교수로 있었다. 해방전에 일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30대후반의 엘리트 교수였다. 그런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확인하는 기회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학생들에게 엄하게 하고 봐주지 않는 분이다. 그런데 박 목사를 경험한 선배는 "엄한것 같지만 자상하고 학생들을 경제적으로 돕는다"고 전해 주었다.

1949년 12월, 성탄절 예배는 평양성에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신학교 성가대가 메시야를 전곡을 불렀다. 음악을 잘 몰랐고, 더우기 공산치하인 평양에서 메시야를 부른것도 귀했다. 학생들은 서툰 솜씨로 성탄절 저녁에 메시야를 공연했다. 반주를 맡으신 분이 박대선 목사의 부인이다. 당시 반주할수 있는 분은 희귀했다. 그래서 박 목사를 다시 우러러 보았다.

49년 12월 성탄축하예배에서 성화신학교는 배덕영 목사가 행방불명 영영 돌아오지 않는 슬픈 사건이 터졌다. 그래서 교장자리를 박대선 목사가 맡았다. 장장 폐교하라고 압력이 들어왔지만 안된다고 떼를 썼다. 박 목사는 유도선수이다. 앞에서면 압도를 당한다.

한국전쟁의 터지고 12월에 대구까지 걸어 왔다. 그런데 박 목사는 평양에 군용기로 대구까지 날라서 피난왔다. 52년 육군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육본 군목실장인 박 목사가 사람을 보내 소식을 전해주었다. 박 목사는 제 뒷배경이 됨이 마음이 든든했다.

이후 박 목사는 기독교대한감리회 동부연회 감독이었으며, 나는 연회원이었다. 그래서 가끔 뵈었다. 박 목사가 빨간 박사가운을 입고 채플을 인도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나에게는 선망의 인물이었다. 저는 오랜 군생활을 마치고 박 목사의 부름을 받았다.

박 목사는 나와 교회를 하자고 했다. 너무나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민이 계획되어 있어 도망치듯이 미국으로 왔다. 이자리에 서게 된것인 그때 박 목사에 잘못한일을 이실직고 하라는 것이다. 실토한다. 박 목사는 국가가 어려울때 후진들에게 정신적인 버팀목이고  언덕이고 뒷배경이 되어 주신 분이다. 개신교 역사에 길히 남을 스승이고 큰별이다.

5.
추모사 함성국 목사(전 연대신과대학장, 평화성화신학교 동문)

남과북이 갈라진 상황의 평양에 감리교 지도자들이 감리교회를 어떻게 할것인가가 큰 과제였다. 그래서 생각끝에 여자성경학교 교사하던 배덕영 목사가 교장을 박대선 목사가 교감을 맡고 공산치하이지만 신학교를 열었다. 기독교 학생들 모두 포함해서 6백여명의 학생들이 조그마한 성경학교에 모여 들었다. 신학생 학생이라기 보다는 공산주의 학교에서 쫓겨난 기독교 학생이 모여 공부했다.

교장 배영덕 목사님이 실종하고 보안국 사람들이 박재선 총장을 때리며 성화신학교를 폐교하고 평양신학교와 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박 목사는 그렇게 못한다고 버텼다. 결국 50년 2월, 창립 4년 9개월만에 성화신학교가 폐교되고 교수와 6백여명이 학생이 탄압으로 흩어졌다. 열심히 교회를 신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에는 두 목사들의 공로가 있었다.

박대선 목사는 학자이지만 세상의 권력앞에 강하게 서신 분이었다.  75년 연세대 총장으로 할때 유신헌법 반대 학생과 교수때문에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박 총장은 사직서를 내고 연대를 떠났다.  박정희 정권이 박 총장의 재정적인 부정을 조사했으나 깨끗했다. 총장 관저에서 나갈때에는 전세를 얻을 돈도 없어서 고생했다. 성화신학교 폐교와 연세대학교 총장 사퇴를 보면서 박 목사는 강직하고 권력을 가진자에 힘차게 맛서는 진리와 정의의 편에서 서신 분이다. 하나님의 특권으로 생각하지 않고 예수처럼 고통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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