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종은 목사 "건강한 교회를 향한 3가지 방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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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0-05-1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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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회에서 분쟁이 생겼다. 분쟁의 이유는 본당 바닥의 카페트 색깔을 빨간색으로 할지, 파란 색깔로 할지를 놓고 격론을 벌이다 편이 갈린 것이다. 어떤 교회는 예배시간에 드럼을 치느냐, 마느냐가 이슈가 돼서 싸움이 벌어지기도 한다. 종탑을 세우는 문제로 교회가 갈라진 곳도 보았다. 물론 이런 것들은 교회분쟁의 표면적인 이유일뿐이지, 그 이면에는 다른 근본적인 동기가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교회분쟁의 이슈는 대체로 시시하고 유치한 것들인 경우가 많았다.
교회가 수준높은 고민을 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해야지, 유치하고 시시한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벌인다는 것은 좀 우스워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치한 문제를 가지고 분쟁하는 교회가 반드시 있어야 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정답은 “그렇다”이다. 아무리 오늘날 교회가 문제가 많고, 분쟁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교회외에는 위탁하신 일이 없고,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해나가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기대와 사명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는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 이 시대에 적지 않은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건강한 교회로 바로 서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잘못 되었다면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하는가?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기 위한 성도들의 물음과 고민이 많아진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인터넷의 각종 기독교 사이트들의 주된 주제는 “건강한 교회”에 대한 토론이다. 건강한 교회라는 이슈는 결국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병들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목회직 세습, 재정의 불투명, 성직의 귀족화, 담임목사의 일인독재, 교회직분의 권력화, 기복주의, 성장주의, 교회간 경쟁, 교파간 분열, 무허가 신학교의 난립, 배타적, 공격적 선교방식, 타종교비하, 도덕적 타락등등등....참 많은 영역에서 교회의 문제들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아프고 부끄럽지만, 이런 우리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드러낼 때 바로 그곳에서부터 회복과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환자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메스를 대고 수술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도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힘들어도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적 생동력과 전도의 뜨거운 열정이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원동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의 성장위주의 목회보다는 바른 방향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뜨거운 열정과 열심이 있어도, 추구하는 방향이 틀렸다면 블행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을 향해 나가는 일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교회는 규모가 큰 교회가 아니라, 바른 신학위에 세워진 교회,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건강한 교회가 필요하고 이것은 오늘 이 시대와 사회가 기독교에 요구하는 가장 큰 도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건강한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교회를 건강하다고 하는가?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기 위한 방향을 세가지 측면에서 모색해 보고자 한다.
첫째, 건강한 교회는 세상에 관심을 갖는 교회다.
교회가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교회가 100명되고, 1000명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일 뿐이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치유되고, 변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일 뿐이다. 그 교회가 사회와 역사속에서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느냐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교회와 성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병든 세상을 위해 오셨다. 만약 매년 예산을 늘려나가는 것이나 교회당을 증축하고, 세우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린다면 교회는 희망이 사라질 것이다. 교회의 궁극적인 관심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맞추어져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다. 부수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일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많은 교회들이 갖는 분쟁의 이슈을 보라. 솔직히 다 부수적인 것들이다.
오늘 이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분쟁으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는 이유는 결국 부수적인 것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본질은 어떻게 생명을 구할 것이냐에 맞추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는” 목적이었다. 교회의 고민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죽어가는 한 생명,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최대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부수적인 것을 추구하면 분쟁이 되지만, 본질에 집중하고, 본질을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면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다.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오늘 우리시대의 교회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아니라 교회에 맞추어져 있다. 교회의 눈이 세상을 향하지 않고, 스스로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형교회의 한주간 프로그램이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제자훈련, 사도훈련, 바나바교육, 전도폭발, 구역장교육, 성서대학, 금요철야등등등....성도들의 신앙교육과 훈련, 영적생활을 돕는 유익한 프로그램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살아버리면 언제 세상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이다. 한주간 빈틈을 주지 않는 빽빽한 스케줄로 운영되는 교회들을 보면 마치 세상과 분리된 폐쇄적인 교회로 보일 때도 있다. 물론 늘 교회안에서 살면 안전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참 성도는 세상을 향해 모험적인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과거 부목사시절에, 어떤 분은 아예 교회로 출근을 한다. 하루종일 교회에 나와 있는 것이다. 교회가 집이고, 집이 교회이다. 이것이 참 신앙인인가? 참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일주일 내내 교회생각만 하고, 자나깨나 교회걱정만 하는 것이 참 신앙이 아니다. 참신앙인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소금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어둠의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세상가운데 주님의 빛을 드러내고, 어떻게 하면 세상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 것인가를 기도하고 고민하며,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교회일을 치열하게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인가? 아니다. 그는 단지 교회생활에 익숙한 사람이 될 뿐이다. 참 신앙인은 세상에 관심을 갖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영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관심을 세상으로, 성도들의 발길을 세상으로 향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즐거움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갖으라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오로지 자신의 교회에만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세상에 관심을 갖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나의 기도가 필요한곳, 나의 손길과 도움, 희생이 필요한 곳을 찾고, 그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사랑이 들어가면 예수의 생명이 살아난다.
둘째, 건강한 교회는 스스로 갱신하는 교회이다.
현대판 마틴루터라고 불리는 한스큉이라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교회는 절대적으로 고정된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안에서 그리고 현실속에서 늘 새롭게 적응해 나가야 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재의 상황에서의 출발이며, 과거의 뿌리와의 조화이며, 미래의 교회상의 추구인 것이다. 초대교회는 오늘날 교회의 이상형이 될 수 없다. 신약성서의 교회는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훌륭한 것이지 현대에도 초대교회를 원리와 원칙으로 여길 수는 없다. 초대 교회를 그대로 본뜰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맞게 변형시켜 적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교회의 원형이었던 초대교회도 불완전한 교회였고, 지금까지 인류역사상 완벽한 교회는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불완전했고, 문제투성이였다. 불완전한 교회,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할 이유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적인 상황과 요구에 따라서 스스로 변화의 노력을 해야 한다. 왜? 불완전하니까...
지난 2천년동안의 교회사를 보면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의 노력을 거듭해 왔음을 발견한다. 제도나 의식, 조직, 교회의 직제도 끊임없이 바뀌었고, 성서를 해석하는 신학사상도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었다. 카톨릭과 개신교로 크게 구분은 되지만, 오늘날 기독교안에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갈라진 교파들만 봐도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역사적으로 교회안에 있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새롭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 교회의 완성은 지상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곧 성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은 다 바뀔 수가 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변의 진리인 성서이외에 무엇인가를 절대화시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들은 특정한 교리와 조직, 신학과 헌법을 가진 교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그런 것들을 성서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시하고, 절대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말씀의 본질은 사라지고, 율법이 남게되는, 다시말해 유대인들의 율법시대가 교회에 재현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깨고자 하셨던 율법이 교회의 발목을 잡는 불행한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불변하는 절대적 가치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 한국교계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중의 한분이셨던 이재철 목사님이 소속교단에서 면직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오늘 이 시대의 교계가 얼마나 권위적이고, 정치적이며, 폐쇄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이재철 목사님이 장로와 권사 호칭제를 시작하면서 발생한다. 나이가 만 60세가 넘고, 집사로 임명된 지 7년 이상되신 분들을 남자는 장로, 여자는 권사로 부르기로 자체 정관을 만든 것을 두고, 교단에서는 교단헌법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면직처분을 내린것이다. 웃기는 것은 이 사건이후에 이재철 목사님이 사도신경 해석에 대한 문제로 이단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코메디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신학적인 논쟁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인 처벌이라는 것이다.
당시 이재철 목사님은 장로 권사 호칭제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그릇된 제도를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진짜 예수쟁이로 생을 마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계급화 되고 권력화 된 장로, 권사 제도에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이 실험은 결국 교단의 헌법에 가로막혀 목사직이 박탈되고, 이단으로 고발되는 사태에 이른다. 갱신을 위한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교단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 사건은 전통과 율법은 항상 새로운 변화과 갱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생명을 상실한 부분들은 과감히 변화시켜야 한다. 율법과 전통의 틀을 넘어서는 갱신의 노력없이 교회는 새로워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되는 교회이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성도인가? 장로인가? 목사인가? 절대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주인되는 교회는 무너진다. 교회의 주인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다. “내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그 누구의 집도 아니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충성하며, 헌신하는 일외에 그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도의 본문은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그뿐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집에서 자기의 뜻을 가지고 주인노릇하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말은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인간이 주인노릇하던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돌려드리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운영의 주체는 될 수 있지만, 주인은 될 수 없다. 단지 잠시 위탁받은 청지기일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져야할 의식은 청지기 의식이다. 맡은자 의식이다. 주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뜻에 따라 잘 관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청지기의 눈과 귀는 늘 예민하게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교회를 맡겨주신 주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무릅ㅤㄲㅜㄶ어야 한다. 주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성령께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마음을 다해 주님께 나가야 한다.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고집, 나의 계획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이 마음이 없이 분주하게 내 머리가 돌아가고, 내 손과 발이 움직일 때, 바로 그 때 교회는 위기앞에 서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에, 영적인 교통하심이 없이 움직일 때 문제가 일어나다.
우리는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집에 서 있다. 우리가 선 바로 이곳이 거룩한 땅이다. 이 거룩한 땅에서 우리의 신을 벗어야 합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우리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나를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마음의 자세없이 움직일때 우리의 욕심과 계획에 따라 실패하는 길을 걷고 말 것이다.
세상에 관심을 갖는 교회, 스스로 갱신하는 교회, 하나님이 주인되는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을 위해 마음과 뜻을 모아 기도하며 노력할 때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넘치는 교회(행 9:31)로 온전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뉴욕소금교회 한종은 목사
35-56 159 St Flushing NY 11358
347-320-2889 / saltchurch@hotmail.com
홈페이지: http://nysaltchurch.com
ⓒ 2010 아멘넷 뉴스(USAamen.net)
교회가 수준높은 고민을 하고, 본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을 해야지, 유치하고 시시한 문제를 가지고 분쟁을 벌인다는 것은 좀 우스워보인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치한 문제를 가지고 분쟁하는 교회가 반드시 있어야 하느냐 하는 의문이 생긴다. 정답은 “그렇다”이다. 아무리 오늘날 교회가 문제가 많고, 분쟁이 있다 할지라도 교회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일을 교회외에는 위탁하신 일이 없고,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해나가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기대와 사명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교회로서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는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오늘 이 시대에 적지 않은 성도들이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고, 건강한 교회로 바로 서기 위한 진지한 고민과 노력을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란 무엇인가? 교회가 잘못 되었다면 무엇이 잘못되었고,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하는가? 바른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기 위한 성도들의 물음과 고민이 많아진다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인터넷의 각종 기독교 사이트들의 주된 주제는 “건강한 교회”에 대한 토론이다. 건강한 교회라는 이슈는 결국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병들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목회직 세습, 재정의 불투명, 성직의 귀족화, 담임목사의 일인독재, 교회직분의 권력화, 기복주의, 성장주의, 교회간 경쟁, 교파간 분열, 무허가 신학교의 난립, 배타적, 공격적 선교방식, 타종교비하, 도덕적 타락등등등....참 많은 영역에서 교회의 문제들이 도마에 오르고 있다.
그러나 아프고 부끄럽지만, 이런 우리의 약한 모습을 인정하고 드러낼 때 바로 그곳에서부터 회복과 치유가 시작될 수 있다. 환자가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단과 처방이 필요하고, 때에 따라서는 메스를 대고 수술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오늘 우리 시대의 교회도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로 서기 위해서는 힘들어도 새롭게 거듭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가 가진 영적 생동력과 전도의 뜨거운 열정이 한국교회를 부흥시킨 원동력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의 성장위주의 목회보다는 바른 방향을 추구하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뜨거운 열정과 열심이 있어도, 추구하는 방향이 틀렸다면 블행한 결과에 도달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바른 방향을 향해 나가는 일이다. 지금 우리 시대에 필요한 교회는 규모가 큰 교회가 아니라, 바른 신학위에 세워진 교회, 세상에 희망을 줄 수 있는 건강한 교회가 필요하고 이것은 오늘 이 시대와 사회가 기독교에 요구하는 가장 큰 도전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건강한 교회라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교회를 건강하다고 하는가?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해 나가기 위한 방향을 세가지 측면에서 모색해 보고자 한다.
첫째, 건강한 교회는 세상에 관심을 갖는 교회다.
교회가 세상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관심이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에 있지 교회에 있지 않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교회가 100명되고, 1000명되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관심일 뿐이다.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그 교회를 통해 세상이 어떻게 치유되고, 변화되고 있는지에 대한 관심일 뿐이다. 그 교회가 사회와 역사속에서 어떤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느냐에 대한 관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이유는 교회와 성도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사랑때문이었다. 예수님은 병든 세상을 위해 오셨다. 만약 매년 예산을 늘려나가는 것이나 교회당을 증축하고, 세우는 것이 목표가 되어 버린다면 교회는 희망이 사라질 것이다. 교회의 궁극적인 관심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맞추어져야 한다. 그 외의 것들은 다 부수적인 것이다. 부수적인 것에 목숨을 거는 일은 어리석은 선택이다. 많은 교회들이 갖는 분쟁의 이슈을 보라. 솔직히 다 부수적인 것들이다.
오늘 이 시대에 많은 교회들이 분쟁으로 인해 아픔과 상처를 경험하는 이유는 결국 부수적인 것에 목숨을 걸었기 때문이다. 본질은 어떻게 생명을 구할 것이냐에 맞추어져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양들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시려는” 목적이었다. 교회의 고민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죽어가는 한 생명,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최대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부수적인 것을 추구하면 분쟁이 되지만, 본질에 집중하고, 본질을 위해 고민하고 기도하면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다. 본질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오늘 우리시대의 교회의 관심은 어디에 있는가? 세상이 아니라 교회에 맞추어져 있다. 교회의 눈이 세상을 향하지 않고, 스스로를 향해 있다는 것이다. 어떤 대형교회의 한주간 프로그램이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예배, 제자훈련, 사도훈련, 바나바교육, 전도폭발, 구역장교육, 성서대학, 금요철야등등등....성도들의 신앙교육과 훈련, 영적생활을 돕는 유익한 프로그램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중요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렇게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살아버리면 언제 세상을 위해 사는가라는 질문이다. 한주간 빈틈을 주지 않는 빽빽한 스케줄로 운영되는 교회들을 보면 마치 세상과 분리된 폐쇄적인 교회로 보일 때도 있다. 물론 늘 교회안에서 살면 안전해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참 성도는 세상을 향해 모험적인 삶을 사는 존재들이다.
과거 부목사시절에, 어떤 분은 아예 교회로 출근을 한다. 하루종일 교회에 나와 있는 것이다. 교회가 집이고, 집이 교회이다. 이것이 참 신앙인인가? 참 신앙인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일주일 내내 교회생각만 하고, 자나깨나 교회걱정만 하는 것이 참 신앙이 아니다. 참신앙인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소금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이다. 어둠의 세상에 빛을 비추는 사람이다. 어떻게 하면 세상가운데 주님의 빛을 드러내고, 어떻게 하면 세상속에서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 것인가를 기도하고 고민하며,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고, 교회일을 치열하게 열심히 한다고 그것이 경건하고 거룩한 삶인가? 아니다. 그는 단지 교회생활에 익숙한 사람이 될 뿐이다. 참 신앙인은 세상에 관심을 갖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로 영향력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관심을 세상으로, 성도들의 발길을 세상으로 향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와 즐거움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관심을 갖으라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오로지 자신의 교회에만 지나치게 관심이 많다. 세상으로 눈을 돌리고, 세상에 관심을 갖는 성도들이 되어야 한다. 나의 기도가 필요한곳, 나의 손길과 도움, 희생이 필요한 곳을 찾고, 그곳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것이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사랑이 들어가면 예수의 생명이 살아난다.
둘째, 건강한 교회는 스스로 갱신하는 교회이다.
현대판 마틴루터라고 불리는 한스큉이라는 신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 “교회는 절대적으로 고정된 정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역사안에서 그리고 현실속에서 늘 새롭게 적응해 나가야 하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현재의 상황에서의 출발이며, 과거의 뿌리와의 조화이며, 미래의 교회상의 추구인 것이다. 초대교회는 오늘날 교회의 이상형이 될 수 없다. 신약성서의 교회는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훌륭한 것이지 현대에도 초대교회를 원리와 원칙으로 여길 수는 없다. 초대 교회를 그대로 본뜰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에 맞게 변형시켜 적용하여야 하는 것이다.”
교회는 애초부터 완벽하지 않았다. 교회의 원형이었던 초대교회도 불완전한 교회였고, 지금까지 인류역사상 완벽한 교회는 단 하나도 없었다. 모두가 불완전했고, 문제투성이였다. 불완전한 교회, 바로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교회가 끊임없이 변화되어야 할 이유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새로운 시대적인 상황과 요구에 따라서 스스로 변화의 노력을 해야 한다. 왜? 불완전하니까...
지난 2천년동안의 교회사를 보면 교회는 끊임없이 스스로 변화의 노력을 거듭해 왔음을 발견한다. 제도나 의식, 조직, 교회의 직제도 끊임없이 바뀌었고, 성서를 해석하는 신학사상도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되었다. 카톨릭과 개신교로 크게 구분은 되지만, 오늘날 기독교안에 수없이 다양한 모습으로 갈라진 교파들만 봐도 얼마나 많은 변화들이 역사적으로 교회안에 있어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새롭게 만들어져 가고 있다. 교회의 완성은 지상교회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 곧 성서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은 다 바뀔 수가 있는 상대적인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불변의 진리인 성서이외에 무엇인가를 절대화시키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작업이다.
특별히 오늘날 교회들은 특정한 교리와 조직, 신학과 헌법을 가진 교단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그런 것들을 성서의 가르침보다 더 중요시하고, 절대화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말씀의 본질은 사라지고, 율법이 남게되는, 다시말해 유대인들의 율법시대가 교회에 재현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깨고자 하셨던 율법이 교회의 발목을 잡는 불행한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불변하는 절대적 가치이며, 다른 모든 것들은 변할 수 있는 상대적인 것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은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얼마전 한국교계에서 존경받는 목회자중의 한분이셨던 이재철 목사님이 소속교단에서 면직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오늘 이 시대의 교계가 얼마나 권위적이고, 정치적이며, 폐쇄적인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이재철 목사님이 장로와 권사 호칭제를 시작하면서 발생한다. 나이가 만 60세가 넘고, 집사로 임명된 지 7년 이상되신 분들을 남자는 장로, 여자는 권사로 부르기로 자체 정관을 만든 것을 두고, 교단에서는 교단헌법을 어지럽혔다는 이유로 면직처분을 내린것이다. 웃기는 것은 이 사건이후에 이재철 목사님이 사도신경 해석에 대한 문제로 이단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코메디같은 일이라고 말한다. 신학적인 논쟁이 아니라 일종의 정치적인 처벌이라는 것이다.
당시 이재철 목사님은 장로 권사 호칭제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그릇된 제도를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진짜 예수쟁이로 생을 마감하고 싶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의 계급화 되고 권력화 된 장로, 권사 제도에 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이 실험은 결국 교단의 헌법에 가로막혀 목사직이 박탈되고, 이단으로 고발되는 사태에 이른다. 갱신을 위한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교단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 사건은 전통과 율법은 항상 새로운 변화과 갱신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생명을 상실한 부분들은 과감히 변화시켜야 한다. 율법과 전통의 틀을 넘어서는 갱신의 노력없이 교회는 새로워 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건강한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되는 교회이다.
교회의 주인은 누구인가? 성도인가? 장로인가? 목사인가? 절대 아니다.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사람이 주인되는 교회는 무너진다. 교회의 주인은 결코 사람이 될 수 없다. “내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그 누구의 집도 아니고, 하나님의 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충성하며, 헌신하는 일외에 그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성도의 본문은 주인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면 그뿐이다. 성도가 하나님의 집에서 자기의 뜻을 가지고 주인노릇하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이었다. 이말은 교회의 주인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인간이 주인노릇하던 교회를 주님의 교회로 돌려드리고자 하는 운동이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운영의 주체는 될 수 있지만, 주인은 될 수 없다. 단지 잠시 위탁받은 청지기일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져야할 의식은 청지기 의식이다. 맡은자 의식이다. 주님께서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신 주님의 교회를 주님의 뜻에 따라 잘 관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청지기의 눈과 귀는 늘 예민하게 주님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교회를 맡겨주신 주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기도하고 무릅ㅤㄲㅜㄶ어야 한다. 주님의 뜻을 깨닫기 위해 우리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성령께서 말씀하시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성령께서 연약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도와주시도록 마음을 다해 주님께 나가야 한다. 나의 생각, 나의 뜻, 나의 고집, 나의 계획을 내려놓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열망을 가져야 한다.
이 마음이 없이 분주하게 내 머리가 돌아가고, 내 손과 발이 움직일 때, 바로 그 때 교회는 위기앞에 서게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기에, 영적인 교통하심이 없이 움직일 때 문제가 일어나다.
우리는 지금 거룩한 하나님의 집에 서 있다. 우리가 선 바로 이곳이 거룩한 땅이다. 이 거룩한 땅에서 우리의 신을 벗어야 합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우리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나를 복종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 마음의 자세없이 움직일때 우리의 욕심과 계획에 따라 실패하는 길을 걷고 말 것이다.
세상에 관심을 갖는 교회, 스스로 갱신하는 교회, 하나님이 주인되는 건강한 교회를 세워나가는 일을 위해 마음과 뜻을 모아 기도하며 노력할 때 교회는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가 넘치는 교회(행 9:31)로 온전히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다.
뉴욕소금교회 한종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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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 http://nysaltchu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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