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철목사 "세상사람이 불러 주어야 참된 크리스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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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1-01-23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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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장로교(PCA) KEP 뉴욕시찰회 청지기 연합집회가 1월 23일(주일) 오후 5시 뉴욕남교회(박상일 목사)에서 열렸다. 1부 청지기 세미나와 2부 청지기 대각성 집회로 진행됐는데, 박상일 목사와 이정철 목사(필라제자교회)가 각 강사를 맡았다.
1부 청지기 세미나는 인도 김상태 목사(주님의교회), 찬양 연합찬양팀(인도 문정웅 목사), 강의 박상일 목사, 광고 정상철 목사(뉴욕예본교회)로 진행됐다. 만찬후 이어진 집회는 인도 오태환 목사(뉴욕은총교회), 뉴욕시찰회 소개, 특송 PCA 목사회원, 대표기도 구자범 목사(뉴욕광염교회), 특별찬양 연합성가대, 설교 이정철 목사, 중보기도 석중훈 목사(뉴욕새순교회), 특별연주 홍요한 전도사, 헌금기도 정민철 목사(뉴하트선교교회), 축도 이정철 목사로 진행됐다.
PCA교단은 1973년 보수적인 개혁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PCUSA를 탈퇴함으로 시작됐으며, 현재 1,700여 교회와 50여개의 노회로 성장됐다. 대표적인 PCA소속 한인교회로는 남가주사랑의교회와 워싱톤 중앙장로교회등이 있다. 교단내에는 350여개의 한인교회와 500여명의 한인목회자들이 가입되어 있다. PCA-KEP 뉴욕시찰지역에는 한인목회자 20여명이 가입되어 있으며 14개의 지교회가 있다.
▲말씀을 전하는 이정철 목사
이정철 목사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본문으로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이 목사는 오늘날 세상에 영향력을 잃은 교회의 모습을 조명하고, 교인들이 크리스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자신도 모르게 강도가 될수 있는 성도의 삶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풀어나갔다.
다음은 이정철 목사의 설교내용이다.
저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부탁받았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성도의 대답-전도이다.) 저에게 큰 부담이 있다. 우리는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에 살고 있다. 태어난 조국은 두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등불이었던 교회가 꺼진 등불교회가 된 이유
문제는 지난 어려운 시절에 교회는 사회의 등불이었다. 저희 아버지는 오랫전에 제과점을 운영하셔서 돈을 많이 벌었다. 어느날 아버지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이북에서 신앙생활하던 생각이 나 모든 것을 접고 목회자가 됐다. 목회자로서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었다.
그때는 교회하면 큰 등불이었다. 지금은 교회라면 불을 끄고 싶은 심정을 가지는 것이 목회자와 교인들의 마음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선교를 그렇게 많이하고 지하철마다 아파트에서 전도함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사회의 등불이 못되고 오늘도 전도라는 미명아래 사람의 손가락질을 당하는가.
오랫전에 LA 한 기독교 신문에 한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목사가 식당을 하면서 아침에 사용한 설거지 물을 저녁까지 버리지 못하게 하고 반찬도 재사용하는 것을 보고 주방에서 일하는 여성도가 보다못해 신문사에 고발을 한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왜 예수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씁슬해 졌다.
성경을 읽을때 순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직분을 받을때 우리교회는 9가지 서약을 한다. 본인이 한가지씩 사인하고 최종 결정하여 목회자에게 보내면 서리집사로 임명한다. 그것에는 보통교회 장로가 할일이 적혀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성도 한분 한분이 저희교회 얼굴이다. 그분이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하면 교회가 아름다운 소문이 나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 교회전체 얼굴에 먹칠을 한다.
선교와 전도하기 전에 해야 할 일
성경에 보면, 에베소서 4장 11-12절(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을 보면 목사의 중요한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다음에 봉사가 나온다. 직분이 먼저가 아니라 성도가 온전한 사람으로 서게하는 것이 제직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다음에 그리스도 몸을 세워가는 교회로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선교와 전도를 하고, 교회가 그렇게 많음에도 세상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안에 있다. 교인들과 목회자의 모습 때문이다. 이것에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선교해도 하나님이 기쁘게 생각하지 않으실것이다.
복음서를 읽으면 주님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전도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전도도 선교도 하지 말고 직분도 받지 말라고 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전도와 선교사역을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를 안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혹시 오늘날 우리의 선교가 물거품의 선교가 아닌지 돌이켜 보라.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산에 올라가 팔복을 전하실때 무리를 짓지 않고 제자들만 들었다. 그리고 말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전도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다.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추게 하여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삶이 따라주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교회의 사명을 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시편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셨다. 솔로몬의 영화로운 제사보다, 사울의 욕심으로 하는 제사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상한 심령이다.
제직들이 교회사명을 알고 선행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로 바로 섰는가, 그리고 선교할때 선교자로 바로 섰는가를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강도는 바로 내 자신일수도 있다
본문 30절을 보면 강도가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만약에 강도가 강도짓을 하려고 한 사람의 형상속에서 창세기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았다면 강도짓을 할수 있었겠는가. 많은 사람이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니 강도짓을 한다. 주님이 말씀한 강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2천여년 전의 강도가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강도는 일반적으로 목사들의 입을 통해 악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어쩌면 여러분 자신일수도 있다. 나는 사람을 죽인적도 무엇을 뺏은적도 없는데 왜 강도냐고 할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무엇을 빼앗아야만 강도가 아니다. 교회안에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강도가 될수 있디. 나는 말한마디를 던진것 같지만 그 사람의 심장은 비수에 찔릴수도 있다.
성가대 지휘를 잠시 한 적이 있다. 50명정도의 성가대였는데 새벽기도에도 빠지지 않고 대부분 다 나올 정도로 참 열심히 했다. 유명 성악가를 초청하여 성가대 세미나를 했는데 이웃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 세미나가 끝나고 옆 교회 지휘자와 우리교회 성가대원 남편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었다. 성가대원 남편은 LA에서 사업을 하다 사기를 당하고 부도내고 가족들과 여기까지 왔다. 4년전 사기치고 도망간 그 사람이 옆 교회 지휘자이고 안수집사였다.
총을 들고 칼을 든 사람만 강도가 아니라 잘못된 인생관으로 이웃을 미워하고 교인들을 미워하고 심지어 내 가족에게 가슴을 아프게 하고 세상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모습이 있다면 오늘부터 강도의 모습을 가지고 주님앞에 서야 한다. 아무리 거룩한 채 하더라도 아무리 의로운 채 하더라도 내 심정을 궤뚫어 보시는 하나님앞에서 나는 강도였음을 고백해야 한다. 자신이 강도임에도 예배를 드리고 제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교하고 전도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강도가 아닌가. 하나님앞에 강도의 모습으로 선 적이 없는가 질문한다.
예배를 통한 삶의 변화
31-32절을 보면 강도만난 사람을 못본채 지나간 인물 두사람이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원어를 보면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피해간 것이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 직분은 돈을 주고 사고 팔았다. 일년을 제사장하면 일생을 먹을 돈이 생겼다. 말씀이 없고 사랑이 없고 사회의 지위를 가지고 제사장을 산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겠는가.
제사장은 오늘날 목사와 같다. 레위인은 장로 집사 정도 되는 사람이다. 그들은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지도자이다. 그들을 돕고 사랑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피해서 도망갔다.
그들은 왜 도망갔는가. 제가 오늘 대표기도하고 설교하고 사회를 보아야 하므로 바쁘고 그것을 중요해서 그냥갔다고 이야기할수도 있다. 그렇다.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하지만 예배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배를 두려워해야 한다. 예배는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예배를 드리고 삶의 변화가 없다면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요구하고 계시다.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수 밖에 없다. 예배후 삶의 변화없이 한주를 살다가 다시 교회에 와 예배드리면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그런 상태로는 선교도 전도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신다.
참된 예배의 의미는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가 다음 주일까지를 참된 예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한시간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삶속의 변화를 가지고 가정과 사업체등 모든 내 영역에서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예배이다.
평신도 생활을 하면서 토요일 밤이면 낚시를 하고 새벽 4시에 집에 돌아와 준비하고 아침 8시까지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교사회의를 인도하고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을 했다.
문제는 주일 아침에 아내와 자주 다툰다. 집사람은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면 좋겠는데 남편이 밤새도록 낚시하다가 눈이 발개져서 성가대에서 조는 것이 못마땅했다. 은혜가 없을때이니 설교에 은혜도 못받고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싸우고 아침 8시 교회에 들어갈때는 해맑은 모습으로 들어간다.
예배는 삶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의 열매이다. 지난 한주간 이렇게 했습니다. 이 열매를 받으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높인다고 하면서 실제로 삶은 안그렇다.
성가대 지휘를 할때마다 못된 버릇이 있다. 나의 예배는 성가대 순서를 마칠때 끝난다. 다음 순서는 신경을 안쓴다. 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어느날 성가대 지휘를 마치는데 가슴에 치는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오늘 과연 내가 몇사람의 찬양을 들은 것 같느냐" 라는 음성을 주셨다. 성가대원은 50명인데 세다보니 4명까지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마음에 부담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내 찬양을 받으실까, 목소리가 아니라 성가대 마음속에 삶의 변화를 있는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는가,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찬양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그랬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좋아하신다.
세상사람이 불러 주어야 참된 크리스찬
한가지 근본적인 말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저는 지금도 다른 목사와 이메일이나 전화할때 '이정철 목사'라는 말을 잘 사용안한다. 목사는 목사라고 스스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불러주어야 한다. 내 스스로 목사라고 하면 안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크리스찬이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목사는 목사다워야 목사이며, 장로 권사 집사도 다 마찬가지이다. 제사장다워야 제사장이다. 스스로 어떻게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강도를 만난 사람을 피해 도망갈 수 있겠는가.
김혜자 권사를 통해 어떤 중견 여 달렌트가 큰 도움을 받았다. 어려울때 김혜자 권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거액을 그냥 주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도 안했다. 최근 그분의 간증을 들으니 시장에 가서 할머니나 힘든 분이 장사하면 자신은 필요없지만 무더기로 물건을 구입해서 집으로 가져와 아는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크리스찬이다.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러주는 것이 크리스찬이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교인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 안된다. 예수를 안믿는 사람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크리스찬이라고 불러주어야 한다. 집사다우면 집사라고 안해도 사람들이 집사라고 이야기한다. 목사다우면 사람들이 목사라고 불러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이야기 해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아니라 다른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크리스찬이라고 불러주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헌금하고 목숨을 걸고 선교지에 나가면 '미친 놈'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변화가 있고 확실히 달라지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저 사람 정도면 교회가 세워질 이유가 있다고 증언 할것이다.
하나님께서 최고 관심이 있으신 것은?
저는 여러분에게 착한일을 하자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안 이야기할때 제자들이 기절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사마리안들은 선한사람이 아니기에 그렇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가 임할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 그곳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여행하다가 가버려도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도와줄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지 결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사마라아 사람이 등장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님을 보내시고 이 말을 하시는 이유는 중요하다.
하나님은 목사라는 직함에는 관심없음을 의미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20-30년 예수믿은 것에 관심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태신앙이고 아버지가 목사인 것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다고 하신다. 중요한 것은 지금 지위 학력 사업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주님이 보고 계신다.
엣날 아버지가 장로였을때 심방하고 목사님에게 보고하고, 새벽 4시30되면 교회나가 종을 치는 일을 했다. 나는 지금도 장로가 그런일을 하는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큰교회 가서 장로들과 목회하니 답답하다. 종도 안치고 심방도 안가고 회의만 하려고 한다. 그래도 장로라고 한다. 그것이 열불이 나는 것이 제 심정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신다. 하나님이 직분을 주실때는 감당할 능력도 주셨는데 너무 우리 생각대로 산다.
강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것인가
사마리안의 모습을 보면 그에게는 뜨거움이 있었다. 볼수 있는 눈이 있고 가슴이 있었다. 그냥 안가고 도와주려는 희생하는 모습이 있었다. 오늘 말씀속에서 우리가 눈을 조금만 다시 돌리고 가자. 강도 맞은 사람이 우리눈에 지금 보이고 있는가. 이시간에도 가족이라는 강도를 만나 아픈 사람이 있을수 있다.
저는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 예배도 정확히 시작하고 심방도 5분 이상 안기다린다. 식사약속도 10분만 기다린다. 시간에 철저하다 보니 새벽기도에도 집사들이 조금만 늦게 오면 불끄고 바로 기도한다. 멀리있는 성도집에 심방을 다녀오고 회개했다. 그들은 고속도로 30분거리를 달려 새벽기도에 참가한다. 몇분을 못기다려 불꺼지고 기도하면 얼마나 집사가 힘든지 몰랐다. 잘한것 같지만 교인 한사람이 목사때문에 강도만나서 아파할수도 있다.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교인이라는 강도를 만나 힘들고 너무 아파서 구른적이 있다. 우리 삶속에 강도를 만난 사람이 많다. 눈을 돌려 한사람 한사람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왜 저사람이 아픈지 제직이라면 그 정도 마음을 써야 한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런 마음을 가질수 없다. 예수를 잘믿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할때 우리교회 근처 교회의 목사 아들이 자살했다. 목사의 자식인데 어떻게 키웠길래 자살을 했느냐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아팠다. 자살은 충동이 아니라 일주일 한달이상 계획해야 한다. 그 아이는 자살하기 전에 계속 자살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는 예배끝나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구석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누가 하나라도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면 권총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할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죽기까지 아이를 위해 기도를 안한 목사들의 책임이다. 목회자의 자녀를 위해 기도를 못했던 제직의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직분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귀한 직분을 주실때는 우리의 삶을 요구하신다. 선교와 전도, 그리고 예배를 잘해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삶에 먼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삶의 변화를 가지고 다시 한번 헌신하여 뉴욕을 변화시키는 밀알이 되겠다고 고백을 하기를 축원한다.
ⓒ 2011 아멘넷 뉴스(USAamen.net)
1부 청지기 세미나는 인도 김상태 목사(주님의교회), 찬양 연합찬양팀(인도 문정웅 목사), 강의 박상일 목사, 광고 정상철 목사(뉴욕예본교회)로 진행됐다. 만찬후 이어진 집회는 인도 오태환 목사(뉴욕은총교회), 뉴욕시찰회 소개, 특송 PCA 목사회원, 대표기도 구자범 목사(뉴욕광염교회), 특별찬양 연합성가대, 설교 이정철 목사, 중보기도 석중훈 목사(뉴욕새순교회), 특별연주 홍요한 전도사, 헌금기도 정민철 목사(뉴하트선교교회), 축도 이정철 목사로 진행됐다.
PCA교단은 1973년 보수적인 개혁신앙을 고수하기 위해 PCUSA를 탈퇴함으로 시작됐으며, 현재 1,700여 교회와 50여개의 노회로 성장됐다. 대표적인 PCA소속 한인교회로는 남가주사랑의교회와 워싱톤 중앙장로교회등이 있다. 교단내에는 350여개의 한인교회와 500여명의 한인목회자들이 가입되어 있다. PCA-KEP 뉴욕시찰지역에는 한인목회자 20여명이 가입되어 있으며 14개의 지교회가 있다.
▲말씀을 전하는 이정철 목사
이정철 목사는 누가복음 10장 25-37절을 본문으로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이 목사는 오늘날 세상에 영향력을 잃은 교회의 모습을 조명하고, 교인들이 크리스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들어 자신도 모르게 강도가 될수 있는 성도의 삶과 선한 사마리아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풀어나갔다.
다음은 이정철 목사의 설교내용이다.
저는 '교회의 사명'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부탁받았다.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성도의 대답-전도이다.) 저에게 큰 부담이 있다. 우리는 가장 많은 선교사를 파송한 미국에 살고 있다. 태어난 조국은 두번째로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등불이었던 교회가 꺼진 등불교회가 된 이유
문제는 지난 어려운 시절에 교회는 사회의 등불이었다. 저희 아버지는 오랫전에 제과점을 운영하셔서 돈을 많이 벌었다. 어느날 아버지는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이북에서 신앙생활하던 생각이 나 모든 것을 접고 목회자가 됐다. 목회자로서 우리에게 큰 믿음을 주었다.
그때는 교회하면 큰 등불이었다. 지금은 교회라면 불을 끄고 싶은 심정을 가지는 것이 목회자와 교인들의 마음이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선교를 그렇게 많이하고 지하철마다 아파트에서 전도함에도 불구하고 왜 교회가 사회의 등불이 못되고 오늘도 전도라는 미명아래 사람의 손가락질을 당하는가.
오랫전에 LA 한 기독교 신문에 한 충격적인 기사가 실렸다. 목사가 식당을 하면서 아침에 사용한 설거지 물을 저녁까지 버리지 못하게 하고 반찬도 재사용하는 것을 보고 주방에서 일하는 여성도가 보다못해 신문사에 고발을 한 것이다. 그것을 보면서 왜 예수믿는 사람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씁슬해 졌다.
성경을 읽을때 순서를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직분을 받을때 우리교회는 9가지 서약을 한다. 본인이 한가지씩 사인하고 최종 결정하여 목회자에게 보내면 서리집사로 임명한다. 그것에는 보통교회 장로가 할일이 적혀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하지 말라고 한다.
그 이유는 성도 한분 한분이 저희교회 얼굴이다. 그분이 세상에 나가 좋은 일을 하면 교회가 아름다운 소문이 나고, 이상한 행동을 하면 교회전체 얼굴에 먹칠을 한다.
선교와 전도하기 전에 해야 할 일
성경에 보면, 에베소서 4장 11-12절(11.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을 보면 목사의 중요한 목적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다음에 봉사가 나온다. 직분이 먼저가 아니라 성도가 온전한 사람으로 서게하는 것이 제직의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다음에 그리스도 몸을 세워가는 교회로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선교와 전도를 하고, 교회가 그렇게 많음에도 세상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안에 있다. 교인들과 목회자의 모습 때문이다. 이것에 변화가 없으면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선교해도 하나님이 기쁘게 생각하지 않으실것이다.
복음서를 읽으면 주님에 제자들을 부르시고 전도하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다. 그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전도도 선교도 하지 말고 직분도 받지 말라고 했다. 마태복음 3장을 보면 전도와 선교사역을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회개를 안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하는 것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혹시 오늘날 우리의 선교가 물거품의 선교가 아닌지 돌이켜 보라.
주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산에 올라가 팔복을 전하실때 무리를 짓지 않고 제자들만 들었다. 그리고 말하시기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다. 전도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부탁하신 말씀이다. 너희 빛을 사람앞에 비추게 하여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삶이 따라주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도 전도하는 것도 교회의 사명을 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다. 시편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셨다. 솔로몬의 영화로운 제사보다, 사울의 욕심으로 하는 제사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상한 심령이다.
제직들이 교회사명을 알고 선행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예배자로 바로 섰는가, 그리고 선교할때 선교자로 바로 섰는가를 조명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강도는 바로 내 자신일수도 있다
본문 30절을 보면 강도가 나타났다. 중요한 것은 만약에 강도가 강도짓을 하려고 한 사람의 형상속에서 창세기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았다면 강도짓을 할수 있었겠는가. 많은 사람이 사람을 이용의 대상으로 보니 강도짓을 한다. 주님이 말씀한 강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2천여년 전의 강도가 과연 누구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강도는 일반적으로 목사들의 입을 통해 악한 사람이라는 이야기만 들었는데, 어쩌면 여러분 자신일수도 있다. 나는 사람을 죽인적도 무엇을 뺏은적도 없는데 왜 강도냐고 할수 있다. 그러나 사람에게서 무엇을 빼앗아야만 강도가 아니다. 교회안에서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 강도가 될수 있디. 나는 말한마디를 던진것 같지만 그 사람의 심장은 비수에 찔릴수도 있다.
성가대 지휘를 잠시 한 적이 있다. 50명정도의 성가대였는데 새벽기도에도 빠지지 않고 대부분 다 나올 정도로 참 열심히 했다. 유명 성악가를 초청하여 성가대 세미나를 했는데 이웃교회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 세미나가 끝나고 옆 교회 지휘자와 우리교회 성가대원 남편이 멱살을 잡고 싸우고 있었다. 성가대원 남편은 LA에서 사업을 하다 사기를 당하고 부도내고 가족들과 여기까지 왔다. 4년전 사기치고 도망간 그 사람이 옆 교회 지휘자이고 안수집사였다.
총을 들고 칼을 든 사람만 강도가 아니라 잘못된 인생관으로 이웃을 미워하고 교인들을 미워하고 심지어 내 가족에게 가슴을 아프게 하고 세상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모습이 있다면 오늘부터 강도의 모습을 가지고 주님앞에 서야 한다. 아무리 거룩한 채 하더라도 아무리 의로운 채 하더라도 내 심정을 궤뚫어 보시는 하나님앞에서 나는 강도였음을 고백해야 한다. 자신이 강도임에도 예배를 드리고 제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선교하고 전도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강도가 아닌가. 하나님앞에 강도의 모습으로 선 적이 없는가 질문한다.
예배를 통한 삶의 변화
31-32절을 보면 강도만난 사람을 못본채 지나간 인물 두사람이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원어를 보면 그냥 지나간 것이 아니라 피해간 것이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 직분은 돈을 주고 사고 팔았다. 일년을 제사장하면 일생을 먹을 돈이 생겼다. 말씀이 없고 사랑이 없고 사회의 지위를 가지고 제사장을 산 사람이 무슨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겠는가.
제사장은 오늘날 목사와 같다. 레위인은 장로 집사 정도 되는 사람이다. 그들은 종교적이며 사회적인 지도자이다. 그들을 돕고 사랑해야 했다. 그러나 이들은 피해서 도망갔다.
그들은 왜 도망갔는가. 제가 오늘 대표기도하고 설교하고 사회를 보아야 하므로 바쁘고 그것을 중요해서 그냥갔다고 이야기할수도 있다. 그렇다. 예배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하지만 예배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예배를 두려워해야 한다. 예배는 삶의 변화를 요구한다. 예배를 드리고 삶의 변화가 없다면 예배가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반드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오늘 성경은 그것을 요구하고 계시다. 하나님 말씀으로 변화되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바른 삶을 살수 밖에 없다. 예배후 삶의 변화없이 한주를 살다가 다시 교회에 와 예배드리면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그런 상태로는 선교도 전도도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으신다.
참된 예배의 의미는 예배를 드리고 세상에 나가 다음 주일까지를 참된 예배의 시간으로 보아야 한다. 한시간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가 아니라, 삶속의 변화를 가지고 가정과 사업체등 모든 내 영역에서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예배이다.
평신도 생활을 하면서 토요일 밤이면 낚시를 하고 새벽 4시에 집에 돌아와 준비하고 아침 8시까지 교회에 가서 주일학교 부장으로 교사회의를 인도하고 교회에서 성가대 연습을 했다.
문제는 주일 아침에 아내와 자주 다툰다. 집사람은 거룩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면 좋겠는데 남편이 밤새도록 낚시하다가 눈이 발개져서 성가대에서 조는 것이 못마땅했다. 은혜가 없을때이니 설교에 은혜도 못받고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싸우고 아침 8시 교회에 들어갈때는 해맑은 모습으로 들어간다.
예배는 삶의 열매를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삶의 열매이다. 지난 한주간 이렇게 했습니다. 이 열매를 받으시기 바랍니다라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신다.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높인다고 하면서 실제로 삶은 안그렇다.
성가대 지휘를 할때마다 못된 버릇이 있다. 나의 예배는 성가대 순서를 마칠때 끝난다. 다음 순서는 신경을 안쓴다. 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어느날 성가대 지휘를 마치는데 가슴에 치는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오늘 과연 내가 몇사람의 찬양을 들은 것 같느냐" 라는 음성을 주셨다. 성가대원은 50명인데 세다보니 4명까지 줄어들었다.
그때부터 마음에 부담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내 찬양을 받으실까, 목소리가 아니라 성가대 마음속에 삶의 변화를 있는 마음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는가, 그것이 아니면 하나님은 찬양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을 그랬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좋아하신다.
세상사람이 불러 주어야 참된 크리스찬
한가지 근본적인 말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저는 지금도 다른 목사와 이메일이나 전화할때 '이정철 목사'라는 말을 잘 사용안한다. 목사는 목사라고 스스로 부르는 것이 아니다. 목사는 교인들이 불러주어야 한다. 내 스스로 목사라고 하면 안된다. 저는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크리스찬이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목사는 목사다워야 목사이며, 장로 권사 집사도 다 마찬가지이다. 제사장다워야 제사장이다. 스스로 어떻게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강도를 만난 사람을 피해 도망갈 수 있겠는가.
김혜자 권사를 통해 어떤 중견 여 달렌트가 큰 도움을 받았다. 어려울때 김혜자 권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거액을 그냥 주었다. 예수를 믿으라는 말도 안했다. 최근 그분의 간증을 들으니 시장에 가서 할머니나 힘든 분이 장사하면 자신은 필요없지만 무더기로 물건을 구입해서 집으로 가져와 아는 사람에게 나누어 준다고 한다.
그 사람들이 크리스찬이다. 내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불러주는 것이 크리스찬이다.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교인이라고 말하면 안된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 안된다. 예수를 안믿는 사람이 우리의 모습을 보고 크리스찬이라고 불러주어야 한다. 집사다우면 집사라고 안해도 사람들이 집사라고 이야기한다. 목사다우면 사람들이 목사라고 불러준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이야기 해 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아니라 다른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크리스찬이라고 불러주어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가 헌금하고 목숨을 걸고 선교지에 나가면 '미친 놈'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우리의 삶의 변화가 있고 확실히 달라지면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저 사람 정도면 교회가 세워질 이유가 있다고 증언 할것이다.
하나님께서 최고 관심이 있으신 것은?
저는 여러분에게 착한일을 하자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안 이야기할때 제자들이 기절을 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사마리안들은 선한사람이 아니기에 그렇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에게 경멸의 대상이다.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가 임할수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기대할 것이 없다. 그곳에 사는 사람도 아니고 여행하다가 가버려도 누구도 모르는 사람이다.
길에 쓰러진 사람을 도와줄 사람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지 결코 사마리아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왜 사마라아 사람이 등장했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님을 보내시고 이 말을 하시는 이유는 중요하다.
하나님은 목사라는 직함에는 관심없음을 의미하고 계신다. 하나님은 20-30년 예수믿은 것에 관심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모태신앙이고 아버지가 목사인 것이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다고 하신다. 중요한 것은 지금 지위 학력 사업이 아니라, 지금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고 있느냐를 주님이 보고 계신다.
엣날 아버지가 장로였을때 심방하고 목사님에게 보고하고, 새벽 4시30되면 교회나가 종을 치는 일을 했다. 나는 지금도 장로가 그런일을 하는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큰교회 가서 장로들과 목회하니 답답하다. 종도 안치고 심방도 안가고 회의만 하려고 한다. 그래도 장로라고 한다. 그것이 열불이 나는 것이 제 심정이다.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신다. 하나님이 직분을 주실때는 감당할 능력도 주셨는데 너무 우리 생각대로 산다.
강도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선한 사마리아인이 될것인가
사마리안의 모습을 보면 그에게는 뜨거움이 있었다. 볼수 있는 눈이 있고 가슴이 있었다. 그냥 안가고 도와주려는 희생하는 모습이 있었다. 오늘 말씀속에서 우리가 눈을 조금만 다시 돌리고 가자. 강도 맞은 사람이 우리눈에 지금 보이고 있는가. 이시간에도 가족이라는 강도를 만나 아픈 사람이 있을수 있다.
저는 시간을 정확히 지킨다. 예배도 정확히 시작하고 심방도 5분 이상 안기다린다. 식사약속도 10분만 기다린다. 시간에 철저하다 보니 새벽기도에도 집사들이 조금만 늦게 오면 불끄고 바로 기도한다. 멀리있는 성도집에 심방을 다녀오고 회개했다. 그들은 고속도로 30분거리를 달려 새벽기도에 참가한다. 몇분을 못기다려 불꺼지고 기도하면 얼마나 집사가 힘든지 몰랐다. 잘한것 같지만 교인 한사람이 목사때문에 강도만나서 아파할수도 있다.
목사들이 강대상에서 교인이라는 강도를 만나 힘들고 너무 아파서 구른적이 있다. 우리 삶속에 강도를 만난 사람이 많다. 눈을 돌려 한사람 한사람 모습을 돌아보아야 한다. 왜 저사람이 아픈지 제직이라면 그 정도 마음을 써야 한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이런 마음을 가질수 없다. 예수를 잘믿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할때 우리교회 근처 교회의 목사 아들이 자살했다. 목사의 자식인데 어떻게 키웠길래 자살을 했느냐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아팠다. 자살은 충동이 아니라 일주일 한달이상 계획해야 한다. 그 아이는 자살하기 전에 계속 자살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이는 예배끝나고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구석에서 하나님을 생각했을 것이다.
바로 그때 누가 하나라도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물어 보았다면 권총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살을 할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가 죽기까지 아이를 위해 기도를 안한 목사들의 책임이다. 목회자의 자녀를 위해 기도를 못했던 제직의 잘못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직분을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이렇게 귀한 직분을 주실때는 우리의 삶을 요구하신다. 선교와 전도, 그리고 예배를 잘해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삶에 먼저 변화가 있어야 한다. 삶의 변화를 가지고 다시 한번 헌신하여 뉴욕을 변화시키는 밀알이 되겠다고 고백을 하기를 축원한다.
ⓒ 2011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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