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샘물장로교회 현영갑 목사의 야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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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2-01-30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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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샘물장로교회(현영갑 목사)는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주제로 신년심령부흥회를 1월 27일부터 3일간 열었다. 강사는 현영갑 담임목사.
현영갑 목사는 '나를 부수고 나오라(창 28:10-22)', '믿음으로 극복하라(창 32:24-32)', '상생만이 살길이다(창 35:1-11)'이라는 3번의 설교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구약을 여행하며 야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명했다. 그리고 야곱의 신앙생활을 통해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지혜를 꺼집어 냈다.
다음은 마지막날 집회 '상생만이 살길이다(창 35:1-11)' 말씀요약이다.
"어떻게 살것인가"의 결론은 한마디로 야곱의 벧엘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4가지를 약속하시고,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3가지로 응답했다. 하나님의 약속의 네가지는 땅에 대한 약속, 자손에 대한 약속, 복의 근원되리라는 약속, 하나님이 동행하시리라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4가지 약속이 있었기에 야곱은 근심과 어려움을 이기는 근원이 되었다.
야곱은 3가지 서원을 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단을 쌓겠으며, 십일조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근원이다. 벧엘의 신앙으로 회복한다는 말은 야곱의 3가지 서원과 고백이 매일매일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근본이다. 이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된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 씨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4가지 약속을 믿고 열심히 일하며 복의 근원으로 재물을 얻었다.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천사와 싸웠다. 아직 약속들이 안이루어주셨는데 죽이시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싸운 것은 믿음이다.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백성이다. 오래된 약속을 구약이라하고, 새로운 약속을 신약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부르짖을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달라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잘믿으면 4가지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아직 안 이루어졌으니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앞에는 뻔뻔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사이이다. 좋은 말로 하면 담대함이다. 야곱처럼 뻔뻔함 즉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담대한 신앙을 가져라. 그것이 벧엘의 신앙이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 디나는 레아에서 낳았다. 하나님의 큰 뜻이 있다. 야곱의 아내가 4명이다. 믿는 사람이 아내를 4명을 두었다면 할말이 없다. 그런데 자손의 복으로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야곱이 좋아했던 여자는 라헬이다. 그런데 야곱을 속여서 못생긴 레아를 먼저 준다. 하나님은 분명히 티끌처럼 많이 후손을 주신다고 하셨다.
야곱은 싫어했던 레아와 어떻게 살겠는가.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이 하라는 데로 했다. 야곱과 레아와의 사이에 중요한 사람 2명(레위, 유다)이 나온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나는 이들이 라헬에서 나올줄 알았다. 그러나 역사에 필요한 사람은 레아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사용하는 것은 얼굴이나 지식과 상관없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기적을 이룬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를 한다. 문제가 여기서 벌어진다. 믿음은 전략이다.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겠다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타이밍, 스페이스, 속도이다. 야곱은 이것을 잘 사용했다. 야곱은 땅을 돈주고 샀지만 주위는 이방족속들이 있어 일촉즉발의 위기속에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야곱의 족속이 몰살의 위기이다.
야곱은 인생에서 가장 큰위기를 당했다. 자신과 가족들이 하나님의 사명이 다 잃게 되는 위기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때 하나님은 반드시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약속을 위해 뛰는 사람에 같이 하신다. 이것이 믿음이다. 디나의 사건을 통해 아직 죽으면 안된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 살리시고 생명을 주신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아야 할때 참고 돌아가야 할때 돌아갈줄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사울에 쫓길때 도망가서 미친척 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보고 뒤로 한발 물러설수가 있어야 한다. 믿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전략이다.
어디가 빈자리이고 헛점인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속도이다. 야곱이 타이밍을 조절하는 사람이기에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당장 일전불사르고 싶지만 참을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라고 하신다. 기다릴줄을 알아야 한다. 한 발 물러설줄도 알아야 한다. 사명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랑이 사이에 지날지라고 사명을 지킬수 있다면 살아야 한다.
함부러 생명을 굴리지 마라. 우리는 존귀한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는 귀중한 그릇이다. 우리에게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국보 1호는 사람이며, 교회의 국보 1호도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사람이 중요하다.
야곱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첫 사랑의 땅 벧엘로 돌아간다. 가끔 높은데 올라가서 세상을 볼수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첫째 이심전심을 나눌수 있는 심안, 둘째 세상을 볼수 있는 혜안, 셋째 하나님을 볼수 있는 영안, 넷째 자기를 볼수 있는 자안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전략을 세울수 있다.
가끔은 높은데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 볼수 있어야 한다. 가끔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 신앙이 처음 신앙의 약속을 이루고 있는가, 온전한 신앙을 하고 있는가, 세상에 물들어 변질되지 않는가를 되돌아 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야곱은 벧엘로 가면서 신앙의 개혁을 다시 일으킨다. 소유물중 이방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깨끗하게 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킨다. 말씀의 거울을 보아 신앙을 점검하고 벗어내야 한다. 야곱이 처음 하나님께 드렸던 3가지 약속, 벧엘의 신앙중에 아직 하나님의 집을 짓지 않았다.
하나님은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해놓고 한번도 안부르셨다. 하나님의 집을 짓기까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야곱'이라고 불렀다. 야곱이 마지막에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벧엘의 단을 쌓자 비로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다.
오늘 설교제목은 "상생만이 살길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상생하도록 하신것이다. 아직 물리칠때가 아니다. 상생할때는 상생해야 한다. 크리스찬은 상생일까 공생일까.
중국의 오행설이 있는데 상생의 기본이다. 수생목, 목생토, 토생금. 금생수. 이것이 오행설이다. 자기의 몸을 버리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상생이다. 이것과 같은 것은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성경말씀이다. 초는 자기를 녹아서 빛을 만들어 낸다. 소금도 녹아져야 제 맛을 낸다. 이것이 상생이다. 크리스찬들은 자신을 불살라 빛을 발하고, 녹아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동양철학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것이 많다.
공생은 악어와 악어새같은 것이다. 둘만 좋은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이다. 공생은 재벌이 서로 밀고 자기들 끼리 잘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공생이 아니라 상생이다. 크리스찬은 공생을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교회끼리만 같이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개교회주의로 빠진다. 큰 교회 몇개가 선교한다고 모이는 것도 공생같은 것이다. 작은교회와 큰교회가 상생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언제까지 악어와 악어새만 살것인가. 상생해야 한다.
자본논리로 미국의 인구 1%가 부의 23%를 차지한다. 월스트릿에 정의가 없다고 데모를 한다. 잘사는 사람만 잘살게 되니 양극화가 된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가 아니다. 기독교는 상생의 문화이다. 나를 태우고 녹여야 한다. 왜 야곱이 벧엘로 다시 돌아왔는가. 상생의 삶을 살지 못해서이다. 우리는 상생해야 한다. 자기를 몸을 녹이고 태움으로 빛을 발하고, 소금으로 녹아 맛을 내는 멋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현영갑 목사는 '나를 부수고 나오라(창 28:10-22)', '믿음으로 극복하라(창 32:24-32)', '상생만이 살길이다(창 35:1-11)'이라는 3번의 설교를 통해 흥미진진하게 구약을 여행하며 야곱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명했다. 그리고 야곱의 신앙생활을 통해 "어떻게 살것인가"라는 지혜를 꺼집어 냈다.
다음은 마지막날 집회 '상생만이 살길이다(창 35:1-11)' 말씀요약이다.
"어떻게 살것인가"의 결론은 한마디로 야곱의 벧엘의 신앙을 회복하자는 것이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4가지를 약속하시고,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3가지로 응답했다. 하나님의 약속의 네가지는 땅에 대한 약속, 자손에 대한 약속, 복의 근원되리라는 약속, 하나님이 동행하시리라는 약속이다. 하나님의 4가지 약속이 있었기에 야곱은 근심과 어려움을 이기는 근원이 되었다.
야곱은 3가지 서원을 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단을 쌓겠으며, 십일조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의 근원이다. 벧엘의 신앙으로 회복한다는 말은 야곱의 3가지 서원과 고백이 매일매일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근본이다. 이중 하나라도 빠지면 안된다.
야곱은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 씨름하고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야곱은 하나님의 4가지 약속을 믿고 열심히 일하며 복의 근원으로 재물을 얻었다. 하나님의 군대를 만나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땅의 약속과 자손의 약속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기에 하나님의 천사와 싸웠다. 아직 약속들이 안이루어주셨는데 죽이시겠는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끝까지 싸운 것은 믿음이다. 약속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우리는 언약백성이다. 오래된 약속을 구약이라하고, 새로운 약속을 신약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앞에 부르짖을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달라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잘믿으면 4가지 복을 주신다고 했는데 아직 안 이루어졌으니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앞에는 뻔뻔해야 한다. 그것이 아버지와 아들사이이다. 좋은 말로 하면 담대함이다. 야곱처럼 뻔뻔함 즉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 담대한 신앙을 가져라. 그것이 벧엘의 신앙이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다. 디나는 레아에서 낳았다. 하나님의 큰 뜻이 있다. 야곱의 아내가 4명이다. 믿는 사람이 아내를 4명을 두었다면 할말이 없다. 그런데 자손의 복으로 믿음으로 보아야 한다. 야곱이 좋아했던 여자는 라헬이다. 그런데 야곱을 속여서 못생긴 레아를 먼저 준다. 하나님은 분명히 티끌처럼 많이 후손을 주신다고 하셨다.
야곱은 싫어했던 레아와 어떻게 살겠는가.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이 하라는 데로 했다. 야곱과 레아와의 사이에 중요한 사람 2명(레위, 유다)이 나온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다. 나는 이들이 라헬에서 나올줄 알았다. 그러나 역사에 필요한 사람은 레아에서 나왔다. 하나님의 사용하는 것은 얼굴이나 지식과 상관없다.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기적을 이룬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야곱의 아들들이 복수를 한다. 문제가 여기서 벌어진다. 믿음은 전략이다. 믿는다면 어떻게 살아야 겠다는 전략을 세워야 한다. 타이밍, 스페이스, 속도이다. 야곱은 이것을 잘 사용했다. 야곱은 땅을 돈주고 샀지만 주위는 이방족속들이 있어 일촉즉발의 위기속에 있었다. 만약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야곱의 족속이 몰살의 위기이다.
야곱은 인생에서 가장 큰위기를 당했다. 자신과 가족들이 하나님의 사명이 다 잃게 되는 위기속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힘들고 어려울때 하나님은 반드시 개입하신다.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 약속을 위해 뛰는 사람에 같이 하신다. 이것이 믿음이다. 디나의 사건을 통해 아직 죽으면 안된다. 사명자의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 살리시고 생명을 주신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아야 할때 참고 돌아가야 할때 돌아갈줄을 알아야 한다. 다윗이 사울에 쫓길때 도망가서 미친척 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을 보고 뒤로 한발 물러설수가 있어야 한다. 믿으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전략이다.
어디가 빈자리이고 헛점인가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속도이다. 야곱이 타이밍을 조절하는 사람이기에 살았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오늘 당장 일전불사르고 싶지만 참을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때를 기다리라고 하신다. 기다릴줄을 알아야 한다. 한 발 물러설줄도 알아야 한다. 사명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가랑이 사이에 지날지라고 사명을 지킬수 있다면 살아야 한다.
함부러 생명을 굴리지 마라. 우리는 존귀한 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있는 귀중한 그릇이다. 우리에게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국보 1호는 사람이며, 교회의 국보 1호도 사람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사람이 중요하다.
야곱은 어려움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첫 사랑의 땅 벧엘로 돌아간다. 가끔 높은데 올라가서 세상을 볼수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첫째 이심전심을 나눌수 있는 심안, 둘째 세상을 볼수 있는 혜안, 셋째 하나님을 볼수 있는 영안, 넷째 자기를 볼수 있는 자안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전략을 세울수 있다.
가끔은 높은데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 볼수 있어야 한다. 가끔 스스로를 돌아보는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내 신앙이 처음 신앙의 약속을 이루고 있는가, 온전한 신앙을 하고 있는가, 세상에 물들어 변질되지 않는가를 되돌아 볼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야곱은 벧엘로 가면서 신앙의 개혁을 다시 일으킨다. 소유물중 이방신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깨끗하게 하여 종교개혁을 일으킨다. 말씀의 거울을 보아 신앙을 점검하고 벗어내야 한다. 야곱이 처음 하나님께 드렸던 3가지 약속, 벧엘의 신앙중에 아직 하나님의 집을 짓지 않았다.
하나님은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부르겠다고 해놓고 한번도 안부르셨다. 하나님의 집을 짓기까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부르지 않으시고 '야곱'이라고 불렀다. 야곱이 마지막에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벧엘의 단을 쌓자 비로서 '이스라엘'이라고 부르셨다.
오늘 설교제목은 "상생만이 살길이다"라고 했다. 하나님의 때를 따라서 상생하도록 하신것이다. 아직 물리칠때가 아니다. 상생할때는 상생해야 한다. 크리스찬은 상생일까 공생일까.
중국의 오행설이 있는데 상생의 기본이다. 수생목, 목생토, 토생금. 금생수. 이것이 오행설이다. 자기의 몸을 버리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상생이다. 이것과 같은 것은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성경말씀이다. 초는 자기를 녹아서 빛을 만들어 낸다. 소금도 녹아져야 제 맛을 낸다. 이것이 상생이다. 크리스찬들은 자신을 불살라 빛을 발하고, 녹아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동양철학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되는 것이 많다.
공생은 악어와 악어새같은 것이다. 둘만 좋은것이다. 기브 앤 테이크이다. 공생은 재벌이 서로 밀고 자기들 끼리 잘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이 원하신 것은 공생이 아니라 상생이다. 크리스찬은 공생을 살아서는 안된다. 우리교회끼리만 같이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 개교회주의로 빠진다. 큰 교회 몇개가 선교한다고 모이는 것도 공생같은 것이다. 작은교회와 큰교회가 상생하는 기쁨을 누려야 한다. 언제까지 악어와 악어새만 살것인가. 상생해야 한다.
자본논리로 미국의 인구 1%가 부의 23%를 차지한다. 월스트릿에 정의가 없다고 데모를 한다. 잘사는 사람만 잘살게 되니 양극화가 된다. 이것은 기독교 문화가 아니다. 기독교는 상생의 문화이다. 나를 태우고 녹여야 한다. 왜 야곱이 벧엘로 다시 돌아왔는가. 상생의 삶을 살지 못해서이다. 우리는 상생해야 한다. 자기를 몸을 녹이고 태움으로 빛을 발하고, 소금으로 녹아 맛을 내는 멋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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