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일 목사 ① 바보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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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ㆍ2012-07-29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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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차 한인세계선교대회 개막예배가 7월 23일(월)부터 5일간 시카고 휘튼칼리지에서 열렸다. 26일(목) 오후 장동일 목사(후러싱제일교회)가 선택강좌를 인도했다. 1시간 10여분동안 강의는 숙연한 분위기에서 진행됐다. 한 목회자의 진솔한 고백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장 목사는 목회의 어려움과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쟁을 소개하고 바보의 우두머리이셨던 예수님을 닮는 목회를 하겠다고 고백했다. 두번에 걸쳐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강의를 하는 장동일 목사(후러싱제일교회)
질문을 하면서 시작하겠다. 교회에서 영적지도자인 목회자가 죽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사는 것이 좋은가? 목회자가 똑똑한 것이 좋은가 아니면 바보인것이 좋은가? 쉽지 않다. 바보가 좋은가. 바보같은 리더를 따라올 사람이 있는가? 쉽지 않은 토픽이다.
신약의 바보와 구약의 바보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에 바보가 나온다. 구약에는 시편 14편 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나온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 나오는 바보들에게는 하나님은 없다.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살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없어도 인생이 괜찮기에 굳이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신약 고린도전서 4장 10절에는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나온다. 구약의 바보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막사는 진짜 바보이고, 신약의 바보는 하나님을 계심을 믿고 그래서 자원해서 바보의 자리에 서있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어떤 바보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바보가 되었는가?
예수님을 닮은 목회
목회의 길을 걸으면서 경험되는 몇가지를 나누겠다. 목회를 해보니 만만치 않은 부분들이 꽤 있다. 교인들의 수많은 눈이 목사를 쳐다본다. 리더의 자리는 피라밋의 꼭대기와 같다. 아래에서 보면 꼭대기가 훤하게 보인다. 바로 그 곳에 리더가 올라가 있는 것이다. 아래에 있으면 섞여서 모르는데 리더의 자리는 항상 높은데 있어 어디서나 잘보인다. 많은 눈들을 인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많은 교인들의 의견이 다 다르다. 이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목사가 똑똑하게 인도한다고 교인들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목사가 밑으로 내려가 바보같이 죽어사는 것도 다 좋아하지 않는다.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목회일가. 이것 저것도 보고, 이런 저런 목회자도 보고, 나도 경험을 해보면서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목회방법의 결론은 예수님을 닮아서 해야 한다. 욕심없이 내 자신을 계속 낮추고 나는 없고 내 안에 예수님만 사시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잘안되어 문제이다.
바보의 우두머리 예수
사도 바울은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바드 수석졸업을 했으며 최고의 학자밑에서 수제자로 공부한 사람이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 가장 바보처럼 살았다. 바울이 평상시 생각한 세상의 권력 부유 지식은 예수님을 안 다음부터는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세상적의 눈으로 보면 이런 바보가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같은데 바울의 입에서는 항상 소리높은 찬양만 나온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분명하게 발견한것은 소명이다.
예수님을 분명하게 만나고 나니 복음이 너무나 소중한것이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십자가의 복음을 발견하고 십자가앞에 무릎을 꿇으면 바보의 자리에 서는 것이 굴욕적이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감당이 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는 모든 과정은 세상에 저런 바보가 없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진짜 바보이시다.
바보 양의 죽음
몽골선교를 매년 가는데 마지막 코스는 양을 잡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 진짜인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순종한다. 예수님을 양으로 많이 묘사를 한다. 힘센 분이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고 끌려가신 분이기 때문이다. 양을 도살장으로 데리고 오니 소란을 피웠다. 알고보니 양이 아니라 염소였다. 다시 양을 도살장에 데리고 왔는데 가만히 있는다.
양을 죽이는데 작은 칼로 손하나가 들어가 정도로 배를 짼다. 고통이 있을텐데 양은 움직이지 않고 주인만 쳐다본다. 양의 배의 찢으진 부분에 손을 집어넣고 숨을 쉬는 부분을 막는 것 같다. 양은 고통스러워도 주인만 쳐다본다. 창자가 풍선처럼 부풀어 밖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데도 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인의 뜻이라면 끝까지 순종하는 양의 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고 조금있으면 양은 눈을 감는데 죽은 것이다.
누가 찬양하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도 모르게 찬양이 나온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전에는 그냥 가사에 도취되어서 찬양을 했는데 정말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예수님은 정말 바보였다. 세상에 정말 그런 바보가 없다.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위해서 오셨으니 이런 바보가 없다. 바보의 우두머리이다. 그런데 그 분이 바보처럼 행동하고 바보같이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가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받은 사람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 지나고 나니 바보가 아니라 엄청난 파워가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중간이 없다
저는 성격이 어머니를 닮아 좀 젠틀한 편이다. 그러나 목회는 그렇게 젠틀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분명히 만났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을 저는 분명히 안다. 그리고 사탄의 정체도 분명히 안다. 사단은 사자처럼 믿는 사람을 삼키려고 세게 들어오는데 우리는 토끼처럼 앉아있으면 매일 당한다. 나는 영적인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기에 설교하러 올라가면 사자가 된다. 내려와서는 양처럼 바뀐다. 말씀을 전할때 만큼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지 중간이 없다. 중간을 주면 안된다.
캐톨릭은 은근히 사람들 분위기를 본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은 천국에 못간다고 생각한다. 천국에 가기에는 미달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옥가기에는 그렇게 나쁜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양쪽 다 애매한것이다. 그런 사람의 심리를 파악한 캐톨릭이 연옥을 만들었다. 중간이다. 연옥에는 왠만한 사람들은 다 갈수있다. 캐톨릭이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필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천국은 못가지만 지옥가기에는 조금 괜찮고 연옥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복음은 중간 지점이 있으면 안된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때 만큼은 원사이드로 간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내려와서 교인을 섬길때는 밑에서 섬기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내려와서는 양이고 말씀을 전할때 만큼은 사자이다. 목회하는 방식은 되도록이면 바보처럼 그리고 머슴처럼 하려고 노력한다.
바보 스토리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 단점이 안보이고 장점만 보인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과 어디든지 갈수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힘든일을 할수 있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을수도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
스데반같은 경우도 무지무지 바보이다. 그냥 대충 넘어가 살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복음을 전하면 되는데 바보이니 예수고집을 부리다가 돌에 맞아죽는다. 엄청난 바보이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데 얼마나 바보인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웃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천사와 같다. 그러니 돌에 맞아도 사랑하는 예수의 얼굴만 보인다. 야고보 같은 경우 앞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하면 살려준다고 했지만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다가 칼에 목을 배어 죽임을 당했다. 긴칼이 목으로 내려오는 직전 야고보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의 사랑 예수님'이라고 하며 죽었다.
이런 바보의 스토리가 너무나 많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만 빼고 다 순교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창에 찔려 죽었을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 같이 위대한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나같은 죄인이 예수님 처럼 죽을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바돌로매는 날카로운 칼에 살을 벗김을 당하고 죽었지만 끝까지 웃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세상이 이런 바보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목회가 왜 어려운가?
그런데 왜 다들 목회가 어렵다고 할까. 나름대로 목회하면서 얻은 결론은 날마다 죽는것이 안되어서 그렇다. 말은 죽겠다고 하고 죽어야 된다고 하는데, 어떤 때는 죽고 어떤 때는 안죽는다. 사람이 설죽으면 오히려 어렵다. 죽든지 살던지 해야 한다. 영이 살아서 방방뜨면서 목회를 하던지, 아니면 죽는 목회를 해서 나를 완전히 낮추어야 하는데 어떨때는 예수님같은데 어떤때는 마귀같아서 헷갈린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중간지점이 많이 보이니 목회가 어려운 것 같다. 이용규 선교사처럼 하바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가장 열악하다는 몽골에서 사역을 하면서 내려놓음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내려놓음>이라는 책 다음에 내놓은 책의 이름이 <더 내려놓음>이다. 더 내려놓으면 어려울것이 없다. 누가와서 나를 찔러도 나는 이미 죽었기에 문제가 없다.
몇년전에 목회가 너무 어려워 아버지와 전화를 했다. 여러가지 힘든 점이 있어 목회를 그만두려고 한적이 있다. 목회를 오래하신 아버지는 제가 말도 안했는데 '목회가 어렵지'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저에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았냐고 물으셨다. 보았다고 하자 아버지는 "영화에서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 처럼 누가 너에게 채찍질을 한 적이 있으냐"고 물으셨다. 또 "누가 너에게 발길질하고 침뱆고 손에 못박은 적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런적이 없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러면 계속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누가 나를 때린적이 없다. 누가 한두마디 이야기하는 것 때문에 내 영이 약해서 괜히 쓰러지고 힘들고 한것이다. 그러니 내가 설죽는 목회가 문제이다.
첫째는 소명이 분명하지 않으면 굉장히 문제이고 오래 못간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간다면 소명이 있으냐고 계속 물어본다. 그리고 소명이 없으면 왠만하면 가지말라고 한다. 그래도 신학교에 간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끝까지 지원한다. 두번째는 설죽으면 안된다. 확실히 죽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사도행전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이 있다. 복음을 마음속에 깨닫으니 이 말씀이 받아 들여졌다. 전에는 내 생명과 내 목회가 소중했다. 영적교훈을 깨닫고 나니 내 생명이 소중하지 않고 예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소중해졌다. 복음과 다른 영혼이 소중하다.
내 몸을 사용하지 않아 녹이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뛰고 싶다. 지혜롭게 뛰어야 하지만 내몸이 주님을 위해 뛰어 닳고 닳은 모습으로 주님앞에 서고 싶다. 나를 통해 영혼을 구원시키고 목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소망이 있다. 그것이 내가 똑똑해서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천재성이 있고 말을 잘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닮아가는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낮추어서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것 처럼 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섬기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생명을 아끼지 않는 마음으로 가면 장점이 있다. 죽기로 각오한 사람과 싸워서 이기기는 쉽지 않다. 사업도 죽을 각오로 하는 사람을 못이긴다. 신앙생활도 목회도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들면 사탄마귀가 두려워 한다. 예수님이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시고 이 땅에 냐려오시니 사단이 두려워 한다. 상황을 보고 헛점만 보이면 이길수 있겠구나 하는 틈이 예수님에게 없다. 시작부터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니 방법이 없다.
죽으러 온 사람에게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화를 안낸다. 사명을 가지고 온사람이고 죽기를 각오했으며 방향이 분명히 정해져 있기에 그런것이 두렵지 않다. 저도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않고 달려가니 좀 괜찮다.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해도 웃어줄수 있다. 옛날에는 저주는 안해도 사랑의 기도가 안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내가 머슴의 자리로 서려고 했기에 왠만한 것은 넘어갈수 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세상사람이 날 몰라주어도 상관없다. 그래서 강단에 올라가면 말씀을 사자처럼 전할수 있다. 교회에 부임해 오자마자 사람을 즐겁게 하기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여러분과 정을 나누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만들고 구원시켜서 천국가게 하기위해서 온 것이라고 선포했다. 성도들을 즐겁게 하기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 종이라는 자세를 가지니 목회하기가 좀 신난다. 그렇게 하나님만 생각하고 복음에 분명한 열정을 가지고 나가니 열매도 좋은 것 같다.
"예수님 처럼" 가사
내가 초라한 것이 연약한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죠
내가 모자란 것이 부족한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주님만을 닮아가기 원하죠
예수님처럼 겸손한 삶 나는 없고 오직 십자가만 드러내는 삶
나의 삶도 십자가 위에 가리우고 예수님만 드러내기 바래요
예수님처럼 섦기는 삶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는 삶
내 삶 속에 하나님으로 가득차는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해요
내가 모자란 것이 부족한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주님만을 닮아가기 원하죠
(2부 기사가 이어집니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강의를 하는 장동일 목사(후러싱제일교회)
질문을 하면서 시작하겠다. 교회에서 영적지도자인 목회자가 죽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사는 것이 좋은가? 목회자가 똑똑한 것이 좋은가 아니면 바보인것이 좋은가? 쉽지 않다. 바보가 좋은가. 바보같은 리더를 따라올 사람이 있는가? 쉽지 않은 토픽이다.
신약의 바보와 구약의 바보
성경을 보면 구약과 신약에 바보가 나온다. 구약에는 시편 14편 1절에는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나온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구약에 나오는 바보들에게는 하나님은 없다.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없다고 믿고 살고 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없어도 인생이 괜찮기에 굳이 하나님이 필요없다고 생각한다.
신약 고린도전서 4장 10절에는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라고 나온다. 구약의 바보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 인생을 막사는 진짜 바보이고, 신약의 바보는 하나님을 계심을 믿고 그래서 자원해서 바보의 자리에 서있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어떤 바보인가.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바보가 되었는가?
예수님을 닮은 목회
목회의 길을 걸으면서 경험되는 몇가지를 나누겠다. 목회를 해보니 만만치 않은 부분들이 꽤 있다. 교인들의 수많은 눈이 목사를 쳐다본다. 리더의 자리는 피라밋의 꼭대기와 같다. 아래에서 보면 꼭대기가 훤하게 보인다. 바로 그 곳에 리더가 올라가 있는 것이다. 아래에 있으면 섞여서 모르는데 리더의 자리는 항상 높은데 있어 어디서나 잘보인다. 많은 눈들을 인도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많은 교인들의 의견이 다 다르다. 이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인도할 것인가?
목사가 똑똑하게 인도한다고 교인들이 다 좋아하는 것은 아니고, 목사가 밑으로 내려가 바보같이 죽어사는 것도 다 좋아하지 않는다. 목회자의 길을 가면서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목회일가. 이것 저것도 보고, 이런 저런 목회자도 보고, 나도 경험을 해보면서 어떻게 목회를 해야 할 것인가 고민을 많이 했다. 목회방법의 결론은 예수님을 닮아서 해야 한다. 욕심없이 내 자신을 계속 낮추고 나는 없고 내 안에 예수님만 사시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잘안되어 문제이다.
바보의 우두머리 예수
사도 바울은 가장 똑똑한 사람이었다. 지금으로 말하면 하바드 수석졸업을 했으며 최고의 학자밑에서 수제자로 공부한 사람이다. 가장 똑똑한 사람이 가장 바보처럼 살았다. 바울이 평상시 생각한 세상의 권력 부유 지식은 예수님을 안 다음부터는 배설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세상적의 눈으로 보면 이런 바보가 없다. 사람들이 보기에 바보같은데 바울의 입에서는 항상 소리높은 찬양만 나온다. 그 비결이 무엇인가를 궁금하게 생각했는데 분명하게 발견한것은 소명이다.
예수님을 분명하게 만나고 나니 복음이 너무나 소중한것이다. 오늘 말씀의 결론은 십자가의 복음을 발견하고 십자가앞에 무릎을 꿇으면 바보의 자리에 서는 것이 굴욕적이거나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충분히 감당이 된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예수님도 그러셨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돌아가시는 모든 과정은 세상에 저런 바보가 없는 것이다.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은 진짜 바보이시다.
바보 양의 죽음
몽골선교를 매년 가는데 마지막 코스는 양을 잡는 것을 보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이 진짜인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양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면서도 순종한다. 예수님을 양으로 많이 묘사를 한다. 힘센 분이 사람에게 대항하지 않고 끌려가신 분이기 때문이다. 양을 도살장으로 데리고 오니 소란을 피웠다. 알고보니 양이 아니라 염소였다. 다시 양을 도살장에 데리고 왔는데 가만히 있는다.
양을 죽이는데 작은 칼로 손하나가 들어가 정도로 배를 짼다. 고통이 있을텐데 양은 움직이지 않고 주인만 쳐다본다. 양의 배의 찢으진 부분에 손을 집어넣고 숨을 쉬는 부분을 막는 것 같다. 양은 고통스러워도 주인만 쳐다본다. 창자가 풍선처럼 부풀어 밖으로 들어갔다 나갔다 하는데도 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주인의 뜻이라면 끝까지 순종하는 양의 모습을 보게된다. 그리고 조금있으면 양은 눈을 감는데 죽은 것이다.
누가 찬양하자고 하지도 않았는데 우리도 모르게 찬양이 나온다.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때 세상 죄를 지시고 고초당하셨네. 예수여 예수여 나의 죄 위하여 보배 피를 흘리니 죄인 받으소서." 전에는 그냥 가사에 도취되어서 찬양을 했는데 정말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을 보면서 예수님처럼 살아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예수님은 정말 바보였다. 세상에 정말 그런 바보가 없다.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오셨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대속물로 주기위해서 오셨으니 이런 바보가 없다. 바보의 우두머리이다. 그런데 그 분이 바보처럼 행동하고 바보같이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가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받은 사람중에 내가 포함되어 있다. 지나고 나니 바보가 아니라 엄청난 파워가 있는 것이다.
복음에는 중간이 없다
저는 성격이 어머니를 닮아 좀 젠틀한 편이다. 그러나 목회는 그렇게 젠틀하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분명히 만났기 때문이다. 복음의 핵심을 저는 분명히 안다. 그리고 사탄의 정체도 분명히 안다. 사단은 사자처럼 믿는 사람을 삼키려고 세게 들어오는데 우리는 토끼처럼 앉아있으면 매일 당한다. 나는 영적인 지도자로 부름을 받았기에 설교하러 올라가면 사자가 된다. 내려와서는 양처럼 바뀐다. 말씀을 전할때 만큼은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지 중간이 없다. 중간을 주면 안된다.
캐톨릭은 은근히 사람들 분위기를 본다.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은 천국에 못간다고 생각한다. 천국에 가기에는 미달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옥가기에는 그렇게 나쁜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양쪽 다 애매한것이다. 그런 사람의 심리를 파악한 캐톨릭이 연옥을 만들었다. 중간이다. 연옥에는 왠만한 사람들은 다 갈수있다. 캐톨릭이 그래서 사람들에게 어필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천국은 못가지만 지옥가기에는 조금 괜찮고 연옥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복음은 중간 지점이 있으면 안된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다. 그래서 말씀을 전할때 만큼은 원사이드로 간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내려와서 교인을 섬길때는 밑에서 섬기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내려와서는 양이고 말씀을 전할때 만큼은 사자이다. 목회하는 방식은 되도록이면 바보처럼 그리고 머슴처럼 하려고 노력한다.
바보 스토리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 단점이 안보이고 장점만 보인다.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과 어디든지 갈수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어떤 힘든일을 할수 있고, 그 사람을 위해서라면 죽을수도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
스데반같은 경우도 무지무지 바보이다. 그냥 대충 넘어가 살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복음을 전하면 되는데 바보이니 예수고집을 부리다가 돌에 맞아죽는다. 엄청난 바보이다. 사람들이 돌을 던지는데 얼마나 바보인지 돌에 맞아 죽으면서 웃는다. 그런데 그 모습이 천사와 같다. 그러니 돌에 맞아도 사랑하는 예수의 얼굴만 보인다. 야고보 같은 경우 앞으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하면 살려준다고 했지만 끝까지 복음을 전하겠다고 하다가 칼에 목을 배어 죽임을 당했다. 긴칼이 목으로 내려오는 직전 야고보는 하늘을 바라보며 '나의 사랑 예수님'이라고 하며 죽었다.
이런 바보의 스토리가 너무나 많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만 빼고 다 순교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창에 찔려 죽었을 정도로 생각하겠지만 그 정도가 아니다. 예수님 같이 위대한 분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는데 나같은 죄인이 예수님 처럼 죽을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바돌로매는 날카로운 칼에 살을 벗김을 당하고 죽었지만 끝까지 웃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세상이 이런 바보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목회가 왜 어려운가?
그런데 왜 다들 목회가 어렵다고 할까. 나름대로 목회하면서 얻은 결론은 날마다 죽는것이 안되어서 그렇다. 말은 죽겠다고 하고 죽어야 된다고 하는데, 어떤 때는 죽고 어떤 때는 안죽는다. 사람이 설죽으면 오히려 어렵다. 죽든지 살던지 해야 한다. 영이 살아서 방방뜨면서 목회를 하던지, 아니면 죽는 목회를 해서 나를 완전히 낮추어야 하는데 어떨때는 예수님같은데 어떤때는 마귀같아서 헷갈린다.
천국도 아니고 지옥도 아니고 중간지점이 많이 보이니 목회가 어려운 것 같다. 이용규 선교사처럼 하바드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이 가장 열악하다는 몽골에서 사역을 하면서 내려놓음을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가 <내려놓음>이라는 책 다음에 내놓은 책의 이름이 <더 내려놓음>이다. 더 내려놓으면 어려울것이 없다. 누가와서 나를 찔러도 나는 이미 죽었기에 문제가 없다.
몇년전에 목회가 너무 어려워 아버지와 전화를 했다. 여러가지 힘든 점이 있어 목회를 그만두려고 한적이 있다. 목회를 오래하신 아버지는 제가 말도 안했는데 '목회가 어렵지'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저에게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를 보았냐고 물으셨다. 보았다고 하자 아버지는 "영화에서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 처럼 누가 너에게 채찍질을 한 적이 있으냐"고 물으셨다. 또 "누가 너에게 발길질하고 침뱆고 손에 못박은 적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런적이 없다고 하자 아버지는 "그러면 계속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누가 나를 때린적이 없다. 누가 한두마디 이야기하는 것 때문에 내 영이 약해서 괜히 쓰러지고 힘들고 한것이다. 그러니 내가 설죽는 목회가 문제이다.
첫째는 소명이 분명하지 않으면 굉장히 문제이고 오래 못간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신학교에 간다면 소명이 있으냐고 계속 물어본다. 그리고 소명이 없으면 왠만하면 가지말라고 한다. 그래도 신학교에 간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끝까지 지원한다. 두번째는 설죽으면 안된다. 확실히 죽어야 한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사도행전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는 말씀이 있다. 복음을 마음속에 깨닫으니 이 말씀이 받아 들여졌다. 전에는 내 생명과 내 목회가 소중했다. 영적교훈을 깨닫고 나니 내 생명이 소중하지 않고 예수님의 거룩한 부르심이 소중해졌다. 복음과 다른 영혼이 소중하다.
내 몸을 사용하지 않아 녹이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뛰고 싶다. 지혜롭게 뛰어야 하지만 내몸이 주님을 위해 뛰어 닳고 닳은 모습으로 주님앞에 서고 싶다. 나를 통해 영혼을 구원시키고 목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소망이 있다. 그것이 내가 똑똑해서 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천재성이 있고 말을 잘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닮아가는 몸부림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이 그렇게 낮추어서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것 처럼 해야 한다.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모습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섬기면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생명을 아끼지 않는 마음으로 가면 장점이 있다. 죽기로 각오한 사람과 싸워서 이기기는 쉽지 않다. 사업도 죽을 각오로 하는 사람을 못이긴다. 신앙생활도 목회도 죽기를 각오하고 뛰어들면 사탄마귀가 두려워 한다. 예수님이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시고 이 땅에 냐려오시니 사단이 두려워 한다. 상황을 보고 헛점만 보이면 이길수 있겠구나 하는 틈이 예수님에게 없다. 시작부터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니 방법이 없다.
죽으러 온 사람에게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화를 안낸다. 사명을 가지고 온사람이고 죽기를 각오했으며 방향이 분명히 정해져 있기에 그런것이 두렵지 않다. 저도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것으로 여기지 않고 달려가니 좀 괜찮다. 사람들이 이상한 말을 해도 웃어줄수 있다. 옛날에는 저주는 안해도 사랑의 기도가 안되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바뀌었다. 내가 머슴의 자리로 서려고 했기에 왠만한 것은 넘어갈수 있다.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심했다. 세상사람이 날 몰라주어도 상관없다. 그래서 강단에 올라가면 말씀을 사자처럼 전할수 있다. 교회에 부임해 오자마자 사람을 즐겁게 하기위해 여기에 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 여러분과 정을 나누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만들고 구원시켜서 천국가게 하기위해서 온 것이라고 선포했다. 성도들을 즐겁게 하기위해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 온 종이라는 자세를 가지니 목회하기가 좀 신난다. 그렇게 하나님만 생각하고 복음에 분명한 열정을 가지고 나가니 열매도 좋은 것 같다.
"예수님 처럼" 가사
내가 초라한 것이 연약한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주님만을 바라보게 되죠
내가 모자란 것이 부족한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주님만을 닮아가기 원하죠
예수님처럼 겸손한 삶 나는 없고 오직 십자가만 드러내는 삶
나의 삶도 십자가 위에 가리우고 예수님만 드러내기 바래요
예수님처럼 섦기는 삶 나는 없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는 삶
내 삶 속에 하나님으로 가득차는 예수님처럼 살기를 원해요
내가 모자란 것이 부족한 것이 모두 은혜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주님만을 닮아가기 원하죠
(2부 기사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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