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부인을 둔 탄자니아 감리교 감독 마문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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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12-08-14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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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된 탄자니아 감리교(TMC) 감독 Mathew Bya-Mungu 목사의 한국이름은 '마문구'이다. 30여년전 마 목사가 한국신학교에서 공부할수 있도록 도와준 김국도 목사가 발음대로 지어준 이름이다. 임마누엘 교회 김국도 목사가 20년 이상 장기간 지원을 통해 탄자니아 감리교 설립에 크게 기여를 했다.
세계감리교연합회(WMC)는 2년전 아프리카 더반에서 총회를 열고 탄자니아 감리교(TMC)를 새로운 회원으로 받아 들였다. 탄자니아 감리교(TMC)는 현재 80여교회 4천5백여명의 교인이 속해있다. 올해 마문구 목사는 감독으로 취임한다.
마 목사는 감리교회가 하나도 없는 탄자니아에 첫 감리교회를 만들고 30여년동안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탄자니아 감리교(TMC) 신학교의 총장은 마사이족 선교로 잘알려진 안찬호 선교사가 맡고 있다. 안찬호 선교사도 한국감리교(KMC)의 파송을 받았다. 두 목사는 시카고 한인세계선교대회에 참가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마 목사는 고아로 자랐다. 어렸을때 독일선교사를 만나서 같이 살며 교회도 다녔다. 그러나 1978년 대학교다닐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한국으로 공부하러 가게되었다. 마문구 목사의 부인은 한국인이다. 탄자니아에서 교사였던 마 목사는 1981년 한국으로 유학을 와 아시아연합신학대학에서 공부했다. 마 목사는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낮선 한국의 가이드를 하던 유재영 사모를 사랑하게 되고 1984년 결혼을 했다. 당시 유 사모는 한철화 박사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유재영 사모는 선교사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지인과 결혼하여 탄자니아 1호 한국인 선교사로 1984년 3월 탄자니아에 들어갔다. 부부가 힘을 합해 개인집의 응접실에서 시작한 탄자니아 감리교는 30여년만에 큰성장을 하여 80개 교회가 속한 주류교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탄자니아가 복음화율은 어느정도인가. 카톨릭까지 합하면 50%정도 되지만 개신교만 치면 2-3% 정도이다. 현지 변질된 샤머니즘적인 기독교의 모습과 무슬림의 공세속에 이제부터 더욱 할일이 많다.
84년 감리교를 탄자니아에서 시작하며 마 목사는 쉽지 않은 환경에 직면했다. 타교단에서 목회자를 데려와 새로운 교단을 만들수 없어 학교를 먼저 세우고 아이들 중심으로 교육을 먼저하고,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하여 교회를 세워가는등 다양한 전술을 개발했다.
마 목사는 유학을 통해 한국교회를 배웠다. 특히 한국교회 특유의 뜨거운 영성과 새벽기도를 배웠다. 마 목사가 탄자니아에 돌아와 세운 교회는 한국형 선교교회이다. 마 목사는 "한국에서 교육받은대로 하고 있다. 새벽기도회, 저녁예배, 부흥회등 한국에서와 같이 한다. 주일학교도 같다. 한국교회가 아프리카 복음화에 큰 공로를 했다"고 말했다.
마 목사가 신학교 근처에서 강도를 당해 도끼를 맞아 눈이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번에 한국의 공안과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선교하겠다는 자세는 흔들리지 않는다. 마 목사는 아멘넷 기자에게 부족싸움이 일어나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할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죽어도 남아 원주민을 돌보는 선교사가 몇명이나 있을까. 마 목사는 그것을 실천하는 분이다. 마 목사는 "같이 살고 같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툰 한국어 였지만 선교의 기본자세를 말하는 것 같아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세계감리교연합회(WMC)는 2년전 아프리카 더반에서 총회를 열고 탄자니아 감리교(TMC)를 새로운 회원으로 받아 들였다. 탄자니아 감리교(TMC)는 현재 80여교회 4천5백여명의 교인이 속해있다. 올해 마문구 목사는 감독으로 취임한다.
마 목사는 감리교회가 하나도 없는 탄자니아에 첫 감리교회를 만들고 30여년동안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탄자니아 감리교(TMC) 신학교의 총장은 마사이족 선교로 잘알려진 안찬호 선교사가 맡고 있다. 안찬호 선교사도 한국감리교(KMC)의 파송을 받았다. 두 목사는 시카고 한인세계선교대회에 참가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마 목사는 고아로 자랐다. 어렸을때 독일선교사를 만나서 같이 살며 교회도 다녔다. 그러나 1978년 대학교다닐때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한국으로 공부하러 가게되었다. 마문구 목사의 부인은 한국인이다. 탄자니아에서 교사였던 마 목사는 1981년 한국으로 유학을 와 아시아연합신학대학에서 공부했다. 마 목사는 한국어를 가르쳐주고 낮선 한국의 가이드를 하던 유재영 사모를 사랑하게 되고 1984년 결혼을 했다. 당시 유 사모는 한철화 박사의 비서실장으로 근무했다.
유재영 사모는 선교사의 비전을 가지고 있었는데 현지인과 결혼하여 탄자니아 1호 한국인 선교사로 1984년 3월 탄자니아에 들어갔다. 부부가 힘을 합해 개인집의 응접실에서 시작한 탄자니아 감리교는 30여년만에 큰성장을 하여 80개 교회가 속한 주류교단으로 자리잡게 된다. 탄자니아가 복음화율은 어느정도인가. 카톨릭까지 합하면 50%정도 되지만 개신교만 치면 2-3% 정도이다. 현지 변질된 샤머니즘적인 기독교의 모습과 무슬림의 공세속에 이제부터 더욱 할일이 많다.
84년 감리교를 탄자니아에서 시작하며 마 목사는 쉽지 않은 환경에 직면했다. 타교단에서 목회자를 데려와 새로운 교단을 만들수 없어 학교를 먼저 세우고 아이들 중심으로 교육을 먼저하고, 그리고 아이들이 성장하여 교회를 세워가는등 다양한 전술을 개발했다.
마 목사는 유학을 통해 한국교회를 배웠다. 특히 한국교회 특유의 뜨거운 영성과 새벽기도를 배웠다. 마 목사가 탄자니아에 돌아와 세운 교회는 한국형 선교교회이다. 마 목사는 "한국에서 교육받은대로 하고 있다. 새벽기도회, 저녁예배, 부흥회등 한국에서와 같이 한다. 주일학교도 같다. 한국교회가 아프리카 복음화에 큰 공로를 했다"고 말했다.
마 목사가 신학교 근처에서 강도를 당해 도끼를 맞아 눈이 빠지는 사고를 당했다. 이번에 한국의 공안과에서 수술을 받았다. 그럼에도 선교하겠다는 자세는 흔들리지 않는다. 마 목사는 아멘넷 기자에게 부족싸움이 일어나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할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다. 죽어도 남아 원주민을 돌보는 선교사가 몇명이나 있을까. 마 목사는 그것을 실천하는 분이다. 마 목사는 "같이 살고 같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 서툰 한국어 였지만 선교의 기본자세를 말하는 것 같아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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