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영 목사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4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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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2-10-05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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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필그림교회(양춘길 목사)는 창립 15주년을 맞이하여 10월 5일(금)부터 3일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주제로 부흥회를 열었다. 강사는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
양춘길 목사는 성회를 시작하며 "15년전에 하나님께서 10가정이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게 하시고 15년이 지나는 동안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성장시켜 주셨다. 그래서 기쁨으로 부흥성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양춘길 목사는 강사 이수영 목사를 소개하며 "16년간 장신대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많은 목회자들과 학자들을 양성했으며, 2000년부터 한국 어머니교회인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지난번에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한국의 어머니교회같은 푸근함과 지적 영적인 것이 잘 균형을 이룬 교회임을 보았다"고 말했다.
▲강사 이수영 목사
첫날 집회에서 이수영 목사는 로마서 11장 33절을 본문으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이해할수 없을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오묘하며 옳고 선하시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본문이다. 기독교신앙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고백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된다. 예배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천지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기독교신앙의 첫째 조항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하거나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친히 섭리하신다는 신앙이다. 섭리란 무엇인가. 섭리를 막상 정의해 보라고 하면 잘 못한다. 중국에서 강의를 하니 '섭리'라는 말자체가 없다. 중국사람에게 없는 단어이다. 섭리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가 지으신 모든 세계를 그가 계획하신 목적에 이르도록 그의 주권과 사랑과 지혜와 권능과 공의로 계속하여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행위를 가르키는 말이다. 섭리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가 창조의 목적에 이르도록 친히 당신의 주권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공의로 계속하여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섭리의 신앙이다.
'섭리'라는 말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은 완전히 성경적인 신앙이다. 사람은 옛날부터 이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며 어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물음에 대해 여러가지 대답들을 제시해 왔다.
그 중 하나가 '이신론'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신론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으나 창조한 후에는 세상에 대해 더이상 상관하지 않으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운행되어 가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세상에 부여하신 원리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신론이다. 이신론의 '이'자는 둘 이가 아니라 이치 이(理)이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지 신이 이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신론이다. 이신론은 세상이 자체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기에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며 어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하는 다른 하나의 대답은 숙명론이다. 숙명론은 세상만사 세상자체의 인과율,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 다 결정되어 있다는 사고이다. 숙명론이 우리가 말하는 예정론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둘은 전혀 다른것이다. 예정론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안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예정론이다. 숙명론은 세상 자체의 인과율에 의해 모든것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도 하나님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하기에 완전히 다른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대답은 우연론이다. 우연론은 이 세상이 어떤 일정한 목표나 방향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순간순간의 우연에 의해 이끌려 진다는 주장이다. 그밖에도 이세상은 악이 지배하거나 악신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보는 악지배론도 있다. 이런 4가지 사고들은 서로 다른것이지만 공통점은 다같이 하나님이 간섭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자체의 원리, 자체의 인과율, 우연,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사고들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 모든 주장들은 거짓된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신앙
성경은 이러한 4가지 이론들을 일시에 거부하는 섭리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창조하시고 모든것을 존재하게 하시고 모든것을 다스리시고 모든것을 창조의 목적에 이를때까지 친히 인도하시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섭리신앙이기에 앞서 말한 모든 사고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욥기 33장 4절은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지으셨을뿐만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느헤미야 9장 6절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으시기만 하고 너희들이 알사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살아있는 것과 보전되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도 만물을 붙드는 것은 주님이라고 증거하고 있고,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세상 만물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것을 세상자체에 맡겨놓지 않으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3편 19절을 보면 "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라고 하신다. 역대상 29장 12절은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무관심하시며 각자가 가는대로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시편 113편 6-9절을 보면 시편기자는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라고 말씀하고 있다. 시편 146편 6-9절을 보면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외에도 성경은 기쁨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위로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힘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복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단잠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바울은 당대의 숙명론자들이라 할수 있는 스토아 학파들과 우연론자라 할수 잇는 에피쿠르스 학파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아테네에서 그들에게 정면으로 맞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이라고 했으며, 25절 뒤에는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라고 했으며, 26절에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라고 함으로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과 흥망성쇠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세상만물을 그가 계획하신 목표에 이르도록 주권적인 사랑과 지혜 능력 공의로 계속해서 보존하시고 다스리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섭리신앙과 어긋나는 언어과 행동은 삼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팔자소관'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믿는 사람도 별생각없이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가 할 말이 아니라 숙명론자들이나 사용할 말이다. 결코 숙명론자가 될수없는 우리가 쓸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팔자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앞으로 '팔자소관'이라는 말은 우리입에서 일체 사라져야 한다. 또 '재수가 있다, 없다' 라든가 '운이 좋았다, 나빴다'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그런 말들은 우연론자들이 할수 있는 말로서 우연론자가 될수 없는 우리들이 사용할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섭리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재수'니 '우연'이니 하는 말은 모순된것이다. 우리는 재수가 좋아서 존재하거나 운이 나빠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속에 살아왔고 지금 이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경우에 할수 있는 유일한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말 밖에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할수 밖에 없는 일들이다.
상당수의 우연론자들이 빠질수 밖에 없는 길인 쾌락주의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섭리신앙과는 조화할수 없다. 사람의 일정한 목표도 삶의 법칙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때그때 최대한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삶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래서 옛날 에피쿠르스 학파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쾌락주의에 빠졌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히 복된 삶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신앙인이기에 순간순간의 무절제한 쾌락추구는 단호히 배제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복락의 삶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삶이다.
마찬가지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로 악귀를 내쫓겠다고 하는 행위는 말할것도 없고, 점이나 토정비결을 보러 다니는 것은 결단코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탈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점치는 행위나 다름없는 예언기도를 받겠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일은 섭리주이신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섭리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 무슨일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만사가 내뜻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장래일을 알지못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옳으시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은 신뢰속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기독교신앙이고 섭리신앙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4가지
그런데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일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이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몇가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을 4가지로 정의했다. 허락, 방해, 방향, 결정이다.
1. 허락
하나님께서는 어떤때는 우리가 하는 일을 하는대로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가는 길과 하는 일이 하나님이 뜻하신바와 일치할때는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기에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안다면 만사가 내가 원하는대로 순조롭고 형통할때 내가 잘하는 것이라고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그런것이라는 겸손함과 모든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모르면, 잘되면 자기가 잘나고 잘해서 그런것이라고 교만해지기 쉽다. 사람은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신다.
2. 방해
하나님은 어떤때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으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잘생각해 보니 이것이 제일 좋고 기도해 보아도 좋은것 같아도 그것으로 가는데 하나님이 막으신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된다. 할수없이 갈수있는 다른 길로 가면 된다. 하나님이 다 막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도록 모는 것이다. 방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려고 애를 썼는데 길이 다 막혔다. 성령께서 길을 막았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환상중에 나타나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성령의 지시하심으로 깨닫고 마게도니아로 간다.
그래서 유럽전체가 복음화되는 유럽선교의 길을 연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다른데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이해한다면 무엇이 우리뜻대로 되지않을때 좌절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버리지를 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생각하고 내가 가야할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게 되고 그럼으로 응답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감으로 형통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알면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3. 방향
어떤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지못한 일임에도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셔서 마지막에 그 결과를 하나님이 원하시는데로 방향을 바꾸어 놓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큰일을 이루는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을 방향이라고 한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요셉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다. 하나님이 좋은 일이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나쁜일임에도 하나님이 막지도 방해하지도 않으셨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7년간의 기근에 잘 대비하여 애굽의 백성을 살리고 인근의 백성들도 살리고 아버지와 집안형제를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인도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이해할때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부조리와 악때문에 분노하고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하지 않게된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저런 악당을 안데려가시고 내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저렇게 착한 사람이 고생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하고 이 세상의 악과 불의와 부조리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할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방법을 이해한다면 이 세상에 난무하는 악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기다릴수가 있다. 하나님이 더 크신 선을 이루려고 하시는구나 하며 참고 기다릴수 있다. 이러한 섭리신앙이 없으면 세상이 조금만 어둡고 어지롭고 잘못되면 금방 왜 그런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의심하게 된다. 세상이 뒤숭숭해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4. 결정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목적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이제 우리가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판단하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러한 자유로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큰결정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받아들이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예수안에서 얻는 선물이 자유함이다.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다는 아니지만 늦게 예수믿은 사람을 보면 예수믿기전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예수믿고 작은것 하나도 자기마음대로 못한다. 어떤 넥타이를 매고 나갈까 또는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같은 것도 반드시 기도하고 묻는다.
그렇게 까지 할 것 없다. 그런것은 우리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 그런것들은 마음대로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마음대로 하지만 구원못받게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은 이미 이루어지신 것이고 그 은혜안에서 자유함을 주신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KTX를 탔다. 그러면 기차안에서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기차는 여전히 부산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아무리 기차가는 방향과 반대편 좌석에 앉아도 부산에 간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천국가는 기차를 태워주셨다. 기차안에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니라는 것이다. 기차안에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고 내리라 하고 바깥으로 던지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지금까지 잘되던 일이 갑자기 안될때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일을 바라거나 행할때라도 그 일때문에 조바심내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다. 일이 뜻대로 안된다고 낙심하거나 죄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인내할수 있다. 주위에서 옳지못한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기다릴수 있게 된다. 섭리신앙은 비록 지금 내가 이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만사는 하나님에게 달려있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능력있으시고 공의로운 분이고 지금 일이 내뜻대로 안되는 것은 내뜻이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섭리신앙이고 그런 섭리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다.
어떤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사건들의 이해되지 않음을 견딜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뭔가하면 사건들이 이해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떤 사건은 우리도 이해하지만 어떤 사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건들의 이해되지 않음을 견딜수 있음을 의미한다.
딸이 셋이 있고, 48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있다. 아들이 어렸을때 즐겨하던 장난은 차를 타면 차창을 열고 닫는 버튼을 누르며 장난하는 것을 좋아했다. 차만 타면 장난한다. 어느날 보니 장난을 치다가 창을 열고 몸이 절반이 나가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들이 장난치기 전에 운전석에 있는 잠금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아들이 아무리 버튼을 만져도 창이 꼼짝도 않는다. 아들은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창이 움직이지 않자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버튼을 두들기고 운다. 그것을 보면서 섭리신앙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도 살다보면 지금까지 잘되던 일이 갑자기 안될때가 있다. 갑자기 왜 그런지 이해할수 없다. 그런데 잘 움직이든 창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뒤에는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 아들을 보호하려니 창이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도 만사형통하다 보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브레이크 고장난 기관차 처럼 무슨 사고가 날지를 모르기에 미리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걸어주신다.
그럴때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해온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닌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뭔가 손을 쓰신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우리는 역경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서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너무 만사형통하면 하나님을 다 잊어버린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신앙의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요즘에 사업이 잘안되거나, 갑자기 집안의 우환이 겹치고,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 속이 상한 분들은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과 더 큰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고 위로받고 힘을 내기 바란다.
우리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뱅 선생은 이런말을 했다. "번영할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관해서는 염려로 부터의 놀라운 자유를 얻게하는 것"이라고 섭리신앙의 요점을 정리했다. 참 작절한 정리이다. 번영할때는 자기가 잘나서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심으로 그런것으로 믿고 감사할줄 알고, 역경속에서는 하나님의 더 크고 좋은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뜻이 나타나도록 기다리고 인내하고, 미래는 우리가 알지못하는 세상이기에 아주 불안해진다. 그러나 미래의 염려로 부터 놀라운 자유를 얻게 해주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그 보다 1,500년전에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 돌보고 계시지 않는 것 같아도 돌보고 계신다. 염려하지 말고 모든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늘 순종과 평안함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를 해주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전도서 11장 5절을 보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이라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알지못해도 하나님은 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간다고 하신다. 이사야서 55장 8절에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선하게 아름답게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다. 신명기 32장 4절은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말한다.
이수영 목사의 몇가지 경험을 통한 '섭리신앙' 적용
1. 군대경험
군대생활을 공군에서 했다. 공군장교는 4년 복무로 길었다. 그럼에도 공군장교로 간 것은 학과 4년 선배가 공군장교로 입대하여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가 제대할때 내가 군대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선배는 내가 공군에 오면 자신의 자리에 오면 된다고 했다. 4년이라는 시간이 길어도 전공과목을 생도들에게 가르치고 대학원을 다니면 절대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에 넘어가 공군에 들어갔다.
군대에 들어가서야 군대보직이 선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이 되려면 교육특기를 얻어야 한다. 다행히 교육특기를 받고 2달간 공군대학에서 교육장교로서 전문훈련을 받고 공군사관학교 배속이 되었다. 학교내 교수부로 발령나면 선배와 같이 가르칠수가 있었는데 생도전대에 발령이 났다. 생도들의 생활훈련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곳이다. 직함은 군사훈련 교관으로 생도들과 4년간 연병장에서 뛰게 되자 앞이 캄캄해졌다.
더구나 입대한 68년에는 1.21사태가 있었다. 그래서 공군역사상 최고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공군장교 입대 몸무게 한계가 53키로인데 53.5키로로 입대한 약한 몸으로 훈련받기가 힘이 들었다. 교관을 시작했는데 대통령 특명으로 전군정예화를 위해 공군에도 공수훈련과 유격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차출되어 실미도로 유명한 오류동 공군정보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부대에 돌아와 생도들을 훈련시켰다. 엄청난 훈련을 받자 세상이 무서운것이 없어졌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잘타는 성격인데 매일 연병장에서 수백명 생도들에게 호령하고 굴리고 뛰게했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그 일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고 매사에 자신감이 생겨 어떠한 역경도 정면돌파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성도들을 훈련시키면서 많은 사람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훈련을 동시에 받았다. 돌이켜 보면 목사를 만들려고 하나님이 그런 경험을 미리하게 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안되고 뒤틀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것을 통해서도 더 큰일을 계획하시고 우리를 더 귀하게 쓰시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경험이다. 당장 어려운일이 생기고 귀찮은 일이 생기고 힘들다고 해도 잘 견디면 하나님이 크게 쓰실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2. 장신대 교수 경험
장신대에서 교수생활 16년을 했다. 군대에 있을때는 엄하고 무서운 교관이었다. 그때 얻은 교육철학은 교육자는 학습자가 학교문을 나가기 전에 학생으로 부터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고 인기를 얻으려고 하면 교육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교육자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학습자가 졸업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군대에서 얻은 교육철학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치니 인기가 없었다. 더우기 운동권 학생들을 반대해여 운동권들의 공격을 받았다. 장신대 16년간이 즐겁기 보다는 운동권 학생들과 싸우면서 보냈다.
돌이켜보니 이러한 장신대 16년 경험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다. 연단시킨 것이다. 새문안교회에서의 목회를 위해 연단시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문안교회에서 가보니 쉽지 않았다.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서의 훈련경험과 장신대에서 교수하면서 싸웠던 경력이 없었다면 새문안교회 목회가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새문안교회 힘든 목회를 잘견디기 위한 훈련을 하나님께서 시키셨다는 생각이 든다.
3. 실패의 경험
제 자랑이 아니라 제가 각종시험에서 떨어져 본적이 없다. 그런데 운전면허 시험에서 떨어졌다. 운전을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했다. 그런데 앞에서 긴장하여 헤매는 아주머니에게 훈수하다가 괘심죄로 떨어진 것이다. 실패라는 것은 한번도 겪어보지 않아 떨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시험장을 나오며 문득 생각나는 것은 "네가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가" 하는 음성이 들렸다. 교회와서 생각해보니 교회안에도 실패를 겪은 사람이 많았다. 목회를 하려면 실패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것이 필요할텐데 모르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것도 목회위해 준비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암의 경험
1997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1년을 쉬면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대장암으로 판정받는 순간 "왜 접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때까지 하나님이 하지말라시는 것을 안하고 반듯하게 살아왔는데 왜 내가 암이 걸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장신대 교수생활을 하면서 아쉬운것은 신학대학 교수가 기도하고 성경을 볼 시간이 없었다. 너무나 가르쳐야 할 과목과 강의시간이 많었다. 주당 25시간을 가르쳤다. 그래서 3시간 이상을 잘수 없을 정도였다. 교수중 어떤 분은 설교하다가 "죄를 안지고 감옥에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감옥에 가면 남는게 시간이니 기도하고 성경보겠다는 것이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암걸리고 1년동안 투병하다보니 시간이 남았다. 눈뜨면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그자리에서 잠들고 깨면 기도하고 성경읽었다. 기도하고 성경읽기 위해 감옥가고 싶다는 것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암에 걸리게 하신 이유를 알았다. 다른것이 아니라 육심의 암을 통해 내속에 숨어있는 영적인 암을 발견하게 하셨다. 당시에 동료교수중에 저에게 불편하게 하는 교수가 있었는데 용서를 해야지 하는데 사실은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나는 동료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는 것이 내속에 숨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눈뜨는 첫시간에 그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말씀은 그렇지만 실제는 어떻게 할수 있겠는가 했던것이 가능해졌다. 내힘으로는 안되는데 셩령님이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고,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하게 하는 은혜를 체험하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놀라운 은혜였다.
그 이후로 암은 아무나 걸리는 것은 아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암이 걸리며, 암은 은혜받는 기회라고 늘 간증한다. 저는 암이 안걸리면 큰일날뻔 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영적인 암을 숨기고 목사로서 살았을 것이 아닌가. 암이 걸린것이 목회에도 도움이 됐다. 목회지로 나오니 교인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많다. 중환자는 수술실에 들어가기전에 기도하는데 암이 걸려 사색이 된 교인에게 가서 위로할말이 별로 없다. 저도 몇년전에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며 깊은 은혜를 받을 기회이니 감사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줄 알라고 하면 사색이 된 교인들의 입이 벌어지고 화색이 돌며 할렐루야 하며 수술실에 들어간다. 그런분들을 위로하고 목회하라고 암이라는 훈련을 시켜주신 것을 깨닫게 된다.
뒤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삶이다. 우리의 삶의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이 한눈팔거나 내버려두신 순간이 없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굳게 믿으라. 그래서 늘 감사와 기쁨과 순종으로 가득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양춘길 목사는 성회를 시작하며 "15년전에 하나님께서 10가정이 모여서 교회를 시작하게 하시고 15년이 지나는 동안 놀라운 은혜와 축복으로 성장시켜 주셨다. 그래서 기쁨으로 부흥성회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양춘길 목사는 강사 이수영 목사를 소개하며 "16년간 장신대에서 조직신학 교수로 많은 목회자들과 학자들을 양성했으며, 2000년부터 한국 어머니교회인 새문안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지난번에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렸는데 한국의 어머니교회같은 푸근함과 지적 영적인 것이 잘 균형을 이룬 교회임을 보았다"고 말했다.
▲강사 이수영 목사
첫날 집회에서 이수영 목사는 로마서 11장 33절을 본문으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삶"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가 이해할수 없을때가 너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오묘하며 옳고 선하시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그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 본문이다. 기독교신앙은 천지만물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고백한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시작된다. 예배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도 천지의 창조주인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만유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기독교신앙의 첫째 조항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는 신앙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하거나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계를 친히 섭리하신다는 신앙이다. 섭리란 무엇인가. 섭리를 막상 정의해 보라고 하면 잘 못한다. 중국에서 강의를 하니 '섭리'라는 말자체가 없다. 중국사람에게 없는 단어이다. 섭리란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가 지으신 모든 세계를 그가 계획하신 목적에 이르도록 그의 주권과 사랑과 지혜와 권능과 공의로 계속하여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시는 행위를 가르키는 말이다. 섭리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존재가 창조의 목적에 이르도록 친히 당신의 주권과 사랑과 지혜와 능력과 공의로 계속하여 보존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섭리의 신앙이다.
'섭리'라는 말은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신앙은 완전히 성경적인 신앙이다. 사람은 옛날부터 이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며 어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물음에 대해 여러가지 대답들을 제시해 왔다.
그 중 하나가 '이신론'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신론은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으나 창조한 후에는 세상에 대해 더이상 상관하지 않으며 관심도 가지지 않고 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면 이 세상은 어떻게 운행되어 가느냐 하면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세상에 부여하신 원리에 의해 운행된다는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원리가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신론이다. 이신론의 '이'자는 둘 이가 아니라 이치 이(理)이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이지 신이 이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신론이다. 이신론은 세상이 자체의 원리에 의해 돌아가기에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
세상이 어떻게 운행되며 어떤 원리에 의해 다스려지는가 하는 다른 하나의 대답은 숙명론이다. 숙명론은 세상만사 세상자체의 인과율,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의해 다 결정되어 있다는 사고이다. 숙명론이 우리가 말하는 예정론이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둘은 전혀 다른것이다. 예정론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고 안받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안에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예정론이다. 숙명론은 세상 자체의 인과율에 의해 모든것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그곳에도 하나님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예정론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말하기에 완전히 다른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대답은 우연론이다. 우연론은 이 세상이 어떤 일정한 목표나 방향을 향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라 그저 순간순간의 우연에 의해 이끌려 진다는 주장이다. 그밖에도 이세상은 악이 지배하거나 악신에 의해 다스려진다고 보는 악지배론도 있다. 이런 4가지 사고들은 서로 다른것이지만 공통점은 다같이 하나님이 간섭할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자체의 원리, 자체의 인과율, 우연, 악이 지배하는 세상이라는 사고들에는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그 모든 주장들은 거짓된 것이다.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신앙
성경은 이러한 4가지 이론들을 일시에 거부하는 섭리신앙을 우리에게 가르친다. 하나님이 모든것을 창조하시고 모든것을 존재하게 하시고 모든것을 다스리시고 모든것을 창조의 목적에 이를때까지 친히 인도하시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섭리신앙이기에 앞서 말한 모든 사고는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욥기 33장 4절은 "하나님의 영이 나를 지으셨고 전능자의 기운이 나를 살리시느니라"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지으셨을뿐만 아니라 우리가 계속해서 살아있게 하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느헤미야 9장 6절은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라고 말하고 있다. 지으시기만 하고 너희들이 알사서 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계속 살아있는 것과 보전되는 것은 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도 만물을 붙드는 것은 주님이라고 증거하고 있고, 사도행전 17장 28절에서는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세상 만물을 단지 존재하게 하시고 살아 움직이게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것을 세상자체에 맡겨놓지 않으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시편 103편 19절을 보면 "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라고 하신다. 역대상 29장 12절은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 대해 무관심하시며 각자가 가는대로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시편 113편 6-9절을 보면 시편기자는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라고 말씀하고 있다. 시편 146편 6-9절을 보면 "여호와는 천지와 바다와 그 중의 만물을 지으시며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 정의로 심판하시며 주린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이시로다 여호와께서는 갇힌 자들에게 자유를 주시는도다 여호와께서 맹인들의 눈을 여시며 여호와께서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며 여호와께서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여호와께서 나그네들을 보호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붙드시고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외에도 성경은 기쁨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위로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힘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복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단잠을 주시는 이도 하나님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사도바울은 당대의 숙명론자들이라 할수 있는 스토아 학파들과 우연론자라 할수 잇는 에피쿠르스 학파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아테네에서 그들에게 정면으로 맞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했다. 사도행전 17장 24절에는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이라고 했으며, 25절 뒤에는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라고 했으며, 26절에는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라고 함으로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과 흥망성쇠 또한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렇듯 하나님은 그가 지으신 세상만물을 그가 계획하신 목표에 이르도록 주권적인 사랑과 지혜 능력 공의로 계속해서 보존하시고 다스리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섭리신앙과 어긋나는 언어과 행동은 삼가해야 한다. 예를 들면 '팔자소관'이라는 말이 있다. 예수믿는 사람도 별생각없이 그렇게 말하는데 우리가 할 말이 아니라 숙명론자들이나 사용할 말이다. 결코 숙명론자가 될수없는 우리가 쓸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팔자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앞으로 '팔자소관'이라는 말은 우리입에서 일체 사라져야 한다. 또 '재수가 있다, 없다' 라든가 '운이 좋았다, 나빴다'는 말을 사용해서도 안된다. 그런 말들은 우연론자들이 할수 있는 말로서 우연론자가 될수 없는 우리들이 사용할수 있는 말이 아니다. 섭리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 '재수'니 '우연'이니 하는 말은 모순된것이다. 우리는 재수가 좋아서 존재하거나 운이 나빠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속에 살아왔고 지금 이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경우에 할수 있는 유일한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합니다"라는 말 밖에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감사할수 밖에 없는 일들이다.
상당수의 우연론자들이 빠질수 밖에 없는 길인 쾌락주의 또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섭리신앙과는 조화할수 없다. 사람의 일정한 목표도 삶의 법칙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때그때 최대한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현명한 삶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래서 옛날 에피쿠르스 학파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쾌락주의에 빠졌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원히 복된 삶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는 신앙인이기에 순간순간의 무절제한 쾌락추구는 단호히 배제해야 한다. 우리는 영원한 복락의 삶을 향하여 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약속된 삶이다.
마찬가지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로 악귀를 내쫓겠다고 하는 행위는 말할것도 없고, 점이나 토정비결을 보러 다니는 것은 결단코 그리스도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그리고 신앙의 탈을 쓰기는 했지만 사실은 점치는 행위나 다름없는 예언기도를 받겠다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는 일은 섭리주이신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지 못하는 불신앙적인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
섭리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 어디서 무슨일을 하든지,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만사가 내뜻대로 되든지 안되든지, 장래일을 알지못하든 상관없이 언제나 옳으시고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흔들리지 않은 신뢰속에서 평안함을 누리고 승리하는 삶을 살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기독교신앙이고 섭리신앙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 4가지
그런데 하나님이 섭리하시는 일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인도이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곳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몇가지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을 4가지로 정의했다. 허락, 방해, 방향, 결정이다.
1. 허락
하나님께서는 어떤때는 우리가 하는 일을 하는대로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우리가 가는 길과 하는 일이 하나님이 뜻하신바와 일치할때는 그대로 내버려 두신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기에 허락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안다면 만사가 내가 원하는대로 순조롭고 형통할때 내가 잘하는 것이라고 교만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그런것이라는 겸손함과 모든것을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는 믿음의 자세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을 모르면, 잘되면 자기가 잘나고 잘해서 그런것이라고 교만해지기 쉽다. 사람은 교만해지면 하나님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하나님은 교만을 가장 싫어하신다.
2. 방해
하나님은 어떤때는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으심으로서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잘생각해 보니 이것이 제일 좋고 기도해 보아도 좋은것 같아도 그것으로 가는데 하나님이 막으신다.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안된다. 할수없이 갈수있는 다른 길로 가면 된다. 하나님이 다 막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가도록 모는 것이다. 방해도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예를 들면 사도바울이 아시아에서 선교하려고 애를 썼는데 길이 다 막혔다. 성령께서 길을 막았다. 마게도니아 사람이 환상중에 나타나 와서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보고 성령의 지시하심으로 깨닫고 마게도니아로 간다.
그래서 유럽전체가 복음화되는 유럽선교의 길을 연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것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위해 다른데로 가는 길을 막으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이해한다면 무엇이 우리뜻대로 되지않을때 좌절하고 원망하고 하나님을 의심하고 버리지를 앓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보다 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시 생각하고 내가 가야할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하게 되고 그럼으로 응답을 받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감으로 형통의 역사가 일어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알면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는다.
3. 방향
어떤때는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허락하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좋지못한 일임에도 막지 않으시고 내버려 두셔서 마지막에 그 결과를 하나님이 원하시는데로 방향을 바꾸어 놓으셔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더 큰일을 이루는 방법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을 방향이라고 한다.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요셉이다.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팔았다. 하나님이 좋은 일이라고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나쁜일임에도 하나님이 막지도 방해하지도 않으셨다. 그렇게 함으로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고 7년간의 기근에 잘 대비하여 애굽의 백성을 살리고 인근의 백성들도 살리고 아버지와 집안형제를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인도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이해할때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부조리와 악때문에 분노하고 하나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의심하지 않게된다. 도대체 왜 하나님은 저런 악당을 안데려가시고 내버려두시는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저렇게 착한 사람이 고생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가 하고 이 세상의 악과 불의와 부조리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할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방법을 이해한다면 이 세상에 난무하는 악과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기다릴수가 있다. 하나님이 더 크신 선을 이루려고 하시는구나 하며 참고 기다릴수 있다. 이러한 섭리신앙이 없으면 세상이 조금만 어둡고 어지롭고 잘못되면 금방 왜 그런가 불평하고 원망하고 의심하게 된다. 세상이 뒤숭숭해도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방법을 이해하는 것이다.
4. 결정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우리를 향하신 목적이 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안에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이제 우리가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판단하고 자유롭게 행동한다. 그러한 자유로운 행동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큰결정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의 이러한 인도방법을 받아들이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예수안에서 얻는 선물이 자유함이다. 진리가 너희들을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다는 아니지만 늦게 예수믿은 사람을 보면 예수믿기전에는 자기 멋대로 살다가 예수믿고 작은것 하나도 자기마음대로 못한다. 어떤 넥타이를 매고 나갈까 또는 오늘 점심은 무엇을 먹을까 같은 것도 반드시 기도하고 묻는다.
그렇게 까지 할 것 없다. 그런것은 우리 구원과 아무 상관없다. 그런것들은 마음대로 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다. 우리가 마음대로 하지만 구원못받게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결정은 이미 이루어지신 것이고 그 은혜안에서 자유함을 주신것이다. 서울에서 부산가는 KTX를 탔다. 그러면 기차안에서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기차는 여전히 부산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 아무리 기차가는 방향과 반대편 좌석에 앉아도 부산에 간다. 하나님이 이미 우리를 천국가는 기차를 태워주셨다. 기차안에서 마음대로 자유롭게 다니라는 것이다. 기차안에서 마음대로 왔다갔다 한다고 내리라 하고 바깥으로 던지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지금까지 잘되던 일이 갑자기 안될때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 섭리를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일을 바라거나 행할때라도 그 일때문에 조바심내거나 불안할 필요가 없다. 일이 뜻대로 안된다고 낙심하거나 죄절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인내할수 있다. 주위에서 옳지못한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의심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더 큰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기를 기다릴수 있게 된다. 섭리신앙은 비록 지금 내가 이해할수 없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만사는 하나님에게 달려있고 하나님은 언제나 변함없이 선하시고 지혜로우시고 능력있으시고 공의로운 분이고 지금 일이 내뜻대로 안되는 것은 내뜻이 하나님의 뜻에 함당하지 않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더 좋은 것을 주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믿을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섭리신앙이고 그런 섭리신앙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수 있다.
어떤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이라 함은 사건들의 이해되지 않음을 견딜수 있음을 의미한다"고 정의했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뭔가하면 사건들이 이해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는데 어떤 사건은 우리도 이해하지만 어떤 사건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건들의 이해되지 않음을 견딜수 있음을 의미한다.
딸이 셋이 있고, 48세에 얻은 늦둥이 아들이 있다. 아들이 어렸을때 즐겨하던 장난은 차를 타면 차창을 열고 닫는 버튼을 누르며 장난하는 것을 좋아했다. 차만 타면 장난한다. 어느날 보니 장난을 치다가 창을 열고 몸이 절반이 나가있었다. 그 다음부터는 아들이 장난치기 전에 운전석에 있는 잠금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아들이 아무리 버튼을 만져도 창이 꼼짝도 않는다. 아들은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창이 움직이지 않자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버튼을 두들기고 운다. 그것을 보면서 섭리신앙을 다시 생각했다.
우리도 살다보면 지금까지 잘되던 일이 갑자기 안될때가 있다. 갑자기 왜 그런지 이해할수 없다. 그런데 잘 움직이든 창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는 뒤에는 아들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그냥 내버려 두면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르니 아들을 보호하려니 창이 움직이지 못한다. 우리도 만사형통하다 보면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브레이크 고장난 기관차 처럼 무슨 사고가 날지를 모르기에 미리 하나님이 브레이크를 걸어주신다.
그럴때는 하나님의 뜻과 다르게 살아온 것이 아닌가, 내가 지금 해온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이 아닌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뭔가 손을 쓰신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우리는 역경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 돌아서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너무 만사형통하면 하나님을 다 잊어버린다. 그것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잊어버리지 않도록 신앙의 길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요즘에 사업이 잘안되거나, 갑자기 집안의 우환이 겹치고, 뜻하지 않는 일이 일어나 속이 상한 분들은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과 더 큰 하나님의 선한 계획이 있음을 믿고 위로받고 힘을 내기 바란다.
우리의 위대한 종교개혁자 칼뱅 선생은 이런말을 했다. "번영할때에는 감사한 마음을, 역경속에서는 인내를, 미래에 관해서는 염려로 부터의 놀라운 자유를 얻게하는 것"이라고 섭리신앙의 요점을 정리했다. 참 작절한 정리이다. 번영할때는 자기가 잘나서 그런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은혜로 허락하심으로 그런것으로 믿고 감사할줄 알고, 역경속에서는 하나님의 더 크고 좋은 계획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뜻이 나타나도록 기다리고 인내하고, 미래는 우리가 알지못하는 세상이기에 아주 불안해진다. 그러나 미래의 염려로 부터 놀라운 자유를 얻게 해주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그 보다 1,500년전에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전서 5장 7절에서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 돌보고 계시지 않는 것 같아도 돌보고 계신다. 염려하지 말고 모든것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늘 순종과 평안함 가운데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렇게 우리를 해주는 것이 섭리신앙이다.
전도서 11장 5절을 보면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이라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알지못해도 하나님은 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이루어간다고 하신다. 이사야서 55장 8절에는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고 했다. 본문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고 했다. 하나님의 판단은 우리 생각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은 모든 일을 선하게 아름답게 이루어가고 계심을 믿으라고 하신다. 신명기 32장 4절은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라고 말한다.
이수영 목사의 몇가지 경험을 통한 '섭리신앙' 적용
1. 군대경험
군대생활을 공군에서 했다. 공군장교는 4년 복무로 길었다. 그럼에도 공군장교로 간 것은 학과 4년 선배가 공군장교로 입대하여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서 철학을 가르쳤다. 그가 제대할때 내가 군대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 선배는 내가 공군에 오면 자신의 자리에 오면 된다고 했다. 4년이라는 시간이 길어도 전공과목을 생도들에게 가르치고 대학원을 다니면 절대 손해보는 것이 아니라 이익이라는 말에 넘어가 공군에 들어갔다.
군대에 들어가서야 군대보직이 선배가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이 되려면 교육특기를 얻어야 한다. 다행히 교육특기를 받고 2달간 공군대학에서 교육장교로서 전문훈련을 받고 공군사관학교 배속이 되었다. 학교내 교수부로 발령나면 선배와 같이 가르칠수가 있었는데 생도전대에 발령이 났다. 생도들의 생활훈련과 군사훈련을 담당하는 곳이다. 직함은 군사훈련 교관으로 생도들과 4년간 연병장에서 뛰게 되자 앞이 캄캄해졌다.
더구나 입대한 68년에는 1.21사태가 있었다. 그래서 공군역사상 최고의 고된 훈련을 받았다. 공군장교 입대 몸무게 한계가 53키로인데 53.5키로로 입대한 약한 몸으로 훈련받기가 힘이 들었다. 교관을 시작했는데 대통령 특명으로 전군정예화를 위해 공군에도 공수훈련과 유격훈련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차출되어 실미도로 유명한 오류동 공군정보부대에서 훈련을 받고 부대에 돌아와 생도들을 훈련시켰다. 엄청난 훈련을 받자 세상이 무서운것이 없어졌다.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잘타는 성격인데 매일 연병장에서 수백명 생도들에게 호령하고 굴리고 뛰게했다.
당시에는 너무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서 돌이켜 보니 그 일을 통해 몸이 건강해지고 매사에 자신감이 생겨 어떠한 역경도 정면돌파할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성도들을 훈련시키면서 많은 사람앞에 서서 이야기하는 훈련을 동시에 받았다. 돌이켜 보면 목사를 만들려고 하나님이 그런 경험을 미리하게 하신 것이다. 처음에는 일이 안되고 뒤틀리는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런것을 통해서도 더 큰일을 계획하시고 우리를 더 귀하게 쓰시려고 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는 경험이다. 당장 어려운일이 생기고 귀찮은 일이 생기고 힘들다고 해도 잘 견디면 하나님이 크게 쓰실날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2. 장신대 교수 경험
장신대에서 교수생활 16년을 했다. 군대에 있을때는 엄하고 무서운 교관이었다. 그때 얻은 교육철학은 교육자는 학습자가 학교문을 나가기 전에 학생으로 부터 평가를 받고 칭찬을 받고 인기를 얻으려고 하면 교육자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교육자에 대한 진정한 평가는 학습자가 졸업한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다. 유학을 마치고 신학교에 학생들을 가르쳤다. 군대에서 얻은 교육철학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치니 인기가 없었다. 더우기 운동권 학생들을 반대해여 운동권들의 공격을 받았다. 장신대 16년간이 즐겁기 보다는 운동권 학생들과 싸우면서 보냈다.
돌이켜보니 이러한 장신대 16년 경험이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이다. 연단시킨 것이다. 새문안교회에서의 목회를 위해 연단시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새문안교회에서 가보니 쉽지 않았다.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서의 훈련경험과 장신대에서 교수하면서 싸웠던 경력이 없었다면 새문안교회 목회가 힘들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새문안교회 힘든 목회를 잘견디기 위한 훈련을 하나님께서 시키셨다는 생각이 든다.
3. 실패의 경험
제 자랑이 아니라 제가 각종시험에서 떨어져 본적이 없다. 그런데 운전면허 시험에서 떨어졌다. 운전을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 잘했다. 그런데 앞에서 긴장하여 헤매는 아주머니에게 훈수하다가 괘심죄로 떨어진 것이다. 실패라는 것은 한번도 겪어보지 않아 떨어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시험장을 나오며 문득 생각나는 것은 "네가 실패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는가" 하는 음성이 들렸다. 교회와서 생각해보니 교회안에도 실패를 겪은 사람이 많았다. 목회를 하려면 실패자들의 마음을 이해하는것이 필요할텐데 모르고 있었다. 그때서야 그것도 목회위해 준비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암의 경험
1997년 대장암 수술을 받았다. 그리고 1년을 쉬면서 항암치료를 받았다. 대장암으로 판정받는 순간 "왜 접니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때까지 하나님이 하지말라시는 것을 안하고 반듯하게 살아왔는데 왜 내가 암이 걸려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장신대 교수생활을 하면서 아쉬운것은 신학대학 교수가 기도하고 성경을 볼 시간이 없었다. 너무나 가르쳐야 할 과목과 강의시간이 많었다. 주당 25시간을 가르쳤다. 그래서 3시간 이상을 잘수 없을 정도였다. 교수중 어떤 분은 설교하다가 "죄를 안지고 감옥에 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감옥에 가면 남는게 시간이니 기도하고 성경보겠다는 것이다. 나도 같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암걸리고 1년동안 투병하다보니 시간이 남았다. 눈뜨면 기도하고 성경보고 기도하고 그자리에서 잠들고 깨면 기도하고 성경읽었다. 기도하고 성경읽기 위해 감옥가고 싶다는 것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암에 걸리게 하신 이유를 알았다. 다른것이 아니라 육심의 암을 통해 내속에 숨어있는 영적인 암을 발견하게 하셨다. 당시에 동료교수중에 저에게 불편하게 하는 교수가 있었는데 용서를 해야지 하는데 사실은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었다. 학생들에게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면서 나는 동료교수를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있는 것이 내속에 숨어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눈뜨는 첫시간에 그분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게 되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말씀은 그렇지만 실제는 어떻게 할수 있겠는가 했던것이 가능해졌다. 내힘으로는 안되는데 셩령님이 원수를 사랑하게 해주고, 가장 미워하는 사람을 위해 가장 많이 기도하게 하는 은혜를 체험하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운지 모른다. 놀라운 은혜였다.
그 이후로 암은 아무나 걸리는 것은 아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이 암이 걸리며, 암은 은혜받는 기회라고 늘 간증한다. 저는 암이 안걸리면 큰일날뻔 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영적인 암을 숨기고 목사로서 살았을 것이 아닌가. 암이 걸린것이 목회에도 도움이 됐다. 목회지로 나오니 교인중에 암에 걸린 사람이 많다. 중환자는 수술실에 들어가기전에 기도하는데 암이 걸려 사색이 된 교인에게 가서 위로할말이 별로 없다. 저도 몇년전에 암에 걸려 수술을 했다며 깊은 은혜를 받을 기회이니 감사하라.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줄 알라고 하면 사색이 된 교인들의 입이 벌어지고 화색이 돌며 할렐루야 하며 수술실에 들어간다. 그런분들을 위로하고 목회하라고 암이라는 훈련을 시켜주신 것을 깨닫게 된다.
뒤돌아보면 우리의 삶은 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인도하신 삶이다. 우리의 삶의 어느 한순간도 하나님이 한눈팔거나 내버려두신 순간이 없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항상 선한 길로 인도하심을 굳게 믿으라. 그래서 늘 감사와 기쁨과 순종으로 가득한 삶을 사시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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