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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응렬 목사 ① 세계 선교의 시작- 모라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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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3-05-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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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주의 한인교회중 선교에 특징적인 교회들이 있다. 이원상 목사가 원로목사로 있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도 그 중 하나이다. 이 목사는 지난 2월 뉴욕중부교회에서 열린 선교학교에서 4월말에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열리는 선교집회에 대해 언급했다.

와싱톤중앙장로교회는 "생명보다 귀한 사명"라는 주제로 선교부흥회를 4월 26일부터 3일간 열었다. 강사는 류응렬 목사, 이원상 목사, 닥터 프라이스와 테너 휴 프라이데이등이다. 류응렬 목사는 와싱톤중앙장로교회 4대 담임목사 청빙됐으며 5월 11일 담임목사 위임예배를 앞두고 있다.

류응렬 목사는 총신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와 고든콘웰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를 받고, 켄터키 루이빌에 있는 남침례신학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한후 선교사의 삶을 살기를 원해 휴학하고 중국선교사로 나갔다. 1년 정도 사역하면서 선교적인 삶을 살아야 하지만 풀타임 선교사로 부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이후 설교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2004년부터 총신대학원에서 설교학 부교수로 섬겨왔다.

선교부흥회에서 류응렬 목사는 "세계 선교의 시작-모라비안"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개신교 선교의 기적을 보여준 모라비안 선교에 대해 교수적인 지식과 선교사로서의 열정을 전했다. 아멘넷은 2회에 걸쳐 이 강의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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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부흥회에서 류응렬 목사

펜실바니아 베들레헴이라는 소도시가 있는데 그곳에 있는 교회를 방문했을 때이다. 한 1천명 정도 들어갈수 있는 큰 예배당이 지어져 있는데 교회역사를 소개해 놓았다. 교회가 세워졌을때 지역의 인구가 8백명쯤 되었다. 그 정도 밖에 안되는 인구인데도 천명이 들어가는 예배당을 세웠다. 그리고 마을의 모든 사람을 다 복음화하기 위한 열정으로 천명이 들어가는 교회를 세웠다고 설명해 놓았다. 인구가 800명밖에 안되는데도 1천명이 들어가는 예배당을 세웠던 사람들이 있었다.

서인도 제도에 흑인 노예들을 위한 선교사가 필요했을 때이다. 선교 지원을 받자 한 사람이 지원했다. 언제 떠날수 있겠는가를 물으니 나에게 신발 한 컬레만 더 주어진다면 내일이라도 떠나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하여 많은 선교사들이 흑인 노예들이 잡혀있는 지역에 가서 그들의 삶을 하나님께 드렸다. 노예들에게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노예가 되어야만 그들을 이해하고 한마음으로 복음을 전할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곳에 들어가면 자신이 노예가 되어서 복음을 전하러 들어간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었다.

선교사로 지원했던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모든 사람들을 다 보낼수 없어서 제비뽑기를 했다. 제비를 뽑아서 하나님이 보내시면 떠나고 만약 머물라는 표를 뽑으면 기도하면서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했던 사람들, 그들이 한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을 물들였던 모라비안 사람들이었다.

왜 모라비안 선교인가?

왜 모라비안 선교를 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자 하는가. 기독교 역사에 세계곳곳에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세상을 변화시켰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선교사로 훈련을 받았던 한 단체에서는 모라비안의 뒤를 따르려고 아예 이름을 모라비안으로 바꾼 사람도 있었다. 늘 모라비안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삶을 드리고자 했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가면서 두가지 결단을 했다. 하나님이 저에게 은혜를 주셔서 책을 번역하거나 쓰게 된다면 첫번째 번역하거나 쓰는 책은 반드시 선교에 대한 책으로 하겠다는 결단이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책을 쓴 윈형제가 두번째 쓴 '백투 예루살렘'을 번역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에 대한 책을 먼저 번역을 하게 된 것이다.

주님이 은혜를 주셔서 책을 쓰게된다면 어떤 선교에 대한 책을 쓸것인가. 20대 젊은 저의 가슴을 불태웠고 오래동안 생각할때 마다 심장을 뛰게했던 그들이 모라비안 사람들이었다. 미국에서 자주 모라비안에 대해 논문도 발표하면서 다시한번 그들의 삶의 흔적을 찾아보고자 다녔던 시절이 있었다. 이름만 들어도 우리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는 사람들, 한순간이라도 적당하게 살기를 거부하게 만드는 사람들, 그들이 모라비안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은 근대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고 할때 윌리암 캐리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한다. 윌리암 캐리가 인도에 선교를 떠나기 60년전에 이미 모라비안 선교의 사람들이 선교지를 향하여 떠났다. 중국 선교의 아버지, 허드슨 테일러가 중국으로 선교하러 떠나기 150년전에 먼저 선교지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네덜란드 소속 영지였던 서인도 제도에 처음 모라비안 선교사를 나갔을때 그곳에는 10만명의 노예들이 매해 팔려와서 가련한 인생을 보내야 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서인도 땅에서 노예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들에게 소망을 불어 일으키자 백인지주들이 좋아하지 않았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핍박과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그들의 헌신과 기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노예해방의 기틀까지 쌓은 사람들이 모라비안 선교회였다.

어떻게 모라비안 선교회가 세상의 역사를 고치는 선교회가 될수 있었을까. 모라비안 선교회는 선교회라고 말을 하지만 평범했던 하나의 교회였다. 우리와 동일했던 교회였지만 수많은 선교사를 파송했기에 선교회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모라바인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던 때가 1700년대이다. 그들이 20년동안 파송했던 선교사 숫자가 종교개혁이 일어나고 지난 2백년간 모든 개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수 보다 더 많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수 있을까.

선교는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전유물?

모라비안들은 선교를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진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모라비안 교회에서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바로 선교였다. 예수를 믿고 만나게 되면 선교라는 것은 피할수 없는 과제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한 교회가 20년간 파송한 선교사의 수가 지난 200년 모든 개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 수 보다 더 많을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세계선교에 대해 다른 사람들의 관심이 왜 적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종교개혁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세계선교를 모든 교회에 주어진 과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사명은 주님의 제자들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명령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루터도 그들중 한 사람이었다. 장로교 기틀을 세운 칼빈같은 경우는 선교를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브라질로 수십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기도 했다. 칼빈을 따랐던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을 이미 하나님이 하셨으면 다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으로 세계선교에 대해 미온적이었다.

예수님은 분명히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을 하셨다. 다시 한번 주님이 부탁하셨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주님의 열두제자들과 부름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 명령에 순종하면서 세계선교를 위해 그들의 삶을 던졌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명령앞에 어떵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이다. 과연 그 주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있는가. 과연 오늘 나에게 말씀하시는 절절한 하나님의 목소리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니면 2천년전 제자들에게만 국한되어 주신 말씀으로 듣고 있는가.

예수님은 지금 이순간에도 동일하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성령을 체험하고 땅끝까지 가서 나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 말씀은 지금 우리 한사람 한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모라비안 성도들은 이 말씀을 그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말씀이 되었기에 그 교회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교회로 바뀌게 된 것이다.

순교자 '존 허스'

왜 모라비안 교회라고 이름을 부르는가. 모라비안 교회를 이해하려면 한사람을 이해해야 한다. '존 허스'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1373-1415년까지 짧게 생애를 살다가 간 분이다. 허스는 당시 캐톨릭 시대에 특별한 신앙을 가졌다.

허스는 사제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을수 있고, 누구든지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아갈수 있고, 성경만이 우리가 의지하고 믿어야 할 대상이라고 평신도들에게 해방의 복음을 선포했다. 사제들의 전유물 같았던 복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날수 있고 예수님의 말씀을 깨달을수 있다고 증거했던 사람이다.

오늘날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당시에는 마치 혁명같은 말이었다. 그래서 캐톨릭에 잡혀갔다. 발언을 취소하고 평생 감옥에서 살든지 아니면 타오르는 불속에서 화형시키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말씀을 다시 가르치시지 않는 한 자신의 생각을 고칠 생각이 없었고 결국에는 타오르는 불덩이속으로 들어가 화형의 이슬로 이땅을 떠났던 순교자였다.

후스를 따랐던 많은 개혁가들이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따랐던 수많은 사람들, 그들은 카톨릭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갔던 소수의 무리였다. 그 소수의 무리들이 모라비안 교회에서 가장 중요했던 한 사람, 세계사에도 이름이 잘알려진 '진센돌프'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들을 만나서 함께 이룬 것이 모라비안 교회가 된 것이다.

그들의 시작이 예전에 모라비아 라는 곳에서 시작되었고, 진센돌프를 만나서 구체적으로 교회가 탄생이 된것이다. 모라바안 교회를 이해하려면 모라바인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고, 기틀을 쌓았고, 자신의 전 삶을 선교를 위해서 헌신했던 진센돌프 백작의 이름을 거쳐가야 한다.

모라비안 선교의 시작 - 진센돌프

진센돌프 백작은 1700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높은 장관이었던 사람이고 태어난지 6주만에 죽었으며, 어머니는 진센돌프가 4살때 재혼을 하여 할머니와 숙모의 품에서 어린시절 자랐다. 어린 진센돌프는 할머니에게 영향을 받았다. 할머니는 철저하게 엘리트 층에 있으면서 높은 사람들 특히 대학교수들과 교제하며 당시 특별한 신앙흐름인 경건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린시절 부터 진센돌프도 경건주의의 대가들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하나님앞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기초를 배웠다.

진센돌프는 여러 외국어도 능통했으며, 외적인 지위나 내적인 실력이나 모든면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백작이었다. 그는 5살이 되었을때 부터 그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결단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린시절 부터 말씀으로 훈련을 받았으며, 대학에 다니면서 했던 3가지 결단이 있다. 첫째 나는 한사람 한사람을 예수님처럼 대하면서 천절하게 내삶을 그들을 위해 드리리라, 둘째 어떤 일을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며 충성하는 삶을 살리라, 셋째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세계까지 전파하리라.

대학때부터 복음을 향하여 신실하게 살아갔던 진센돌프가 예수님을 위해서 구체적으로 헌신했던 결정적인 계기가 일어났다. 진센돌프는 대학을 졸업한후 유럽을 투어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뒤셀도르프의 한 회당에서 특별한 그림을 하나 보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고통을 받으시는 장면이었다. 그 밑에 글귀가 쓰여져 있다. "나는 너를 위해서 피흘려 내몸을 주었건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그 글귀는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신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들려주신 음성이었다. 그때부터 진센돌프 백작은 결단한다. "지금까지 나름대로 주님을 위해 살아왔다고 하지만 주님을 위해서 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시는 내인생을 나를 위해 보내지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 보내기로 하겠습니다."

진센돌프는 목사가 되기로 결단했다. 그러나 진센돌프 는 높은 귀족의 가정이었지만 당시 목사는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그래서 진센돌프는 할머니의 권유로 변호사직을 계속 수행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자 하는 열망이 진센돌프를 그냥 두지 않았다. 커다란 영지를 사서 교회를 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주일에 초청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증거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농부와 부랑자들, 그리고 소망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며 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진센돌프는 모라비안 교도들을 만나게 되었던 특별한 계기가 일어났다. 1722년으로 진센돌프가 22살때였다. 순교자 '존 허스'를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핍박을 받다가 진센돌프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래서 진센돌프의 영지에 와서 정착을 한다. 진센돌프는 그들에게 말씀을 전했고 교회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모라비안 교회가 생겨나게 된 첫걸음이었다.

진센돌프는 1734년에 목사가 되었고, 백작등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귀족의 지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기로 결단하고 나아갔다. 그에게는 특별한 아내가 있었다. 당시 귀족들은 같은 귀족과 결혼했지만, 진센돌프는 복음을 위해 평범한 여인과 결혼했다. 집안의 반대때문에 1년동안 결혼사실을 집안에 알리지 않고 살아갔다. 진센돌프는 오직 복음을 위해서 때로는 가정에서 버림을 핍박을 받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길을 걸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진센돌프가 평생토록 가졌던 한 구호가 있다. "나는 하나의 열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라비안 교회의 두가지의 특징

진센돌프는 모라비안 교회가 두가지의 특징을 가지기를 원했다. 한가지는 온교회가 온전히 가족처럼 하나되는 사랑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다. 한 공동체가 서로간의 마음을 나누고 공동체안에서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표출하지 못한다면 누구에게 사랑을 전파할수 있겠는가. 진센돌프는 진정한 가족공동체를 강조했다. 또한 안에서의 사랑공동체뿐만 아니라 세상의 빛처럼 살아가는 전투하는 교회도 그가 지향하는 두가지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지지난주 사도행전의 교회특징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을 통해 우리교회가 나아가야 할 4가지 방향성이 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능력공동체,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사랑공동체, 만날때 마다 마지막 예배인 것 처럼 예배하는 예배공동체, 모든 기도 말씀 모임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인 복음을 확장시키는 생명공동체라고 했다. 진센돌프가 추구했던 공동체가 바로 생명공동체요, 전투하는 교회요, 사랑의 공동체였다.

성령을 받고 세계선교를 시작하다

모라비안 교회가 평범했던 교회였지만 세계선교를 위해서 일어나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다. 모라비안 교회 가운데 거룩한 부흥운동이 일어난 시발점은 1727년 8월이었다. 오늘날 교회처럼 부흥집회를 하고 있을때였다. 성령님이 집회가운데 그들에게 임하신 것이다. 얼마나 성령이 강하게 임하셨는지 가시적으로 성령을 체험할정도로 집회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그들의 삶을 주님을 위해 드리기로 결단을 하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고 몇년후인 1732년에 선교가 시작된다.

진센돌프가 코펜하겐 왕실 대관식에 참석했을때 그곳에 온 노예들을 만나게 된다. 지금까지 노예들의 삶에 관심이 없었던 진센돌프는 노예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 듣게 된다. 어떻게 한 인생이 태어나서 저렇게 비참하게 살아가는지 마음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노예들을 자신의 교회로 초청하여 그들의 생활을 교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리고 진센돌프는 교인들에게 노예들을 위한 선교사로 삶을 바치기 원하는 사람을 초청을 한다. 26명이라는 많은 사람들의 그들의 삶을 노예들을 위한 선교로 드리겠다고 결단하고 헌신하며 손을 들게 되었다. 전혀 가보지도 못했던 곳에 가서, 전혀 이름을 듣지 못했던 이방땅의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서 그들의 삶을 드리겠다고 헌신하며 나온 사람들이었다.

모라비안 선교회가 1732년 8월 서인도 제도에 최초로 두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했다. 한 사람은 목수이고 한사람은 옹기장이였다. 평범했던 우리와 다를바 없는 소시민이었다. 두사람이 선교지로 가기위해 배를 탄 모습은 기록에 잘나타나 있다. 이제 들어가면 다시 오지못할 두사람을 보내면서 교도들이 부둣가에 나와서 그들을 배웅한다. 들어가는 배삵만 가지고 들어가는 두사람을 태운 배가 떠나는 순간 한사람이 그들을 향하여 소리를 친다. "우리의 죄를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여, 당신의 고통이 우리가 드리는 생명과 희생을 통해서 보상을 받아 주소서."

어린양의 피를 기억하면서 생명을 던지며 떠나가는 사람들, 그 젊은이들이 남긴 메세지이다. 이시대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 말을 듣고 뒤를 잇고 있다. 서인도 제도에 도착한 선교사들의 삶을 보여주는 글들이 많이 남아있다. 그들은 노예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수수밭에 앉아 희망없는 노예들을 위해 기도할때 노예들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나오고 가슴을 열고 예수님을 믿고 그렇게 노예들의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모라비안 선교사들은 들어가지 않은 지역이 없다고 할 정도로 수많은 나라, 특히 다른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꺼려했던 지역에 들어갔다. 모라비안 선교회가 1732년부터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고 1760년까지 28년간 보낸 선교사 수는 226명이 넘었다. 1930년까지는 모라비안 교회를 통해서 3천명이라는 엄청난 교인들이 전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다. 12명의 교인중에 1명이 선교사로 파송이 된 것이다. 우리 교회같은 경우 장년 3천5백명등 모두 4천5백명정도 나온다면 3백명 이상을 선교사로 파송해야 한다. 그것도 다른데서 선교사를 데리고 와서 파송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인중에 3백명이 선교사로 나갔다는 말이다.

모라비안들의 선교지 몇군데를 소개하면, 얼음으로 뒤덮힌 그린랜드에 1733년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특별히 배움이 없었던 사람들이 파송을 받았다. 얼음으로 뒤덮힌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복음을 전했지만, 먹을것이 없어서 때로는 굶어죽고 때로는 핍박을 받았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증거했던 복음때문에 에스키모 인들이 마음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시작했다.

미국에도 수많은 모라비안 교도들이 미국 초창기에 들어갔다. 제일 먼저 들어간 곳이 조지아, 펜실바니아, 노스캐로리나등이다. 많은 미국지역에 모라비안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고 말씀을 전했다. 미국 초창기에 모라비안 선교사들의 흔적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복음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요한 웨슬리를 변화시킨 모라비안 선교사

감리교를 세운 요한 웨슬리가 1735년 영국에서 미국 조지아에 선교사로 들어왔다. 대서양을 횡단하면서 배가 뒤집힐 정도의 푹풍속 죽음의 위협앞에서 벌벌 떨고 있었던 요한 웨슬리는 배한편에서 너무나 고요하고 평안한 소리로 하늘을 향하여 찬송하는 사람들을 발견하는데 그들이 바로 모라바인 교도들이었다. 요한 웨슬리는 저들은 누구이기에 죽음의 위기에서도 전혀 요동없이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하고 있는가를 물었다.

요한 웨슬리가 조지아에서 한 선교는 성공적이 아니었다. 선교에 실패하고 기진맥진해서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738년 5월에 영국에서 거리를 걷고 있을때 부흥집회가 열리는 것을 발견했다. 요한 웨슬리는 설교를 듣고 그의 심령속에 다시한번 부흥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설교를 한 사람이 모라비안 평신도 선교사였다. 요한 웨슬리는 일기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설교를 통해 내 가슴이 강렬히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되었고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구원자가 되었다. 그리스도는 나의 죄와 내 자신까지도 가져가시고 구원의 확신을 주셨다. 죄와 죽음의 율법으로 부터 나를 구원하셨다."

요한 웨슬리는 다시 한번 힘을 얻어 영국의 런던을 변화시키고, 런던의 모든 술집을 닫게 할 정도로 거룩한 부흥운동을 일으켰던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영국의 브리스톨에 가면 요한 웨슬리가 목회했던 조그마한 교회가 남아있다. 요한 웨슬리는 말을 타고 일생동안 여가저기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의 일기장에는 "아침 7시30분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다. 3,500명 모임. 오전 11시에 가서 주의 복음을 증거하다. 2,500명 모임. 오후에 티타임을 하고 4시에 다시 복음을 전하러가다. 2,500명이 모임."

요한 웨슬리는 일생동안 말을 타고 말위에서 잠을 자면서 복음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 그를 변화시킨 사람이 바로 모라비안 교도들이었다. 전세계가 나의 교구이라고 하면서 세계를 가슴에 품고 복음을 전했던 요한 웨슬리를 변화시킨 사람이 모라비안 선교사였다. 그들이 어떻게 무슨 선교를 했기에 이렇게 세상을 떠들석하게 만들고 사람들에게 변화가 일어날수 있었을까.(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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