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 목사] 목회자 위상 회복을 위한 칼럼 (7) 은혜를 아는 자의 절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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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2ㆍ2024-06-20 10:58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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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서울올림픽 당시 난 운영요원으로 여러 가지 일을 하였었다. 당시 업무 차 태능선수촌을 방문하게 되었었다. 그곳에서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기억에 남는 권투선수와 함께 식사를 하게 된 적이 있었다. 당시 내 기억에 그 권투선수를 보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국가대표 선수가 될 수 있을까 의아해 했었다. 얼마나 체격이 왜소한지 정말 아프리카의 굶주린 아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점심을 몇 수저 먹었을까, 바로 일어나는 그 선수를 향해 동행했던 사무관이 한마디 했다. “어떻게 그렇게 먹고 훈련할 힘이 나나요?” 그때 그 선수가 한말이 기억에 남아 있다. “체중 조절을 위해 음식 조절을 해야 합니다.”
결국 그 선수는 서울올림픽 권투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땄다. 김광선 선수이다. 난 이분을 생각해 보면서 만일 올림픽 경기가 아니었다면 그렇게 음식을 절제할 이유가 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올림픽이란 목표를 앞두고 철저하게 절제된 그의 삶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절제라는 것은 어쩌면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감당해야 할 중요한 덕목이 아닌가 한다.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나라를 향해 가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절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목표가 없기 때문이다. 절제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할 필수과정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목사에게는 스스로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통제 안에 있기에 하나님 앞에 선 순종의 중요한 잣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절제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을 못한다는 의미이다.
그 중에 1순위가 “말”이다.
사람들이 말이나 행동이 즉흥적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은 이미 심리학에서 증명된 논리다. 말과 행동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인격이나 가치관이 밖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말을 절제 못하고 막말을 한다는 것은 이 세상을 자신의 통제 안에 두겠다는 폭군이나 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목사들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절제 없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당성과 의를 세우기 위해 말을 한다. 그러나 정화되지 못한 말들, 통제가 안 되는 말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킨다. 그 이유는 말은 밖으로 나오면 역동하는 에너지가 되기 때문이다.
대화라는 것이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바탕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일반적으로 자기 말만 하는 사람,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지 않는 사람. 또 말하고 있는 상대방의 말을 가로채서 말하는 중간에 끼어들어 말의 본질을 다르게 만드는 분들, 다 절제력이 없는 분들이다.
이런 절제력 부족이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즉 자기가 주인이고 왕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목사는 생각난다고 막말을 하라고 부름받은 자가 아니라고 여겨진다.
목사는 자신이 하는 말을 하나님 앞에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절제되지 못한 말들로 인해 목사들이 모이는 곳마다 언성이 높아진다. 다 하나님 앞에서 검증받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말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 아니겠는가.
식욕도 대표적 예이다.
목사는 일단 잘 먹어야 한다. 나처럼 소식하는 사람은 목사 될 자격이 좀 부족하다. 문제는 식탐이다. 목사들이 먹기 위해 맛있다고 하는 곳은 사방팔방 다 찾아다닌단다. 식탐이 상상을 초월한다. 자기 앞에 있는 것들은 다 먹어야 자리에서 일어난다. 도무지 절제가 안 된다.
하기야 먹을 것이 풍성하다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다. 은혜로 주신 음식 감사하게 잘 먹어야 한단다. 맞는 말 같지만 절제되지 못하는 식탐은 받은 은혜를 배신한 것이다. 그 배신의 결과는 온갖 질병으로 나타날 것이고 마지막에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엄청난 괴로움을 안겨다 주는 이유가 다 절제되지 못한 식탐 때문 아닌가?
사탄은 절제력이 부족한 인류 최초의 인간에서부터 먹을 것을 가지고 유혹했다는 사실을 놓치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지금도 똑같은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여겨진다. 먹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절제하고 또 내 절제로 인해 식량의 불평등을 겪고 있는 굶주린 이웃에게 평등을 제공할 초석이 된다는 것을 목사들이 되새겨야 할 것으로 보여진다.
또 하나 성욕이다.
목사이고 나이가 70이 넘었으면 적어도 성욕 정도는 얼마든지 절제할 수 있는 인격이 있어야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데 육체는 노쇠해져 가는데 성욕은 왕성해져 간다. 더욱이 성적 욕망을 부추기는 통제 불능의 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이 시대는 인간의 의지력으로 불가능하게 만들어 놓은 성욕과 어떻게 싸우느냐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관건이 아닌가 여겨진다.
목사가 성욕에 사로잡히면 이미 목사의 본질을 상실한다. 성욕이 이성을 지배하다보니 좀 예쁜 여성도들에게는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어떻게 해서든지 친밀감을 표현하고 가까워지려는 동물적 표현이 암암리에 드러난다. 본인은 거룩한 체하지만 벌써 동물적 본능은 숨길 수 없다. 젊은 목사나 은퇴한 노년의 목사들이나 예외없이 이 수렁에 빠져 허덕이는 목사들이 부지기수라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치욕이다.
사실 인간의 욕구를 절제할 의지력은 우리에게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은혜가 바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도록 할 절제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그래서 절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는 은혜받은 자의 표현이고 의지이다.
이 받은 은혜를 절제력으로 표현할 의지가 없으면 목사는 통제 불능이다. 결국 하고 싶은 것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말하고 싶은 것 말하고, 가고 싶은 곳 가고야 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목사들은 눈에 보이는 외적인 것에 넘어지고 또 아무도 안보는 골방에서 범죄하면서 타락의 올무에 스스로 걸려있으면서도 사람들 앞에서는 더 거룩한 체 외식하는 목사로 있을 확률이 높다.
절제한다는 것은 순전히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싸움이다. 목사가 하나님 보는 앞에서 볼 것 안볼 것, 할 것 안할 것, 먹을 것 안 먹을 것을 통제받지 못한다면 목회자로서 이미 자격이 상실한 자가 아니겠는가. 결국 뉴욕교계 목사들의 위상이 높아지려면 이 절제의 훈련을 할 수 있도록 불을 붙여 놓을 진정한 지도자의 지혜가 절실한 때가 아닌가 여겨진다. 어쩌면 절제는 내가 믿음을 지킬 수 있는 선악을 아는 나무인 것 같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9:25)
한준희 목사(뉴욕목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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