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선희 목사 "도덕적이고 지식적인 설교의 문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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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3-04-08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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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목사회(회장 최예식 목사)는 곽선희 목사 초청 목회자 세미나를 4월 8일(월) 오전 10시 퀸즈중앙장로교회(안창의 목사)에서 열었다. 곽 목사는 "설교와 현대 목회"라는 주제로 강의를 해 참가한 목회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다음은 세번째 세미나 내용이다.
곽선희 목사는 현대설교의 문제점으로 도덕적인 설교와 지식적인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곽 목사는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설교로는 교인을 바꿀수 없으며 오직 사랑으로만 바꿀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지식적인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목사들은 너무 지식으로 성경지식을 주려고 한다며, 성경은 묵상하는 책이지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세미나를 인도하는 곽선희 목사
자 이렇다면 설교가 오늘와서 크게 잘못되고 문제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런 관점에서 현대설교를 보자.
현대설교 문제점 1. 도덕주의
첫째, 현대 설교가 잘못된 것이 도덕주의 설교이다. 그래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안식일 지켜라, 십일조 바쳐라, 무엇을 하라 이런 설교는 율법주의이다. 초대교회에서 부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안된다. 설교자의 제일 중요한 것은 교인들을 졸지 않도록 깨우고 가면서 설교해야 한다. 그것도 기술이다. 교인들이 조는 것을 보고 그냥 설교하면 죄이다. 깨워가면서 설교해야 한다.
대치동에 6천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름은 대면 다알지만 실례이니 안한다. 담임목사가 굉장히 율법적이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성수주일이다. 목사가 설교하다가 끝에 가면 꼭 성수주일을 강조한다. 그런데 교회 바로 앞에는 전부 식당이다. 그래서 예배마치면 교인들이 나가서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는다. 목사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설교하다가 "장로놈들이 사먹으니 젊은 사람들이 사먹는다"고 막 내려친다. 장로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 목사가 개척한 교회라서 장로들을 무시하고 막 내려친다.
어느날 그 교회에 주일 저녁예배 설교하러 갔다. 장로 3분이 나를 데리고 교회앞 식당에 가서 식사를 대접하여 주일인데 잘먹었다. 먹고 난 다음에 장로들이 선배인 내가 후배인 그 목사에게 진지하게 말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성수주일해야 하니 식당에 가지 말라고 하면 좋겠는데 '장로놈들'이라고 하니 거북하니 좀 말려달라고 한다. 나는 별것도 아닌데 왜 고민하느냐고 하니 장로들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먹고 회개하라고 했다. 그러니 장로님들이 "그것을 몰랐구나" 하고 좋아했다.
주일에 외식을 했다고 지옥가는가.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왜 그렇게 각박한 분으로 만드는가.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아멘'하고 그냥 먹으면 되지 지나친것도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자기교만함을 만들고 남을 비판하게 만든다. 교회에서 그러면 안된다. 비판의 눈이 밝으면 안된다. 교회 예배는 축제이니 다 받아들이고 다 용서하는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미국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한국에는 "너는 혼수도 안가지고 왔냐"라는 말이 있다. 시어머니가 결혼전에 며느리될 사람을 만났는데 보니 배가 안불렀다. 그래서 "너는 혼수도 안가져 왔냐"라고 한다는 것이다. 애를 하나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래야 좋은 며느리이다.
그것도 이유가 있다. 그래서 세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결혼해서 40%의 부부가 애를 못낳는다. 애가 안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애를 가지고 들어오면 얼마나 좋은가. 요즘은 결혼식때 배가 불러가지고 들어와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고 잘되었다고 한다. 그런 세상이다. "너는 혼수도 안가지고 왔냐"라는 말은 유명한 말이다. 배불러서 오는 것이 혼수이다. 그런 세상이 되었다.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비판할것이 없다. 옛날과 다르다. 결혼식도 안하고 그냥사는 사람도 많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다. 우리교회는 탈렌트 영화배우등 여러분야의 연예인이 3백명이나 된다. 왜 이분들이 우리교회에 오는가. 제 설교가 가장 좋다고 한다. 다른데 가면 자꾸 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는 그런것이 없다. 교인들에게 비판없는 설교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잘못될것이 없다. 목사들이 꼬집는 설교를 해도 잘못되기 때문이다.
비판한다고 달라지는가. 절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외에는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 어떤 비판도 어떤 심판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도 못하신다. 홍수로 내려치셔도 안된다.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을 목사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그러니 목사의 입에는 비판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사랑이다.
그런것을 많이 본다. 결혼 주례를 했다. 신혼여행을 갈때 인사를 하러 왔다. 신랑이 45살이다. 그래서 내가 "많이 늦었다. 허니문 베이비 쌍둥이를 낳으라"고 한마디 했다. 그 친구가 내 귀에다 대고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하나 들어섰어요" 한다. 이런 세상이다. 그래서 내가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루이스의 말대도 사람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트로게'에서 자랐고, '필리아'에서 성숙해가고, '아가페'에서 완성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유명한 학설이 있다. '에로스'라는 것은 암놈과 숫놈이 만나는 것이다. 정신없는 것이다. 무서운 힘이다. 생명의 힘이다. 서로 만나서 화끈해서 애를 만드는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 가정이라는 속에서 깨닫는다.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와 지내면서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이 '스트로게'이다. 그 다음에 '필리아'가 있다. 도덕적인 사랑이고 이웃의 사랑이고 넓은 사랑을 경험한다. 그 다음에 '아가페'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완성의 프로세스 과정중에 있는 것이다. 내 사랑이 어디까지 왔는가, 그 사람의 사랑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인정해야지 지금 당장 '아가페'가 되라고 할수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사랑의 정도와 수준을 인정하고 다 같이 몰고가야 한다. 이것이 메세지라는 것이고 설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인 비판이 설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어두운 사회를 다시 변화시킬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외의 어떤 비판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도 못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할 본분을 다 할 뿐이다. 오직 사랑이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복음주의의 핵심은 설교의 중심이 사랑에 있다. 이것도 사랑이고 저것도 사랑이라고 설교하고, 교인들이 삶의 터전에 돌아가서 경험하면서 "아, 이것이 이 사랑이구나. 미처 몰랐는데 저것도 사랑이구나" 이렇게 깨닫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있을수 없다. 오직 사랑이다. 이것이 복음주의 설교의 핵심이다. 도덕주의라는 것이 참 문제인데 이것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현대설교 문제점 2. 지식주의
어려운 말씀인데 두번째가 지식주의이다. 현대설교가 잘못되는 것이 지식주의 때문이다. 설교를 통해 지식을 주려고 한다. 어떤 지식도 반론이 있기 마련이다. 지식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 어떤 지식도 완전하게 느껴지도 않는다. 그런고로 지식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그런데 자꾸 목사는 설교를 통해 지식을 주려고 한다.
제가 보수적인 목사 2백명 모인데 가서 세미나를 했다. 가만히 보니 방향이 있는 것 같아서 한마디 물어보았다. "목사님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많이 시키지요"라고 물으니 많이 하려고 애를 쓴다고 답을 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많이 한 교인이 교회에서 좋은 교인인가 나쁜 교인인가"라고 물으며 양심적으로 손들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목사들은 성경공부 많이 한 교인들이 말썽이라고 대답했다.
성경공부도 공부는 공부이다. 성경공부를 많이 시키면 그 교인때문에 교회에서 쫓겨난다. 알겠는가. 그 이유는 성경은 지식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지식을 주려고 한다. 그래서 전에 있던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는데 후임 목사는 다르게 설교한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꼭 잊지마라. 성경은 묵상하는 책이지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 목사들은 너무 지식으로 성경지식을 주려고 한다. 성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설교하다가 몇장 몇절 하고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이 '성경속에 다 있겠지' 하며 '그 다음 말만 하세요'라고 냉소적으로 대응한다. 심지어는 어떤 교인들은 저 목사가 밑천이 없어서 또는 할 말이 없어서 저런다고 말한다. 설교할때 '몇장 몇절'은 필요없다. 한 절이면 충분하고 이속에서 말씀이 들려와야지, 길게 말한다고 무슨수로 성경을 설명하겠는가.
설교할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셔서 12지파를 주셨다. 12지파 이야기를 하겠다. 야곱은 아내가 4명이고 그들을 통해 12지파가 나온다. 이런것을 무슨 말로 설명하겠는가. 목사들은 아내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은 안된다. 성경에 그 많은 이야기들을 무슨말로 설명할것인가. 그래서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으라 하지만 그래도 다행한것은 안 읽기때문에 좋다. 성경을 읽어와서 따지면 큰일난다. 그런 사람이 좀 있다, 유달리 성경을 많이 읽고 와서 몇장 몇절 골치아프게 하는 교인이 있다. 성경은 묵상하는 책이다. 성경은 비판하며 읽고 지식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현대 목회의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 신교의 장점이면서 단점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교의 단점은 지식이다.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고 제자훈련하고 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신교의 특히 장로교의 사람중 상당한 지성인들이 카톨릭으로 간다. 이것은 놀라운 이슈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카톨릭으로 갔느냐고 물었다. 첫째, 신교는 시끄럽고 구교는 조용하다. 신교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데 구교에 가니 하나님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가. 하나님을 믿으러 갔는데 하나님은 없고 애들만 떠들고 음악하고 있다. 이것이 뭐하는 짓인가. 난리이다. 그래서 경건을 찾아야 하고 예배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찬송을 부르던 설교를 하던 모든 순서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 좀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예배이다. 하지만 요즘 교회들이 그렇지 못하다.
한국교회의 무당 끼, 노래방 끼, 지식에 대한 오해
한국교회가 세가지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말한다. 첫째 무당끼가 많다. 우리 민족은 무당끼가 핏속에 있다. 무당끼가 문제이다. 그래서 같은 음악을 해도 한국청년과 미국사람하고 하는 것이 다르다. 면밀히 연구해 보았다. 미국사람은 정신차리고 움악을 하고 우리는 정신이 빠져서 한다. 그것이 다르다. 같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새들백교회에 가서 음악하는 것을 보면 한국교회와 다르다. 찬양을 하다가도 찬송부를때 보면 정장한다. 다르다.
윌로크릭교회에 가서 보니 복음성가 12곡을 부른다. 종이를 나누어 주는데 가사만 있고 악보가 없다. 왜 악보가 없는가 물으니 악보가 들어가면 가사의 뜻이 희석된다고 대답한다. 찬양의 가사가 아름다운 시인데 콩나물 대가리가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말이 된다. 복음성가를 12곡을 하고 맨 마지막 가서 찬송가 두곡을 부르는데 '홀리 홀리 홀리' 하면서 다 일어서서 정장을 해서 부른다. 미국 교인들은 난리굿을 해도 정신을 차리고 하는구나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한국교회 찬양은 미쳐서 한다. 무당끼가 있어서 그렇다. 무당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둘째는 노래방 끼가 있다. 찬양을 부를때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와 비슷하게 부른다. 노래방 끼에 빠진다. 세번째가 교회는 학원이 아닌데도 지적인 일에 빠진다. 지식을 배워 어떻게 생활에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지식 자체를 자기 격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을 많이 알면 나는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지식을 많이 알면 다른 사람들과 계급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봉건주의적인 생각이다. 지식이 많다고 사람이 달라지고 격이 높아지는가. 아무것도 아닌데도 우리는 성경을 많이 본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과는 상대를 안하고 저 사람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자체가 문제가 있다.
설교 중에도 자꾸 지식을 주려고 하는데 모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모든 지식은 반론이 있다. 반론에 시달리면서 지식은 얻었는데도 가슴은 싸늘해지고 만다. 이것이 반복되면 마지막에 교인이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설교가 지식을 주려고 하면 안된다. 은혜를 주어야 하고 감격을 주어야 하고 깨달음을 주어야 한다.
원고를 보며 설교하는 설교자는 회개해야 한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고를 보고 설교를 하면 안된다. 요즘은 원고설교하면 안된다. 목사님이 원고를 보는 순간 교인들은 잔다. 사람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듣는 것이다. 눈과 눈이 마추쳐야 듣는 것이다. 눈이 안 마주치면 아무것도 안들린다. 우리교회 4천석 예배당 앞에서 맨뒤까지 53미터 이다. 얼마나 먼가. 내가 교인들을 돌아보면서 설교하면 교인들은 나를 전부 본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밑을 보면 교인들은 다른데를 본다. 사실이다. 멀리있어도 눈과 눈이 마주쳐야 한다. 중요하다. 절대로 눈이 다른데로 가면 안된다. 매스 미디어 시대에 원고를 읽고 있다면 빨리 회개해야 한다. 원고는 무슨 원고인가. 목사가 그 말씀에 은혜받으면 받는 순간에 무슨 말을 할것인가 훤하다. 그런데 무슨 원고가 필요한가. 원고가 필요한 목사는 아직도 프로가 되지 못했다. 프로는 그렇지 않다.
탈렌트를 보라. 탈렌트는 남의 쓴 글을 외워서 연기한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까지 하면서 애를 쓰는데 목사는 자기가 써온 원고도 잘못 읽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목사는 원고를 써가지고 와서 한참 읽는데 종이순서가 바뀌어 당황해 한다. 이것이 직무유기이다. 원고없이 설교해야 한다. 분명히 말한다.
이야기식 설교와 웅변식 설교
설교는 이야기 식으로 해야 한다. 그럴려면 이야기 구성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같은 이야기도 직선적으로 말하면 논란이 된다. 그래서 설교내용을 이야기에 담아서 말해야 한다. 이야기에 담아서 설교하면 교인들의 놀라서 듣는데 직선적으로 바로 말하면 교인들은 설교를 안듣고 5분내로 잔다. 안된다. 그러니 설교를 이야기식으로 구성하여 교인들이 쉽고 편안하게 잘 받아들일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동시에 역설적이지만 웅변적이어야 한다. 설교할때 물이 흘러가듯이 변화없이 말하면 안된다. 웅변하듯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웃기기도 울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식이다. 설교가 이야기이니 고저장단으로 말하여 교인들이 편안하고 이해가 잘되도록 전달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웅변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를 책을 읽듯이 하면 안된다. 교인들은 책읽는 소리를 싫어한다. 웅변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예를 소개하겠다.
송도에 있는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하는데 당회장은 따로있다. 나는 주일 11시 예배만 설교한다. 사회도 당회장이 하고 나는 설교와 축도만 한다. 당회장은 젊은 목사로 프린스톤에서 목회학 석사를 공부하고 풀러신학교에서 박사공부를 한 상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말이 빠르다. 사회를 하는 것을 보아도 말이 빠르다. 문장의 내용은 좋지만 말이 빨랐다. 한 2년 지나서 조언을 했다.
"설교를 할때 원고가 없는 것 처럼 말해야지 책을 읽는 것 처럼 하면 안된다. 그리고 말이 너무 빠르다. 사람은 한꺼번에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말하고 좀 기다렸다가 다음 말을 하고 해야 교인들이 이해가 되지 쉼이 없이 책을 읽듯이 빠르게 읽어나가면 설교를 이해할 교인은 몇 안된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 가능하겠지만, 노인부터 여러 계층이 다 있는 교회에서 설교할때 그래서는 안된다."
"올라갔다 내려오고, 길게했다가 짧게하고. 그리고 잠시 멈춤이 있는 설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설교를 하다가 잠깐 멈추는 동안에 듣는 교인들의 생각이 따라간다. 당신은 그것이 없다. 한번 말하고 조금 쉬었다가 '여러분, 함께 생각해보십시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야 하는데 쉬지않고 빠르게 말하면 안된다. 교인들의 이해가 어디까지 왔는가를 확인하고 이해를 시켜가면서 그 다음 이해를 연결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젊은 목사는 강대상 밑에다 "천천히"라는 글을 써놓았다. 지금은 놀랍게도 완전히 달라졌다. 젊은 사람이 이래서 좋다. 목사는 이렇게 노력을 해야 한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공짜가 아니다. 설교는 음율, 제스추어 까지 다 종합해서 종합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못한다. 어느 사이에 설교가 리딩이 되어 버렸다.
특히 설교원고를 타이프 쳐서 읽지마라. 손으로 원고를 쓰면 큰 글자와 작은 글자가 있어 읽는 것이 달라지는데, 타이핑해서 읽으면 글자 크기가 같아서 그냥 쭉~ 하고 읽는다. 좋지 않다. 원고를 전부 써가지고 설교하는 것 보다 몇 자만 적어서 가지고 나가 설교하라. 강단에서 생각하며 말하는 것과, 생각해서 쓴 것을 가지고 나가 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훈련의 문제이다.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읽는 설교는 하지말라. 빨리 벗어나야 한다.
지식주의 설교는 피해야 한다. 아이들을 가르킬때도 "공부해서 남주냐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물론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가지고 되는가. 자녀교육을 걱정하지 말고 제발 부부싸움이나 하지마라. 이것이 히브리 사람의 교육이다. 자녀교육은 말이 아니다. 가정이 행복하게 살면된다. 매일매일 즐겁게 살면 애들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님이 즐겁게 행복하게 목회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 이래라, 저래라, 이러면 안된다, 저러면 벌받는다, 이러면 복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라. 시효가 지났다. 이것은 아니다. 지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안된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곽선희 목사는 현대설교의 문제점으로 도덕적인 설교와 지식적인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곽 목사는 도덕적이고 율법적인 설교로는 교인을 바꿀수 없으며 오직 사랑으로만 바꿀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지식적인 설교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목사들은 너무 지식으로 성경지식을 주려고 한다며, 성경은 묵상하는 책이지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세미나를 인도하는 곽선희 목사
자 이렇다면 설교가 오늘와서 크게 잘못되고 문제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이런 관점에서 현대설교를 보자.
현대설교 문제점 1. 도덕주의
첫째, 현대 설교가 잘못된 것이 도덕주의 설교이다. 그래서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 안식일 지켜라, 십일조 바쳐라, 무엇을 하라 이런 설교는 율법주의이다. 초대교회에서 부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율법주의에 빠지면 안된다. 설교자의 제일 중요한 것은 교인들을 졸지 않도록 깨우고 가면서 설교해야 한다. 그것도 기술이다. 교인들이 조는 것을 보고 그냥 설교하면 죄이다. 깨워가면서 설교해야 한다.
대치동에 6천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있는데 이름은 대면 다알지만 실례이니 안한다. 담임목사가 굉장히 율법적이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성수주일이다. 목사가 설교하다가 끝에 가면 꼭 성수주일을 강조한다. 그런데 교회 바로 앞에는 전부 식당이다. 그래서 예배마치면 교인들이 나가서 식당에서 음식을 사먹는다. 목사는 그것이 못마땅했다. 설교하다가 "장로놈들이 사먹으니 젊은 사람들이 사먹는다"고 막 내려친다. 장로들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그 목사가 개척한 교회라서 장로들을 무시하고 막 내려친다.
어느날 그 교회에 주일 저녁예배 설교하러 갔다. 장로 3분이 나를 데리고 교회앞 식당에 가서 식사를 대접하여 주일인데 잘먹었다. 먹고 난 다음에 장로들이 선배인 내가 후배인 그 목사에게 진지하게 말해달라는 부탁을 했다. 성수주일해야 하니 식당에 가지 말라고 하면 좋겠는데 '장로놈들'이라고 하니 거북하니 좀 말려달라고 한다. 나는 별것도 아닌데 왜 고민하느냐고 하니 장로들이 심각하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먹고 회개하라고 했다. 그러니 장로님들이 "그것을 몰랐구나" 하고 좋아했다.
주일에 외식을 했다고 지옥가는가.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왜 그렇게 각박한 분으로 만드는가.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아멘'하고 그냥 먹으면 되지 지나친것도 율법주의이다. 율법주의는 자기교만함을 만들고 남을 비판하게 만든다. 교회에서 그러면 안된다. 비판의 눈이 밝으면 안된다. 교회 예배는 축제이니 다 받아들이고 다 용서하는 것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 미국에는 그런 말이 없지만 한국에는 "너는 혼수도 안가지고 왔냐"라는 말이 있다. 시어머니가 결혼전에 며느리될 사람을 만났는데 보니 배가 안불렀다. 그래서 "너는 혼수도 안가져 왔냐"라고 한다는 것이다. 애를 하나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그래야 좋은 며느리이다.
그것도 이유가 있다. 그래서 세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결혼해서 40%의 부부가 애를 못낳는다. 애가 안생기는 것이다. 그러면 이미 애를 가지고 들어오면 얼마나 좋은가. 요즘은 결혼식때 배가 불러가지고 들어와도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고 잘되었다고 한다. 그런 세상이다. "너는 혼수도 안가지고 왔냐"라는 말은 유명한 말이다. 배불러서 오는 것이 혼수이다. 그런 세상이 되었다.
교회에서는 아무것도 비판할것이 없다. 옛날과 다르다. 결혼식도 안하고 그냥사는 사람도 많고 이런저런 일들이 많다. 우리교회는 탈렌트 영화배우등 여러분야의 연예인이 3백명이나 된다. 왜 이분들이 우리교회에 오는가. 제 설교가 가장 좋다고 한다. 다른데 가면 자꾸 비판을 한다는 것이다. 우리교회는 그런것이 없다. 교인들에게 비판없는 설교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데 잘못될것이 없다. 목사들이 꼬집는 설교를 해도 잘못되기 때문이다.
비판한다고 달라지는가. 절대 달라지는 것이 없다. 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외에는 절대 변화되지 않는다. 어떤 비판도 어떤 심판도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도 못하신다. 홍수로 내려치셔도 안된다. 하나님도 못하시는 것을 목사가 어떻게 하려고 하는가. 그러니 목사의 입에는 비판이라는 것은 없다. 오직 사랑이다.
그런것을 많이 본다. 결혼 주례를 했다. 신혼여행을 갈때 인사를 하러 왔다. 신랑이 45살이다. 그래서 내가 "많이 늦었다. 허니문 베이비 쌍둥이를 낳으라"고 한마디 했다. 그 친구가 내 귀에다 대고 "목사님, 걱정하지 마세요. 벌써 하나 들어섰어요" 한다. 이런 세상이다. 그래서 내가 잘했다고 칭찬했다. 그것을 알아야 한다.
루이스의 말대도 사람은 '에로스'에 의해 태어나고, '스트로게'에서 자랐고, '필리아'에서 성숙해가고, '아가페'에서 완성되는 것이 인생이라는 유명한 학설이 있다. '에로스'라는 것은 암놈과 숫놈이 만나는 것이다. 정신없는 것이다. 무서운 힘이다. 생명의 힘이다. 서로 만나서 화끈해서 애를 만드는것이다. 인정해야 한다. 그 다음에 가정이라는 속에서 깨닫는다.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와 지내면서 이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이 '스트로게'이다. 그 다음에 '필리아'가 있다. 도덕적인 사랑이고 이웃의 사랑이고 넓은 사랑을 경험한다. 그 다음에 '아가페'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완성의 프로세스 과정중에 있는 것이다. 내 사랑이 어디까지 왔는가, 그 사람의 사랑이 어디까지 왔는가를 인정해야지 지금 당장 '아가페'가 되라고 할수있는가. 그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의 사랑의 정도와 수준을 인정하고 다 같이 몰고가야 한다. 이것이 메세지라는 것이고 설교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인 비판이 설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 어두운 사회를 다시 변화시킬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외의 어떤 비판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하나님도 못하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는 할 본분을 다 할 뿐이다. 오직 사랑이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복음주의의 핵심은 설교의 중심이 사랑에 있다. 이것도 사랑이고 저것도 사랑이라고 설교하고, 교인들이 삶의 터전에 돌아가서 경험하면서 "아, 이것이 이 사랑이구나. 미처 몰랐는데 저것도 사랑이구나" 이렇게 깨닫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것은 있을수 없다. 오직 사랑이다. 이것이 복음주의 설교의 핵심이다. 도덕주의라는 것이 참 문제인데 이것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현대설교 문제점 2. 지식주의
어려운 말씀인데 두번째가 지식주의이다. 현대설교가 잘못되는 것이 지식주의 때문이다. 설교를 통해 지식을 주려고 한다. 어떤 지식도 반론이 있기 마련이다. 지식에는 완전한 것이 없다. 어떤 지식도 완전하게 느껴지도 않는다. 그런고로 지식으로는 해결이 안된다. 그런데 자꾸 목사는 설교를 통해 지식을 주려고 한다.
제가 보수적인 목사 2백명 모인데 가서 세미나를 했다. 가만히 보니 방향이 있는 것 같아서 한마디 물어보았다. "목사님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많이 시키지요"라고 물으니 많이 하려고 애를 쓴다고 답을 했다. 그래서 "성경공부를 많이 한 교인이 교회에서 좋은 교인인가 나쁜 교인인가"라고 물으며 양심적으로 손들어 보라고 했다. 그러자 목사들은 성경공부 많이 한 교인들이 말썽이라고 대답했다.
성경공부도 공부는 공부이다. 성경공부를 많이 시키면 그 교인때문에 교회에서 쫓겨난다. 알겠는가. 그 이유는 성경은 지식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 지식을 주려고 한다. 그래서 전에 있던 목사님은 이렇게 설교했는데 후임 목사는 다르게 설교한다. 교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꼭 잊지마라. 성경은 묵상하는 책이지 비판하는 책이 아니다.
우리 목사들은 너무 지식으로 성경지식을 주려고 한다. 성도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설교하다가 몇장 몇절 하고 성경을 인용하는 것이다. 그러면 교인들이 '성경속에 다 있겠지' 하며 '그 다음 말만 하세요'라고 냉소적으로 대응한다. 심지어는 어떤 교인들은 저 목사가 밑천이 없어서 또는 할 말이 없어서 저런다고 말한다. 설교할때 '몇장 몇절'은 필요없다. 한 절이면 충분하고 이속에서 말씀이 들려와야지, 길게 말한다고 무슨수로 성경을 설명하겠는가.
설교할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복을 주셔서 12지파를 주셨다. 12지파 이야기를 하겠다. 야곱은 아내가 4명이고 그들을 통해 12지파가 나온다. 이런것을 무슨 말로 설명하겠는가. 목사들은 아내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이것은 안된다. 성경에 그 많은 이야기들을 무슨말로 설명할것인가. 그래서 교인들에게 성경을 읽으라 하지만 그래도 다행한것은 안 읽기때문에 좋다. 성경을 읽어와서 따지면 큰일난다. 그런 사람이 좀 있다, 유달리 성경을 많이 읽고 와서 몇장 몇절 골치아프게 하는 교인이 있다. 성경은 묵상하는 책이다. 성경은 비판하며 읽고 지식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현대 목회의 가장 어려운 점이 있다. 신교의 장점이면서 단점이 되어 버렸다.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신교의 단점은 지식이다.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고 제자훈련하고 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신교의 특히 장로교의 사람중 상당한 지성인들이 카톨릭으로 간다. 이것은 놀라운 이슈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카톨릭으로 갔느냐고 물었다. 첫째, 신교는 시끄럽고 구교는 조용하다. 신교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데 구교에 가니 하나님이 있는 것 같다고 한다. 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가. 하나님을 믿으러 갔는데 하나님은 없고 애들만 떠들고 음악하고 있다. 이것이 뭐하는 짓인가. 난리이다. 그래서 경건을 찾아야 하고 예배가 있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기 때문이다. 찬송을 부르던 설교를 하던 모든 순서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로 좀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예배이다. 하지만 요즘 교회들이 그렇지 못하다.
한국교회의 무당 끼, 노래방 끼, 지식에 대한 오해
한국교회가 세가지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있다고 말한다. 첫째 무당끼가 많다. 우리 민족은 무당끼가 핏속에 있다. 무당끼가 문제이다. 그래서 같은 음악을 해도 한국청년과 미국사람하고 하는 것이 다르다. 면밀히 연구해 보았다. 미국사람은 정신차리고 움악을 하고 우리는 정신이 빠져서 한다. 그것이 다르다. 같다고 생각하면 안된다. 새들백교회에 가서 음악하는 것을 보면 한국교회와 다르다. 찬양을 하다가도 찬송부를때 보면 정장한다. 다르다.
윌로크릭교회에 가서 보니 복음성가 12곡을 부른다. 종이를 나누어 주는데 가사만 있고 악보가 없다. 왜 악보가 없는가 물으니 악보가 들어가면 가사의 뜻이 희석된다고 대답한다. 찬양의 가사가 아름다운 시인데 콩나물 대가리가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말이 된다. 복음성가를 12곡을 하고 맨 마지막 가서 찬송가 두곡을 부르는데 '홀리 홀리 홀리' 하면서 다 일어서서 정장을 해서 부른다. 미국 교인들은 난리굿을 해도 정신을 차리고 하는구나 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한국교회 찬양은 미쳐서 한다. 무당끼가 있어서 그렇다. 무당끼로 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둘째는 노래방 끼가 있다. 찬양을 부를때 노래방에서 부르던 노래와 비슷하게 부른다. 노래방 끼에 빠진다. 세번째가 교회는 학원이 아닌데도 지적인 일에 빠진다. 지식을 배워 어떻게 생활에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지식 자체를 자기 격을 높이는 것으로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경을 많이 알면 나는 높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지식을 많이 알면 다른 사람들과 계급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봉건주의적인 생각이다. 지식이 많다고 사람이 달라지고 격이 높아지는가. 아무것도 아닌데도 우리는 성경을 많이 본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사람과는 상대를 안하고 저 사람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 자체가 문제가 있다.
설교 중에도 자꾸 지식을 주려고 하는데 모든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모든 지식은 반론이 있다. 반론에 시달리면서 지식은 얻었는데도 가슴은 싸늘해지고 만다. 이것이 반복되면 마지막에 교인이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래서 설교가 지식을 주려고 하면 안된다. 은혜를 주어야 하고 감격을 주어야 하고 깨달음을 주어야 한다.
원고를 보며 설교하는 설교자는 회개해야 한다
그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고를 보고 설교를 하면 안된다. 요즘은 원고설교하면 안된다. 목사님이 원고를 보는 순간 교인들은 잔다. 사람은 귀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듣는 것이다. 눈과 눈이 마추쳐야 듣는 것이다. 눈이 안 마주치면 아무것도 안들린다. 우리교회 4천석 예배당 앞에서 맨뒤까지 53미터 이다. 얼마나 먼가. 내가 교인들을 돌아보면서 설교하면 교인들은 나를 전부 본다.
하지만 내가 조금만 밑을 보면 교인들은 다른데를 본다. 사실이다. 멀리있어도 눈과 눈이 마주쳐야 한다. 중요하다. 절대로 눈이 다른데로 가면 안된다. 매스 미디어 시대에 원고를 읽고 있다면 빨리 회개해야 한다. 원고는 무슨 원고인가. 목사가 그 말씀에 은혜받으면 받는 순간에 무슨 말을 할것인가 훤하다. 그런데 무슨 원고가 필요한가. 원고가 필요한 목사는 아직도 프로가 되지 못했다. 프로는 그렇지 않다.
탈렌트를 보라. 탈렌트는 남의 쓴 글을 외워서 연기한다. 얼마나 힘들겠는가. 말만하는 것이 아니라 연기까지 하면서 애를 쓰는데 목사는 자기가 써온 원고도 잘못 읽는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떤 목사는 원고를 써가지고 와서 한참 읽는데 종이순서가 바뀌어 당황해 한다. 이것이 직무유기이다. 원고없이 설교해야 한다. 분명히 말한다.
이야기식 설교와 웅변식 설교
설교는 이야기 식으로 해야 한다. 그럴려면 이야기 구성 능력이 있어야 한다. 같은 이야기도 직선적으로 말하면 논란이 된다. 그래서 설교내용을 이야기에 담아서 말해야 한다. 이야기에 담아서 설교하면 교인들의 놀라서 듣는데 직선적으로 바로 말하면 교인들은 설교를 안듣고 5분내로 잔다. 안된다. 그러니 설교를 이야기식으로 구성하여 교인들이 쉽고 편안하게 잘 받아들일수 있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동시에 역설적이지만 웅변적이어야 한다. 설교할때 물이 흘러가듯이 변화없이 말하면 안된다. 웅변하듯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 웃기기도 울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히브리식이다. 설교가 이야기이니 고저장단으로 말하여 교인들이 편안하고 이해가 잘되도록 전달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웅변적이어야 한다는 말은 설교를 책을 읽듯이 하면 안된다. 교인들은 책읽는 소리를 싫어한다. 웅변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의 예를 소개하겠다.
송도에 있는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하는데 당회장은 따로있다. 나는 주일 11시 예배만 설교한다. 사회도 당회장이 하고 나는 설교와 축도만 한다. 당회장은 젊은 목사로 프린스톤에서 목회학 석사를 공부하고 풀러신학교에서 박사공부를 한 상당한 사람이다. 그런데 말이 빠르다. 사회를 하는 것을 보아도 말이 빠르다. 문장의 내용은 좋지만 말이 빨랐다. 한 2년 지나서 조언을 했다.
"설교를 할때 원고가 없는 것 처럼 말해야지 책을 읽는 것 처럼 하면 안된다. 그리고 말이 너무 빠르다. 사람은 한꺼번에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천천히 말하고 좀 기다렸다가 다음 말을 하고 해야 교인들이 이해가 되지 쉼이 없이 책을 읽듯이 빠르게 읽어나가면 설교를 이해할 교인은 몇 안된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하면 가능하겠지만, 노인부터 여러 계층이 다 있는 교회에서 설교할때 그래서는 안된다."
"올라갔다 내려오고, 길게했다가 짧게하고. 그리고 잠시 멈춤이 있는 설교하는 것이 필요하다. 설교를 하다가 잠깐 멈추는 동안에 듣는 교인들의 생각이 따라간다. 당신은 그것이 없다. 한번 말하고 조금 쉬었다가 '여러분, 함께 생각해보십시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야 하는데 쉬지않고 빠르게 말하면 안된다. 교인들의 이해가 어디까지 왔는가를 확인하고 이해를 시켜가면서 그 다음 이해를 연결해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젊은 목사는 강대상 밑에다 "천천히"라는 글을 써놓았다. 지금은 놀랍게도 완전히 달라졌다. 젊은 사람이 이래서 좋다. 목사는 이렇게 노력을 해야 한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공짜가 아니다. 설교는 음율, 제스추어 까지 다 종합해서 종합예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못한다. 어느 사이에 설교가 리딩이 되어 버렸다.
특히 설교원고를 타이프 쳐서 읽지마라. 손으로 원고를 쓰면 큰 글자와 작은 글자가 있어 읽는 것이 달라지는데, 타이핑해서 읽으면 글자 크기가 같아서 그냥 쭉~ 하고 읽는다. 좋지 않다. 원고를 전부 써가지고 설교하는 것 보다 몇 자만 적어서 가지고 나가 설교하라. 강단에서 생각하며 말하는 것과, 생각해서 쓴 것을 가지고 나가 읽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훈련의 문제이다. 그러니 제발 부탁인데 읽는 설교는 하지말라. 빨리 벗어나야 한다.
지식주의 설교는 피해야 한다. 아이들을 가르킬때도 "공부해서 남주냐 열심히 공부하라"고 하는 것은 물론 맞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것가지고 되는가. 자녀교육을 걱정하지 말고 제발 부부싸움이나 하지마라. 이것이 히브리 사람의 교육이다. 자녀교육은 말이 아니다. 가정이 행복하게 살면된다. 매일매일 즐겁게 살면 애들은 저절로 자라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님이 즐겁게 행복하게 목회하고 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말로 이래라, 저래라, 이러면 안된다, 저러면 벌받는다, 이러면 복받는다 라고 하는 것은 이제 그만하라. 시효가 지났다. 이것은 아니다. 지적으로 설교하는 것은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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