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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브런스윅신학교 차재승 교수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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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3-1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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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v1.jpg뉴브런스윅 신학교 조직신학 교수인 차재승 교수가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습니다. 왜 십자가입니까. 목회자는 기독교 핵심사상인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며, 평신도들도 십자가에 대한 설교를 수없이 듣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이라면 십자가에 대한 자칭 전문가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라는 주제가 독자들이 관심을 끌기에 너무 흔한 주제같기도 보입니다.

하지만 과연 십자가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예수님은 십자가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차재승 교수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신비이자 역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십자가를 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결코 인간이 원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야 하는 크리스찬이면서도,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십자가에 적용합니다.

차재승 교수는 십자가에 대한 해석은 인간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세계로 돌아가서 성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며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해서 직접 하신 5가지의 말씀들을 근거로 십자가가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십자가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해석들을 고찰하며, 십자가가 우리에게 과연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새물결플러스를 통해 낸 268페이지의 책에는 2부로 되어 있습니다, 1부 신비와 전제는 십자가는 무엇인지 그리고 십자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2부 신비와 역설은 성경에 나오는 5개 구절을 통해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가르침과 선포를 다루고 있습니다.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3명이 추천사를 썼는데 강영안 교수(서강대학교 철학과)는 "이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에 대한 적용까지 이끌어 내는 책", 이수영 목사(새문안교회)는 "성경 말씀으로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 이해를 풀어내고 있기에 평신도를 포함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유익한 책", 양춘길 목사(필그림교회)는 "그리스도적 성경적 십자가 이해를 통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고히 정립하고 성숙한 신앙으로 발돋움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는 책"이라고 추천했습니다.

아멘넷은 차재승 교수와 이메일을 통해 인터뷰를 했습니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차 교수는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대답을 준비했습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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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브런스윅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차재승 교수

[질문] 관련 사진을 보면 늘 개량 한복을 입습니다. 미국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한복을 입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신 것이 연상이 되기도 합니다.

한복을 즐겨 입는 이유는 특별히 사상적인, 문화적인 배경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우선적으로 한복이 양복보다 몸에 편하기 때문입니다. 유독 극동 삼국에서 심할 정도로 양복이 공식적인 옷이 되어버린 현상에 대해서 좀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구태여 의도를 밝히자면, 저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한복과 양복을 함께 번갈아 가면서 입는데, 저의 신학적인 작업이 서양신학과 동양사상의 접목을 시도하는 것과 연관될 수 있습니다.

특히 기독론에 있어서 서양신학이 걸어온 길에 몇몇 치명적인 문제를 발견하고, 동양의 사상에서 새로운 단초를 발견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상황신학의 흐름을 일방적으로 쫓아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서양신학, 특히 교부신학과 개혁주의 신학을 잘 이해하고 연구한 후에 그 비어있는 부분이나 잘못된 부분을 동양의 사상, 특히 도교의 사상으로 재해석하고 보완하려는 시도입니다.

이러한 주제로 몇몇 논문을 이미 발표했고, 몇 년 안에 영어로 편찬할 책의 제목이: “Fellowship and Reconciliation: Christ’s Nature and Person from Patristic, Reformed, and Taoistic Perspectives” 입니다. 상황신학이 지나치게 개개의 상황을 절대화하면서 서양신학의 역사와 가치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이고, 서양신학이 서양문화와 철학의 테두리 속에 갇혀있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 둘 사이에 신학적인 교류, 혹은 서양신학으로부터 비서양신학으로의 신학적 흐름의 연착륙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일의 일부를 감당하고 싶습니다.

[질문]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특별히 어떤 사람들이 읽기를 기대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심이 있는 모든 분들이 이 책을 읽을 수 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이 접근하기 쉬운 십자가 이해를 써야 한다는 점을 절감하고 이 책을 계획했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다 읽기 쉬운 문체를 사용하고 각 장을 설교식의 서술로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 내용이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십자가 이론의 거의 대부분을 포함하고 있고, 그 위에 저의 십자가 사상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학교에서 교재로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학회에서 발표한 전문적인 내용도 일부 포함하고 있어서 신학자들에게도 참고가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전통적인 십자가 이론 가운데, 형벌적 대속론, 상업적 대속론, 제례적 대속론, 도덕적 모범론의 문제점을 잘 이해하고 있는 분들께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최후의 만찬의 선언과 버림받음의 선포에 대해서 전문적인 신학적 해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결국, 평신도, 신학생과 목회자, 전문 신학자들 모두에게 저의 책이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질문]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라는 책과 ‘예수 그리스도, 그 신비와 역설’라는 책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십자가'입니까?

그리스도가 누구이시고 그리스도의 일은 어떤 것인가를 논하는 것을 기독론이라고 합니다. 기독론은 크게 (1) 그리스도의 본성과 인격 (2)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이라는 두 분야로 나뉘어 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비와 역설”은 이 모든 분야를 다 포함해야 할 것이지만,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그리스도 십자가 죽음의 신비와 역설만을 다루는 좁은 영역의 책입니다.

[질문]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의도는 무엇입니까?

핵심적인 내용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고(Christ shares himself with us), 인간의 고난을 우리와 나누시고(Christ shares humanity with us), 우리의 죄, 고난, 죽음, 한계를 짊어지셨다(Christ bears humanity)는 것입니다.

핵심적인 의도는, 기존의 십자가 이해는 인간이 이해 가능한 논리, 사고체계, 사회 제도 등에 힘입어서 설명해 왔는데 이러한 이해의 메커니즘이 십자가의 실재와 잘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폴 리꾀르의 “Text 그 자체의 세계”라는 개념을 적용해서 성경 속에 등장하는 실재와 개념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들과 어떻게 다른 가를 먼저 밝힌 후에 성경 속의 개념으로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나 우상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보다는, 성경만이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드러내고 있고 (십자가의 내용과 실재), 또한 성경만이 그 해석학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십자가 해석의 원리), 성경 속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개념들을 다시 재 정의(redefine)할 수 있는 문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인간의 법정에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심판하고 용서하고 의를 심어주는 일을 동시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에서 십자가는 심판, 용서, 의를 심어주시는 것과 모두 연결되어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예로는, 철학의 실재론과 그리스도의 실재론의 차이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와 나누셨다는 사상은 철학의 실재론(realism)과 연결될 수 있는데, 철학적 실재론(philosophical realism)은 사물과 사태에 보편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장해서 논쟁을 불러일으켰지만, 성경 속에는, 자신을 인류에게 나누어 주셔서 인류를 그 안에 품으시는 새로운 인간, 신적 실재론(divine realism)의 그리스도를 발견합니다.

두 번째 의도는, 위의 첫 번째 의도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습니다만, 이 책을 통해서 저는 세속적 대속론과 구분되는 성경적인 대속론을 주장하고자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십자가 이해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심판 받았다”는 사상인데, 소위 형벌적대속론(penal substitutionary theory)라고 불리는 이 대속론은 “의인인 예수께서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죄인인 인간이 그 죄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기본 골격으로 인해서, 정의(justice)를 세우기 위해서 비정의(injustice)가 발생하는 논리의 모순, 폭력적 하나님, 인간의 도덕적 퇴화,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의 단절을 야기할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에서 신학을 40년간 가르치셨다는 어떤 익명의 조직 신학자조차 이 대속론 때문에 기독교를 떠났다는 책을 쓰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셨다는 기독교 사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1) 대속의 개념과 (2) 십자가의 동시성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대신(substitution)이라는 세속적 개념은 대신하는 자가 대신 당하는 자를 대신해서 교환이 발생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신은, 그 능력에 있어서는 예수님 홀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우리도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기 때문에(고후5:14; 갈2:20; 롬6:6-8), 세속적 대신과는 정반대 입니다. 뿐만 아니라, 심판의 하나님이 바로 용서와 의의 하나님시기 때문에 십자가에서는 심판과 용서, 의가 동시에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의인 그리스도를 심판하신 것이라기 보다는 죄인인 인간을 심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정의와 하나님의 거룩함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자기 아들을 희생하시면서 인간을 함께 심판하셨기 때문에, 또한 심판하시는 그 분이 용서로 가득 찬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코 폭력적 하나님이 아니라 용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기 때문에 십자가는 인간의 도덕적의 퇴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도덕적 영적 요청을 가집니다. 함께 죽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라 강한 형태로 결속시키며 새롭게 회복시키는 일입니다. 이렇게 성격적 대속론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십자가의 신비와 역설의 가장 깊은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의도는, 이 책을 통해서 저는 도덕적 모범론의 대한 논의를 균형 있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현대의 십자가 이해가 도덕적 모범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습니다. 즉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는 우선적으로 도덕적인 모범이 되셨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만, 위에서 언급한대로 세속적 대속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 때문에 도덕적 모범론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경적 대속의 의미에서 밝힌 대로, 십자가가 얼마나 강력하게 도덕적 함의를 가지고 있는가를 먼저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가 도덕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거나, 도덕적 의미를 일차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모두 논리적인 한계를 드러냅니다. 죽음 그 차제는 도덕적 가치를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오로지 죽기 위해서 십자가를 따른다면, 역설적으로 십자가를 따를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런 도덕적 노력을 가하지 않아도 죽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내용을 가지지 않는 죽음 그 자체가 도덕적 가치를 결코 가질 수 없습니다. 희생적 죽음만이 도덕적 가치를 가질 수 있고, 따라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희생적 가치를 먼저 가져야 도덕적 모범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저술하게 된 중요한 동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도덕적 모범론의 문제를 지적하고, 십자가가 윤리적, 영적 함의를 얼마나 강력하게 가지는가 하는 문제를 도덕적 모범론의 테두리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밝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질문]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제1부 신비와 전제와 제2부 신비와 역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책의 제목에서 '십자가의 신비'는 쉽게 이해가 되지만 '십자가의 역설'은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 십자가의 역설은 무엇입니까?

역설은 신비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에서 “이것이 역설입니다”를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적 존재가 인간의 육이 되어서 십자가에서 피조물을 위해서 희생한다는 기본적인 골격 그 자체가 역설적입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몸과 피를 나누심으로써 우리를 하나로 만드신다는 것(받아라, 내 몸이다), 버림받음으로써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하신다는 것(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심판이 바로 용서라는 것(많은 사람을 위해서 대속물로 주노라), 죽음이 사랑과 화해를 이루어 낸다(다 이루었다)는 요한복음의 선포도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잘 알지 못해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았는데, 예수께서 자신이 들리면 즉, 십자가에서 죽으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될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이것도 깊은 역설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도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도 역설입니다(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우리가 늘 직면하는 역설은, 십자가를 잘 알고 십자가를 따르는 삶을 살고 있다고 믿는 자들이게도 십자가는 늘 충격과 도전이 된다는 점입니다. 이런 내용들이 책에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문]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에서 “내 몸과 피”,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 이루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는 다섯가지 말씀을 통해 십자가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구절에서 특별히 이 5개 구절을 인용한 이유가 있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십자가 사상은 전통적으로 바울의 글 속에서 그 근거를 찾아왔습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이런 점을 비판하고 공관복음에서 예수를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습니다. 역사적 예수 운동도 이런 맥락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깊은 사상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잘 의식하고 있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주장이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십자가 달려 죽을 것이라는 것 자체는 반복적으로 선포하시고 있지만 그 의미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에 반대해서, 저는 책에서 공관복음, 특히 마가복음에서 예수님 자신이 하신 선포만 살펴보아도 십자가에 대한 깊은 내용과 그 내용의 근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다섯 말씀을 선택했고 그 말씀에 대해서 해설하고 있습니다.

둘째, 구체적으로 이 다섯 말씀을 선택한 이유는 다섯 말씀들이 비록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에 대한 실재(reality)를 아주 원초적으로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다섯 말씀은 서로 연결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하나의 긴 호흡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 자신이 그런 호흡을 의도하신 것은 아닙니다. 저자인 제가 그 긴 호흡을 발견하고 다섯 말씀을 순차적으로 배열했습니다. 그 긴 호흡 속에서 우리는 아래와 같이 예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나누시고 우리를 짊어지시며 마침내 우리를 자신에게로 모으시는 일관된 흐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나누어 주시는 예수님 (Christ shares himself with us)—“내 몸이라”
⇒ 인간을 나누시는 예수님 (Christ shares humanity with us)—“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 우리를 짊어지시는 예수님 (Christ bears us)—“대속물로 주노라”
⇒ 우리를 모으시는 예수님 (Christ draws us)—“다 이루었다”
⇒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실제로는 위의 5과정 가운데 3번째, “짊어지시는 예수님”에서부터 그 방향이 위쪽으로 향해야 합니다. 우리를 자신에게로 올리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아래 도표 자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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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말씀을 하나하나 간략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첫째,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 “받아라 이것은 내 몸이다,” “내 피로 새운 새 언약이다”(막14:22-25)는 말씀은 일반적으로 성찬을 제정하신 것으로 이해 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는 “기념하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위한 피”라고 선포하십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그 죽음이 가지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선포하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죽음으로 나누어 주셨습니다. 단 하나의 몸이신 예수님께서 성육신 하셔서 우리와 동일한 몸이 되셨고, 죽음으로 자신의 몸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Christ shares himself with us.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는, 죽음의 살아있는 공동체가 됩니다.

두 번째 말씀은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막15:34)입니다. 이 고통에 찬 예수님의 절규는, 기독교를 잘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상당히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이 마치 자신이 이루려고 했던 것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 구절 때문에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많습니다. 전통적으로 이 말씀을 시편 22편의 맥락에서 이해해 왔는데, 시편 22편에서는 버림받았다는 것은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는 신뢰의 선포이자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게 되면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관계로 축소될 우려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구절은 “하나님으로부터”가 아니라 “인간에게로” 버림받았다고 해석합니다. 인간은 인간에게로 버림받아 고통과 죄악, 죽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의 고난은 어떤 종교나 철학도 해결할 수 없는 가장 어려운 난제중의 난제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버림받은 인간에게로 버림받아서 우리의 고난과 함께 하십니다. 십자가에서 마침내 우리는 인간의 고난 속에 계시는 신적 존재를 만나게 됩니다. 모두에게 버림받아도, 심지어 우리 자신들에게서 버림받아도 우리는 결코 상실의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시어 버림받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고난과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Christ shares humanity with us.

세 번째 말씀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대속물로 주로라”(막10:45)입니다. 대속물이라는 단어는 신약에서 이 구절에서만 사용되고 있어서 정확한 의미를 알기 어렵지만, 그 파생어를 살펴보면 이 단어는 (1) 상업적으로 대신 지불한다는 의미, (2) 법정적으로 죄를 짊어진다는 의미, (3) 제례적으로 피로 대속한다는 의미 등을 갖고 있습니다. “피로 산다”는 내용이 성경에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십자가를 상업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재화의 교환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내용과 교환의 메카니즘이 십자가의 치열함을 약화시키거나 왜곡시킬 우려가 있습니다.

법정적인 의미로, 성경은 심판과 용서를 동시에 선포하고 있는데, 저는 심판을 십자가의 “외적 원리,” 용서를 십자가의 “내적 원리”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외적 심판 속에 그 용서를 감추고 계시고, 또한 반대로 용서하시기 위해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또한 십자가를 “의를 심어주심”과도 연관시킵니다. 일반적으로 심판이라고 하면 의가 세워지는 것으로 이해해서 심판과 의를 동일시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심판과 용서뿐만 아니라 “의가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것”(롬3:22-26; 고후5:21)을 십자가와 연관시킵니다. 절대적이고 영원하신 의가 우리를 찾아오시는 의가 됩니다.

돼지나 닭과 같은 동물을 죽여서 그 살을 태우고 피를 뿌리는 제사의 풍습은 인류의 역사 속에 풍부하게 자리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을 제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분명히 발생했다는 것 말고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제사 제도의 유사성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이 책에서는 저는 이러한 문제를 유월절, 구약의 제사제도,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장면, 계시록의 어린양과 같이 다양한 각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2-3장에서 고난의 종이 요한복음 1:29절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이해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근거가 된다는 것도 함께 다룹니다. 예수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우리를 짊어지셔서, 거래와 보복과 교환과 미신의 인간굴레를 깨뜨리고, 참회와 용서와 나눔과 희생과 의로움과 위로와 동행과 감사라는 새로운 인간실존, 새로운 지성의 가치, 새롭고도 아름다운 도덕적, 영적 세계로 우리를 향하게 합니다.

네 번째, 예수께서는 “다 이루었다”(요19:30)라고 십자가에 선포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기록된 복음서이기 때문에, 공관복음과 구분되는 요한복음만의 독특한 초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요한복음 내용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십자가는 사랑입니다(10장, 15장). 그런데 죽음이 어떻게 사랑이 되는지를 예수께서 상세히 설명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단지 “내가 들려지면 영생을 얻으리라”(3:14-15), “내가 들려지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리라” (요8:28), “내가 들려지면 모든 사람을 내 자신에게로 모으리라”(12:32)는 선포를 하고 계십니다. 이 세 말씀 속에서 예수께서 “다 이루신 것”의 실체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십자가에 달린 그 분을 보면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 수 있다는 두 번째 말씀이 충격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 수 있고 아들의 죽음을 보면 아들이 참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에 대한 가장 중요한 지식이 십자가에서 드러난 셈입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십자가위의 그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없다”고 할 정도로 십자가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연결 지었습니다. 세 번째 말씀은 모든 사람을 자신에게 모으신다는 선포입니다. 어떤 의미인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죽음으로 인해서 제자들은 십자가 주위를 멀리서 서성이다가 다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죽음이 모두가 떠나갔던 그 자리로 다시 모은다고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평화화 화해를 이룬다는 바울의 사상을 통해서 “모은다”는 말씀을 비추어 보면, 죄와 죽음과 자기애로 갈기갈기 찢겨졌던 인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모여들어서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인간이 하나님께 화해되었다는 말씀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죽음이 생명과, 참 지식과 평화를 다 이루셨습니다. 이 신비스러운 실체가 이 땅에 다 이루어 졌는가에 대한 의문 속에 우리는 살아가지만, 예수께서 선포하신 일이기 때문에 이루심의 완성된 실체가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고백합니다. 예수께서 죽음으로 이루신 일의 결국은 이 땅의 모든 분열을 물리치고 그 자신이 평화이신 예수(엡2:14)님 자신에게로 모든 사람들을 모으시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막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8:29절)고 물으시고, 자신이 누구신지를 “고난을 당하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8:31)라고 정의하신 후에 제자들을 향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결국, 자신에 대한 자기 정체성과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자기 정체성을 함께 언급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로 만나는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자들!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자신을 총체적으로 부인하고 비어내고 십자가로 채우며 고난 당하는 인류와 함께 할 때, 이미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이 우리 안에서 넘쳐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은 이렇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일을 통해서, 이 땅에서 점점 더 이루어져 갑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을 참으로 엄청난 일입니다. 자신 홀로 인류를 나누시고 짊어지신 그 유일한 예수께서, 자신에게로 모두를 모으시는 총체적인 예수님이 되셨고, 우리는 바로 그 예수님과 십자가로 점점 더 연합되어 갑니다.

[질문]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서 목회학석사 과정을 밟는 동안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읽고 그리스도인의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를 발견하고 회심했다는데 특히 루터가 말하는 어떤 부분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까?

루터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읽기 전까지 다른 신학자들의 십자가 사상을 계속 읽고 있었습니다. “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으려고 했고, 많은 사상가들이 여러 가지 비유와 개념을 사용해서 이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이런 논리, 인과관계, 교환, 메타포등을 통해서 십자가를 이해한다는 것이 일종의 역추론(reverse inference)에 가깝기 때문에 뭔가 부족하고 미흡하다는 것을 계속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신의 자시 희생을 이해하고 해석할만한 그 어떤 사상체계나 언어나 문화코드가 없을 경우에 어떻게 십자가를 이해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루터의 십자가사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why?”라는 질문보다는 “what?”에 더 초점을 맞춘 루터의 사상 속에서 아주 간결하지만 강력한 십자가의 실재(reality), 즉 “죽음에 죽음, 죄에 죄, 사탄에 사탄”(라틴어로 여격을 사용했기 때문에, “죽음을 위한 죽음”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접하게 되었고, 인간의 논리체계를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 루터에 대해서 석사 논문을 쓰면서 더 다양하고 복잡한 루터의 십자가 사상을 접하게 되었지만, 그의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철학과 사상이 결코 다 담아내지 못하는 십자가의 초월적인 면을 깨닫게 되었고 십자가로 드러난 “신적 자기 희생(divine self-sacrifice)”의 하나님께로 참다운 회심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질문] 오늘날 교회는 십자가라는 외형은 있지만 그 진정한 의미를 잃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같은 의미로 모습만 크리스찬인채 크리스찬의 삶을 살지 못하는 현대 교인의 모습이 많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하는 교회와 신앙인의 삶의 모습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삶은 좁은 의미로는 (1) 행동양식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보다 더 기독교적인 의미로는 그 삶 속에서 (2) 인간이 내적으로 외적으로 누리고, 지향하고, 의도하고, 품고, 관계하고, 행동하는 모든 총체적인 면, 전 인격적인 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자가로 찾아오신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과 믿음과 고백으로 인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기쁨과 은총 속에, 또한 말할 수 없는 참회와 고통 속에 사는 삶이며 이것은 결코 인간의 잣대나 기준에 의해서 쉽게 판별 될 수 없는, 가장 깊숙한 삶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삶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우리의 행동양식도, 우리의 삶의 표현도 십자가가 드러나는 삶이 될 것이며 이것은 그 어떤 도덕적, 영적 수준보다도 더 강력한 요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총체적 모습을 일관되게 소유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식으로부터, 행동으로부터, 확신으로부터도 소외 당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양자 사이에 긴장 속에 살아갑니다.

첫째,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로 인해서 우리는 일정 부분에 우리 삶을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해방신학이 지나치게 정치, 사회적인 면을 강조함으로써 해방의 전 인격적인 면을 놓칠 수는 있지만, 그 동안 기독교가 해방의 복음을 내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치명적인 문제를 낳았습니다. 따라서 현재 우리의 삶이 보다 더 강력한 초점을 가져야 하는 것은 정치, 사회적인 해방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는 삶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점들이 현재 한국교회가 당면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즉, 십자가가 실천적으로 드러난 삶을 한국기독교가 그 동안 놓쳐왔다면, 이를 회복하기 위해서 강력한 실천을 지향하는 길입니다. 자기부인, 희생, 나눔, 내려놓음을 우리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십자가를 따르는 것입니다. 모든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는 십자가의 윤리가 기독교인의 삶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깊은 반성은 특히 오늘날 가장 시급한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둘째, 삶의 다양성과 깊이를 이해하고 그 다양성 속에서 십자가가 드러낸 포괄적인 조화를 지향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 깊은 침묵과 안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신비주의적인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기독교인의 삶의 조화를 꾀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천박한 영적 상태가 우리의 행동양식을 가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은, 우리의 일천한 지성이 십자가를 획일화하거나 심지어 우상화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면, 전교회적으로 십자가에 대한 깊은 연구와 묵상이 필요합니다. 십자가가 뻔하고 식상 하다면 우리는 죽은 영혼입니다. 혹은, 십자가의 희생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아무리 노력해도 십자가의 그 본질에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인간의 도덕적 한계로 인해서 좌절하고 절망한다면, 바로 그 좌절과 절망의 한 가운데 십자가의 은총의 깊은 비밀과 풍요로움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고 나누는 것도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한 모습일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십자가의 전 인격적인 면을 주목한다면, 우리의 삶의 신비와 지성과 행동이 포괄적으로 십자가와 만나는 삶을 지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의 아주 긴 호흡 속에서 포괄적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위와 같이 우리는 어느 한 긴급한 일에 십자가의 삶으로 매진하거나, 긴 호흡으로 십자가의 삶을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긴급함과 포괄성 사이에 그 긴장을 서로가 이해하고 허용하는 것도 십자가를 따르는 하나의 길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질문] 또한 교역자가 십자가의 진리를 알게 된다면 목회에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십자가의 심오한 진리와 신비를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목회현장에서 늘 십자가가 드러나도록 노력하고 있을 것으로 믿습니다. 그래도 오늘 교회가 직면한 수많은 문제를 생각해 본다면 십자가에 대한 깊은 지식과 나눔이 교회의 회복의 핵심적인 내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만약 교회의 세속화가 목회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면, 십자가의 희생과 나눔과 용서가 세속적 가치와 얼마나 선명하게 구분되는 가를 가르치고 선포하고 실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만약 지도자들의 부패가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를 가져오고 있다면, 지도자들이 먼저 십자가 앞에 한없이 엎드려 지는 삶을 통해서 교회의 영적, 도덕적 회복을 기대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살아간다는 것은 십자가 앞에서(coram cruce) 살아가는 것입니다. 명예, 부, 권력은 십자가와 가장 먼 가치입니다. 사실 한국교회가 직면했다고 고발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반대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세속의 부침에 귀 기울이지 않는 목회, 십자가와 함께 기독교의 정도를 걸어가는 호흡이 긴 목회, 인간의 가치로 쉽게 전환되지 않는 십자가의 신비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되어가는 기쁨이 늘 잠잠히 차오르는 목회를 지향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질문] 아버지가 총신대 조직신학 교수였으며, 교수님도 현재 뉴브런스윅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조직신학적인 면에서 다루고 있습니까?

저의 전공도 분명히 조직신학입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은 분명히 조직신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조직신학자들의 다양한 견해를 다루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견해를 다루는 책은 내년에 한국어로 출판될 예정입니다.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에서는 조직신학적인 안목과 철학적인 문제의식이 그 골격을 형성해서 성경본문의 5말씀을 다루고 있는데, 성경 신 구약의 여러 말씀들을 참고하고 그 말씀들 속에 녹아있는 하나님의 특성들을 근거로 조직신학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주제들을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내용은 조직신학이지만, 그 방법론은 조직신학적인 테두리를 벗어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질문] '십자가 그 자체와 넘치는 십자가'라는 다음 책이 준비되고 있고, 7인의 십자가 사상을 다룰 예정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출간된 책과 비교하여 다음 책의 내용은 무엇이며, 7인은 누구입니까?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십자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루는 책입니다. 내년에 새물결출판사를 통해서 출간될 “7인의 십자가 사상”은 (아직 제목이 정해지지 않는 가제입니다) 7명의 신학자들의 십자가 사상을 다루는 전문적인 신학 책입니다. 더 쉽게 요약하면 십자가 그 신비와 역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상이고, 7인의 십자가사상은 신학자들의 십자가 사상입니다. 7명의 신학자들이란, 초기교회에서 이레네우스과 오리겐, 중세의 안셈, 개혁시대의 마틴 루터와 캘빈, 근세의 맥레오드 캠벨, 현대의 아브라함 판드 베잌입니다. 이렇게 각 시대마다 가장 중요한 십자가사상을 전개한 신학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그 자체와 넘치는 십자가”라는 개념은 저의 십자가 사상의 기초가 되는 개념으로서, 인간의 지성의 패러다임을 가능한 한 배제 한 “십자가는 그 자체”로부터 우리의 십자가에 대한 이해를 출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십자가 그 자체라고 이름 지었고, 그러나 예수께서 십자가 그 자체로부터 “넘치는 십자가”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의미에서 넘치는 십자가라고 개념 지었습니다. 십자가 사상의 다양성을 나타내는 개념으로는 “객관적 의미”와 “주관적 의미,” “대속적 의미”와 “도덕적 모범,” “회귀적 의미”와 “전향적 의미”등이 있습니다만 이들의 개념들은 그 두 개념의 연속성을 잘 표현하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그 자체와 넘치는 십자가라는 개념은 십자가의 다양성이 서로 구분되어야 하면서도 연속성을 가진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십자가의 실재로부터 십자가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출발하면, 승리주의, 도덕적 모범론의 논리적 문제, 대속론의 재조명 등의 단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는 십자가사상의 유형을 다루는 2차 자료를 주로 교재로 사용해왔는데, 본 저서에서는 7인의 십자가 사상가들이 저술한 일차자료를 풍부하게 인용하고 있어서 7명의 신학자들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접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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