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순 목사 “교회갈등만큼 전도의 문을 막는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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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ㆍ2015-12-05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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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교회내 갈등 예방과 치유 세미나가 "목회 승패는 갈등조정에 달렸다"라는 주제로 11월 30일(월) 오전부터 2일간 뉴욕그레잇넥교회(양민석 목사) 교육관에서 열렸다. 갈등 대화 중재 상담소와 교회문제연구소가 공동주최한 세미나의 강사는 조남홍 박사(교회문제연구소 소장)와 장학순 목사(연합감리교 세계선교부 한인목회강화협의회 사무총장)이다. 장학순 목사의 “화해사역-건강한 신앙을 위한 소통과 관계의 지혜”의 강의내용을 소개한다.
▲왼쪽부터 장학순 목사와 조남홍 박사
세월호가 왜 침몰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안전 불감증 때문에 큰 비극이 일어났다. 배가 잘 갈때는 문제가 없지만 위기에 처하게 되면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아서 세월호가 큰 어려움을 당했다. 요즘 교회를 보면서 많은 교회들이 항상 부흥성장하는 좋을 때만 생각하지 교회에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월호 선장과 마찬가지로 목회자나 중직자가 안전 불감증에 빠져서 좋을 때만 생각하고 어려운 시기의 갈등과 논란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준비를 안한다. 그래서 교회가 잘 성장하다가 정말 예기치 않는 갈등이 오고 목회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것은 목회자 개인문제만 아니라 교회가 건강문제와도 직결된다.
요즘,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 교회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냉소적인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밖으로 드러난 교회의 갈등과 분란이다. 교회가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과 분란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삶의 공동체이며 화해의 공동체로 먼저 그 안에 화해를 이루고 나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텐데 교회 안에서 싸움질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상은 교회를 향해 너나 잘하라고 한다. 저는 현대 교회에 있는 갈등은 마귀사탄의 역사라고 본다. 이것만큼 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문을 막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연합감리교에서 한인교회 및 한인목회자와 교단을 연결하는 중간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지도자들을 만나면 한인교회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한다. 열심히 전도와 선교하고, 기도하는 교회로 이해한다. 그러다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다. 바로 교회갈등의 문제이다. 한인교회는 희생적이고 은혜롭고 사랑이 많은 교회인데 왜 그렇게 갈등만 생기면 끝장을 보고 마는가 묻는다. 그것을 이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끝장을 본다는 이야기는 목사가 교회에서 쫓겨나던가, 교인들이 갈려서 나가든지, 아니면 교회가 공중분해 되는 것을 말한다.
사무실 하는 일중 하나가 교회개척이다. 한 교회가 개척되면 15만 불을 지원한다. 재정지원만이 아니라 많은 노력과 기도와 시간이 걸려 한 교회가 개척된다. 그래서 교회 하나가 없어지는 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다. 인근 지역에 교인 1천명이상 연합감리교회가 3개가 있었는데 지난 5년간 교회갈등을 통해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다. 이 세 교회에서 연합감리교가 잃은 교인들의 숫자가 지난 7-8년간 그렇게 노력하여 개척하여 얻은 교인들의 숫자보다 더 많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긍정적이고 훌륭한 점이 많지만 아직도 갈등이라는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 있다. 우리 한국 사람의 문화적인 DNA 안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인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 교회와 비교할 때 유독 한국 사람들은 교회 안에 갈등이 하나 생기면 끝까지 간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주제이다. 교회가 분쟁이 일어나면 그 험악하기가 세상은 저리가라이다.
화해사역은 ‘성장’에 치중해 내실 있게 자라지 못한 우리 한인교회의 신앙적 균형을 위해 꼭 필요한 ‘성숙’을 목표로 한다. 부흥과 성장이 교회의 양적인 확장을 통한 복음의 증거에 관한 것이라면, ‘화해’는 질적인 성숙을 통해 우리 교회가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에 관한 것이다. 화해사역은 복음의 핵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사역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여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모든 성도가 화해의 직분을 맡아 다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사역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성서적 진리에 근거한다 (고후 5:17-19).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신앙적으로 고민한 경험이 있는 성도는 화해사역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개인의 신앙성숙과 더불어 자신이 속해 있는 신앙공동체가 더욱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교인들과 갈등이 생기는 것일까? 배우자와의 소통이 점점 더 막힌다. 더 늦기 전에 바람직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 사람들을 화해시키려는데 잘 안 된다. 성경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자녀와 보다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고 싶다.
화해사역을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는 갈등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하여 이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나아가서 우리 삶에 선한 열매를 맺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관계의 기법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성찰을 통한 신앙과 인격의 성숙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이 글에서는 기초적인 갈등이해와 화해사역을 위한 다섯 가지 전략을 나누려고 한다.
1. 갈등에 대한 이해의 도모와 이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
갈등은 보통 “사람들간에 생각과 입장이 다름으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위기상황”이라고 정의된다. 갈등이란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칡나무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를 합해 갈등이란 단어를 조합해 내었다. 이는 넝쿨과에 속하는 두 나무 중 전자는 시계반대 방향으로, 그리고 후자는 시계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는 성질을 관찰하여, 둘이 한 장소에서 자랄 경우 얽히고설키는 모양에서 서로 복잡하게 꼬여있는 인간관계를 이러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서양에서는 영어의 'conflict' 라는 단어에서 보듯 그 어원이 되는 라틴어의 con(함께)과 fligere(치다)가 합하여 ‘함께 치다’ 혹은 ‘서로 때리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동양의 갈등과 비슷한 부정적인 뜻을 가지면서 좀 더 역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갈등을 우리가 겪으면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하나는 싸우고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피한다. 갈등이 우리에게 왔을 때 무작정 부딪치고 싸워보자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고, 일단 갈등이 싫으니 감정적으로 거북함을 주니 피하고 보자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을 정정당당하게 대면하고 이해하고 그것을 다루고 그것을 잘 극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저는 제 3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화목과 화해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더운 여름에 아버지는 너무 덥다고 창문을 열라고 하고, 어머니는 모기 때문에 절대 창문 열지 말라고 할 때 자식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갈등의 상황이다. 아버지를 따르자니 어머니가 불편하고, 어머니를 따르자니 아버지가 불편한 딜레마이다. 모기장을 치면 된다. 그러면 시원한 바람을 원하는 아버지도 만족하고, 모기를 피하고자 하는 어머니도 만족된다. 꼭 두 가지 옵션중 하나를 택해서 승자와 패자를 만들지 않더라도 조금 더 화해스럽고 창조적인 접근법을 가지면 제3의 화해의 길이 있을 수 있다. 보통 갈등이 있을 때 주장하는 표면에 나타나는 입장이나 주장만을 볼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내적인 욕구를 볼 수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문을 열고 닫는 것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면 아무리해도 답이 안 나온다. 그런데 아들이 모기장을 쳤다. 아버지가 문을 열라고 하는 말의 밑에 담긴 욕구는 시원함이고, 문을 열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어머니의 내면에 있는 욕구는 모기로 부터 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표면적인 것만을 놓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욕구를 찾아내서 그것이 함께 만족될 수 있는 해결점을 모색해야 한다.
보통 교회 안에서 목회자나 평신도 모두 갈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불문률이고,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피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건강하고 화해적인 신앙을 위해서는 이 주제에 대해 솔직하고 자유롭게 대화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동일한 주제에 대해 설교나 성경공부 등을 통해 솔직하게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다양성의 존중: 다름과 틀림은 다르다
갈등이란 사람들간의 생각과 입장이 달라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위기상황이다. 다름과 틀림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른 것은 진실이고 가치판단이 안들어가 있지만 틀림에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옳고 틀리다, 선하고 악하다, 추하고 아름답다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것은 나에게 해가되거나 거북하거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한다. 그런데 다르다는 다양성의 원리는 우리 신앙의 원리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창조하실때 다양성의 원리로 창조하셨다.
화목한 관계를 위해서는 ‘다름’과 ‘틀림’을 구분 할 줄 아는 능력과 이를 신앙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름은 ‘관찰진술’로 그저 ‘다르다’에 대한 기술인데 반해, 틀림은 ‘판단진술’로서 옳고 그르거나 선하고 악하다는 가치판단이 담겨있다. 획일적인 가치기준을 중요시 했던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국문화에서는 규범이 제시하는 유일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다르다’고 보기 보다는 ‘틀리다’고 보는 경향이 있고, 이는 다른 의견이나 태도를 용납하지 못하는 성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조선시대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란 이름으로 주자학이 아닌 다른 유학적 학풍조차 이단(사학)으로 정죄하고 처벌했던 역사가 그 한 예라 하겠다.
다름이 긍정되는 곳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 중의 하나이다. 창세기에 보면 천지간 모든 사물을 다양하고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심히 보기 좋았더라’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의견이 있을 때, 이를 대립관계로 간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존중할 줄 아는 것은 갈등극복과 화해사역의 첫 걸음인데, 이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는 성숙한 인격이 요구되는 덕목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당회나 임원회에서 논란이 있는 사안에 대해 상이한 의견들이 제시될 때, 서로를 대립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함께 당면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며 머리를 맞대야 하는 한 팀의 구성원으로 볼 수 있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진영논리를 극복하고 관점수용 혹은 역지사지의 사고방식을 지향하는 일이 중요하다.
3. 소유로부터 관계를 지향하는 삶.
‘인생은 관계가 전부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인생의 목표로 추구하는 행복을 생각해 볼 때, 소유를 중심으로 한 성공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 좋은 관계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행복하다 할 수 있고, 부정적인 관계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관계는 메아리와 같은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상대를 대하느냐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상호관계가 형성된다는 이치를 가르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이 이와 관련되는 지혜를 담고 있다. 예로부터 ‘무감어수 감어인 (無鑑於水 鑑於人)’이란 가르침이 있는데, 자신의 모습을 거울(물)에 비치지 말고, 사람 즉 타인에 비추어 경계로 삼으라는 말이다. 그 만큼 관계는 인생의 행복과 신앙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이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롬 12:17-18). 그런 면에서 개인이나 교회의 연중계획이나 목표를 세울 때, 소유적인 관점에서 수치적인 성과(헌금이나 교인의 숫자)의 달성을 제시하기보다 관계 (회개/용서/화해/회복)적인 향상을 지향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4. 갈등을 선한 기회로 활용
신앙생활 가운데 갈등을 부정적으로 보고 피하는 경향을 극복하고 이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해해서 이를 선한 기회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갈등은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갈등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에 파괴적일 수 있고 혹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갈등은 ‘가능성의 미학’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危機)라는 단어에 위험과 기회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내재해 있는 것처럼, 갈등은 부정적인 위험일 수 있지만 반대로 기회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갈등은 물질과 같아서 갈등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주인이 되면 우리 삶은 피폐할 수 밖에 없으나, 우리가 갈등을 통제하고 적절히 잘 사용하면 우리 삶에 뜻밖의 유익함을 가져 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갈등은 ‘해소’하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하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우리 삶을 ‘변혁’할 수 있는 신앙적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갈등을 선용하면, 우리 삶에 개인의 영적성장과 관계의 성숙 그리고 공동체의 화합과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예를 들어, 마치 조약돌의 거친 표면이 서로 간의 마찰을 통해 부드러운 상태로 변해 가듯이, 친구나 부부관계에서도 갈등이라는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그 관계가 나날이 성숙해 갈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유행가에도 ‘아픔만큼 성숙해지고’라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교회도 마찬가지로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표현처럼, 목회자의 교체시기나 성전 건축시에 자주 발생하는 갈등을 단지 시련이나 ‘마귀’의 장난으로 보지 않고, 이 경험을 통해 더 성숙하고 건강한 회중으로 거듭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
5. 웨슬리의 갈등해소 원칙
18세기 영국의 종교지도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갈등을 극복하는 금과옥조와 같은 교훈을 강조했는데, 이 원리를 신앙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실천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In Essentials, Unity 본질적인 일에는 일치를,
In Non-essentials, Freedom 부차적인 일에는 자유를,
In Everything, Charity!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
언뜻 보기에 자명한 이 가르침의 방점은 마지막 구, 즉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에 있다고 해석한다. 일치를 추구해야 하는 본질적인 사안이나, 자유를 허용하는 부차적인 사안을 포함한 모든 일에 있어 ‘사랑’으로 임해야 한다는 교훈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일치를 빙자하여 권위를 강요하지 않고, 자유가 허용된다고 상대방을 무시하며 허투루 대하지 말며, 모든 일을 이해와 사랑으로 처리해야 공동체 안에 평화와 화해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화해사역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 글에서 다룬 갈등에 대한 다섯 가지 기초적인 이해가 기본이라 하겠다. 나아가 심화단계에서는 자신의 인성분석, 대화법, 사과와 용서, 중재사역, 그리고 회복적 정의 등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실습을 다룬다. 아울러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개인과 교회공동체 차원의 화해만이 아니라 세상과 사회로 이 화해사역을 확장하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기라는 절박함이 있다. 갈등의 극복과 선한 활용을 통한 화해사역을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 문제,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통일 등의 사회적 성화 (social holiness)와 관계되는 이슈에 적용하는 것은 이 시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사명이자 책임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신앙인들이 ‘평화의 왕’ (Prince of Peace)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먼저 갈등과 분란을 극복하는 화해와 평화의 본보기로서의 교회가 되고, 나아가 그 메신저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로 세상을 더욱 화목케 하는 날을 소망해 본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왼쪽부터 장학순 목사와 조남홍 박사
세월호가 왜 침몰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안전 불감증 때문에 큰 비극이 일어났다. 배가 잘 갈때는 문제가 없지만 위기에 처하게 되면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하지 않아서 세월호가 큰 어려움을 당했다. 요즘 교회를 보면서 많은 교회들이 항상 부흥성장하는 좋을 때만 생각하지 교회에 위기가 왔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준비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월호 선장과 마찬가지로 목회자나 중직자가 안전 불감증에 빠져서 좋을 때만 생각하고 어려운 시기의 갈등과 논란이 일어날 때를 대비한 준비를 안한다. 그래서 교회가 잘 성장하다가 정말 예기치 않는 갈등이 오고 목회에 어려움을 겪는다. 그것은 목회자 개인문제만 아니라 교회가 건강문제와도 직결된다.
요즘, 세상을 걱정해야 하는 교회가 세상의 걱정거리가 되었다는 냉소적인 이야기가 종종 들려온다. 그렇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밖으로 드러난 교회의 갈등과 분란이다. 교회가 내부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갈등과 분란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삶의 공동체이며 화해의 공동체로 먼저 그 안에 화해를 이루고 나야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텐데 교회 안에서 싸움질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세상은 교회를 향해 너나 잘하라고 한다. 저는 현대 교회에 있는 갈등은 마귀사탄의 역사라고 본다. 이것만큼 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문을 막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연합감리교에서 한인교회 및 한인목회자와 교단을 연결하는 중간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 지도자들을 만나면 한인교회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한다. 열심히 전도와 선교하고, 기도하는 교회로 이해한다. 그러다가 한 가지 주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고개를 흔들기 시작한다. 바로 교회갈등의 문제이다. 한인교회는 희생적이고 은혜롭고 사랑이 많은 교회인데 왜 그렇게 갈등만 생기면 끝장을 보고 마는가 묻는다. 그것을 이분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끝장을 본다는 이야기는 목사가 교회에서 쫓겨나던가, 교인들이 갈려서 나가든지, 아니면 교회가 공중분해 되는 것을 말한다.
사무실 하는 일중 하나가 교회개척이다. 한 교회가 개척되면 15만 불을 지원한다. 재정지원만이 아니라 많은 노력과 기도와 시간이 걸려 한 교회가 개척된다. 그래서 교회 하나가 없어지는 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다. 인근 지역에 교인 1천명이상 연합감리교회가 3개가 있었는데 지난 5년간 교회갈등을 통해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다. 이 세 교회에서 연합감리교가 잃은 교인들의 숫자가 지난 7-8년간 그렇게 노력하여 개척하여 얻은 교인들의 숫자보다 더 많다.
제가 보기에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긍정적이고 훌륭한 점이 많지만 아직도 갈등이라는 부정적인 면을 극복하지 못한 모습이 있다. 우리 한국 사람의 문화적인 DNA 안에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갈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인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 교회와 비교할 때 유독 한국 사람들은 교회 안에 갈등이 하나 생기면 끝까지 간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인들이 진지하게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주제이다. 교회가 분쟁이 일어나면 그 험악하기가 세상은 저리가라이다.
화해사역은 ‘성장’에 치중해 내실 있게 자라지 못한 우리 한인교회의 신앙적 균형을 위해 꼭 필요한 ‘성숙’을 목표로 한다. 부흥과 성장이 교회의 양적인 확장을 통한 복음의 증거에 관한 것이라면, ‘화해’는 질적인 성숙을 통해 우리 교회가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 가는 성화(sanctification)의 과정에 관한 것이다. 화해사역은 복음의 핵심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사역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화해하여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모든 성도가 화해의 직분을 맡아 다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사역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성서적 진리에 근거한다 (고후 5:17-19). 다음과 같은 질문을 가지고 신앙적으로 고민한 경험이 있는 성도는 화해사역에 대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 개인의 신앙성숙과 더불어 자신이 속해 있는 신앙공동체가 더욱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 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데, 왜 다른 교인들과 갈등이 생기는 것일까? 배우자와의 소통이 점점 더 막힌다. 더 늦기 전에 바람직한 관계를 회복하고 싶다. 사람들을 화해시키려는데 잘 안 된다. 성경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자녀와 보다 효과적으로 의사소통하고 싶다.
화해사역을 실천하기 위한 첫 단계는 갈등에 관한 깊이 있는 이해를 통하여 이를 지혜롭게 극복하고, 나아가서 우리 삶에 선한 열매를 맺는 기회로 활용하는 것을 배우는 일이다. 그러나 이는 관계의 기법을 배우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영혼에 대한 성찰을 통한 신앙과 인격의 성숙과 더 깊은 관계가 있다. 이 글에서는 기초적인 갈등이해와 화해사역을 위한 다섯 가지 전략을 나누려고 한다.
1. 갈등에 대한 이해의 도모와 이에 대한 자유로운 대화.
갈등은 보통 “사람들간에 생각과 입장이 다름으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위기상황”이라고 정의된다. 갈등이란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동양에서는 칡나무 갈(葛)자와 등나무 등(藤)자를 합해 갈등이란 단어를 조합해 내었다. 이는 넝쿨과에 속하는 두 나무 중 전자는 시계반대 방향으로, 그리고 후자는 시계방향으로 감아 올라가는 성질을 관찰하여, 둘이 한 장소에서 자랄 경우 얽히고설키는 모양에서 서로 복잡하게 꼬여있는 인간관계를 이러한 단어로 표현한 것이다. 서양에서는 영어의 'conflict' 라는 단어에서 보듯 그 어원이 되는 라틴어의 con(함께)과 fligere(치다)가 합하여 ‘함께 치다’ 혹은 ‘서로 때리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동양의 갈등과 비슷한 부정적인 뜻을 가지면서 좀 더 역동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갈등을 우리가 겪으면 훈련받지 않은 사람은 두 가지로 반응한다. 하나는 싸우고 다른 하나는 정반대로 피한다. 갈등이 우리에게 왔을 때 무작정 부딪치고 싸워보자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고, 일단 갈등이 싫으니 감정적으로 거북함을 주니 피하고 보자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갈등을 정정당당하게 대면하고 이해하고 그것을 다루고 그것을 잘 극복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저는 제 3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바로 화목과 화해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더운 여름에 아버지는 너무 덥다고 창문을 열라고 하고, 어머니는 모기 때문에 절대 창문 열지 말라고 할 때 자식으로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것이 바로 갈등의 상황이다. 아버지를 따르자니 어머니가 불편하고, 어머니를 따르자니 아버지가 불편한 딜레마이다. 모기장을 치면 된다. 그러면 시원한 바람을 원하는 아버지도 만족하고, 모기를 피하고자 하는 어머니도 만족된다. 꼭 두 가지 옵션중 하나를 택해서 승자와 패자를 만들지 않더라도 조금 더 화해스럽고 창조적인 접근법을 가지면 제3의 화해의 길이 있을 수 있다. 보통 갈등이 있을 때 주장하는 표면에 나타나는 입장이나 주장만을 볼 것이 아니라 내적으로 감추어져 있는 내적인 욕구를 볼 수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문을 열고 닫는 것을 놓고 서로 논쟁을 벌이면 아무리해도 답이 안 나온다. 그런데 아들이 모기장을 쳤다. 아버지가 문을 열라고 하는 말의 밑에 담긴 욕구는 시원함이고, 문을 열지 말라는 주장을 하는 어머니의 내면에 있는 욕구는 모기로 부터 피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표면적인 것만을 놓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욕구를 찾아내서 그것이 함께 만족될 수 있는 해결점을 모색해야 한다.
보통 교회 안에서 목회자나 평신도 모두 갈등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지 않는 것이 불문률이고, 이 주제에 대한 대화를 피하는 것이 상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건강하고 화해적인 신앙을 위해서는 이 주제에 대해 솔직하고 자유롭게 대화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동일한 주제에 대해 설교나 성경공부 등을 통해 솔직하게 논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2. 다양성의 존중: 다름과 틀림은 다르다
갈등이란 사람들간의 생각과 입장이 달라서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위기상황이다. 다름과 틀림의 차이는 무엇인가? 다른 것은 진실이고 가치판단이 안들어가 있지만 틀림에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다. 옳고 틀리다, 선하고 악하다, 추하고 아름답다는 가치판단이 들어가 있는 표현이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다름과 틀림을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는다. 나와 다른 것은 나에게 해가되거나 거북하거나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한다. 그런데 다르다는 다양성의 원리는 우리 신앙의 원리중의 하나이다. 하나님께서 이세상을 창조하실때 다양성의 원리로 창조하셨다.
화목한 관계를 위해서는 ‘다름’과 ‘틀림’을 구분 할 줄 아는 능력과 이를 신앙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름은 ‘관찰진술’로 그저 ‘다르다’에 대한 기술인데 반해, 틀림은 ‘판단진술’로서 옳고 그르거나 선하고 악하다는 가치판단이 담겨있다. 획일적인 가치기준을 중요시 했던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잔재가 남아 있는 한국문화에서는 규범이 제시하는 유일한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을 ‘다르다’고 보기 보다는 ‘틀리다’고 보는 경향이 있고, 이는 다른 의견이나 태도를 용납하지 못하는 성향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조선시대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란 이름으로 주자학이 아닌 다른 유학적 학풍조차 이단(사학)으로 정죄하고 처벌했던 역사가 그 한 예라 하겠다.
다름이 긍정되는 곳에서는 다양성이 존중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 중의 하나이다. 창세기에 보면 천지간 모든 사물을 다양하고 다른 모양으로 창조하신 후 하나님께서 ‘심히 보기 좋았더라’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 나와 다른 의견이 있을 때, 이를 대립관계로 간주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고 존중할 줄 아는 것은 갈등극복과 화해사역의 첫 걸음인데, 이는 말하기는 쉽지만 실천하기는 결코 쉽지 않는 성숙한 인격이 요구되는 덕목이라 하겠다. 예를 들어, 당회나 임원회에서 논란이 있는 사안에 대해 상이한 의견들이 제시될 때, 서로를 대립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함께 당면한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협력하며 머리를 맞대야 하는 한 팀의 구성원으로 볼 수 있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 진영논리를 극복하고 관점수용 혹은 역지사지의 사고방식을 지향하는 일이 중요하다.
3. 소유로부터 관계를 지향하는 삶.
‘인생은 관계가 전부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만큼, 인간관계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모든 사람이 인생의 목표로 추구하는 행복을 생각해 볼 때, 소유를 중심으로 한 성공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 좋은 관계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행복하다 할 수 있고, 부정적인 관계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관계는 메아리와 같은 것이다. 내가 어떻게 상대를 대하느냐에 따라 이에 상응하는 상호관계가 형성된다는 이치를 가르친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속담이 이와 관련되는 지혜를 담고 있다. 예로부터 ‘무감어수 감어인 (無鑑於水 鑑於人)’이란 가르침이 있는데, 자신의 모습을 거울(물)에 비치지 말고, 사람 즉 타인에 비추어 경계로 삼으라는 말이다. 그 만큼 관계는 인생의 행복과 신앙의 가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이므로, 이를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라” (롬 12:17-18). 그런 면에서 개인이나 교회의 연중계획이나 목표를 세울 때, 소유적인 관점에서 수치적인 성과(헌금이나 교인의 숫자)의 달성을 제시하기보다 관계 (회개/용서/화해/회복)적인 향상을 지향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
4. 갈등을 선한 기회로 활용
신앙생활 가운데 갈등을 부정적으로 보고 피하는 경향을 극복하고 이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이해해서 이를 선한 기회로 삼는 것이 중요하다. 갈등은 어느 누구에게나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갈등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대처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에 파괴적일 수 있고 혹은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이런 견지에서 갈등은 ‘가능성의 미학’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위기(危機)라는 단어에 위험과 기회라는 두 가지 요소가 다 내재해 있는 것처럼, 갈등은 부정적인 위험일 수 있지만 반대로 기회일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 갈등은 물질과 같아서 갈등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주인이 되면 우리 삶은 피폐할 수 밖에 없으나, 우리가 갈등을 통제하고 적절히 잘 사용하면 우리 삶에 뜻밖의 유익함을 가져 올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갈등은 ‘해소’하는 것만이 아니라 ‘관리’하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우리 삶을 ‘변혁’할 수 있는 신앙적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갈등을 선용하면, 우리 삶에 개인의 영적성장과 관계의 성숙 그리고 공동체의 화합과 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예를 들어, 마치 조약돌의 거친 표면이 서로 간의 마찰을 통해 부드러운 상태로 변해 가듯이, 친구나 부부관계에서도 갈등이라는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그 관계가 나날이 성숙해 갈 수 있는 기회로 삼을 수 있다. 유행가에도 ‘아픔만큼 성숙해지고’라는 표현이 있지 않은가? 교회도 마찬가지로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표현처럼, 목회자의 교체시기나 성전 건축시에 자주 발생하는 갈등을 단지 시련이나 ‘마귀’의 장난으로 보지 않고, 이 경험을 통해 더 성숙하고 건강한 회중으로 거듭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다.
5. 웨슬리의 갈등해소 원칙
18세기 영국의 종교지도자였던 요한 웨슬리는 갈등을 극복하는 금과옥조와 같은 교훈을 강조했는데, 이 원리를 신앙인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적용실천하는 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In Essentials, Unity 본질적인 일에는 일치를,
In Non-essentials, Freedom 부차적인 일에는 자유를,
In Everything, Charity!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
언뜻 보기에 자명한 이 가르침의 방점은 마지막 구, 즉 ‘모든 일에는 사랑으로!’에 있다고 해석한다. 일치를 추구해야 하는 본질적인 사안이나, 자유를 허용하는 부차적인 사안을 포함한 모든 일에 있어 ‘사랑’으로 임해야 한다는 교훈인 것이다. 다시 말해, 일치를 빙자하여 권위를 강요하지 않고, 자유가 허용된다고 상대방을 무시하며 허투루 대하지 말며, 모든 일을 이해와 사랑으로 처리해야 공동체 안에 평화와 화해가 가능하다는 가르침이다.
화해사역을 본격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 글에서 다룬 갈등에 대한 다섯 가지 기초적인 이해가 기본이라 하겠다. 나아가 심화단계에서는 자신의 인성분석, 대화법, 사과와 용서, 중재사역, 그리고 회복적 정의 등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실습을 다룬다. 아울러 이 시대는 어느 때보다도 개인과 교회공동체 차원의 화해만이 아니라 세상과 사회로 이 화해사역을 확장하는 노력을 필요로 하는 시기라는 절박함이 있다. 갈등의 극복과 선한 활용을 통한 화해사역을 인종차별주의와 성차별 문제, 그리고 한반도의 평화통일 등의 사회적 성화 (social holiness)와 관계되는 이슈에 적용하는 것은 이 시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사명이자 책임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모든 신앙인들이 ‘평화의 왕’ (Prince of Peace)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먼저 갈등과 분란을 극복하는 화해와 평화의 본보기로서의 교회가 되고, 나아가 그 메신저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로 세상을 더욱 화목케 하는 날을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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