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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길 목사 “6.25 동란과 94일 - 순교자 아버지를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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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ㆍ2020-06-25 0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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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길 목사(뉴저지장로교회 원로목사)는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하여 전쟁당시 51세의 나이로 납치되어 순교한 아버지 김동철 목사에 대한 글을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글을 공개했다. 전쟁 발발일 로부터 서울 수복까지 94일의 기록이다. 지금도 서소문교회당 마당에는 교회 개척자인 김동철 목사의 순교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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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동란 70주년을 맞이하여 어린 시절에 공산당이 아버지를 납치하여 북으로 끌고 간일에 분통함과 아버지 없이 오랜 세월을 그리워하며 억울하게 살았던 아린 세월, 전쟁으로 인한 폭격과 파괴, 서울과 대한민국의 잿더미와 황폐화를 상기시키려 함이 아니라 지난 날 아프고 슬픈 역사는 지나가고 새롭게 발전하는 오늘을 낳았고 다시 내일의 힘찬 미래 대한민국을 창조하기에 우리는 6.25동란의 의미와 가치를 정직하고 바르게 후손들에게 생생히 일러주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 70년 전으로 돌아가 이 글을 쓴다.

 

또한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역사의 진실이 왜곡되어 가는 어이없는 현실 앞에서 지난 날 지내왔던 어린 시절을 더듬어 가며 비록 한국을 떠나  외국에 사는 코리안 디아스포라이지만 이 글을 한국교회에 남기고 싶다. 이 글은 6.25동란으로 북한 공산당에게 점령당한 후 다시 서울을 수복했던  94일 동안의 기록이다.

 

그때 나는 열 살 서소문교회당 담 옆에 있는 태평국민학교를 다니는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쉰한 살 목사로 서소문교회를 담임하셨다. 우리 가정에 두 기둥이셨던 아버지와 외삼촌이신 신당동중앙교회에 시무하시는 안길선 목사가 같은 날 내무서원에 의해 잡혀 가셨다.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육형제와 목사를 잃어버린 백여 명의 성도들은 방황하며 만나고 싶고 보고 싶어 한없이 찾아 헤매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앞날이 캄캄했다.

 

북한 공산당이 남침하여 첫 번째로 남한 질서를 파괴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지식층을 잡아 감옥에 가두거나 죽여 그 지도력을 빼앗아 백성들이 공산주의를 쉽게 따라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오지(阿吾地)의 한(限): 납북인사, 월북인사들의 최후”라는 동아일보의 연재 비화에서 오기완(북한 제1수상 김일의 보좌관)이 망명하여 (1979.7)이 말한 내용에 의하면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국회의원 김장열, 김의환, 유지수, 김용현, 최병주, 허영호, 정인식, 심영훈, 최석홍, 조옥현, 김우식, 구중회,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김옥주 등 수십명이 끌려갔고 반동문화인으로 김기림, 유자후, 방한준, 이백수, 김억, 이명우, 김형원, 김동환, 역사학자 정인보, 윤기섭, 고원훈, 최린, 김상윤, 백관수, 판사 김홍순, 변호사 강동진, 사법관 이수영, 저명 종교인으로 알려졌던 인사들 만으로도 구자옥, 남궁혁, 오택관, 박현명, 한치명, 송창근, 방훈, 김동철, 김규복, 유한주, 박상건, 장덕로, 이건, 송태연, 김유연 등 백여명에 달하고 있었다”(아오지의 한) 종교인 명단에는 캐톨릭 신부들도, 성공회 신부, 구세군 사관도 포함되어 있었다. 민주동맹(뒤에는 기독교 연맹으로 바뀜) 위원장 김창준이가 목사들을 설득해서 앞잡이로 세우려했지만 박상건목사가 선두로 듣기 싫다 나가라고 고성지름으로 나갔으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악랄해졌다.

  

아오지는 공포의 탄광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정치범에게 강제노역을 시키는 곳으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주재명목사와 아버지 김동철 목사는 전염병 발진티푸스에 걸려 5, 6명이 사망하고 말았다. 서울에 온 내무서원은 닥치는 대로 남한의 사회 지도자를 밤 10시 이후 미아리 고개나 영천고개를 넘어 북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 6.25 당시 서울의 크기는 지금보다 20배나 적었다. 서울 사대문 안의 개신교회는 아마도 100여곳 가량 되었다. 교단으로는 감리교, 장로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1, 동방정교회 1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주일 아침 오전 9시경

 

서소문 교회당 앞 행길에 스피커를 단 군대 짚차가 확성기로 “국군장병 여러분, 오늘 새벽에 북한 공산군들이 38선을 넘어 침공했으므로 외출이나 휴가나간 국군장병들은 즉시 부대에 복귀하십시오.”라는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자동차는 시청 쪽으로 천천히 지나갔다.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사람들은 여기저기 뜨문뜨문 모여서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나의 아버지 김동철 목사는 해방과 더불어 만주 신경 입선정교회 교인을 이끌고 함께 귀국하여 서울에서 만주 조선동포를 위한 서소문교회를 창립한지 5년째 되는, 교인 100여명이 모이는 교회였다. 그 교회당은 남대문과 덕수궁 중간쯤에 위치해 있다. 아버지는 그날 평소대로 여배를 드리고 갑자기 일어난 비상시국이므로 다른 모임은 취소하고 교인들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장로와 집사들이 사택에 찾아 와 라디오 방송 뉴스를 듣고 염려하는 말을 하였다. 아버지는 ”여러분 좀 지켜보십시다. 지금 우리들이 기도할 때입니다. 전쟁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데 우릴 지켜 주십니다.”고 말씀하신 후 교회당에 들어 가 강대상에 엎드려 오랫동안 기도하고 오셨다.

 

나는 동네 동무들과 어울려 집문 밖 조금 나가면 남대문 지하도가 있는데 거기에 피난민 떠나는 행렬을 구경하러 나갔다. 남대문 지하도 옆 아스팔트 위로 흰 바지저고리 입은 농부들이 짐을 지거나 가끔은 황소를 몰고 가며 하얀 치마저고리 입은 아줌마들이 짐 보따리이고 아이들의 손목을 잡고 걸음을 재촉하는 이들에게 옆에 있는 어른들이 어디서 오느냐고 물으면 동두촌에서, 덕정에서, 의정부에서, 송추에서 온다고 대답한다. 왜 소를 가지고 가느냐고 물으니 인민군들이 오면 소를 빼앗아 잡아먹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 돌아와서 이 광경을 말하니 어머니도 나와서 피난민 광경을 보고 놀란다. 그날 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신중하게 우리도 피난가자고 말하니 아버지는 한마디로 피난 못 간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1950년 6월 26일 

 

아침에 피난행렬들은 의정부, 수유리, 미아리에서 밀려오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참다못해 “여보 우리가 만주에서 서울로 나올 때도 목사님은 안된다고 했지만 서울에 오고 보니 얼마나 잘했습니까? 그냥 만주에서 눌러 살았으면 공산치하에서 얼마나 고생하며 혼났겠어요. 만주살 때 목사님이 교회일로 출장갔다가 길이 막혀 못 오셨을 때 산에서 팔로군이 내려와 양식을 빼앗아 가고 여인들에게 못된 일도 하고 죽이기도 했는데 난 그때 너무 놀라 신경쇠약에도 걸리고 잠 못자는 병에 걸린 일 잘 아시지 않아요. 공산당은 교회를 제일 싫어하고 기독교를 아편이라고 험담하며 목사를 제일 먼저 숙청합니다. 당신이 일본 헌병에게 끌려 가 한 달 감옥살이 하고 성경책과 설교노트 빼앗긴 것보다 공산당은 잔인하고 무섭습니다. 난 공산당이 무섭고 싫어요 이제 창국이도 군대 끌려 갈 나이도 되고 창권, 창열이는 갓 대학생 된 일 학년 이잖아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한의 자유 민주주의 진영에 살아야 합니다.” 어머니는 흐느껴 울면서 아버지에게 졸랐습니다.

 

어머니 간청에 아버지는 “그러면 당신이 아이들 데리고 피난 갔다가 며칠 후 전쟁 끝나면 돌아오시오” 하셨다. 어머니는 한숨을 길게 쉬면서 옷가지를 챙기며 아이들이 들고 나갈 짐보따리와 미수가루를 만들었다. 아들 여섯을 데리고 나가려 하는데 갑자기 둘째가 아버지 혼자만 어떻게 집에다 두고 갈 수 있느냐고 하면서 자기가 아버지 모시고 있을테니 형이 어머니 모시고 동생 데리고 가라고 했다. 뜻밖에 이산가족이 되었다. 우리는 아버지의 기도를 받고 어두움을 헤치고 한강 쪽으로 걸어갔다. 그 넓은 길이 피난민 행렬로 꽉 찼고 시끄러웠다.

우리가 삼각지 로타리에 도착했을 때 하늘에서 불빛이 대낮처럼 밝히면서 꽝꽝하는 폭탄소리가 나자마자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삼각지까지 들렸다. 우리는 가는 길이 막혔다. 삼각지 뒤쪽 길에 들어서니 17연대 백골부대 보초서고 있는 군인에게 지금 행길에서는 트럭을 타고 붉은 깃발을 휘두르며 노래 부르고 다니는데 빨리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피하라고 어머니가 가르쳐 주었다. 부대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머니는 큰 아들 창국에게 비상금과 미숫가루를 배에다 메어주며 빨리 한강에 가서 야매 배를 타고 국군이 있는 남쪽으로 내려가라 그래야 산다고 기도하고 등 두들겨 보냈다,

 

1950년 6월 27일

 

마포국민학교 교사로 있는 창국의 학부형 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 후암동에 있는 전도사님 댁에 들렸다. 전도사님 댁에서 점심을 먹으며 큰 아들이 이북에서 장교 되어 서울에 왔는데 잠간 하는 말이 북한 공산군이 괜찮다고 무서워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전도사님은 우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집에 가서 아버지가 어떤가 상황을 살피고 오라고 하셨다. 난 달려서 집으로 갔다. 길은 인적이 드물고 한산했다. 문 앞에서 아버지를 두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이 없다. 그 다음 형을 불렀는데 또 대답이 없다. 교회당에 가보니 아버지와 형 그리고 몇 교인들과 기도드리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아버지에게 이야기했다. 엄마가 어디 있느냐 하시기에 우리 식구가 전도사님 집에 있다고 말하니 가서 집에 돌아오라고 말하라고 하셨다. 집에 돌아와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큰 형에 대해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난 후 저녁밥을 지어 먹은 후 가정예배를 드린 후 골아 떨어졌다.

 

1950년 6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이 중앙방송을 통해 “국민들이여 서울을 지키라”고 방송하고 한경직 목사도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똑같이 말했다. 공산군이 점령 후 몰래 이불 속에 숨어 듣는 방송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통령과 한경직 목사는 대전에 가 있고 대전에서 녹음으로 하는 방송이었다고 한다. 그때 우리는 가난해서 라디오가 없었다. 교인이 갖다 주는 라디오로 이불 속에 숨어 조용히 듣곤 했다. 그때까지 세상에 녹음기가 있다는 것도 모르는 세상에서 살았다.

 

1950년 6월 29일

 

외삼촌(안길선 목사)이 찾아 왔다. 외삼촌네 가족 세 명은 벌써 피난갔단다. 외삼촌은 아버지에게 아이들도 어리고 동생도(어머니) 몸이 약하니 피난가라고 권면했다. 외삼촌은 이북에서 목회할 때 제직 중에 정치보위부에 근무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집사가 “내일 안길선 목사 차례인데 총살당할 것”이라는 정보를 주며 “빨리 도망가십시요” 하면서 여비를 주어서 갑작스레 서울로 오셨단다. 이일로 교인들을 이북에다가 놓아두고 혼자 살려고 서울에 온 것이 맘에 늘 걸린다면서 이번에는 순교할 각오로 피난가지 않았단다. 아버지도 외삼촌에게 중국이 공산화되어 제직회 결정으로 온 교우들이 함께 남한으로 가기로 했지만 사정상 떠나지 못한 네 가정이 계속 만주에 남아 있어 종종 인편으로 보내오는 편지를 받고 두고 온 교인들로 인해 마음이 괴로워 기도를 많이 하신다고 하셨다.  외삼촌은 피난가라고 하면서 어머님께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주셨다.

 

1950년 7월 9일

 

영락교회 교인과 정동교회 교인들이 본 교회에 예배가 없어 우리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렸다. 서울시내 교회들의 목사들이 피난을 가셨으므로 많은 교회들의 예배가 중단되었었다.

 

1950년 7월 10일

 

서소문 통장이 대형 스탈린 초상화와 김일성 초상화를 가져와 강대상 위에 걸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서통장과 큰 소리로 논쟁을 하셨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지 사람을 숭배하는 곳이 아니라며 어느 교회가 이런 일을 하느냐 일제 때도 이런 일은 없었다고 단호히 거절하였다. 서 통장은 아무튼 상부지시니 사진을 놓고 가겠다고 해서 야단을 쳐서 사진을 돌려보냈다.

 

1950년 7월 13일

 

정치보위부 대좌와 서 통장이 함께 초상화를 들고 왔다. 정치보위부 대좌는 함경도 사람으로 사투리를 썼다. 아버지도 함경도 사람이라고 하시면서 고향과 만주 용정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치보위부 동무 우리 교회 안에는 몇 사람이 아이 모이요. 이 초상화 사진을 동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문에 거는게 좋겠소. 우리 교회 벽과 아파트 입구 벽이 붙어 있찌 않소. 교회당 안에 초상화 거는 교회는 세상 어느 나라도 없소, 강대상 위에 예수님 사진도 우리는 아이 붙이오. 성경에 그렇게 말했찌비.”  대좌는 “우리 북조선 인민공화국 교회들도 다 붙이는데 서울 어느 교회도 붙였는데 어찌 그러우” 하면서 말을 흐린다. 아버지는 다시 강조하셨다. “교회당과 벽이 붙어 있는 아파트 입구가 아주 좋소”. 그래서 강대상 위에 못 부치고 아파트 출입구 위에 붙였다. 이 일은 성령님께서 도와주신 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였다.

 

1950년 7월 16일, 23일

 

어머니는 아버지가 주일 설교를 마치신 후 곧장 책가방과 음식을 싸들고 창길과 창림이를 데리고 흑석동 감리교회 김연자 전도사(큰 외삼촌 부인)가 시무하는 교회에 피해 있게 하셨다. 그 교회는 목사님이 피난가셨고 교회와 동네가 조금 떨어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교회에 외딴 사람들이 드나든다고 항의해서 2주간 계시다가 집에 돌아 왔다. 어머니는 자꾸 기독교 연맹에서 사람을 보내어 아버지를 찾는게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고 하셨다.

 

1950년 7월 30일, 8월 6일

 

아버지는 창길, 창림이를 데리고 고모댁에 피해 있었다. 고모부 유일환 장로는 서소문 교회 장로였고 장충동 적산 가옥에서 사셨다. 기독교 연맹에서 연락 올 때마다 어머니는 목사님이 애들 데리고 시골 어디에 요양 가셨다고 하셨다. 역시 고모네 집에서도 반장을 통해 이상한 식구가 와서 살면 보고하라고 하므로 다시 집으로 돌아 오셨다.

 

1950년 7월 31일

 

서 통장은 어머니에게 와서 대학교에 들어 간 두 아들을 조국전선을 위해 인민군에 보내라고 말할 때마다 어디가고 없다고 적당히 둘러 대었다. 창권, 창열이가 밖에 나가면 의용군 모집에 끌려가 몇 번 빠져 나온 적이 있다. 하는 수없이 어머니는 창권, 창열을 충청도 논산에 있는 황순덕 집사 댁에 피신하러 보낸다. 오라버니에게 받은 돈을 나누어 주고 기도하며 떠나는 뒷모습을 바라본다. 두 형제는 재빠르게 피해 갔지만 많은 사람들이 검문소에서 잡혔다. 창권은 일주일 만에 평택까지 갔다가 되돌아와 지하실에 숨어 밥과 요강을 들여 놓고 숨어 지내곤 했다.

 

1950년 8월 12일

 

창열이도 돌아 왔다. 몸이 몹시 여위었고 오자마자 고생한 이야기를 한다. 논산까지 도착했는데 황순덕 집사는 애양원에 가시고 안계셨고  부유하게 사는 집안 식구들은 밥은 잘 차려 주었는데 더 있으라는 얘기는 안해 돈 몇 푼 주어서 받아 가지고 서울로 돌아왔다 한다. 창열은 18살에 연희대학교 신학과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는데 배재고등학교에서 일 년 월반했고 아버지는 목사 되기를 기대했다. 창권이는 20살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1950년 8월 13일 주일예배

 

8월 13일 정치보위부 위원이 주일예배에 참석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메모해 갔다. 일제 강점기 때 일경이 하던 버릇을 공산당이 그대로 하는구나. 아무래도 때가 가까운 것 같구나. 주님께서 간도 용정의 명동학교를 통해 예수 믿어 구원받게 하고 나라 사랑하게 하시더니 용정감리교회와 협성신학교를 통해 주의 종이 되어 만주에 이주한 조선동포를 위해 사역하게 하시다가 다시 해방과 더불어 귀국한 만주 조선족을 위해 서소문교회를 섬기도록 마지막까지 지켜주심을 감사한다. 지하실에 숨어있는 아이들의 얼굴과 철모르는 아이들이 사랑스럽고 사모를 고생시켜서 미안하다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1950년 8월 20일 주일

 

8월 20일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살아야 할 것(마태복음 10:16-25)”을 강조한 주일 설교는 마지막 설교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살아있는 신앙을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신앙에는 인간적인 계산이나 환경에 지배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육신을 죽일 수 있는 세상권세를 두려워 한 것이 아니라 육신과 영혼을 모두 주관하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했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상황에 따라 사람을 의지합니까? 나를 핍박하는 환경에 따라 타협하는 신앙인입니까?

 

우리가 의지할 대상이 미국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련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이나 소련이라는 강대국에 의해 우리나라의 운명이 좌우된다는 생각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자녀를 중심으로 세계를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은 이 땅을 두루 감찰하사 그분을 온전히 신뢰하고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이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울 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인간적인 모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늘로부터 나는 선한 생각과 지식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얻어집니까? 이렇게 어려울 때 일수록 날마다 말씀을 상고하고 기도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  어려움을 피하게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어려움이 왔을 때 믿음을 저버리지 않도록 준비된 신앙이 절실한 때 입니다. 순교자의 피 위에 세워진 이 교회 터 위에 영광스럽게 부르심을 받은 서소문 75번지의 성도답게 우리의 생이 마무리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서소문교회 50년사 p57-58)

 

1950년 8월 15일

 

서울 시내 목사들을 종로 2가에 모여 구국기도회를 열고 기독교연맹을 조직한다는 편지를 가지고 한 청년이 찾아 왔으나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다.

 

1950년 8월 23일

 

새벽 6시 반경 청년이 아버지를 찾아 왔다. 창길이는 아버지가 안계시고 한시간 후에 오실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새벽기도 마치고 어머니와 창덕이가 마포에 가서 감자를 떼다가 남대문 시장에 가서 넘겨주는 일을 돕기 위해 매일 아침 어머니가 이고 들어오는 감자자루를 서대문 전차 정거장에서 받아 한 자루를 집에 까지 들고 오신다. 그 당시 마포와 서대문이 전차 종점이었다. 전차에서 내리는 어머니의 짐을 받아 들고 오시는데 창덕이는 직접 남대문 시장으로 가서 넘겨주고 엄마의 걸음걸이는 늦어서 아버지가 빨리 집에 도착하고 어머니는 좀 늦게 도착하신다.

 

항시 아버지는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시면 습관적으로 기도하시는데 기도가 끝나자 아까 왔던 청년이 따라 들어왔다. 그 청년은 아버지가 오시기를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누런 봉투 편지를 아버지에게 준다. 아버지는 편지를 읽고 주머니 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어 시간을 보신 후 땀을 닦으시며 엄마 오시면 아버지가 목사님들 모이는 회의 참석차 갔다가 오신다고 해라 하시면서 청년 따라 가신 것이 마지막 길이 되어 버렸다. 창길이는 아버지의 마지막을 혼자 보면서 왜 그 길을 막지 못했나 한동안 죄책감에 잡혀 살았다.

 

어머니와 온 가족들은 밤늦게 까지 기다렸다.  이제 곧 오시겠지 하면서 어머니는 안 오시니까 불안해서 예배당에 가셔서 기도하시다가 몇 번 아버지 오셨나 하고 집에 들렸다.

 

1950년 8월 25일

 

공습을 어렵사리 피해 오라버니 계시는 신당동 중앙교회 목사사택을 찾아 갔다. 식사를 준비해 대접하는 집사님이 안 목사님이 그제 어떤 청년이 편지를 가져 와서 회의가 있다며 따라 가셨는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어서 궁금하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웬일이지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어디를 가셨나 무엇을 하시는 걸까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든다고 하셨다. 집에 돌아 와 아버지와 외삼촌의 상황을 아이들에게 이야기 했다.

 

1950년 8월 26일

 

아침저녁 날씨가 쌀쌀하다. 하얀 모시 적삼을 입고 가셨는데 감기 걸리시면 어떡하나하는 걱정이 되어 가을 옷과 갈아입을 내의를 보자기 싸들고 종로 2가 기독교연맹 사무실에 가서 울면서 하소연했지만 모른다고 딱 잡아뗀다. 거기에 일하는 청년이 화장실 가는데 따라가서 물었다.

 

인적이 없는 사이에 반도호텔이나 조선호텔을 뇌까려 줬다. 어머니는 눈치 채고 반도호텔에 갔더니 매 맞아 아파 소스라치는 소리가 처참하게 들려 문에 들어갈려고 하니 못들어가게 인민군인과 민간인이 길을 막는다. 어머니는 자초지종을 말하며 목사님을 찾아 왔다고 하니 여기는 목사동무 없소 하며 건장한 남자가 밀어낸다. 다시 발길을 옮겨 조선호텔을 찾아 갔더니 역시 거기에도 사람을 때리는 소리와 아파서 소스라치는 소리가 어머님 가슴에 뼈아프게 저려 왔다. 우리 목사님 소리가 아닌가 혹시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아닌가 귀 기울여 들었지만 들여 보내주지는 않았다.

 

1950년 8월 27일

아버지의 옷 보따리를 들고 반도호텔, 조선호텔을 찾았는데 역시 통곡소리와 가끔 고성이 창문 밖에 흘러나왔다. 얼씬도 못하게 내쫒는다.  어머니는 저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저 목소리가 목사님들의 소리가 아니기를 바랬다. 가끔은 기죽은 신사들이 자동차에 실려 와 들어가곤 했다. 조선호텔에 일하는 여자를 따라가 사정해 보았지만 막무가내 문을 닫아 버렸다.

 

1950년 8월 28일 

날씨가 차가와 지면서 지난여름 아버지가 장질부사에 걸려 일주일 동안 고열로 고생하던 일, 영양실조로 몸이 쇠약해졌던 일들을 생각하며 맘이 몹시 안타까웠다. 혹시 오리버니를 만나면 해서 내의를 준비해서 봇따리를 들고 나섰다.

 

1950년 8월 29일 

조선호텔에서 본 여자가 목사들은 여기에 없어요. 서대문 형무소란 말로 흐린다. 어머니가 애처로워서 이렇게 말하는가 해서 고마웠다.

 

1950년 8월 30일

서대문 형무소에 조그만 옷보따리를 들고 갔지만 크고 높은 쇠문이 꽉 잠겨져 있고 사방은 적막했다.  가끔은 안에서 들려 오는 매맞는 소리와 고성이 오갔다.

 

1950년 9월 1일

밤 10시나 11시에 납치인사들이 내무서원에게 이끌려 영천고개를 넘어 북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서대문 형무소 먼발치에서 기다렸지만 내무서원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수십 명씩 끌려나와 어디론가 갔다. 어두워서 얼굴을 구별할 수도 없었다.

 

1950년 9월 2일

그동안 살림은 열여섯 살 난 창덕이가 감자를 넘겨다 팔아 남은 돈으로 보리쌀 한 되를 사거나 밀개울을(껍질) 사다가 창길과 창림이가 남대문 시장에서 주워 온 배춧잎이나 무 이파리를 섞어 죽을 써 먹었다. 이렇게 먹으니 얼굴은 누렇게 뜨고 배는 불룩 나오고 있었다. 창덕이는 배재중학교 3학년생이다. 아직도 창권, 창열은 캄캄한 지하실에서 들키지 않게 계속 숨어 살았다. 국군이 빨리 해방시켜 주기를 이불 속에서 뉴스를 듣고 기다리고 살았다.

 

1950년 9월 3일

정치보위부로부터 서소문교회 교인 명부를 제출하라는 통보를 받다.

 

1950년 9월 10일

이옥자 여전도 회장(세브란스 장욱진교수 부인)에게 어머니가 일러준 대로 명단을 작성하게 했다.

 

1950년 9월 15일

 

북아현동 적산가옥이 있는 (경기대학 건너편) 정치보위국에 어머니가 교적부를 들고 창림이와 나를 데리고 갔다. 어머니는 너희들은 밖에서 놀고 있으라고 하셨다. 엄마가 두 시간이 지나도 안 나오면 집으로 가라고 하셨다 반시간 후에 나오신 엄마는 우리 둘을 끌어안고 눈물을 지었다. 2시간이 지나도 못나오면 아빠처럼 될까봐 엄마는 기도하고 맘을 단단히 먹었던 것 같다.

 

국군이 늦게 들어 왔었다면 공산당은 서울 시내기독교인을 학살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9.28 이후 자료에서 찾아냈다. 그래서 교인명부를 챙겼나 보다. 몸서리치는 공산당의 무서운 공작이었다. 이북에서 기독교인들을 그렇게 숙청했던 대로 서울에서도 같은 짓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난 어머니의 심정을 왜 알아차리지 못하였는가. 열 살 어린 나이라고는 하지만 너무 어리석었다.

 

1950년 9월 20일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상륙 치열한 전투 승리로 서울 탈환을 위해 진군한다는 KBS방송 뉴스를 듣는 게 희망이요 낙이었다.

 

1950년 9월 21일

폭격이 심해지고 공습이 여느 때보다 많아졌다. 8월 23일 아버지가 납치된 후 이영철 장로, 이광수 장로의 건의에 따라 어머니가 몇 주 예배를 주관하다.

 

1950년 9월 25일

인민군이 후퇴하기 시작하는데 서소문에서 아현동 산언덕에서 인민군이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따발총을 쏘며 전투하는 모습이 보인다

 

1950년 9월 26일

경전병원이 폭격을 맞아 불이 났다.  인민군 부상병들이 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 빨치산 여장교들이 경전병원이 불타는데 불을 끈다면서 휘발유를 물이라고 뿌리며 부상병들이 타죽게 하였다. 이직도 빨치산 패잔병들이 동네에 군데군데 남아 사람들에게 최후발악으로 총 쏘아 죽이는 상황이 일어났다.

 

1950년 9월 27일

유엔군이 서울역에 들어 왔다. 덕수궁 앞에도 해병대가 들어 왔는데 서소문은 점령 안했다. 밤새 조명탄이 하늘에서 터지고 환하면 박격포가 날아오고 사방에서 부상당하거나 죽는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의 부탁으로 창덕이가 교회당 뒷마당에 방공호를 파서 당회록, 제직회록을 묻고 옷과 그릇을 넣었는데 직격탄이 그곳에 떨어져 모두 박살나 버렸다. 만일 우리 가족이 그 방공호에 들어갔다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불바다와 총알 속에서도 우리를 지켜 주셨다.

 

1950년 9월 28일 

 

해병대가 서울에 입성하는데 동네 사람들은 몰래 숨겨 두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박수치며 환호했다. 경전병원과 옆 건물이 폭격으로 다 무너져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해병대는 신촌 쪽으로 전진하다가 북한에서 내려 온 배재중학교 교장을 교정에서 생포해 왔는데 병정이 소대장에게 귀찮은데 어떻할까요 하니까 총살시켜 한마디에 군중들 앞에서 그를 한쪽 구석에 데려다가 죽였다. 사람의 생명이 파리보다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서소문교회는 8.15해방과 더불어 중국공산당이 싫어서 자유 대한민국을 찾아 온 사람들이다. 6.25 후에는 제2대 담임목사이신 서금찬 목사님을 중심해서 북한 공산당이 싫어 남하한 함경도 사람들이 모였던 교회이다. 6.25 동란 중 서울시내 교회에 시무하던 목사님들  해방촌 교회, 새문안교회, 신당동중앙교회, 동막교회, 서소문교회, 수색교회, 한신대학교 송창근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박현명 교수, 감리교의 여러 교회들, 서울의 교회를 지키시며 끝까지 신앙양심을 고수하다가 납치되어 순교하신 선열들의 신앙을 되찾았으면 한다.

 

오늘 서울의 교회가 이렇게 확장 부흥한 것은 그들의 순교정신과 반공정신이 아닌가? 한국교회가 이름없이 빛도 없이 끌려가 순교한 숨은 6.25 순교자를 찾아내 그들의 삶과 신앙을 물려주기를 바라며 이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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