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0주년에 내부고발자 루터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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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7-11-07 07:25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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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1985년쯤에 부모님께서 서울 역삼동 어느 집에 세 들어 사실 때 집에 강도가 들었습니다. 아침 출근 시간쯤에 양복을 차려 입은 강도 둘이 부모님 계시는 방으로 들어와 칼을 들이대며 ‘쉬! 소리치면 죽어!’라며 조용하라고 했습니다. 한 놈은 부모님을 지키며 바깥 동정을 살피고 다른 한 놈이 건너 방으로 들어가 주인 부부를 위협하여 방구석으로 몰아 이불을 뒤집어 씌워놓고 집을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어머니께서 기지를 발휘하여 강도가 한 눈 파는 사이 뒷문을 통해 밖으로 뛰어 나가면서 ‘강도야!’라고 소리쳤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들자 탄로 난 것을 알게 된 강도는 유유히 집을 나와서 덩달아 ‘강도야!’라고 소리쳤습니다. 양복 입은 신사가 강도일 줄이야... 사람들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 강도들은 유유히 사라졌습니다. 어머니가 저 놈이 강도라고 가리키는 대도 강도가 양복을 입고 있었고 자기도 마치 강도를 찾고 있는 듯 행동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도를 몰라보았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너도나도 개혁해야 한다며 한 마디씩 합니다. 개혁을 하자는데 ‘뭐, 당신이 개혁을?’라고 하기가 뭣하지만 나쁜 놈이 좋은 말 하면 듣기가 역겨운데 세상이나 교회나 할 것이 없이 온통 나쁜 놈들의 좋은 말이 판을 칩니다. 권력과 명예와 재물과 인기를 향한 해바라기 인사들이 좋은 말은 도맡아 하고, 사기, 거짓말, 돈 횡령 유용, 성범죄, 불법, 탈세, 가짜 학위, 폭력 등의 증거가 분명한 놈들이 국회나 학교나 교회 강단에서 온갖 좋은 말을 다합니다. 나쁜 놈이 좋은 말 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은 나쁜 놈이 좋은 말을 해도 그 말을 듣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역겨움을 못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온갖 나쁜 짓을 해도 또 다시 국회의원이 되고 별의별 나쁜 짓을 한 목사가 버젓이 설교를 해도 수많은 교인들이 아멘 할렐루야 하니까 나쁜 짓 하면서도 두려움도 양심의 가책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옛말에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했는데 나쁜 놈의 좋은 말에 역겨움을 못 느끼는 사람들이 나쁜 놈들의 비빌 언덕이 되는 것입니다. 나쁜 짓도 혼자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정치 지도자가 나쁜 짓 못하게 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고 교회 지도자가 나쁜 짓 못하게 하는 것은 교인의 몫입니다. 나쁜 짓을 하는 것도 용납하지 말아야 하지만 나쁜 짓 해 놓고 좋은 말을 하면 역겨워 해야 합니다. 국회의원이 나쁜 짓 하면 다음에는 절대 뽑지 말아야 하고 목사가 나쁜 짓 하면 그런 목사의 설교는 다시는 듣지 말아야 합니다. 나쁜 짓을 하는 국회의원을 또 뽑아주고 나쁜 짓을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들어주니까 세상과 교회가 온통 시쳇말로 적폐가 쌓이고 그 적폐는 사회를 병들게 하고 힘없는 약자들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교단마다 신학교마다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에 열을 올립니다. 대형교회들은 독자적으로 그런 행사를 합니다. 평소에는 개혁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던 사람들이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행사를 거의 다 주도하고 있습니다. 교단 총회들의 행태를 보면 도무지 거룩한 교회의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조차 없습니다. 몇몇 대형교회 목사들의 나쁜 짓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는데도 수 천 수 만 명의 교인들이 그런 교회로 모여들어 나쁜 목사의 비빌 언덕 노릇을 해주고 있습니다. 나쁜 짓 하는 목사만 나쁜 게 아니고 그런 목사의 설교를 들어주는 것도 나쁜 짓입니다. 전쟁 중에는 종교 전쟁이 가장 악랄한 것처럼 세상 집단 내 분쟁보다 악한 것이 교회 분쟁입니다. 교인들은 무슨 미련 있어서 나쁜 목사가 있고 분쟁이 있는 교회를 떠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나 변명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 나라 원리가 무엇인지 진진하게 생각하고 단호하게 결단해야 합니다. 나 자신이 살고 교회를 살리는 길은 나쁜 짓 하는 목사의 설교를 듣지 않는 것이고 패거리를 지어 싸우는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들이 마치 나쁜 놈이 좋은 말 하는 것처럼 역겹다는 생각이 듭니다.
진정한 교회 개혁은 개혁을 하자고 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개혁이 특별한 지식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것은 더구나 아닙니다. 개혁해야 할 내용은 언제나 나 자신이 포함된 나와 직접 관련 된 것에서부터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대형교회 교인들은 가까운 건전한 작은 교회로 옮겨가는 것도 개혁적 결단 중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교인 천명이 넘으면 목사가 목사 노릇 하기 어려워지고 교인들은 순수한 신앙생활 하기가 어려워진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교인 500명만 넘어도 목사와 교인은 순수성을 잃는 것 같습니다. 화려한 예배당과 격조 높은 교육시설 그리고 수준(?) 있는 교우들과의 관계와 교제 같은 것들이 교인들의 큰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것은 모두의 자유이지만 그런 것은 영적 생명이 아닙니다. 큰 교회는 좋은 시설과 온갖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런 교회가 제공하는 여러 특권을 누리는 것만으로 교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진 것으로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바로 교인들의 개혁적 결단이 필요한 대상이고 이유입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큰 교회가 제공하는 대접과 소속감에서 사회에서는 받아보지 못한 상류 또는 중류 사회의 일원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교회의 참 모습이 아니고 영적으로 살아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정신을 실천하려면 대형교회보다는 중소교회가 유리합니다. 왜냐하면 대형교회에서는 주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목사나 장로의 뜻을 따르게 될 위험이 높기 때문입니다.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목회자라고 해도 교회가 대형화 되면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주님의 권위에 편승하게 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인간 능력의 유한함을 감안할 때 대형교회는 너무 위험합니다. 겸손하고 신실한 목사라고 하더라도 교회가 대형화 하면 피할 수 없이 독재자처럼 변하는 것을 현실에서 우리는 적지 않게 목격하게 됩니다. 대형교회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 어쩔 수 없이 정치가 많아지고, 정치가 필요 이상 많아지면 교회와 하나님 나라 원리가 힘을 잃게 됩니다.
목회자의 타락과 교회의 부패의 상당한 원인은 교회가 대형화 된 데서 비롯되고 있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나 교인들은 대형교회라도 좋은 교회가 될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대형교회는 인격이 훌륭하고 지도력이 뛰어나고 성령이 충만한 목회자가 목회를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섬기며 신앙적 양육을 받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 원리를 따라 사는 일 외에 일체 다른 것에 관심을 빼앗길 요인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대형교회는 교회 본래의 역할과 기능 외의 것에 지나친 관심과 에너지를 소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대형교회를 해체하는 것이 이 시대의 필요한 개혁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대형교회는 경제 문제에 있어서 성경적 원리에 정직해야 합니다. 선교와 사회사업에 엄청난 돈을 쓰면서 정작 대다수의 동역자 목회자들이 최저 생활비도 안 되는 절대 빈곤층임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정상적인 교회 모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같은 총회 같은 노회 안에 절대 빈곤으로 힘들어 하는 동역자들을 외면하고 선교와 구제와 사회사업 업적을 자랑하는 것은 이율배반입니다. 게다가 대형교회는 화려한 예배당을 짓는데 천문학적 돈을 쏟아 붓고 몇몇 대형교회 목회자 중에는 수백억 심지어 천억의 비자금을 관리하는 경우는 있다는데, 그런 교회는 목회자와 교인들이 공범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교회 현실에서 종교개혁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신학교마다 기념행사를 합니다. 신학교 교수들은 나름 학문적으로 종교개혁에 대한 논문이나 연구한 것을 발표 하여 교회 개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주장하지만 정작 개혁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신학교 개혁이 시급한 실정입니다. 목회자의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만들어내는 문제는 심각한 실정입니다. 한 연구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규모 있는 18개 교단 목사의 수가 2003년 43,389명에서 2011년에 76,608명으로 증가한 반면 교회 수는 2003년 33,451개에서 2011년에 44,011개 증가하였습니다. 큰 교회의 부목사나 교육목사의 수를 감안하더라도 1만 5천에서 2만여 명의 목회자 과잉공급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곳 미국에도 목회를 하지 않는 목회자가 대도시에는 수백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한국 상황은 더 심각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신학교 수와 신학생 수를 줄여야 합니다. 신학교 교수는 이런 주장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신학교가 순수하게 목회자 공급을 위해 존재하고 운영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신학교 운영을 위해 신학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 현실인데도 그것의 문제를 제기하는 신학교 교수가 없습니다.
신학교마다 개설하는 목회학 박사 과정은 목회자 계속 교육이나 재교육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신학교 운영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는 운영을 위해 돈이 필요한데 많은 목사들이 박사가 되고 싶어 하는 심리를 이용하여 만들어 낸 것이 소위 DMin 즉 목회학 박사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에 왜 목회학 박사 학위가 필요한지 신학교 교수들은 궁색한 변명 같은 해명이 아니라 종교 개혁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해명하고 그것이 성경적이라면 힘써 장려해야 하되 잘못된 것이면 비판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목회자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과 목회학 박사 과정의 문제점 같은 것을 진지하게 제기하는 신학교수들을 만나보지 못하였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는 대형교회를 해체하여 중소교회로 바꾸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신학교 교수들은 신학교 수와 신학생 수를 줄여야 한다거나 목회학 박사 과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개혁은 자기를 부정하는데서 출발합니다. 루터의 개혁은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였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종교개혁을 하려고 계획하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사제였고 비텐부르크 신학교 교수였으며 어거스틴수도회 수도사로서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교회가 제공하는 혜택을 누리는 특권층이었습니다. 그런 특혜를 누리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교황 레오 10세가 주도하는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를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황에게 가장 충성했던 사람은 도미니코 수도회에 속한 요한 테쩰이었습니다. 테쩰은 면죄부 판매 왕이었습니다. 그는 면죄부를 사는 금화가 그릇에 땡그랑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연옥에 있는 가족이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사람들을 설득하며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이에 격분한 루터가 1517년 10월 30일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대학 성당 정문에 게시하였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3년 동안 루터와 교황 사이에 줄다리기가 계속되었습니다. 교황은 루터를 회유하고 설득하였습니다. 교황은 루터에게 교황청으로 와서 그 주장을 철회하고 사과하면 없었던 것으로 해주겠다고 회유하였지만 루터는 끝내 교황의 회유와 설득과 위협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도 루터를 회유하고 설득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교황이 볼 때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게시 사건은 교회 안에서 일어난 내부문제였기 때문에 루터만 잘 설득하면 무마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황과 황제의 제안과 설득을 거부함으로서 결국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하였습니다. 교황의 파문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성경의 뜻에 위배되기 때문에 교황과 황제의 명령과 설득을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교황의 파문은 루터가 어디에서도 생존 자체를 보장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루터는 내부 고발 자였습니다. 그의 내부 고발 내용이 바로 95개 반박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검소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라서 수도사가 되고 사제가 되고 대학교수가 되어 시쳇말로 금수저는 아니지만 은수저쯤은 되는 그가 쉽지 않게 얻은 모든 지위와 특권과 혜택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법(성경)을 어기고 있는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와 특혜를 잃을까 두렵기도 했을 것이고 또 다른 여러 이유로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루터는 개혁을 한다는 어떤 목적에서가 아니라 성경에 위배되는 것에 대하여 거부하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입니다. 루터에게 배울 점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루터는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내부 고발 자를 자처한 것입니다.
한국 국회, 청와대, 검찰, 대학, 병원, 대형교회, 기업, 사회복지 기관 등 모든 집단에서 루터 같은 내부 고발 자가 나와야 합니다. 성경에 명백히 위배되는 일이 지도자에 의해서 자행되고 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묵인하고 동조할 때 신실한 믿음의 사람은 모든 불이익을 감수하고 내부 고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불의에 항거하는 것은 거창한 개혁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영적 생명의 살아 있는 현상입니다. 한 생명 한 생명의 살아 있는 현상들이 모여 개혁의 힘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진정한 개혁은 개혁하자는 기치 아래 모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개혁은 기도회나 학술 발표회나 세미나 같은 것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자기를 부정하는 영적 생명의 현상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평소에는 권력과 재물과 명예를 얻을 수 있는 방향으로 모든 관심과 역량의 촉수를 맞추어 행동하던 이들이 종교개혁 운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역겨워 하실 것입니다. 그런 이들은 자신의 인생 여정에서 영적 생명의 살아 있는 현상이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의 일상에서 영적 생명현상이 나타나고 있는지부터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후 13:8)
황상하 목사 (퀸즈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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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욱님의 댓글
박종욱 ()
목사님의 귀하신 묵상의 글. 잘 읽고 갑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에 우리 모두가 새겨야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반듯하게 말씀하시는 목사님을 존경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