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교회 말씀사경회, 정갑신 목사 “신앙생활은 죽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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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8-04-15 06:21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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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교회(정주성 목사)는 4월 13일(금)부터 3일간 “신자의 길: 들음과 따름”이라는 주제로 설립 4주년 기념 말씀사경회를 열었다. 한국에서 온 강사 정갑신 목사(예수향남교회)는 들음1(왕상3:9), 들음2(눅8:22-25), 따름1(행20:16), 따름2(요7:53-8:1) 등 4번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간증과 더불어 성경을 재미있게 풀어나갔다.
정갑신 목사는 총신대학교를 졸업하고 신대원을 가는 것이 아니라 손봉호 교수에게 배우기 위해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원(윤리)에 진학했다. 이어 총신대학교 신대원을 졸업하고 충현교회와 안산동산교회 부목사, 그리고 창신교회 담임목사를 거쳐 현재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에 있는 예수향남교회 담임목사로 있다. 정 목사의 사역은 한국교회에 주목을 받고 있는데, 특히 부목사가 5년간 사역후 1백명의 성도들을 데리고 나가 분리개척하도록 하는 방식으로 그동안 5개의 교회를 독립시켰다.
정갑신 목사는 토요일 저녁 사도행전 20:16을 본문으로 “따름1”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정 목사는 말씀을 마치며 “우리가 가치는 어디에 두는가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한마디를 말하고 싶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 죽음이다. 죽음을 목적으로 살라. 내가 죽는 것이 목적이 되게 살아보라.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신다면 그것보다 더 완벽하고 좋은 삶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루하루 죽음을 목적으로 사는 삶을 살아라. 그러면 그것이 새로운 생명으로 가는 길이다. 죽음이 생명을 낳았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생명을 낳았듯이 나의 죽음의 길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되는 것으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에서 생명의 역사가 살아나는 것이고, 그런 분들이 모인 교회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은혜가 나무교회에 충만하기를 축원한다”고 말씀을 전했다.
말씀을 놓고 결단의 기도가 이어졌다. 정갑신 목사는 “하나님, 저는 죽는다고 늘 말은 하지만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좀처럼 내 자존심조차 내려놓지 못하고 꼭 붙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매일매일 어떤 것이 지금 이 상황에서 죽는 것인지 묻게 하시고, 주님으로 부터 듣고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원하시는 그 길을 걸음으로, 내가 죽어 주님이 사시는 길을 매일매일 구체적인 삶속에서 보게 하소서.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타나게 하시고, 생명이 살아남을 보게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를 인도했다.
뜨거운 기도가 이어지는 가운데, 정주성 목사는 “신앙생활은 죽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곧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치 죽기로 작정한 것처럼 그렇게 사역하고 섬겼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나 살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내 자존심이 살아야 되고, 내 욕심을 죽이지 못하고 계속 감추어 두고, 내 안의 온갖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기도했다.
이어 “어제 프레임을 깨트리고 자기 생각을 내려놓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들을 수 없다고 했는데, 오늘 죽어야 한다고 까지 말씀 하십니다. 이 시간, 하나님 죽여주시옵소서! 순종은 곧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하나 끝까지 순종한다는 것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셨으니 우리도 죽게 하여 주소서. 주님께서 죽으신 뒤 부활하셨으니 순종의 끝자락에 죽음이 있다할지라도 우리가 다시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부활할 줄 믿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죽음을 향하여 부활을 향하여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라고 기도를 이어나갔다.
앞서 설교를 통해 정갑신 목사는 신앙인에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해 나갔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1.
“바울이 아시아에서 지체하지 않기 위하여 에베소를 지나 배 타고 가기로 작정하였으니 이는 될 수 있는 대로 오순절 안에 예루살렘에 이르려고 급히 감이러라”
본문에는 “작정”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 단어가 강렬하게 제 안에 들어왔다. 왜 그런가를 생각해 보면 제 속에서 작정함이 없는 모습을 발견하고, 그 모습 때문에 삶에서 쓸데없는 변수들을 초래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되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신앙생활은 깨놓고 하는 것이다. 봐 가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을 때 깨놓고 목숨 걸고 사랑하셨다. 우리에게 들어와 인생을 바꾼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히 결정적인 사랑이다. 작정하고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신 것이다. 모든 것을 거신 사랑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들은 모든 것을 거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는 합당치 않게 잔머리로 계속 굴리고 살아간다. 헌신의 결정이 필요할 때 내 삶에 별지장을 없다면 하겠다는 최종적인 판단을 내가 하겠다는 자세이다. 그것에는 작정이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작정하신 것이기에 우리의 삶도 작정해야 하는데 우리의 삶은 유보적이고 상황적이고 결과주의적이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은 삶에서 계속 헛돈다. 뭔가 공회전하며 부릉거리는데 열매가 없고 삶에 만족과 기쁨이 없다.
신앙생활은 작정하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이 만족될 때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 상관없이 사랑하기로 결정하셨다. 그 사랑이 이미 선포되고 시행된 사랑이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으로 변화된 인생을 산다지만 심지어 자녀에게 조차 조건적으로 대한다. 조건적이고 결과적이고 상황적으로 사랑한다. 우리들은 작정하지 않는다. 배수진을 치지 않는다. 신앙생활이 이런 모습으로 진행되면 하나님과 우리사이에 결정적으로 나타나는 열매를 거두기 어렵다.
믿음의 승부가 나는 지점은 항상 결과론적이며 상황론적인 생각을 뛰어넘는다. 모든 조건이 맞지 않아도 단지 하나님이 옳으시고 원하시게 그 길을 갔을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이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스토리이다. 하나님의 이야기가 이때 쓰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계속해서 작정함이 없이 상황적 유보적으로 결과를 봐 가면서 하려다 보니 우리 신앙이 계속 그 자리에서 맴도는 것이다.
어제 예배 영성과 일상 영성을 말했다. 둘 사이에 격차를 점점 좁혀지는 것이 우리 신앙의 여정이다. 예배를 드릴 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찬양을 부를 때는 다 선교사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일상으로 돌아가면 먹고사는 문제에 부딪친다. 다른 문제들이 들어온다. 일상과 예배 사이에서 격차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일상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격차가 좁혀지는 것이 중요하다.
2.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은 어떤 고난이 있어도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한다. 하지만 제자들은 바울이 가지 못하도록 막으라는 사인으로 해석했다. 같은 성령의 감동인데도 그렇다. 제자들의 영성과 기도의 부족함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충분히 헌신된 제자들이다. 같은 성령의 감동인데도 바울은 죽더라도 예루살렘에 가려고 하고 제자들은 가면 안된다는 방식으로 해석했다. 영성의 차이문제도 아니고 기도적인 문제도 아니다. 바로 작정의 문제이다. 바울은 작정했기에 그렇게 들리는 것이다.
성령의 감동을 쉽게 이야기하는데, 성령의 감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해석하는 우리들의 마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자기 유익을 위해 사용한다. 어떤 사람은 성령의 힘으로 자기의 존재를 확장하고 다른 사람을 압도하려는데 사용하려고 한다. 성령의 감동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받는 우리들의 마음이다. 제자들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도 자기들이 문제에 관련하여 작정했다면 바울과 똑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갔을 것이다. 그들은 작정할 기회가 없었던 것뿐이다.
바울이 작정했던 중요한 이유는 바울에게는 인생 전체에 대한 작정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했다. 그냥 내가 죽겠다는 차원이 아니다. 바울에게 죽음은 실재였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내 몸에 짊어지고 사는 것이 바울의 실제 삶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내가 죽고 사는 것은 바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죽어도 예수그리스도가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방식을 진행된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고 어떤 대접을 받아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바울로 하여금 이 길을 걷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정함이다.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은 죽기 힘들다기 보다는 죽는다는 것이 뭔지 몰라서 어렵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죽는 것인가?
화성으로 가서 개척을 하니, 일부 성도들이 강남에서 교회를 버리고 이곳에 온 목사로 칭송했다. 마치 영웅이 된 것 같이 즐겼다. 그런데 사실 희생적인 개척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려고 개척한 것이다. 만약 어떤 분이 도시의 대형교회에서 목회하다 낙도 교회로 갔다고 하면, 과연 죽음을 향해서 간 것인지 아니면 대형교회를 버리고 낙도교회로 간 훌륭한 목사라는 명예를 구하여 간 것인지 누가 알겠는가? 어떤 것이 죽는다는 것인지 모른다. 죽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엄청나게 희생하면 죽는다고 생각하는데 아닐 수 있다. 그 속내에는 ‘엄청난 희생한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추구하는 것일 수 있다. 반대로 어떤 때는 화를 내는 것이 분노하는 것이 죽는 것일 수도 있다.
3.
죽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질문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인지를 질문하는 것이 죽음이다. 우리들은 그렇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 죽는 것인지 아니면 죽음을 가장하여 내가 살려고 하는 것인가를 질문하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어제는 죽음은 내가 죽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전제를 내려놓는 것이라고 했다. 이래야만 한다는 또는 저래야만 한다는 내 프레임을 깨트리는 것이다. 이것이 죽음이라고 말했다.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살리게 한다. 이것이 죽음의 길이다.
삶에 문제가 있고 힘들어 목사에게 질문했다. 그때 목사가 성도의 고민을 듣고 말씀을 읽어야 한다고 대답했다면 굉장히 정확하지만 답답한 답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해법이 말씀을 읽으라고 하셨다. 여호수아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이다. 말씀대로 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답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읽으라고 하셨을 때 그 말씀에 대해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할 것인지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읽으라고 하실 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기를 기대하시면서 읽으라 하실까를 질문해야 한다. 바로 그 직후에 여호수아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때 변화가 무엇인가? 같은 케이스인 모세가 홍해에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만 했다. 발을 앞으로 내딛으라 하시면 내딛으면 된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하면 된다. 그때 힘이 난다.
죽는다는 것은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니 나는 그의 뜻에 따라 내 전제를 내려놓고 그분께 따르기만 하는 것이다. 어떻게 따라야 하는지 묻기만 하면 되는 것이 죽음이다. 흔히 생각하는 참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신다는 사실이 내 삶에 실재가 되게 하는 것이 죽음이다. 바울은 그것을 알았다, 클라이맥스가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이다. 이런 배경에서 그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그분이 하라는 것을 하면 되는 것이다. 반면 모든 조건이 구비되어 있어도 주님이 아니라고 하시면 안가는 것이다. 홍해는 막다른 골목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잔머리를 굴리면 홍해앞까지 가지 못하고 옆길로 샜을 것이다. 잔머리 굴리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정신없이 간 사람만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보는 것이다.
바울은 날마다 죽음이 목적이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죽음을 목적으로 사는 사람은 절대로 패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떤 경우에도 내가 죽고 예수님이 사시는 방식으로 살기만 한다면 그는 어떤 경우에도 패하지 않는 것이다. 완전한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예수님은 절대로 패하지 않는 분으로 이 땅에 오셨다. 죽으러 오셨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승리자로 오신 것이다.
나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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