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호 노회장 "왜 자느냐고 교회에 묻는 세상에 응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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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ㆍ2014-09-16 00:0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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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한인장로회 뉴욕노회 51회 정기노회가 9월 15일(월) 저녁 뉴욕신일교회에서 2일간의 일정으로 열렸다. 노회장 이상호 목사는 개회 예배에서 요나서 1:4-12을 본문으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뉴욕의 많은 한인교회에서 교회문제가 끓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다. 이에 대한 입장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상호 목사는 이어질 설교에 답이 있다고 말했다. 개회예배에서 이상호 노회장은 좀처럼 듣기 힘든 내용의 설교를 혼신을 다하여 했다.
이상호 목사는 설교에서 풍랑을 만난 배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요나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이 시대에 적용하여 말씀을 전했다.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세상 사람들은 '안티'라고 멍에를 씌우고 그들의 소리에 눈과 귀를 닫는 크리스찬들, 우리 교회의 분쟁은 문제많은 장로들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목회자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들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성도들, 그들 모두에게 이상호 목사는 "바로 나 때문이야"라고 해야 한다고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은 설교내용이다.
▲설교하는 이상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듣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직책과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내려놓고, 처음에 주님이 부르셔서 일꾼 삼으실 때 우리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말씀 앞에 겸허히 서기를 원합니다. 고넬료 가정이 베드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임했듯이 오늘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영이 충만히 임하도록 인도하셔 주소서. 이 예배를 주님께 의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올리나이다.)
오래전 교회 집사님 내외분이 계셨는데 아주 특유의 천상의 보이스를 가졌다. 성악을 전공한 분들과 노래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보이스를 가진 분이었다. 예배 특별순서에서 찬양할 때 너무 은혜스러웠으며 신앙의 뿌리도 좋았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가정의 사연이 있었는데 집사님이 알콜 중독자였다. 그래서 악보를 들고 있으면 손 떨림이 심했다. 문제는 본인은 알콜중독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이 아니라고 해서 지금도 다른 교회가서 성가대를 은혜롭게 섬기지만, 지금도 술을 먹는다고 한다.
잘았겠지만 이 분은 알콜중독을 고칠 수 없다. 본인이 알콜중독자임을 고백하고 고치려고 할때 고쳐지는 것이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목사와 장로이고, 다 영적 지도자들이다. 고개를 들어 세상을 한 번 보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과 교회주변에 있는 도시들이 어떤가. 우리 교회가 이 도시의 희망이 되고, 우리 교회 때문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동네가 좋아지고 너무 교회가 좋다고 하는가. 아니다. 모두가 느끼듯이, 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이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하지 않는가 하는 소리를 못 듣는가? 예수 믿는 우리는 지금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런 소리가 들려지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 때문에 살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예수 믿는 사람 때문에 피곤해 하고 힘들어 하고 그런 것을 느끼시는가?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배안에서 선장이 요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 하고 싶은 대화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요나에 대해 잘 안다. 왜 요나가 배를 탔고, 왜 요나가 탄 배에 풍랑이 일고, 요나가 탄 배안에 있는 선장과 선원들이 왜 고통을 당했고,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이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장과 요나의 대화 속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 세상 돌아가는 상황들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뼈아프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6절을 보니, 선장이 요나에게 지금 어느 때인데 자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불신자들이 신자들에게,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왜 지금 자고 있는가, 일어나야 되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목회자도 모두 잠을 잔다. 잠을 안자고 살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잠을 자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지금 자고 있을 때인가' 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지금 왜 자고 있느냐, 지금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제가 본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 보면 잠을 자다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있다. 성경을 보면 잠을 자면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가 술에 취해 잠을 자다 부끄러운 일을 일으킨다. 사사기 4장에 보면 가나의 군대장관이 잠을 자다가 여인의 말뚝에 박혀서 죽는다. 사사기 16장을 보면 삼손이 잠을 자다가 머리카락에 잘려서 어려움을 당한다. 잠을 자는 사람은 위기의식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잠을 자는 요나는 위기의식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선장과 배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풍랑에서 살아나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상상을 해보라. 풍랑이 이는 가운데 배에 실었던 모든 것을 버리면서 안정되게 항해하기 위해 선장이 가장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데 배 밑에 누가 자고 있다. 한번 그 상황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지금 어느 때인데 자고 있는가, 당신은 이 배에 탄 사람이 아닌가, 이 배가 침몰하면 당신은 죽지 않는가.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 이 질문은 선장이 요나에게 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들에 대한 질문이다. 선장이 질문한 것을 생각해 보자. 한국에서 세월호, 세월호 하는데 우리는 세월호보다 더 큰 배가 좌초위기를 맞아서 지금 침몰하기 일보직전이다.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이런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없는가. 에볼라 바이러스, 동성애, 에이즈가 창궐하고 있다. 이런 것이 우리 주변에 막 일어나는데 우리가 느끼는 것이 없는가. 여러분들은 이웃과 친구와 동료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은 가지는가. 그냥 주일 와서 헌금하고 가면 괜찮은가.
저는 이들에 대해 어떤 제재를 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슈에 대해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은 가지고 있는지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냥 주일에 교회만 오면 되는 것인가. 보편적으로 목사들이 자기 교회의 일이나 자기 교인의 문제등 자신의 일 외에는 관심을 안가진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러다가 지금 세상에 심각한 문제가 우리 교인들도 걸릴 수 있고, 우리 교회까지도 불똥이 튈 수 있다. 그리고 요나가 잠을 자고 있는 상황에서 더 무서운 것은 세상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잠을 자고 있다. 4절을 보면 왜 풍랑이 일어났는지 나와 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생전 경험하지 못한 큰 풍랑을 내리셨다. 풍랑의 원인은 우리가 알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가 풍랑을 만난 이유는 요나이다. 그런데 요나는 자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가만히 생각해 보라.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무서워져 가는데 영적 지도자들로 성도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과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라는 사명을 가진 여러분들, 우리가 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중세교회가 잠자고 있을때 십자군 전쟁, 종교탄압, 교황의 행패 때문에 얼마나 어려웠는가. 그 당시 얼마나 암흑기였는가. 아마 몇 백 년 후에는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를 또 하나의 암흑기로 분명히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암흑기를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눈여겨보자. 요나를 제외한 배 안에 탄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풍랑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장사치들이 자기들이 팔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다는 것은 생명과 같은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를 가볍게 하기위해 배안의 모든 기구를 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풍랑속의 배를 잠잠하게 하려고 희생하면서 손해보고 있다. 그런데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죄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면서 이것이 내 탓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잠을 자고 있는가, 일어나라"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대답이 나올 수 있겠는가.
2.
두 번째 질문은 10절 말씀을 보면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라고 묻고 있다. 이 질문 속에는 '도대체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하면서,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행동해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배의 상황은 악화되어 간다. 해결될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간다. 누구 때문에 풍랑이 이는지 제비를 뽑자고 한다. 그리고 요나가 정확하게 뽑힌다.
모든 사람들이 요나에게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라고 묻는다. 결국 요나는 9절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라고 대답한다. 요나가 대답했을 때 그 배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풍랑이 왔다고 자기 입으로 고백한다.
이런 요나의 고백가운데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어수룩하게 보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잘못되었을 때는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살지 못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그들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올바른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고 이것이 요나가 답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우리를 비판한다. 비판한다고 무조건 안티라고 싸잡을 것이 아니다. 비판 중에는 우리가 뼈가 아프도록 가슴을 열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할 그런 메세지가 수없이 많다. 전부 다 안티들의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정말 귀담아 듣고 가슴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다.
결국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안티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아니 당신들이 어떻게 믿었기에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도대체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기에 세상을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가, 믿을려면 제대로 좀 믿지." 이런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성도들을 바르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쳤는지 생각이나 한 번 해보자. 이런 일이 잘못되었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제대로 가르쳤는데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짚어보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몇 일전에 조용기 목사가 재판을 받고 유죄로 결정 났다. 그런데 어느 교회에서 조 목사를 초청하여 집회를 했다. 그리고 좋은 식당을 빌려서 식사를 하면서 여선교회에서 서빙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조용기 목사가 먹다가 남긴 음식들을 서빙 하던 성도들이 서로 먹으려고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성도들의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가 있다고 법원에서 결정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나가도 되는 것인가. 우상화되는 것, 자기만 높여주면 되고, 성도들이 제대로 사는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지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져 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풍랑이 이는 배안에서 "도대체 네가 믿는 여호와를 어떻게 믿었기에 너때문에 풍랑을 만났는가" 이 소리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 풍랑을 만나지 않았는가.
저는 하나님과 불신자들이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보는 눈이 같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교회 사이즈를 보시는가, 성도수를 보시는가, 휘양 찬란한 시설을 보시는가. 불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무엇을 보는가. 진짜 이들이 신앙 안에서 인격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인가를 본다. 신앙이라는 것은 인격 따로 신앙 따로 노는 것인가. 100% 신앙이 들어가면 인격이 변할 수밖에 없다. 신앙이 들어가면 인격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적어도 자기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 인정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이 들어간 사람들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는 세대가 되어져 가는 것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해결책이 지금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지 생각해보고 기도하고 보아야 한다. 잘되겠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괜찮겠지 하는데 절대로 안 그렇다.
3.
이런 가운데 결국은 올 것이 왔다. 11절 말씀을 보면 선장은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라고 묻는다. 사실 저렇게 할 것도 없다. 제비를 이미 뽑았고 요나가 나왔다. 요나를 바다에 집어 던지면 된다. 기다려 줄 것도 선을 베풀것도 없다. 바다에 집어서 던져버리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렇게 인격이 엉망진창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13절 말씀(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을 보면 요나를 풍랑이 이는 바다에 집어 던져버려야 하는데 안 그렇게 하고 요나를 살리려고 한다.
불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성도들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믿음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너희가 이제까지 못했으니 우리가 맡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집어 안 던지고 살려보려고 육지로 간다. 하지만 세상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은 한계가 있다. 하다가 안 되면 세상은 포기한다. 세상은 이것이 한계이다. 끝까지 희생하면서 안 간다. 결국 14절을 보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기회를 준다. 그러나 기회를 주었다고 세상을 믿으면 안 된다. 세상은 여기까지이다.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고 던져버린다. 15절에 풍랑이 이는데 요나가 던져지니 풍랑이 잠잠해졌다. 그러고 나서 결국 세상 사람들이 다시 믿음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가진다. 16절에는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라고 나온다. 하나님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결론이다. 요나가 제비를 뽑은 후 11절 말씀을 보면 선장은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라고 한다. 이것은 너희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대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너희들은 매일같이 천국을 의지하면서 천국을 바라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이니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벌였으니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요나는 정직하게 풍랑이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니 나를 집어던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던져지니 세상풍파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답이다. 고린도전서 15:31(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자존심, 우리의 어떤 드러낼만한 것, 하나님도 봐주지 않고 세상 사람들도 골치아파하는 것, 이런 것들을 드러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제는 설득력도 없고 이제는 먹히지도 않는다. 이제는 정말 세상을 향하여 죽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던져지기 시작해야 한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끝나지 않았다.
이제 여러분이 결단해야 한다. 이 흐름을 이 시대를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제대로 보면서 이제 여러분들이 결단할 차례이다. 그리고 이들이 대안을 달라고 지금 말하고 있다. 11절 말씀처럼 대안을 묻는 그들의 질문을 깔아뭉개고 없는 척 하지 말고 뭔가 설득력 있게 믿을만한 대안을 지역교회에서 부터 시작해서 이제 변화가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잘못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하나님 우리가 저들을 잘못 인도하고 다 우리의 잘못입니다. 요나가 나 때문에 풍랑을 만났다고 고백하듯이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우리의 직분 우리의 의지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다 내 잘못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짐으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주님 우리가 정말 저들이 원하는 대안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문제의 속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쓰이도록 도와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내려주소서.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은 강하시기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의 기름을 다시 한 번 충만히 부어주신다면 주님 안에서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대로 회개하면서 제대로 문제의식을 파악하고 요나처럼 바다에 던져질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를 들어서 다시 한 번 세상을 회복하는 도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 아멘넷 뉴스(USAamen.net)
이상호 목사는 설교에서 풍랑을 만난 배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요나와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다른 사람들과 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을 이 시대에 적용하여 말씀을 전했다.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세상 사람들은 '안티'라고 멍에를 씌우고 그들의 소리에 눈과 귀를 닫는 크리스찬들, 우리 교회의 분쟁은 문제많은 장로들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하는 목회자들, 우리 교회의 문제는 목회자들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성도들, 그들 모두에게 이상호 목사는 "바로 나 때문이야"라고 해야 한다고 말씀을 증거하고 있다. 다음은 설교내용이다.
▲설교하는 이상호 목사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이 시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말씀듣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직책과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내려놓고, 처음에 주님이 부르셔서 일꾼 삼으실 때 우리의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말씀 앞에 겸허히 서기를 원합니다. 고넬료 가정이 베드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임했듯이 오늘 우리 심령 속에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의 영이 충만히 임하도록 인도하셔 주소서. 이 예배를 주님께 의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올리나이다.)
오래전 교회 집사님 내외분이 계셨는데 아주 특유의 천상의 보이스를 가졌다. 성악을 전공한 분들과 노래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탁월한 보이스를 가진 분이었다. 예배 특별순서에서 찬양할 때 너무 은혜스러웠으며 신앙의 뿌리도 좋았다. 그런데 아무도 모르는 가정의 사연이 있었는데 집사님이 알콜 중독자였다. 그래서 악보를 들고 있으면 손 떨림이 심했다. 문제는 본인은 알콜중독이 아니라는 것이다. 본인이 아니라고 해서 지금도 다른 교회가서 성가대를 은혜롭게 섬기지만, 지금도 술을 먹는다고 한다.
잘았겠지만 이 분은 알콜중독을 고칠 수 없다. 본인이 알콜중독자임을 고백하고 고치려고 할때 고쳐지는 것이다. 여기 계신 분들은 목사와 장로이고, 다 영적 지도자들이다. 고개를 들어 세상을 한 번 보라.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과 교회주변에 있는 도시들이 어떤가. 우리 교회가 이 도시의 희망이 되고, 우리 교회 때문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 동네가 좋아지고 너무 교회가 좋다고 하는가. 아니다. 모두가 느끼듯이, 교인들이 기독교인들이 교회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하지 않는가 하는 소리를 못 듣는가? 예수 믿는 우리는 지금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 이런 소리가 들려지고 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불신자들 때문에 살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 다니는 예수 믿는 사람 때문에 피곤해 하고 힘들어 하고 그런 것을 느끼시는가?
저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배안에서 선장이 요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세상 사람들이 우리 믿음의 사람들과 하고 싶은 대화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리는 요나에 대해 잘 안다. 왜 요나가 배를 탔고, 왜 요나가 탄 배에 풍랑이 일고, 요나가 탄 배안에 있는 선장과 선원들이 왜 고통을 당했고,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러나 본문을 통해서 이것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장과 요나의 대화 속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 세상 돌아가는 상황들을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뼈아프게 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1.
6절을 보니, 선장이 요나에게 지금 어느 때인데 자고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불신자들이 신자들에게,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 왜 지금 자고 있는가, 일어나야 되지 않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목회자도 모두 잠을 잔다. 잠을 안자고 살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잠을 자고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우리에게 '지금 자고 있을 때인가' 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들은 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지금 왜 자고 있느냐, 지금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제가 본문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우리가 성경에 보면 잠을 자다가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이 있다. 성경을 보면 잠을 자면 위기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 창세기 9장을 보면 노아가 술에 취해 잠을 자다 부끄러운 일을 일으킨다. 사사기 4장에 보면 가나의 군대장관이 잠을 자다가 여인의 말뚝에 박혀서 죽는다. 사사기 16장을 보면 삼손이 잠을 자다가 머리카락에 잘려서 어려움을 당한다. 잠을 자는 사람은 위기의식과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잠을 자는 요나는 위기의식도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선장과 배안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풍랑에서 살아나려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상상을 해보라. 풍랑이 이는 가운데 배에 실었던 모든 것을 버리면서 안정되게 항해하기 위해 선장이 가장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데 배 밑에 누가 자고 있다. 한번 그 상황을 생각해 보라.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지금 어느 때인데 자고 있는가, 당신은 이 배에 탄 사람이 아닌가, 이 배가 침몰하면 당신은 죽지 않는가. 이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오늘 이 질문은 선장이 요나에게 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들에 대한 질문이다. 선장이 질문한 것을 생각해 보자. 한국에서 세월호, 세월호 하는데 우리는 세월호보다 더 큰 배가 좌초위기를 맞아서 지금 침몰하기 일보직전이다. 예상치 못한 자연재해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이런 것을 보고 느끼는 것이 없는가. 에볼라 바이러스, 동성애, 에이즈가 창궐하고 있다. 이런 것이 우리 주변에 막 일어나는데 우리가 느끼는 것이 없는가. 여러분들은 이웃과 친구와 동료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여러분들이 가르치는 성도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관심은 가지는가. 그냥 주일 와서 헌금하고 가면 괜찮은가.
저는 이들에 대해 어떤 제재를 취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이슈에 대해 성도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심은 가지고 있는지 여러분에게 물어보고 있는 것이다. 그냥 주일에 교회만 오면 되는 것인가. 보편적으로 목사들이 자기 교회의 일이나 자기 교인의 문제등 자신의 일 외에는 관심을 안가진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러다가 지금 세상에 심각한 문제가 우리 교인들도 걸릴 수 있고, 우리 교회까지도 불똥이 튈 수 있다. 그리고 요나가 잠을 자고 있는 상황에서 더 무서운 것은 세상을 이렇게 어렵게 만들어 놓은 사람이 잠을 자고 있다. 4절을 보면 왜 풍랑이 일어났는지 나와 있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생전 경험하지 못한 큰 풍랑을 내리셨다. 풍랑의 원인은 우리가 알고 있다. 요나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가 풍랑을 만난 이유는 요나이다. 그런데 요나는 자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가만히 생각해 보라. 세상이 이렇게 어렵고 힘들고 무서워져 가는데 영적 지도자들로 성도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라는 사명과 세상에 나가 빛과 소금이 되라는 사명을 가진 여러분들, 우리가 이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중세교회가 잠자고 있을때 십자군 전쟁, 종교탄압, 교황의 행패 때문에 얼마나 어려웠는가. 그 당시 얼마나 암흑기였는가. 아마 몇 백 년 후에는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살았던 이 시대를 또 하나의 암흑기로 분명히 이야기할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또 하나의 암흑기를 지금 우리가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눈여겨보자. 요나를 제외한 배 안에 탄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풍랑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다. 장사치들이 자기들이 팔 물건들을 바다에 던졌다는 것은 생명과 같은 것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배를 가볍게 하기위해 배안의 모든 기구를 버렸다. 세상 사람들은 풍랑속의 배를 잠잠하게 하려고 희생하면서 손해보고 있다. 그런데 세상을 어지럽게 만드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죄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면서 이것이 내 탓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잠을 자고 있는가, 일어나라"라는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요나는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어떤 대답이 나올 수 있겠는가.
2.
두 번째 질문은 10절 말씀을 보면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라고 묻고 있다. 이 질문 속에는 '도대체 믿음을 가지고 산다고 하면서, 신앙을 가지고 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까지 행동해서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배의 상황은 악화되어 간다. 해결될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최선을 다해 해결해 보려고 하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간다. 누구 때문에 풍랑이 이는지 제비를 뽑자고 한다. 그리고 요나가 정확하게 뽑힌다.
모든 사람들이 요나에게 "이 재앙이 누구 때문에 우리에게 임하였는가 말하라 네 생업이 무엇이며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 하니"라고 묻는다. 결국 요나는 9절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라"라고 대답한다. 요나가 대답했을 때 그 배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지만, 출애굽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함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요나가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아서 풍랑이 왔다고 자기 입으로 고백한다.
이런 요나의 고백가운데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어수룩하게 보면 안 된다. 세상 사람들은 다 안다. 믿음의 사람들이 잘못되었을 때는 잘못되었다고 인정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을 살지 못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그들에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올바른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고 이것이 요나가 답하는 모습이다. 우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에 세상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우리를 비판한다. 비판한다고 무조건 안티라고 싸잡을 것이 아니다. 비판 중에는 우리가 뼈가 아프도록 가슴을 열고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할 그런 메세지가 수없이 많다. 전부 다 안티들의 쓸데없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정말 귀담아 듣고 가슴으로 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굉장히 많다.
결국 인터넷이나 방송에서 안티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무엇인가. 한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아니 당신들이 어떻게 믿었기에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렸는가, 도대체 당신들이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기에 세상을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는가, 믿을려면 제대로 좀 믿지." 이런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성도들을 바르게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가르쳤는지 생각이나 한 번 해보자. 이런 일이 잘못되었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제대로 가르쳤는데 세상이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짚어보고 넘어가자는 것이다.
몇 일전에 조용기 목사가 재판을 받고 유죄로 결정 났다. 그런데 어느 교회에서 조 목사를 초청하여 집회를 했다. 그리고 좋은 식당을 빌려서 식사를 하면서 여선교회에서 서빙을 했다. 식사가 끝나고 조용기 목사가 먹다가 남긴 음식들을 서빙 하던 성도들이 서로 먹으려고 다투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이 성도들의 수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가 있다고 법원에서 결정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한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다. 이렇게 나가도 되는 것인가. 우상화되는 것, 자기만 높여주면 되고, 성도들이 제대로 사는지,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지 하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상이 왜 이렇게 되어져 가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이 잘못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풍랑이 이는 배안에서 "도대체 네가 믿는 여호와를 어떻게 믿었기에 너때문에 풍랑을 만났는가" 이 소리가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 풍랑을 만나지 않았는가.
저는 하나님과 불신자들이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을 보는 눈이 같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교회 사이즈를 보시는가, 성도수를 보시는가, 휘양 찬란한 시설을 보시는가. 불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무엇을 보는가. 진짜 이들이 신앙 안에서 인격이 변화된 그리스도인인가를 본다. 신앙이라는 것은 인격 따로 신앙 따로 노는 것인가. 100% 신앙이 들어가면 인격이 변할 수밖에 없다. 신앙이 들어가면 인격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적어도 자기들이 잘못한 것에 대해 인정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이 들어간 사람들의 모습이다. 지금 우리는 세대가 되어져 가는 것을 제대로 보아야 한다. 해결책이 지금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 세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무엇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지 생각해보고 기도하고 보아야 한다. 잘되겠지,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성도들은 괜찮겠지 하는데 절대로 안 그렇다.
3.
이런 가운데 결국은 올 것이 왔다. 11절 말씀을 보면 선장은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라고 묻는다. 사실 저렇게 할 것도 없다. 제비를 이미 뽑았고 요나가 나왔다. 요나를 바다에 집어 던지면 된다. 기다려 줄 것도 선을 베풀것도 없다. 바다에 집어서 던져버리면 된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 그렇게 나쁘지 않다. 그렇게 인격이 엉망진창이 아니다. 믿음의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13절 말씀(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을 보면 요나를 풍랑이 이는 바다에 집어 던져버려야 하는데 안 그렇게 하고 요나를 살리려고 한다.
불신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성도들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믿음의 사람들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준다. 너희가 이제까지 못했으니 우리가 맡아서 하겠다는 것이다. 집어 안 던지고 살려보려고 육지로 간다. 하지만 세상을 믿으면 안 되는 것은 세상은 한계가 있다. 하다가 안 되면 세상은 포기한다. 세상은 이것이 한계이다. 끝까지 희생하면서 안 간다. 결국 14절을 보면, 요나를 바다에 던졌다.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우리들에게 기회를 준다. 그러나 기회를 주었다고 세상을 믿으면 안 된다. 세상은 여기까지이다.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하고 던져버린다. 15절에 풍랑이 이는데 요나가 던져지니 풍랑이 잠잠해졌다. 그러고 나서 결국 세상 사람들이 다시 믿음의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가진다. 16절에는 "그 사람들이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고 서원을 하였더라"라고 나온다. 하나님을 다시 보기 시작한다.
결론이다. 요나가 제비를 뽑은 후 11절 말씀을 보면 선장은 요나에게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라고 한다. 이것은 너희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대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주관하시고 너희들은 매일같이 천국을 의지하면서 천국을 바라면서 살아가는 백성들이니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이런 일을 벌였으니 해결책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요나는 정직하게 풍랑이 나 때문에 그렇게 되었으니 나를 집어던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던져지니 세상풍파가 잠잠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답이다. 고린도전서 15:31(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자존심, 우리의 어떤 드러낼만한 것, 하나님도 봐주지 않고 세상 사람들도 골치아파하는 것, 이런 것들을 드러내서 뭔가 해보려고 하는 것은 이제는 설득력도 없고 이제는 먹히지도 않는다. 이제는 정말 세상을 향하여 죽기 시작해야 한다. 내가 던져지기 시작해야 한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고 끝나지 않았다.
이제 여러분이 결단해야 한다. 이 흐름을 이 시대를 왜 이렇게 되었는지 제대로 보면서 이제 여러분들이 결단할 차례이다. 그리고 이들이 대안을 달라고 지금 말하고 있다. 11절 말씀처럼 대안을 묻는 그들의 질문을 깔아뭉개고 없는 척 하지 말고 뭔가 설득력 있게 믿을만한 대안을 지역교회에서 부터 시작해서 이제 변화가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잘못입니다. 잘못 가르치고 하나님 우리가 저들을 잘못 인도하고 다 우리의 잘못입니다. 요나가 나 때문에 풍랑을 만났다고 고백하듯이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우리의 직분 우리의 의지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다 내 잘못입니다, 한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짐으로 많은 열매를 맺듯이 주님 우리가 정말 저들이 원하는 대안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문제의 속에 들어가면서 그것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로 쓰이도록 도와주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은혜를 내려주소서.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주님은 강하시기에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성령의 기름을 다시 한 번 충만히 부어주신다면 주님 안에서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제대로 회개하면서 제대로 문제의식을 파악하고 요나처럼 바다에 던져질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우리를 들어서 다시 한 번 세상을 회복하는 도구들이 되도록 은혜를 주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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