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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목사 “인생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건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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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19-08-29 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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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목사(달라스 웨슬리 연합감리교회)가 <광야를 살다>를 출간했다. 2017년 ‘대통령의 서재’에 선정된 <광야를 읽다> 후속편으로 두란노에서 낸 저서에는 “광야의 삶을 버티고 견디고 이겨 내는 방법”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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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건너는 것”이라고 말했던 이진희 목사가, 이번에는 우리 앞에 놓인 그 광야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성서 속에 등장한 13곳의 광야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걷고 있는 광야가 어떠한 것인지, 그 길을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1. 가인의 광야: “쫓겨남의 광야”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광야로 나가신다 2. 아브라함의 광야: “기다림의 광야” 광야는 하나님의 시작을 기다리는 곳이다 3. 하갈의 광야: “버림받음의 광야” 기도로 흘린 눈물은 응답의 강물이 된다 4. 요셉의 광야: “침묵의 광야” 하나님은 인생의 함정을 보석함이 되게 하신다 5. 모세의 광야: “잊힘의 광야” 내려올 때를 알면 더 멋진 무대를 꿈꿀 수 있다 6.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불순종의 광야” 두드려 치댄 만큼 쓰임 받을 수 있다 7. 룻과 나오미의 광야: “상실의 광야” 손에서 떨어뜨린 씨앗이 새 생명이 된다 8. 다윗의 광야: “탄식의 광야” 감사함으로 인생의 광야에 기도길을 열라 9. 엘리야의 광야: “영적 침체의 광야” 하나님은 광야 인생에 로뎀 나무 그늘이 되신다 10. 포로기의 광야: “절망의 광야” 바람이 매서울수록 봄은 다가온다 11. 세례자 요한의 광야: “외로움의 광야” 더 깊은 파장을 위해 고요의 자리로 나아가라 12. 예수님의 광야: “십자가의 광야” 고통의 밤이 지나면 회복의 아침이 열린다 13. 바울의 광야: “장하(長夏)의 광야” 깊이 뿌리내린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유기성 목사(선한목자교회)는 추천사에서 “광야를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를 정확히 이해하고 살아가는 이들은 너무나 드뭅니다. 이것이 우리의 불행입니다. 이 책을 통해 성경에 나오는 광야는 다 같은 광야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광야도 누구 하나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광야 길에는 동일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친히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광야에도 길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를 걷되 광야를 보기보다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걷고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는 것이 광야에서 살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광야를 통과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광야는 결코 고통과 형벌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광야 세월은 결코 허비하는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이들 모두는 다 광야가 만든 사람들이었습니다”고 말하고 있다.

 

서문에서 이진희 목사는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광야를 만나게 된다. 지금 아브라함처럼 기다림의 광야를 지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모세처럼 잊힘의 광야를 지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엘리야처럼 영적 침체의 광야를 지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룻처럼 상실의 광야를 지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하갈처럼 버림받음의 광야를 지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바울처럼 장하의 광야를 지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광야를 지나고 있든, 그 광야는 나 혼자만 지나가는 광야가 아니다. 이미 믿음의 선배들이 지났던 광야다. 우리도 그들처럼 광야를 잘 살아 내야 한다. 믿음으로 잘 견뎌 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잘 버텨 내야 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잘 빚어져야 한다. 나를 이 광야로 들어오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 그때 우리는 이 광야에서 나가게 될 것이다. 우리보다 먼저 광야를 통과한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오늘날 광야를 통과하는 독자들의 삶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펴낸다”고 말했다.

 

다음은 본문의 내용 일부이다.

 

하나님은 가인을 광야로 쫓아내시면서도 그를 염려하셔서 그에게 표를 주셨다. 가인에게 표를 주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형벌만 내리신 것이 아니었다. 광야로 쫓겨난 가인이 광야에서 살아남도록 하기 위해 그에게 표를 주어 그를 지키셨다. 바로 이 표 때문에 가인은 광야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도 가인처럼 죄에 대한 형벌로 광야로 내몰릴 때가 있다. 그때에도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기 위해서 가인의 표를 해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표 없이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가인 같은 사람에게도 표를 주시는 분이다. 은혜의 표를 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죄의 형벌로 인해 광야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그 광야를 살아 내고 견뎌 낼 수 있는 은혜가 되는 것이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완전한 0이 되도록 하기 위해 광야로 들어가게 하신다. 광야에 들어가면 누구나 0이 된다.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자신의 무능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그런 후에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에서 나오게 하시고 0이 된 우리를 사용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일을 행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 약해서 쓰지 못하실 때보다 우리가 너무 강해서 쓰지 못하실 때가 더 많다. 부족할 경우 채워 주면 되지만 강한 사람은 내려놓게 해야 하는데,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강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들어가게 하셔서 더 내려놓고, 더 비우고, 더 죽이고, 더 무릎 꿇게 하신다.

 

기도하는 사람은 낚시하는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다. 기다리는 것이다.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그리스도인의 기도에는 언제나 애씀보다 기다림이 더 많아야 한다”고 했다. 기도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바로 기다리는 것이다. 기도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응답이 없다고 쓰레기통에 버려졌거나 폐기 처분된 것이 아니다. 다 쌓아 놓고 계신다. 때가 되면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기다림의 광야를 지날 때는 희망을 갖고 기다려야 한다.

 

하갈이 만난 하나님은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었다. 그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광야에서 만났다. 히브리어로는 ‘엘 로이’(El Roy)로서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내가 학대받는 것을 다 보고 계셨군요. 내가 고통당하는 것을 다 보고 계셨군요. 내 억울한 사정을 다 알고 계셨군요.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다는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신다는 것을 저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엘 로이’라는 이름을 붙여 드렸다. 이것이 성경에 맨 처음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광야에 들어가 있다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로 하여금 광야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목적이 있다면 오히려 광야에 들어간 것이 축복이다. 우리가 광야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그곳을 지나는 동안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형통한 사람이다. 꼭 가나안에 들어가고, 풍요한 삶을 살고, 인생의 정상의 자리에 올라가고 성공해야 형통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룬다고 하신 말씀을 ‘결국은 다 잘될 것이다,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선은 그런 것이 아니다. 선은 축복이나 성공, 풍요, 형통, 번영,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 내가 소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그것이 최고의 선이다.

 

진짜 가나안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가나안이며,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다. 주 예수와 동행하면 광야에 살아도 기쁨과 감사와 행복과 만족과 은혜가 넘친다. 그러면 그 사람은 가나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광야를 지나도 하나님과 함께라면 그곳은 가나안이고, 가나안에 살아도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면 그곳은 광야다.

 

하나님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내 주신 것은 그들이 광야에서 길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을 안전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훈련시키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속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인도하기 위해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내 주신 것이었다.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하나님은 홍해를 갈라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옷과 신발 같은 작은 일에도 세심하게 신경 써 주시는 하나님이다. 오늘도 하나님은 광야를 지나는 우리의 삶 속에서 신발이 닳지 않고 옷이 해지지 않도록 일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광야를 무사히 통과해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광야를 지날 때는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보다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의 은혜가 더 필요하다. 광야를 지나다 홍해를 만나면 40일 금식 기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오늘도 우리의 신발이 닳지 않게 해 달라는 매일의 기도도 필요하다.

 

광야를 지날 때는 기도 응답이 없어도 기도해야 한다. 달리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하다 응답이 없어서 포기했다면 그 사람은 진짜 광야에 들어와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 안 해도 큰 문제가 없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진짜 광야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10년 동안 응답해 주시지 않아도 계속 기도할 수밖에 없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실 때까지 기도할 수밖에 없다. 광야는 그런 곳이다. 광야는 기도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광야에서는 지름길로 가지 않는다. 멀리 돌아가더라도 반드시 오아시스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광야에 오아시스가 없다면 누구도 광야에 들어가서 살아나올 수 없을 것이다. 광야에서 살아남으려면 오아시스를 만날 때마다 반드시 들렀다 가야 한다. 그런데 광야에서 오아시스처럼 중요한 것이 있다.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다. 광야에서는 물이 떨어져도 죽지만, 나무 그늘이 없어도 죽을 수 있다. 충분한 물이 있다 할지라도 그늘 없이 광야를 건너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우리가 광야를 지날 때 만나는 하나님은 갈멜 산의 하나님이실 때보다는 호렙 산의 하나님이실 때가 훨씬 많다. 호렙 산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억지로 무거운 짐을 지도록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헤아려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죽도록 충성하라고 몰아붙이지 않으신다. 억지로 사역의 짐을 지게 하지 않으신다.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만 짐을 지고 가게 하신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만이, 아니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이미 못 박힌 사람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십자가를 질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겪어야 하는 모든 멸시와 천대와 고난과 시련의 광야를 이겨 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다 할지라도, 요나처럼 물고기 배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다 할지라도, 아브라함과 이삭처럼 죽음을 향해 길고 긴 사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예수님처럼 무덤에 갇힌 것 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면, 금요일이 지나고 토요일이 지나고 주일이 되면, 하나님은 우리의 무덤 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우리를 다시 일으켜 주실 것이다. 십자가의 광야를 잘 통과하면 부활의 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미 충분히 기다렸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더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광야에서의 기다림이다.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말라. 말라기서와 마태복음 1장 사이에는 400여 년간의 역사적인 공백이 있다. 그동안에는 예언자도 없었고 제사장도 없었고, 하나님이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영적인 암흑기였던 것이다. 이러한 영적인 암흑기가 절정에 도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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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요 목사(베델교회)가 <일기에 남기고 싶은 시간>를 냈다. 두란노에서 낸 196쪽 저서에는 “일상에서 카이로스를 만드는 묵상”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일기처럼 쓰여진 짧은 글에는 김 목사가 직접 그린 그림도 담았다.

 

저서는 4부로 되어 있는데 1부 시련을 이겨야 좋은 열매를 남긴다, 2부 일상에 남기는 예수의 흔적, 3부 허물은 덮고 사랑만 남긴다, 4부 십자가를 지는 삶만 남는다 등이다. 글의 제목만으로도 은혜가 되는데 다음은 “4부 십자가를 지는 삶만 남는다”에 담긴 글의 제목이다. 

 

“죄를 이기는 힘은 사랑입니다, 죽었어야 했는데 십자가로 엇갈렸습니다, 영적 내시경을 정기적으로 해야 삽니다, 공갈 젖꼭지 같은 설교로는 굶어 죽습니다, 미지근한 것이 싫어 기도합니다, 거짓 관용을 피하십시오, 독도가 누구 땅입니까?, 교회가 비만 되지 않게 계속 선교 나가십시오, 대상포진 덕에 십자가 은혜가 더 진해집니다, 사막이라야 물 귀한 줄 압니다, 예수님도 우셨는데 내 눈물이 마르면 되겠습니까, 영혼에 낀 지방간 빼려면 기도밖에 없습니다, 복음과 능력은 그대로인데 우리가 변했습니다, 너무 편하게 목회했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부어도 열매가 있습니다, 성찬식은 예수님과 한편 먹는 날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니까요.”

 

그리고 “그래서 하나님도 자꾸 말을 거시나 봅니다”라는 제목의 글의 한 꼭지도 소개한다.

 

어느 추수감사절 휴일에 온 식구가 영화 관람을 했습니다. 제목은 <굿 다이노>(The Good Dinosaur)였습니다. 막내딸에게 수준을 맞춘다고 애니메이션을 봤는데, 우리 모두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공룡 알로(Arlo)는 집안의 막내로 늘 하는 일이 시원치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훈련하는 도중 불의의 재난으로 죽고, 알로 역시 강물에 빠져 정신을 잃고 한없이 떠내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합니다. 알로가 집을 찾아가는 길에 여러 일을 겪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그를 더욱 성숙하게 합니다. 이 이야기는 마치 우리 이야기처럼 다가왔습니다. 특별히 집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난 스폿(Spot)이라는 한 소년과의 우정은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습니다.

 

가장 감명 깊었던 장면은 가족을 찾은 스폿과의 이별이었습니다. 친구를 살리기 위해 목숨까지도 걸었던 알로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닫고 드디어 가족을 찾은 스폿을 보내는 장면에서는 슬프다 못해 눈부신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졌습니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시간이었습니다.

 

옆에 앉은 두 아들과 영화를 보면서 저는 두 가지 때문에 놀랐습니다. 첫째는 자기들이 보고 싶은 영화가 있었을 텐데 막내 동생을 위해 애니메이션을 같이 보러 온 점이며, 둘째는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공룡을 보며 제 생각을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뚝뚝하게 지내는 것 같은 멋없는 두 아들이 할아버지의 부재로 힘들어하는 가족에 대한 연민도 느끼면서, 아버지를 여읜 자기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이 기특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드는지 아이들과 얘기하면 좋고, 함께 모여 앉아 식사하는 시간이 마냥 행복합니다. 아이들과 말이 통하는 아버지가 되기 위해 같이 축구도 열심히 보면서 아는 척 떠들고, 제가 해도 되는 심부름도 자꾸 아들들을 시킵니다. 게임 본다고 싫다고 해도 억지로 시킵니다. 그냥 그 말이라도 자꾸 해서 말을 걸고 싶은 아버지의 심정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래서 저에게 자꾸 말을 거시나 봅니다. 제가 귀찮게 느낄 정도로 자꾸 새벽에 깨우시나 봅니다. 제가 바쁘다고 해도, 사역들을 그냥 순조롭게 하지 못하도록 자꾸 성가신 일들을 만드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얘기 좀 하자고 자꾸 말을 거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귀찮아해도 심부름을 억지로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자꾸 말을 거는 제 모습을 보며, 오늘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기도의 무릎을 꿇습니다.(p. 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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