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 켈러 "크리스천의 의사결정 원칙: 예배와 자유와 사랑(상)" > 뉴스

본문 바로가기


뉴스

팀 켈러 "크리스천의 의사결정 원칙: 예배와 자유와 사랑(상)"

페이지 정보

정보ㆍ2021-01-19 07:01

본문

고린도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우상 숭배로 뒤덮인 일상 가운데에서 어떻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의견으로 인해 심각한 분열이 있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우상 숭배가 거의 모든 생활의 이면에 있고 심지어 가게의 음식에까지 파고들어 가 있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완전히 거리를 두고 살아가야 한다고 믿었다. 어떤 기독교인은 그들 자신만의 분리된 사회를 형성하기 위해 교회 안으로 깊이 숨어 들어가기를 원했고, 반면에 다른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그것에 빼앗기지 않는 한, 사회생활에 참여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은 대부분 동일한 교리적 믿음을 공유하고 있지만 나날이 더 비기독교적으로 변하는 우리의 문화 가운데서 곧잘 정치적 이슈로도 부각되는 관심사들에 대해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에 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e47284f421e59556055e4e7b7a6208bc_1611057645_29.jpg
Photo by Lina Volkmann on Unsplash

 

기독교인과 문화

 

로마의 문화는 우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모든 마을과 사람들의 모임에는 나름의 신이 있었다. 모든 길드(기능인들의 조합)와 그들의 작품이 그랬고, 심지어 대부분의 가정에도 수호신이 있었다. 그곳에는 사회의 여러 분야를 주관하는 “많은 신과 많은 주”(고전 8:5)가 있었다. 누군가가 어떤 나라, 도시, 또는 가정을 방문하게 될 때 그들은 통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을 포함하여 그들의 신에 대한 예식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다. 그것이 기술자들의 모임이건, 학교의 모임이건, 도시의 의회 모임이건, 또는 예술 발표를 위한 청중의 모임이건, 한결같이 모임은 신의 이름으로 거행되었다. 따라서 그곳에서는 매일 아침 신들을 기리기 위해 동물이 희생 제물로 바쳐진 뒤 조리되었고, 이를 함께 먹으며 도시의 하루 일상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형태로든 우상 숭배를 금지하는 기독교인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교육, 친교, 정치적 담화, 취업 그리고 상업의 현장에서 대부분의 행위가 우상에 절해야 하는 환경 아래에서 행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식품의 보관 기술이 개발되기 이전 시대에 대부분의 시장과 가게에서 팔린 음식물, 특히 육류는 그날 아침 일찍 거행되었던 다양한 의식 가운데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기독교인들이 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을까?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들이 그랬을 것이라 믿었다. 우상 숭배가 거의 모든 모임과 심지어 가게의 음식들 가운데에도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교회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 자신들만의 구분된 세상을 형성하기 원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마음으로 그것들을 숭배하지 않는 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로 인해 고린도의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는 씁쓸한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동일한 교리적 신앙 고백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주변의 문화적 관습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이 심각하게 엇갈렸다.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상대방이 시대정신과 타협하고 우상 숭배에 굴복했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거룩함의 중요성을 그 이유로 들었다. 한편, 좀 더 자유주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희망 없는 율법주의자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기독교 자유의 의미를 설파하며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자유를 당신들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하였다. 문화로부터 구별되어야 한다는 쪽과 문화에 순응해야 한다는 양측 모두, 상대방이 하나님께 불성실한 자들이라 여겼다(이에 관한 배경은 Roy E. Ciampa와 Brian S. Rosner의 성경 주석, ‘The First Letter to the Corinthians,’ 367-71 참조).

 

오늘날, 거의 동일한 교리적 신념을 공유하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 간에도 때론 정치적인 이슈로 보이는 이러한 심각해지는 이교도적 문화에 어떻게 대응하며 살아갈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예를 들면,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을 고수하며 자신들의 신념과 정서로는 낙태를 반대하지만, 낙태 찬성을 당의 강령으로 내세우는 정당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기독교인이 있다. 반면에 어떤 신자들은 기독교인으로서 그런 개입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으며, 그런 자들과는 어떤 교류가 있어서도 안 되고, 더군다나 그런 정당에 투표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제도적 인종차별’에 대한 이슈도 있다. 일부 기독교인은 이러한 것에 대하여 언급하는 현상 중에 들려오는 목소리에 우려하며, 현재의 관습과 믿음을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성경을 다시 살펴보기도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기독교인이 점점 더 세속적이고 진보적이며 강압적인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기인하는 불의에 대한 모든 요구를 거부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의 깊게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까지를 읽어보아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 전쟁’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와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우상에 제공되었던 육류의 문제로 인해 혼선이 생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내용은 오늘날 우리와 관련된 신학적, 목회적인 깊은 원리들을 포함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우상과 관련된 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개별적으로 보고 논할 수 있도록 각각을 이해하는 것으로 말씀을 시작하고 있다. 거기에는 사제가 우상에 바치기 위해 가축을 제물로 희생시키는 의식이 있었다(고전 10:14, 20). 그리고 우상에 대한 숭배의 의미로 음식을 먹는 일이 있었다(고전 10:20-22). 마지막으로, 제사와 음식에 사용된 것 중에 소비되지 않고 시장에서 팔리는 육류가 있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대하는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나는 이를 예배의 원칙, 자유의 원칙, 그리고 사랑의 원칙이라고 부르도록 하겠다.

 

예배의 원칙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라는 말씀을 따라 바울은 10장 14절에서 18절에 걸쳐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고 기록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우상 숭배의 행사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우상에게 제물이 바쳐질 때 기독교인들은 참석해서는 안 된다. 공개적으로 여러 종류의 권세와 신들이 있으며 하나님은 많은 신 중 하나라고 선언하는 어떤 의식에도 참여할 수 없다. 그것은 거짓이며, 기독교인들은 그러한 메시지를 세상에 선포하는 어떤 예식에 관여할 수도 없다. 이런 기준에 의해 래리 허타도(Larry Hurtado)는 “바울은 기독교인들이 다양한 우상을 기리기 위한 어떠한 공개 의식에 초청받는 것도 단호히 반대하였다. 예를 들어, 우상을 기리는 제사 중 행하는 식사에 참여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여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우상 숭배’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라고 하였다(Larry Hurtado, ‘Destroyer of the gods: Early Christian Distinctiveness in the Roman World,’ 151). 이는 그들이 올바른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어떤 사회적 모임이 되든 참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고 주장했던 지나치게 ‘자유주의’적인 자들에 대한 질책이었다.

 

치암파(Ciampa)와 로스너(Rosner)는 “객관적” 우상 숭배와 “주관적” 우상 숭배에 관해 도움이 될 만한 분별을 제시한다. 주관적 우상 숭배(Ciampa and Rosner, 369)는 우상 신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것을 사랑하고, 그것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객관적 우상 숭배는, 자신의 마음이나 신념과 관계없이, 우상의 실체를 보여주고 참관자들의 가슴 속에 강한 믿음을 갖게 만드는 공식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문화적 자유와 포용’을 주장하는 자들에게 위험을 초래한 것은 후자였다. 비록 그들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은 그런 우상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며 따라서 우상 숭배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늘날 문화와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통하여 우리 사회의 우상인 섹스, 재물, 권력, 자유의지 등을 세상에 홍보하고 있지는 않은 지를 고민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세속적인 비즈니스 세계에서 부상하고 있다면, 혹시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같은 목적을 위해 동일한 방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지는 않은가? 만약 그들이 크리스천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하거나 그들의 사업 방식에 뭔가 차이가 있지 않다면, 결론적으로 그들의 사업 역시 부와 권력에 관한 우상의 매력을 세상에 소개하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또한 ‘그들이 하는 일이 우리 사회를 보다 소비 지향적으로 만들고,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집착하며, 자신에게 더 몰입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여러 상업적인 프로젝트에 자금을 대어 수익을 창출하고 있는가?’와 같은 질문은 예술, 언론, 또는 많은 다른 문화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자유의 원칙

 

둘째, 그러나 바울은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고전 8:6)고 기록하였다. 우상의 신은 가상의 존재를 상상으로 표현한 존재에 불과하여 우리를 축복하거나 저주할 힘이 없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우상에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치암파와 로스너는 “우상 자체는 영적 실재를 갖추고 있지 않고 실제로 신을 대신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탄의 사주로 창조되었다는 점에서 볼 때 그 뒤에는 영적인 실체가 있다”(479)라고 기록하고 있다. 핵심은 성경에서 사탄이 분노나 자존심에 의한 죄악을 이용하고 증폭시키는 것을 묘사한 것과 같이, 우상 숭배는 만들어진 우상과 우리를 대항하여 싸우는 사탄의 권세인 죄악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게 한다는 것이다(고후 2:11; 엡 4:27; 딤전 3:7; 딤후 2:26). 

 

음식 안에는 ‘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음식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하거나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영향을 미칠 초자연적인 힘이 없다.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고전 8:8). 그러고 나서 바울은 10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양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는 기독교인들이 시장에서 구할 수 있는 육류는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자유롭게 사서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고전 10:23-26). 양심을 구속함으로 참여를 금지하는 성경의 규범은 없다. 그들의 이런 행위가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인 우상 숭배는 아니다. 바울은 기독교인이라면 그것을 먹을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바울은 그들의 일상에서 빈번히 마주하며 출세나 사회적 생존에 필수적인 사회 정치적 네트워크 구축의 열쇠가 되었던 사적인 식사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Ciampa and Rosner, 491). 여기서 바울은 다시 각자의 양심에 호소한다. 바울은 식탁 위의 음식이 이전에 우상에게 바쳐졌을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도 초대한 사람이 대놓고 사람들에게 우상에 대한 감사에 참여하자고 요청하지 않는 한 기독교인들은 ‘양심에 거리낌 없이’ 그것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과 10장에 걸쳐 이것을 믿는 자들의 ‘자유’(고전 9:1, 19, 21, 10:29)라고 불렀다. ‘예배의 원칙’ 하나만으로 우리를 문화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할 수 있지만, ‘자유의 원칙’은 우상 숭배자들 사이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들을 영적으로 불결하게 만들 수 있다고 느꼈던, 지나친 영적 결벽증과 탈문화주의를 비판한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문화와 우상들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들은 단지 접촉만으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바울은 이런 식으로 느끼는 기독교인들은 ‘약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러한 접촉만으로도 그들을 더러워지게(고전 8:7) 만든다고 믿었는데, 이 용어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지나치게 결벽증이 있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에 관한 충분한 이해가 부족하다. 유약한 양심은 너무 쉽게 죄책감에 빠지게 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느낌이 들게 만든다. 그런 양심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라는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예수가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눅15:1)고 수군거렸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너무도 흡사하였다. 복음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는 사람들은 삶의 다양한 상황에 참여할 수 있는 충분한 자유를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 원칙은 놀라울 정도로 균형 잡히고도 미묘한 차이가 있는 적용 방법을 보여준다. 신약성서 학자 래리 허타도는 바울의 가르침이 엄격함과 융통성을 겸비하여 기독교인들이 살아 계신 유일신 하나님께 구별되고 신실할 뿐 아니라 동시에 가족의 일원이 되고 삶의 폭넓은 사회적 구조 속의 구성원으로도 남아 있을 수 있도록 했다고 결론 내렸다(151). 바울의 개인적인 식사 모임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균형 잡혀 있다. 초대한 사람이 모든 참석자에게 아폴로를 위한 건배를 요청한다면 먹지 말라. 그러나 그것이 이전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이었다는 것을 알더라도 우상에 대한 헌사의 행위가 없다면 먹어도 좋다.

 

사랑의 원칙

 

바울은 그가 정리한 원칙들이 모든 논쟁을 끝내지는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판단이 쉽지 않은 개인적 상황들이 다양하게 있었을 것이고, 사람들이 그가 규정한 지혜로운 규칙조차도 서로 달리 적용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여러 상황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이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각기 다른 생각들은 어느 정도 개인적인 기질에 바탕을 두고 있고 각각의 상황에 대해 충분한 의견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양심과 문화적 충돌의 다양한 상황에서의 판단을 위한 세 번째 원칙인 ‘사랑’을 알려주었다. 이 원칙 안에는 적어도 세 종류의 적용 방법이 있다.

 

첫째, 만약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다른 믿는 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하여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 기록하고 있다.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고전 8:2). 바울은 문화에 대한 이러한 논쟁은 신랄하거나 고압적이며 거만한 자세가 아닌 사랑을 품은 겸손의 자세로 접근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지나치게 엄격한 보수주의자들이 은혜의 복음에 깊이 뿌리내린 양심을 갖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유주의자들에게는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9절)고 경고한다. 비록 믿음이 있는 자들이라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런 음식을 먹을 때 우상으로 받드는 신이 실제로 임재한다고 느낀다(7절). 다시 말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이 성경적으로 허용되기는 하지만, 예전에 우상 숭배하던 자들을 다시 주관적인 우상 숭배의 길로 돌아가게 할 수도 있다. 그들의 마음은 “만약”을 위해 예전의 우상들에게 이끌릴지도 모른다. 머리로 믿고 입으로 고백한 복음이 마음속 깊이 스며들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바울은 아직 어떤 일을 하기에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일을 하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신학적으로나 영적으로 강하고 성숙한 사람들은 보수적인 분리주의자들을 대할 때 경멸하거나 그들을 깔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자신들의 ‘권리’를 잠시 제쳐두고 다른 형제자매들과의 교류를 위해 사랑을 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 그렇다, 그들의 양심적 판단을 도울 수 있도록 지도해야 한다. 그러나 이를 위하여는 겸손한 마음으로 인내심을 가져야 하며 의견의 차이로 인해 그들과 등을 돌려서는 안 된다.

 

둘째, 만약 그것이 믿지 않는 자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행사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이것을 유명하고 감동적인 고린도전서 9장의 가르침으로 기술하고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고전 9:19-23).

 

바울의 요점은 만약 어떤 행동이 유대인 형제들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라면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대인의 음식 규정에서 그렇다. 바울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었지만, 주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위해서 그는 기꺼이 그의 자유를 포기하였다. 그는 주변의 이웃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단계적으로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다. “어떤 공동체에서든 전도자, 교회 개척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한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야 복음이 불필요하게 문화적 차원에서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는다”(D. A. Carson, ‘The Cross and Christian Ministry: Leadership Lessons from 1 Corinthians,’ 122).

 

이어 바울은 10장에서 사랑의 원칙의 이 원리를 적용한다. 만약 기독교인이 식사 모임에 참석했는데,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바울은 이를 “알게 한 자와 그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고 가르친다(고전 10:28). 이는 오직 한 분이신 살아 계신 참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증거하기 위함이다. 이 경우 바울은 기독교인들에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을 잘못 인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들의 자유를 욕구로부터 멈추어 달라고 요청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허용된 관습이라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과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밝혀지면, 우리는 자유를 행사하지 말아야 한다. 본 로버츠(Vaughan Roberts)는 ‘진실한 교회’라는 그의 책에서 고린도전서 8-10장의 내용을 ‘의사 결정 도식(decision tree)’이라는 내용으로 요약하고 있는데, 필자도 이것을 ‘크리스천 의사 결정 가이드’로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Vaughan Roberts, ‘Authentic Church: True Spirituality in a Culture of,’ 133).

 

e47284f421e59556055e4e7b7a6208bc_1611057625_58.jpg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에서 10장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전 10:31-33).

 

우리는 하나님께 충실해야 하지만 “모든 면에서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기”(고전 10:33) 위하여 불필요하게 감정을 상하는 일이 없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실 수호를 위한 용감성’만 가지고 남에게 불필요한 모욕을 주어서도 안 되며 진리가 훼손당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하는 것만 신경 써서도 안 될 것이다.

 

* 이 가르침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내일 아티클에서 이어진다.- 편집자 주

 

원제: God, Freedom, and Love

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god-freedom-and-love/

번역: 장명근

 

--------------------------------------------------------------------------- 

 

2005년 미국에서 시작되어 팀 켈러 목사와 존 파이퍼 목사 등이 이끄는 TGC(The Gospel Coalition; 복음연합)의 한국어 사이트(tgckorea.org)가 2018년 11월 오픈되어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주제의 글과 동영상이 매일 새롭게 업로드 되고 있다. TGC코리아는 TGC는 물론 개혁주의 신앙을 전달하는 또 다른 인기 사이트인 Desiring God(존 파이퍼), Ligonier(R.C. 스프로울), 9 Marks(마크 데버), Unlimited Grace(브라이언 채플)의 수준 높은 자료들을 공식적으로 허락받아 한국에 소개하고 있다.

 

ⓒ TGC코리아(https://tgckorea.org)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을 쓰기 위해서는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뉴스 목록

Total 10,968건 125 페이지
뉴스 목록
기사제목 기사작성일
뉴저지장로연합회, 홀리네임병원 "커뮤니티브리지 펀드"에 기금전달 2019-09-11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뉴욕, 가든, 뉴욕남, 필라 노회 가을 정기노회 2019-09-11
해외한인장로회 뉴저지노회, 시대적인 상황 속에 개혁 노력 2019-09-11
뉴욕 이민자보호교회 다양한 활동과 함께 후원도 이어져 2019-09-11
해외한인장로회, 뉴욕노회와 동북노회 가을 정기노회 2019-09-10
20주년 임마누엘장로교회, 교회 봉헌 및 이전 감사예배 2019-09-09
뉴욕장로성가단 독일 찬양선교 “찬양으로 유럽이 회복하도록” 2019-09-09
이재철 목사 “연탄의 3대 사명”을 내용으로 하는 축사 2019-09-09
베이사이드장로교회 제5회 코리안푸드 페스티벌 2019-09-09
새생명선교회, 암환자를 위한 13회 사랑의 음악회 2019-09-09
유기성 목사, 뉴욕과 뉴저지 예수동행일기 세미나 인도 2019-09-08
뉴욕수정교회, 지형은 목사 초청 가을부흥회 "말씀이 길입니다!" 2019-09-07
허윤준 목사 "작은교회연구소 개설을 환영하며" 2019-09-07
뉴욕교협 46회기 회장 양민석, 부회장 문석호 후보 단독 등록 2019-09-06
1.3세 노영민 목사, 블루교회 개척 “기성세대와 젊은세대가 함께 성장 … 2019-09-06
한인디아스포라 작은교회연구소 개설 - 유재명목사 초청 첫모임 댓글(1) 2019-09-06
제시카 윤 선교사 “마지막 예배같이 예배드리고 찬양하라” 2019-09-05
정치현 목사 볼리비아 대선출마 돕는 미주 지원협력단 구성 2019-09-04
동부개혁장로회신학교 개강부흥회, 강사 김풍운 목사 2019-09-04
미주한인예수교장로회 뉴욕서노회 85회 정기노회 2019-09-03
ERTS, 고든콘웰신학교와 MOU로 목회학 석사 과정 개설 2019-09-03
최창섭 전임 회장, 뉴욕교협이 갈 방향을 제시하다 2019-09-02
뉴욕교협 선거법 논란 “교회 크기가 입후보자의 얼굴인가?” 댓글(2) 2019-08-30
이진희 목사 “인생은 산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광야를 건너는 것” 2019-08-29
글로벌한인여성목회자연합회 8월 어머니기도회 2019-08-29
게시물 검색



아멘넷의 시각게시물관리광고안내후원안내ㆍ Copyright © USAamen.net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

아멘넷(USAamen.net) - Since 2003 - 미주 한인이민교회를 미래를 위한
Flushing, New York, USA
카톡 아이디 : usaamen / USAamen@gmail.com / (917) 684-0562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