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응렬 목사 “성경적 설교는 성경적 설교자에게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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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9-08-15 13:07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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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즈한인교회는 5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7월 18일 류응렬 목사를 초청하여 “이민목회와 성경적 설교”라는 주제로 목회자 세미나를 열었다. 류응렬 목사는 총신대학원 설교학 교수로 있다가 6년 전 와싱톤중앙장로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류응렬 목사는 1강 “성경적 목회”를 통해 목회자의 태도와 철학을 나누었다. 10가지 주제를 다루었는데 ①행복한 목회자가 행복한 교회를 만든다 ②성경적 교회는 성경적 목회자로 시작된다 ③뛰어난 설교자 보다 신실한 목회자가 우선이다 ④사람을 세우는 리더가 진정한 리더이다 ⑤세상 변화를 위한 예수님의 전략은 한 사람이다 등은 이전 기사에서 소개했다.
[관련기사] 류응렬 목사 “설명하지 않아도 신뢰받는 목자가 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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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소개할 내용은 ⑥성경적 설교는 성경적 설교자에게서 나온다 ⑦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자이다 ⑧설교의 목적은 진리의 말씀을 통한 사람의 변화이다 ⑨은쟁반에 놓인 금사과는 빛이 난다 ⑩성령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라 등이다.
⑥성경적 설교는 성경적 설교자에게서 나온다
최근 설교학을 보면 커뮤니케이션에 집중된 흐름이 있다. 성경본문에 대한 집착 보다는 전달에 대한, 대중을 향하여 임팩트가 있는 전달로 사람을 깨우는 쪽으로 설교신학이 변해간다. 당연하다. 설교에서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정말 해야 될 본질에 대한 것이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이 오늘날 설교신학의 현실이다.
성경적 강해설교라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본문에 집중하는 것, 그래서 강단에 서면 설교자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권위를 가지고 서야 한다. 설교자는 본문에 근거해서 청중에게 나가는 설교를 해야 한다. 간단하게 다 하기에는 너무나 큰 이슈이지만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이 본문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강단에 서기 전에 미리 확인되어야 한다.
⑦설교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자이다
본문을 드러내되 본문에 가장 핵심되는 삼위일체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설교자인가? 오늘날 한국이나 미국이나 가장 문제라면 예수 없는 복음, 삼위일체 하나님이 없는 감동의 복음이 문제이다. 조엘 오스틴 같은 설교는 비복음을 넘어 거의 반복음에 해당되는 설교라 할 수 있다. 설교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설교이다. 과연 내 설교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언자로서 하는가?
마틴 루터는 “성경의 어느 곳을 찔러도 그리스도의 피가 나온다”라고 했다. 찰스 스펄전도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찰스 스펄전과 조셉 파커에 대한 일화가 있다. 예전에 분당우리교회에 가서 해마다 한두 번 설교를 했다. 이찬수 목사는 제가 갈 때마다 설교에 대한 조언을 부탁했다. 하지만 내가 무슨 조언할 것이 있느냐며 피했다. 그런데 독일 코스타에 가서 같은 방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다시 설교에 대한 조언을 부탁받고 해 준 이야기가 있다.
목회자들이 찰스 스펄전과 조셉 파커에게 설교를 배우려고 찾아갔다. 조셉 파커의 설교를 듣고 나오면서 목회자들이 “얼마나 위대한 설교자인가!”라고 했다. 조셉 파커는 위대한 설교자였다. 그런데 찰스 스펄전의 설교를 듣고 나오면서 그들이 한 입으로 한 이야기는 “정말 얼마나 위대한 그리스도인가!”라고 했다.
이찬수 목사에게 위대한 설교자라는 말을 들으려고 하지 말고, 설교를 듣고 “저 분이 진짜 예수님이시구나!”라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설교를 하라고 부탁했다. 우리 목회자들의 들어야 할 이야기는 바로 그것이다. “저 목사님 설교를 잘하시네요”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분이시군요”라는 말을 듣는 설교자가 되라. 설교자의 이름은 사라질수록 좋으며, 남게 할 유일한 이름이 예수님이시다. 앞에 앉아계신 예수님이 과연 내 설교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는가?
⑧설교의 목적은 진리의 말씀을 통한 사람의 변화이다
설교의 목적에서 주해도 중요하고 다른 요소도 중요하지만 설교의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죽어있는 영혼을 마침내 살려내고 살아낸 영혼을 거룩한 하나님 제자로 세워가는 것, 그래서 구원의 변화와 성화의 변화를 이루는 것이다.
진짜 좋은 설교는 예배당 문을 나설 때부터 증명되어야 한다. 부모를 존경하라고 설교했다면 회중들이 예배당 문을 나서면서 부모에게 전화를 드리고, 그동안 찾지 못했는데 찾아뵙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제대로 된 설교의 변화이다. 언제나 설교자들은 오늘 진리의 말씀이 회중의 가슴에 부딪쳐서 그들의 삶속에 구체적인 변화를 어떻게 이루어 내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⑨은쟁반에 놓인 금사과는 빛이 난다
전달에 대한 부분이다. 금사과가 복음이라면 은쟁반은 전달에 해당된다. 뛰어난 설교자에게는 뭔가가 있다. 뛰어난 설교자는 때로는 주해가 좀 부족하더라도 전달부분에서 뭔가가 있다. 조엘 오스틴은 주해는 전혀 성경이 아니지만 전달은 우리가 겸허하게 보아야 한다. 조엘 오스틴은 목요일 하루 종일 설교준비를 하고,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내용을 암기한다. 그리고 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한다.
반드시 들리도록 설교해야 한다. 설교자는 전하는 것이 목적이고, 듣는 것은 회중들이 몫이고, 변화는 성령이 하시는 것이 아니다. 밥을 해놓고 먹든지 말든지 라는 자세는 아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먹도록 만든다. 똑같은 음식이라도 아이가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어머니이다. 어머니의 심정으로 설교해야 한다. 그래서 전하는 것은 설교자의 능력이고, 듣는 것은 회중들의 능력이라는 자세는 안된다. 완악한 양떼들이 설교에 집중을 안한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설교자 문제이다. 양떼들은 원래 완악하다. 그 양떼들을 말씀으로 잘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 설교자의 영광스러운 사명이다. 하나님이 그런 일을 우리에게 주셨다.
누구에게는 마지막 설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단어 하나 그리고 문장 하나에도 신경을 쓰라. 저는 부족하여 설교를 잘 못하지만 교회에서 설교할 때 통역을 하기 때문에 통역팀에게 원고를 보낸다. 그런데 원고를 한 번 보내고 그만 두는 일은 거의 없다. 많이는 7번도 다시 보낸다. 내용의 큰 변화가 없는 경우가 많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를 바꾸는 경우도 있다. 저는 원고를 보지 않고 설교하지만 원고를 통역팀에게 다시 보낸다. 기대하는 것은 그만큼 자네들도 그 마음을 가지고 통역하라는 부탁이다. 설교가 설교자에게도 마지막이 될 수 있고 회중에게도 마지막이 될 수 있다면 한 단어라도 함부로 하면 안될 것이다. 저의 교회에서는 1주일에 11분이 돌아가신 경우도 있다. 누구에게 마지막 설교가 될 수 있다면 어떻게 한 단어라도 함부로 할 수 있겠는가?
⑩성령을 의지하며 최선을 다하라
골로새서 1:28-29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에는 사도 바울의 목회정신이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제가 성경을 연구하다 보면 구약부터 신약까지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이 하나있는데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알아서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실 일을 못 깨달으면 문제가 생기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안해도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게 하고, 그들에게 이 땅을 다 주겠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아브라함이 할 일은 말씀을 믿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라. 하나님께 맡기지 않으면 못 믿으니 하갈을 취하는 일이 일어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하셨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베드로가 할 일은 배도 가족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다. 그리고 물위를 걸아오라고 하시면 걸어가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베드로는 믿고 바다에 뛰어드는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가 할일은 우리가 하면 된다.
세계 선교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사람이 할 일은 그것을 믿고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으로 말미암아 사마리아에 복음이 힘있게 전해졌다. 그 빌립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광야로 보내셨다. 어떻게 이렇게 큰 사마리아의 역사를 두고 광야로 가겠는가 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나님이 말씀하셨을때 빌립은 광야로 달려갔다. 교회를 세워도 길목을 보고 세운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황량한 광야이지만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혼이 있었다. 빌립은 에디오피아 내시 한 사람을 보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많은 에디오피아 영혼들을 보신 것이다. 빌립이 하는 일이 성령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일밖에 없다. 빌립이 내시로 말미암아 일어날 에디오피아 영혼들의 변화를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나님은 친히 하나님 일을 하신다. 당시 땅끝이었던 에디오피아에 복음이 선포된 순간이었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할일은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위해서 진액을 쏟는 일을 하고, 설교를 준비하며 바른 단어를 찾으려고 노력하고, 말씀을 잘 전달하기 위해 청중들과 시선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요즘 목회하다 과로해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기 힘들다. 예수님은 33살에 돌아가셨다. 그렇게 따지면 우리들은 많이 살았다. 이제는 덤으로 얻는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정말 내 생애 마지막 날인 것처럼 다 쏟고 달려가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눈을 감으면 10초 만에 자야지 잠이 안와서 뒤척이는 인생을 살면 안된다. 피곤해서 죽을 듯이 하루종일 뛰어다니다가 저녁에 눈감으면 바로 자야하는 것이다. 그래야 아침 동녘에서 햇살이 비출 때 감격이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명을 위해 오늘 하루를 허락하셨기에 마지막 날처럼 보내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사랑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고, 사랑스럽지 않은 순간이 없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그런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사람을 바라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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