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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호 목사와 청교도 신앙: 신앙과 학문으로서의 청교도 정신을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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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회ㆍ2020-02-19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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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와 청교도 신앙과의 만남:

한국 개신교인의 입장에서 볼 때, ‘청교도’라는 말은 그리 낯설지 않은 단어입니다. 1800년대 말이나 1900년대 초기에 외국 선교사님들을 통하여 우리 한국에 전래된 개신교적 신앙의 이면에는, 일본이나 중국, 특히 남미의 가톨릭적인 선교배경과는 달리, 유럽 대륙의 개신교적인 영향을 입은, 그 중에서도 특히 영국과 독일, 그리고 네덜란드를 비롯하여 종교개혁의 중요한 열매를 맺었던 국가들로부터의 영향이 컸으며, 무엇보다도 신대륙 미국에서 일어난 종교적 부흥운동과 선교적 흐름에 영향을 입은 바가 너무나 지대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당시의 선교적 흐름의 배경에는 멀리 ‘뉴잉글랜드’로 불렸던 신대륙에서 일어난 부흥운동들, 특히 17세기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를 주축으로 한 부흥운동의 여파가 디 엘 무디(D. L. Moody)의 천막 부흥운동에까지 그 여파를 이어갔고, 이에 큰 영향을 입은 일꾼들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까지 걸처 조선 땅으로 선교적 사명을 받아서 일해 왔던 그 흐름을 이해한다면, 한국교회가 청교도들의 신앙 활동에 영향을 입었다는 말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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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교계 집회에서 메시지를 전하는 문석호 목사

특히 영국과 미국의 선교적 활동이 한국교회를 향한 신앙적 흐름에 끼친 영향은 이들 나라로부터 들어온 많은 선교사들로부터 전해진 것임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상황이었으며, 이것은 한국의 개신교적 배경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요소라고 봅니다. 따라서 한국 대부분의 개신교 교단이 교파를 초월하여 공통적으로 ‘청교도 신앙’(Puritanism, 또는 Puritan Faith)이라는 용어를 폭넓게 사용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축복의 모습임을 감사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청교도 신앙’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통하여 이 흐름이 극도의 변화와 전환점에 있는 오늘의 한국기독교 신앙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야하는지를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청교도사상에 대한 역사적 배경과 그 근본적인 입장을 향한 접근을 필요로 하고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적 배경에서 볼 때, 이 청교도 사상을 가볍게 보거나, 또는 단지 400주년이라는 햇수의 계산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흐름과 내용면에서 한국 교회의 신앙의 소중한 맥(脈)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가톨릭사상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세속적 권력(Secular Power)과 세속화(Secularization)를 방지하기 위해 영적 전투를 거치면서 당한 온갖 고난과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수많은 종교 개혁가들과 이후의 청교도 신앙의 선배들이 오늘날 강단(講壇:Preaching)의 흐름과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의 사회와 교회의 분위기를 본다면, 너무나 마음 아프고 애석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즉, 청교도들의 삶과 사상의 뿌리로서의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이해가 희미해져가는 오늘의 시대에, 우리의 마음은 아플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마음이 아프다’라고 하는 이유는, 당시의 청교도들이 꿈꿔왔던 그들 나름대로의 ‘개개인의 신앙관’과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하고자 목숨을 걸면서까지 이를 지켜왔던 그 ‘순수한 목회관과 교회관’, 더 나아가 ‘이 세상에서의 유일한 피난처인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 세우기’에 온갖 생명을 다하여 애쓴 이들의 지난 흔적을 바라볼 때에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단지 400주년이 되었기에’ 기념하거나 조명하려는 유행을 떠나, 지난 날 청교도들이 가졌던 진정한 이상(理想)을 되짚어 보면서, 그 사상의 본질(本質)에 있어서의 이해와 수용, 그리고 그 적용에 대한 대안적(代案的)의 과제를 제시하는 것으로 새롭게 나아가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행이도 한국 기독교 내에서 90년대를 축으로 하여 청교도 사상을 이해하도록 안내되는 글들과 책들이 많이 출간되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라고 하겠지요. 왜냐하면, ‘청교도’라는 단어의 의미는 원래 청교들이 가졌던 ‘생명을 건 경건’(life piety), '전투적 신앙‘울 통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던 그 열정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무언가 ‘고리타분’하다(실제로 오늘날 다원주의 흐름이 판을 치는 현실에서 비추어 볼 때, ‘청교도 사상’은 그야말로 ‘고리타분하다’고 이해될 수밖에 없는 모습이기도 하다) 거나, ‘앞뒤가 꽉막힌’ 종교적 신앙이라는 평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익히 아는 종교개혁 정신의 후예들로서의 공통점이 있기에 이는 당연하다고 보겠으나, 한편으로는 종교개혁 이후에 서구적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의 번역과 더불어 진지한 성경연구를 통하여 성경적 기독교 신앙(개신교적 흐름)으로 급속이 퍼져가는 모습이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적 흐름으로서 르네상스의 영향 아래 교회를 위협하는 인문주의적이며 세속적인 흐름 아래 과학적 발견과 함께 일어난 인본주의 사상의 흐름이 지난 시대의 ‘청교도 사상’과는 커다란 간격을 이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앞에서 오늘날의 기독교 신앙은 커다란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청교도'(Puritans:淸敎徒)라는 단어의 기원은 그 내용이나 사상과 삶이 ‘순수하고 고귀하다’라는 긍정적인 이해에 있었다기보다는, 신앙외적(信仰外的)인 의도로부터 비판 받아왔습니다. 사실 요즈음의 시대정신으로 볼 때, 청교도 사상이란 ‘꼼꼼하고 쩨쩨하고, 편협한 신앙’이라는 다소 냉소적이며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흐름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한 흐름에 편성되어, 기독교 신앙이 그 본질을 흐려버리면서, 세속의 흐름에 기울어지기도 했고, 또한 19세기 미국의 사회전반의 흐름들 속에서 나타난 비신앙적인 정서, 특히 이를 뒷받침하듯이 여러 문학작품들 속에서 당시에 알려진 청교도적 신앙의 사람들이나 목사들을 향하여 ‘교리에 꽁꽁 얽매인 채, 다소 딱딱하고 인간미가 없는 사람’이라든지,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사람들’이라는 비판의 시선 속에, 기독교 신앙에 대한 다소 부정적으로 의도된 여러 작품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청교도적인 신앙의 흐름은 한국의 초기 기독교 신앙의 모습에서도 두드러지게 볼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실례로, 미국의 청교도 운동의 마지막 여파로서 신앙부흥운동의 주역들 중에서 청교도 부흥운동의 끝머리에 서있었던 디 엘 무디(Moody)의 천막집회(Tent Revival)에서 영향을 입은 헌신자들, 바로 그들이 조선을 향하여(또는 중국을 거쳐 조선 땅에) 복음을 심고자 찾아왔다는 역사적 흔적에서 한국교회의 연원적 관계를 짚어 볼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의미있고도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지요.

청소년시절과 신학적 훈련기간 중에 접한 청교도 신앙

개인적으로 저는 60년대 중반의 청소년기 시절부터 ‘청교도 신앙’에 대한 특별히 깊은 이해 없이, 당시의 장로교적 배경을 지닌 기독교 신앙을 ‘청교도 신앙’이라는 단어와 연결시켜서 귀가 따갑게 들었습니다. 초창기에는 ‘청교도’라는 단어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나 역사적 이해 없었기에, 그저 막연히 ‘말씀 그대로의 신앙’, ‘불굴의 의지를 지닌 순교적 신앙’, ‘주일 성수와 가정예배의 강조’,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일상 속에서’라는 식으로 다소 흐릿하게 이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그저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지금 목회활동에 들어와 그 때를 돌이켜 보건대, 그것이 청교도 사상의 핵심을 찌르는 진리였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의 확장기라고 할 수 있는 60년대나 70년대에 신앙생활을 하고, 이제 60, 70대를 지나고 있는 분들은 이 ‘청교도 신앙’이라는 말이 저처럼 그리 낯설지는 않을 것입니다.

엄격한 종교적 계율(戒律)과는 거리가 먼, 개개인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세속적(世俗的)인 흐름을 맛보면서도 교회를 드나드는 현대인들의 신앙 관념에서 볼 때에, 청교도 신앙은 ‘격식에 맞춘 다소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신앙의 흐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으로 신앙을 배우고 자란 당시의 제 모습으로 볼 때에, ‘청교도 신앙’이란 그저 언사(言辭)로만이 아니요, 또한 그저 ‘경건과 말씀’이 몸에 배였다는 모습에서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철저한 ‘하나님 주권사상’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는 구원의 말씀’, 그리고 성경의 진리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인간적인 전통을 섞거나 내세우지 않으면서 철저한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안식일(安息日:主日)에 대한 엄격한 이해와 적용, 또한 해체되어가는 오늘날 가정의 위기 속에서 가정 교육을 중시한다는 모습으로 그 사상과 삶을 신앙과 삶의 핵심주제로 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청교도들에 대한 보다 세밀한 연구라는 배움의 열망이 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저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도 이룩하고자 하여 현실을 개혁하고자 엄청난 강단의 외침을 행했던 그들의 모습은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한 배경 속에 신앙생활을 했던 저로서는, 당연히 미국에서 이어진 신학교육을 받을 당시, 이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의 시간들을 갖고자 노력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학교에서의 배움과 교회에서의 눈코 뜰 새 없는 목회활동들은 저에게 그러한 깊고도 진지한 배움의 기회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의 신학을 공부하면서, 그저 단순하게 교회사 시간외의 또 다른 시간을 내서 청교도에 관한 생각을 가질 여유가 없었던 것이 솔직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저 자신의 개인적 신앙관을 확립해 나가면서, 그리고 목회적 방향을 고려하면서 청교도들의 글들을 접하면 접할수록(청교도 사상가들 대부분의 글들은 오로지 강단을 위한 강론(講論)에 집중된 것입니다), 더 나아가 청교도들의 글들(실제로는 그들의 설교집이라고 하는 편이 나음)을 하나씩 하나씩 접하면서 읽어 내려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마음속에 열정이 하나씩 다시 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80년대 중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책방에서 이상하면서도 놀라울 정도로 청교도 서적들이 구내 서점에서 눈에 띄게 많아지는 것을 경험하면서, 한국에서 강의하다가 방학을 맞이하여 신학교를 다시 찾아갈 때 마다, 원했던 책들을 손쉽게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청교도들의 서적들(거의 대부분이 설교집)을 손쉽게 구할 수가 있게 되었는데, 그것은 개인적으로 제게 크나큰 축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영적거장(靈的巨匠)들의 그 충만한 삶과 활동들을 대할 때 마다, 그리고 신앙과 신학과 사상을 설교를 통하여 읽을 때마다, 나 자신을 비롯한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영적왜소(靈的矮小)함에 빠진, 또는 ‘영적 난쟁이’의 모습임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날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던 시절에 영적거장들을 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 그저 스쳐 지난 것이 죄송스러운 마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 시절, 마지막 클래스들과 학위논문에 집중하느라고 원하는 만큼의 독서를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오히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그 이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그분들의 글 속으로 빠져들어 가게 된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지금도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마다, 또는 신학생들을 위한 강의가 있을 때마다 틈틈이 청교도들의 서적을 읽는 습관이 만들어졌습니다.

교수시절, 청교도 신앙을 향한 문목사의 열정: ‘청교도 개혁주의 연구회’를 발족하면서

80년대 후반에 저는 본교 신학대학교에서 부름을 받고 귀국하여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시간이 날 때마다 청교도 서적을 개인적으로 접하게 되던 중, 어느 날 출판사로부터 좋은 서적 한권을 골라서 번역해 달라는 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주저 없이 ‘이 책이 번역 출판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대량으로 팔리기를 기대하지는 마세요’라는 말과 함께 청교도 서적 몇 권을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대부분의 청교도 서적들은 거의 설교집이나 설교 강해집입니다. 저는 그 책들을 번역하면서, 그리고 그 한 페이지 한 페이지를 번역하면서, 그 설교 속에 담긴 당시의 청교도 목사의 마음과 생각과 신념, 그리고 그들의 불타는 열정과 함께 오로지 말씀 그 자체에 붙잡힌 설교의 내용, 그러면서도 동시에 성경 전체를 조명하는 그 기가 막힌 ‘성경적 설교의 천재들’의 모습에 감동을 받게 되었고, 더불어 그 내용들이 성경의 곳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그 실례를 들면서 동시에 적용하는 모습에 더욱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종종 그들의 설교에 눈을 붙이다 보면, 마치 그 당시의 불과 같은 열정으로 설교를 행하는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보는 듯 했습니다.

번역하는 일에 한창일 당시에, 저는 그 한 장(章)의 독서를 끝내고는 그 내용을 약간 현대적인 수식어로 바꾸어서, 그 설교문 내용을 당시 제 주변에서 목회하는 후배, 동료목사들에게 소개하기 시작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던 성경의 천재들이 실시했던 설교의 내용인데, 여러분들의 설교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라는 당부의 글과 함께 그 설교문을 카피하여 종종 나눠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꼭 이대로는 아니어도 되니, 조만간 이 설교문을 당신의 설교로 재작성하여, 강단을 뜨겁게 해보세요!’ 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물론 그분들 중에서는 반응을 보이면서, ‘이러한 설교문을 더 소개해 주십시요!’라고 요청하는 분들도 있었고, 무엇보다 제 자신도 내가 맡은 강단에서 그 내용들을 조금씩 풀어서 청중들에게 먹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회자 몇 사람들과 ‘오늘날의 목회와 강단’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목회적 소명’에 철저했던 청교도 목회자들에 대한 이야기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의 ‘기독론적 설교’에 대한 이야기 등등에 대한 논의를 진지하게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부터 모일 때마다, 모인 목회자들로부터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단편적으로만 모여서 잠간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미흡하니, 우리가 정기적으로 모여서 처음부터 차분하게 '청교도의 신앙과 목회'라는 것을 주제로 모이면 어떨까요?’. 그중에서 어떤 분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지난 날 기독교 역사 속에서의 인물들 중에서 이러한 금쪽같은 설교문을 많은 분들이 행한 것을 우리가 이어받는 모임을 갖는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함께 모여서 나누도록 합시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함께 나누고 이 내용들을 조금 첨가하여 책으로 내면 어떨까요?’라는 제안을 하기까지에 이르렀습니다. 사실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아직 한국교회 안에서는 ‘청교도’에 대한 말들이 있었지만, 그분들이 저술한 그리도 수많은 서적들이 우리 말로 번역되어 직접적으로 접하기까지는 많이 미흡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후로, 저는 자의반 타의반 그 모임의 장(President)으로서 목회현장으로 부름 받은 자들에 관한 ’소명과 자세‘에서부터, 그 역사적 배경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그 서적들을 여기저기서 발췌하여 모인 목회자들의 강단을 더욱 든든하게 하기 위해서 함께 헌신하면서 모임을 자주 가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을 통해 우리 회원들이 실천하는 목회 현장 속에서 하나님의 뜻이 서서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서로 나누게 되었습니다.

80년대를 지나 90년대만 해도, 당시의 한국의 서점가에는 청교도 관련의 번역서가 눈에 띄지 않았을 당시였기에, 저는 회원들의 제안에 따라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두어 달에 한 번씩 모이는 모임을 가졌고, 교파를 초월하여 ‘청교도’라는 말에 흥미를 가진 다양한 부류의 목회자들 20-40여명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모임이 있을 때마다, 저는 청교도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 상황과 칼빈의 사상의 후예들로서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시키기 위해, 강의와 더불어 당시의 청교도들의 책들 중의 일부를 번역하여 나눠주었고, 그 설교를 여러 목회자들과 함께 나누고 익혔을 뿐만 아니라, 그 설교 속에 담긴 ‘철저한 성경중심의 설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영혼 구원의 의사들로서의 말씀으로의 처방’, 그리고 ‘불굴의 신앙으로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민족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구성’이라는 원대한 꿈을 향했던 청교도 설교자들의 면면에 대하여, 그리고 그들의 설교에 대하여 나누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 중에서 저와 함께 ‘연구위원’이라는 직분을 나누면서, 좀 더 활기 있는 모임을 가진 바도 있습니다.

그들의 설교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고자 하는 그 내용들, 무엇보다도 16, 17세기의 상황에서 당시의 권력(權力)과 세속(世俗)의 욕망(慾望)을 벗어나 성도의 ‘거룩성’(holiness)을 향하여 몸부림치면서, 성경 한 글자, 또는 한 구절을 통하여 성경 전체를 바라보고자 했던 그 기라성(綺羅星) 같은 인물들을 한분, 한분 더듬어 가는 모습은 참으로 모두에게 귀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미 수백 년 전에 청교도들이 써내려간 한 문장의 말씀을 통하여 성경전체를 꿰뚫어보는 그들의 예리함과 통찰력 등을 하나씩 제시하면서, ‘이 성경의 천재들’이 성경전체를 통달하여 보는 면들에 대하여 함께 감탄을 금하지 못하면서, 함께 공감을 나누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짧은 본문 하나에서, 인간의 창조(Creation)와 타락(Fall)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Salvation through Christ)과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휴식'(Eternal Rest in the Kingdom of God)이라는 인생의 여정(Pilgrimage)을 향했던 그들의 삶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아름다운 삶을 그리는 것으로 충분하며, 종교개혁을 배경으로 단지 개혁만이 아니라, 강단을 통하여 생명의 변화를 이룩하고자 애썼던 그 모습은 모든 목회자들의 표상(表象)으로서 손색이 없었습니다.

그 시간은 그토록 진귀한 진리를 펼쳐나가고자 애쓴 흔적들을 함께 모인 회원들과 함께 나누면서, ‘자, 그러면 어떻게 이 흐름을 우리의 목회현장에 적용할 것인가?’를 논의했던 귀중한 순간들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이 거의 1, 2년간 이어지는 사이, 누군가의 제안으로 우리 모임의 명칭을 새롭게 정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히 ‘청교도 신앙연구회’라는 이름에서 다시 ‘청교도 개혁주의 신앙 연구회’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정해졌습니다.

감사와 기쁨: 청교도에 관한 서적들의 번역 출판을 바라보는 즐거움

그런데 어느 날 서점을 둘러보는 중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누군가에 의해 청교도 서적들이 번역, 출간되어 서점을 장식하게 되었다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 때 제 기억으로는 몇몇 출판사가 그 일을 거의 동시에 시작했는데, 그 중에 백금산 목사께서 정성을 다하여 청교도 책들을 번역 출판하는 것을 사명으로(?)알고서는 출판사를 차려 번역출판에 매진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 분을 제가 재직하고 있던 신학교 채플에 모셔 설교를 부탁하면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때 놀랍게도 그분은 청교도 사상과 그 설교에 이미 매료되어 그 책들을 번역 출판하는 것을 자신의 목회의 중요한 소명으로 알고 있노라 고백(告白)했습니다.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크리스찬 다이제스트(Christian Digest:박명곤 사장)사와 기독교 문서선교회(CLC), 그리고 후에 지평서원이라는 이름의 출판사에 이르기까지, 야러 곳에서 청교도 서적들을 번역/출판하여 보급하는 것을 보면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가 더 이상 그 고전서적들을 번역하느라고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만, 그러나 그보다 더 큰 감사는 청교도 신앙과 신앙사상을 함께 관심을 갖는 분들이 많아짐과 동시에 그러한 나눔이 확산되고 있다는 기쁨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의 모임은 지속적으로 얼마동안 이어졌고, 우리의 명칭을 ‘청교도 개혁주의 신앙연구회’라고 확장하여 부르면서 두 세달에 한 번씩 모이는 모음은 감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여러 목회자들이 이 모임에 참여하여 청교도 신앙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하는 모습에는 몇 가지 특기할 만한 요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임의 목적이기도 했습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종교개혁이라는 힘겨운 파도와 함께 가톨릭의 잔존하는 세력과 또한 당시의 세속적 권력(世俗的 權力)을 대항하느라고 다가오는 각종 위기의 순간들과 역경들을 청교도들은 다른 수단과 방식이 아니라, 오직 강단을 통하여, ‘풍성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그 어려운 환경과 역경을 이겨내면서 오로지 그들이 남긴 설교는 ‘여전한 보화덩어리’라는 고백입니다. 성경 한구석의 한 말씀이 결코 작거나 결코 부분적인 것으로 되지 않은 채, 신구약 여기저기를 마구 관련지어 내놓는 그 풍성한 꼴을 얻어내는 그 ‘성경의 천재들’의 혜안(慧眼)을 읽을 때마다, 제가 먼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당연히 강단을 통한 심령의 변화와 구원의 열망을 기대하고 바라보게 됩니다.

요즈음의 설교에서 흔히 들리는 ‘군더더기 같은 그 쓰잘떼기 없는 소리’(!) 없이, 오직 성경에 충실하면서도 전체를 조명하여 바라보는 그 철저한 성경중심의 강론(講論)이야말로, 현대의 세속적 흐름에 젖어든 설교강단이 본받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밀려 들어왔고, 그러한 마음을 ‘청교도 개혁주의 신앙연구회’의 회원들과 나누다 보면, 우리 회원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때로는 각성(覺醒)의 기도로, 때로는 감사와 결단의 기도로 이어지면서, 모임을 마치곤 했습니다. 참석한 회원들 모두 이 사명에 공감하면서, 자신들의 강단을 변화시키고자 마음을 모았던 것은 지금 돌이켜 보아도 너무나 감동적인 시간들이었습니다.

글을 마감하며: 한국적 상황에서의 청교도 정신회복을 바라며

청교도 운동을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청교도인들의 사상과 삶을 가만히 되돌이켜 생각하노라면, 물론 그 내용과 핵심은 전혀 별개의 것이지만, 왠지 모를 한국적 ‘선비사상과 삶’을 서구의 ‘청교도적 교회지도자들’에게서 보는 느낌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타지 않는 그 꼿꼿한 자세, 그리고 ‘성공과 성취라는 인간적인 욕망’(慾望)에 사로잡히지 않은 채, 스스로 고난을 자처하면서, 타협하지 않는 그 의연함과 학문적 진술(神學的 陳述)에 얽매이지 않은 채, 그 철저한 종교개혁의 정신 아래, 실천적 강단을 중심으로 하는 그 신앙자세와 헌신의 열정은 어딘지 모르는 ‘선비정신’과 그 외양(外樣)이 동일하게 흐르는 것 같다는 부족한 소견입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세상은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난 날을 뒤돌아 보기위해 신앙의 위대한 증인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 종종 사람들을 모시고 가긴 합니다만, 찾아가 바라보는 현실의 모습은 너무나 만감이 교차하는 모습일 뿐입니다. 신대륙에서의 초창기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목회지역을 찾아가 본다는 것이 ‘이렇게 변질된 세상에서 무슨 의미를 지닌다는 말인가?’라고 탄식할 정도로 변해버린 그 삶과 목회현장이 오늘날 어두워져가는 세월의 마지막 열차를 타고 가는 ‘종말의 세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청교도들로 이름지어진 그 산증인들의 기록들은 지금도 제 서재에서 여전히 살아 숨을 쉬면서, 종종 그 책장을 열 때 마다 함께 호흡하기를 원하는 듯이 느껴집니다만, 더불어 지금은 너무나 멀리 가버린 이 시대의 흐름들 앞에 그 분들의 글들을 호흡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슬픈 느낌을 받곤 합니다.

우리나라의 지난날 선비들이 현실정치에 미련을 두거나 매몰되지 않은 채, 훗날을 기약하면서 배움과 가르침에 온 힘을 쏟았듯이, 그들 역시 현세에서의 성취나 성공에 연연하지 않은 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힘을 기울여 강단에서 말씀을 쏟아 부음으로 영혼의 구원과 함께 세상의 변혁을 꿈꾸면서도, 장차 성도들이 들어갈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을 금같이 여겨, 생명을 내놓기까지, 복음의 열정으로 살았던 그 모습들은 비록 몇 백 년이 흐는 지금에서도 우리가 변함없이 되새겨야 할 모습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물론 그분들이 그 당시에 지향했던 모습들에 비해 오늘날의 사회 현실과 목회현장이 우리들이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의 나라와는 너무나도 일탈(逸脫)된 모습을 느끼면서 말입니다. 비록 청교도인들이 살았던 때와 오늘이 사회적 변동과 문화적 흐름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다해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온전한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이끌어 나가고자 철저한 방식을 취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지금은 세속 정치와 자본주의적(資本主義的) 삶과 정신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청교도 목회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애를 가만히 되새기다 보면, 마치 우리 역사 속에서 학문적 순수성(純粹性)과 의(義)를 위해 부귀와 성공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은 채, 소신을 따라 살다 죽어간 선비사상이 느껴지는 듯 하기에 이런 말을 나누는 것임을 양해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자신들의 신념을 위해 때로는 국가의 자리나 녹(祿)이나 특혜를 포기하기까지 하면서, 훗날의 꿈을 이루기 위해 교육에 온 몸을 바치면서 죽음조차 거부하지 않았던... 지난날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선비사상을 다른 각도로 비추어 청교도들을 바라보는 모습이라고 이해하여 주시면 족합니다.

물론 기독교 신앙이 이론이나 학문으로만 정립되어야 한다든지, 또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사상이 인간적인 의(義)로 둔갑된다든지, 또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는 고난과 십자가 사상이 결코 지난날의 가난과 청결을 숙명으로 받아들였던 선비사상과 비교될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교도인들의 사상과 삶은 결코 오늘날 이론만 내세우며 ‘신학자(神學者)모습 운운’하면서 논리와 언사(言辭)에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화려할지라도,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순수성을 위한 열정과 희생에는 뒤로 쳐지기에 급급한 오늘날의 현실과 비교하다 보면, 신념과 의를 지켜내기 위해 모든 자리를 포기하면서도, 먼 미래를 바라보면서 순수한 교육에 힘쓴 조선시대의 선비사상이 생각나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물론 선비사상과 하나님의 사람들이었던 청교도들의 목회정신을 비교한다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다만 유비(類比)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성취가 아니라, 맡겨진 강단을 통하여 인간의 죄인(罪人)됨과 이를 회복하기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며 높였던 청교도들의 사상과 삶은 그들 스스로를 ‘영혼의 의사들’로 자처하면서, 복음의 순수성과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분들이었다는 것은 결코 우리 역사에 흔적으로 남긴 선비사상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오늘날 한국의 사회와 정치 현실에서 느끼는 지난날의 선비적 모습들이, 성공과 성취와 세속적 방식의 목회에 종종 매몰되어가는 오늘날의 기독교적 현실이 다만 그러한 유비를 되새기게 한다는 것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정치적 현실을 목회적 현상과 연결지어 볼 때에,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마도 오늘날 말없이 희생하면서 진실하게 목회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는 적절한 비유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말씀일 뿐입니다.

지난 400여년 전, 당시 고향에서의 화려했단 자신들의 삶을 포기하고, 새롭고도 순수한 신앙의 꿈을 안고 ‘새로운 하나님의 땅’을 통해 자신들의 순수한 이상과 꿈의 실현을 위해 새롭게 정착한 땅을 ‘하나님이 허락하신 땅’으로 여기고, 자신들이 만든 ‘청교도들의 신앙신조’를 따라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고자 했던 그 당시를 되새겨 본다는 것이 그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 말입니다! 물론 그 꿈은 여전한 미래로 남겨져서 오늘날의 우리 모두에게도 지워진 ‘아름다운 짐’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 선언(宣言)과 그 당시의 사람들이 꿈꾸어왔던 것들이 지금까지는 그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마음 아픔이 있기는 하나. 애굽을 떠나 약속의 땅(Promised Land)을 찾아간 그 백성들에게 .여전한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며, 결국 뿔뿔이 흩어지는 고통을 당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we are looking for the city that is to come: 히브리서 13:14)라는 말씀으로 교훈한 말씀만이 나그네 길을 가는 여정의 사람들(Pilgrimage)이 기억해야 할 교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흡하나마 대화의 말을 마치고자 합니다.

문석호 목사(뉴욕효신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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