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하 목사 “계시와 역사의 길에서 트럼프를 바라보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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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ㆍ2017-05-26 20:50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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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퀸즈제일교회)가 <계시와 역사의 길에서>를 출간했다. 지난 기사에 이어 인터뷰의 대화를 정리한 두 번째 관련 기사이다. 한편 개혁주의 신학연구모임이 주최한 출판감사 기념회가 5월 30일(화) 오전 11시 뉴욕만나교회에서 열린다.
[이전 기사 보기] 기독교 선비 황상하 목사 <계시와 역사의 길에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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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책의 제목이 <계시와 역사의 길에서>인가? 이에 대해 황 목사는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역사의 길에 서 있는 우리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계시이다. 계시는 전통적인 신학자들의 해석에 의하면 점진적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계시가 과거에는 덜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이 역사가 흐르면서 더욱더 밝게 드러나는데 그것이 하나의 어떤 관념으로서의 계시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그것에 개입하시고 또 하나님의 뜻과 일들을 나타내 보이시는, 그러니 단순히 들려주시는 이론적이며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러니 계시와 역사라는 것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불가분의 관계인 동시에 점진적이다. 계시가 점진적이라는 것 자체가 역사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적으로 실현될 때 우리는 그 실현되는 현장에서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그것을 분별하고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서문을 통해서도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어 그 계시를 이루어 가는 자들이다. 하지만 오늘날 기독교와 교회는 지나치게 사적인 영역으로 기울여 가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역사 가운데에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이루어 가신다는 인식이 부족하다. 그리스도인 개인은 물론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계시와 역사의 길에 참여하고 있다는 분명한 의식에서 행동해야 한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사적 영역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은 세속적 자기실현과 개교회의 업적에 집착하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교회가 정치와 경제와 문화 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교회 본연의 역할이 아니지만 교회 공동체에 속한 개개인이 그러한 분야에서 성경적 가치관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 영향을 나타내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사적 영역으로 기울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며 신학으로 성경을 읽고 사물을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 공공의 길에서 예수 잘 믿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은 나름 그 같은 고민의 결과물”이라고 소개했다.
그래도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역사의 길에 대한 이해가 잘되지 않으면, 지난 기사에 이어 이어지는 황상하 목사의 인터뷰 발언을 들어보자.
미국과 한국 등 전세계적인 사상의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숲속에 들어가면 길을 잃듯이 사상의 풍류 속에 떠내려가면 길을 잃을 수 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 찬성하고 반대하는 부분이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훨씬 더 넘어 서야 한다.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개인을 넘어서서 책제목같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계시가 구체적인 역사에서 어떻게 실현되기를 원하시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 우리가 나누어야 할 담론의 주제이다.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 특히 지도자라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지 탄핵 등 구제적인 이슈에 의견을 쓰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바뀌지만 그 과정가운데 정말 옳은 것을 선택하고 방법들이 정당한가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한 개인과 한 집단이 저지르는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이 어떤 주장과 어떤 판단을 하지만 전혀 의식을 못하지만 전세계적인 사상의 흐름과 경향에 영향을 받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현대를 지배하는 사상은 상대주의이다. 상대주의라는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옳은 것이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시가 옳고 하나님의 뜻이 옳지만 이 세상에서 현실을 생각하면 옳은 것이 무엇인가? 법이 옳은 것이고 우리가 이렇게 하기로 약속한 것이 옳은 것이다. 나아가서 법과 질서를 존중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를 거스르지 않을 때 일반 은총 면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다.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학문과 예술 모든 분야도 마찬가지이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단 한치도 없다”고 말했다. 이번에 프린스톤신학교가 아브라함 카이퍼 상을 제정했다. 팀 켈러 목사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가 취소된 이유가 프린스톤 동문들이 반대했다. 동문들은 동성애와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인 속좁은 목사에게 상을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 것이라면 팀 켈러 목사는 명예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세상이 지금 그렇다. 학계 정치 교계 사회 전반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목사는 어떻게 보면 전문가인데 목사는 적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는 면에서 사회적인 용어로 말하면 전문가이다. 전문가는 자기 분야에 대해 적어도 이것이 사실이고 진리라고 생각하면 어떠한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믿는 것과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목회자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자 발언] 설교할 때 정치나 사회에 대한 내용을 이야기를 하는가. 흔히 설교할 때 오직 성경말씀만 전하라고 한다. 목사님이 시각에 세계관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닐 수도 있지 않는가? 물론 목사님은 그렇게 생각하겠지만 100% 그것이 맞다고 생각할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 자신의 시각과 주장을 칼럼으로 쓰는 것은 문제없지만 설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는가?
저는 성경 말씀만 전하는 것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한다. 성경만 전한다는 말은 그 말은 맞다. 그것을 어떻게 잘못 사용되어지는가 하면, 성경만 전해야 한다고 하면 그 성경을 전해 듣는 사람들이 어디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가? 그 사람들이 미국의 현실에서 미국의 정치와 경제의 직접적인 영향과 통제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경제가 정치가 무엇을 지향하는지 모르기에 힘없는 이름만의 기독교인을 만들어 낸다. 저는 성경만 아는 것이 성경만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경만 주신 것이 아니다. 온 우주만물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시고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지금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계신다. 집권자에게 칼을 돌려준 것이 하나님이시고, 그 집권자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66권 성경을 토대로 해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며 하나님의 손길이라는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성경을 제대로 아는 것이다. 성경 66권을 다 외우고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다. 특히 성경이 무엇을 안다고 할 때 안다는 말 자체도 그런 의미가 아니다.
[기자 발언] 목사들이 보는 세계관이 다를 수 있다. 그러면 하나의 본문을 가지고 각각 다른 내용의 말씀이 선포될 것이다. 그러면 문제가 있지 않는가?
다를 수 있겠지만, 크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구체적으로 한 본문을 전할 때 성경전체의 메시지와 전체의 구조, 성경이라는 교리의 건물에서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그런 것을 가장 잘 설명해준 것이 칼빈의 ‘신학과 교리’이다. 우리의 메시지가 어떤 것을 강조하던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훼손하면 안되고, 인간의 전적 부패를 오해하면 안되고,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에 대해 그것을 잘못 이해하면 안된다. 이런 기본적인 틀은 있어야 한다. 그 틀 안에 있다면 개인의 다양한 적용이 가능하리라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훼손한다든지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오해하면 안된다. 그것만 훼손하지 않는다면 개인에 따라 강조점이 다를 수 있다. 본문도 한 본문을 가지고 드러내는 하나님의 뜻이 많을 수 있다. 그런 것에 대해 다르더라도 큰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기자 발언] 올해가 종교개혁 500주년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들이 너무 진부하고 지난 종교개혁에 대해 한번 되집어 보는 수준에서 머물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현실을 공부하지 않은 하나의 결과이다. 전혀 다른 현상에 처해져 있다.
[기자 발언]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의 모습이 종교개혁 당시와 비슷하고 지금은 제2의 종교개혁 전야라고 말하는데...
자기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니 그렇다. 목회자 개인도 그렇고, 교단적으로도 그렇고, 진짜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 저는 책 제목을 <계시와 역사의 길에서>라고 정한 것이 늘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지금 미국 대통령으로 트럼프를 세우시고, 중국의 시진핑과 일본의 아베를 세워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은 악한 자를 악한 날에 필요하게 사용하시기에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가실 때 트럼프 정책중에 어떤 것은 도저히 기독교적으로 용납이 안되는 부분도 있고 기독교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보편가치를 존중하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어떤 것인가를 선택할 때 최선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선을 선택한다. 최선은 없다.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 끓임없이 차선을 선택하려면 절대적인 최선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비추어 어떤 것이 차선인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러려면 경제와 정치와 사상과 학문에 대해 알아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자연과학이 발전한 후에 모든 학문이 과거의 학문은 통합적이었지만 자연과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모든 학문에 개별적인 학문으로 바뀐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어쩔 수 없다. 학문을 나누고 나누어야 과학이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하고 경제가 발전하니 학문이 그렇게 되었다. 통합적인 학문이 개별적인 학문으로 바뀌었다. 옛날에는 학문이 통합적이기에 학자가 정치와 사회와 경제에 대해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말할 수 없다. 말을 하면 전혀 몰지각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다. 심지어 경제와 정치 분야도 너무 세분화되어 같은 학자가 앉아서 말해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른다. 이런 시대에는 원로가 있을 수 없고, 전문가가 있을 수 없고, 존경받는 지도자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시대에는 자기분야에서는 지대한 공헌을 하지만 전체를 이끌어 가는 면에서 어떤 리더십을 제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시대가 그런 시대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 전부 제각기 아직도 학문이 통합적이었던 그런 시대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런 시대일수록 기독교가 취해야 할 입장을 너무 분명하다. 이와 같은 시대상황을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어떤 사람의 이론에 사사건건 대응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 이 시대적인 흐름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려는 계시의 역사를 거스리는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원리에 참여하고 있는가, 심지어는 악한자라도 하나님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가, 진리는 아닐지라도 보편가치를 존중하고 사회적인 약속을 존중하는 그런 건전한 하나의 정책과 사상인가 하는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의 학자는 학자가 아니라 기술자이다. 학문이 전부 기술로 전락해 버렸다. 그럴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이 그렇게 발전해 왔기에 학문까지도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기독교는 절대 그럴 수 없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지고 있다. 학문이 통합적인 시대에는 철학적인 질문이 있었다. “무엇이 진리인가?” 그러나 학문이 개별적으로 자연과학에 따라 발전한 이후에는 그런 것에 대한 질문이 없다. 그래도 우리가 따라야 할 기준이 있어야 것이 아닌가. 무엇이 진리이고 옳은 것인지를 결정할 때 상대주의가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것이 옳은지 합의하자 라며 전문가들이 모여 합의하면 될 것이 아니다. 음악이 무엇인가? 과거의 음악의 정의와 지금 음악의 정의가 다르다. 지금 음악가들이 모여서 이것을 음악으로 하자고 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것도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다는 과거의 진리가 이제는 두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합의하자고 해서 새롭게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학문이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개별화되고 상대화되어서 절대 즉 하나님이 밀려 나신 것이다. 절대가 없어졌기에 서로가 좋은 것으로 진리를 결정하는 시대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정치 현실을 보아야 한다. 견딜 수 없는 거짓말과 온갖 것을 다하지만 그 사람들은 거짓말을 거짓말로 생각하지 않고 시대를 살아가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기독교인은 그것을 용납을 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교회 안까지 들어와 있다. 굉장히 심각하다. 그런 시대를 분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그런 그리스도인을 키워내는 것이 필요하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기독교가 하나님 나라의 공공의 영역에, 하나님이 미국이라는 나라와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어떤 역할을 하기를 원하시는데,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공공의 영역이다. 그곳에 나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대로 이끌어 가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신다. 공공의 영역이다. 그런데 오늘의 기독교는 교회적으로도 개인적으로도 너무 개인적으로 기울져 있다. 개인이 복 받고 잘되고, 교회가 부흥하고 우리 교회가 커지고... 그래서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 나라와 아무 상관없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공공의 영역에서 빛을 발할 수 있는 개인을 키워내는 기관이다. 내가 이 교회에 속함으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오늘날 현재 하시고 계시는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한 것이 있다. 과거는 성직과 일반직을 나누어서 성직은 거룩하고 소명이고 세상일을 하는 일반인들은 세속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칼빈이나 루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장에서 채소를 팔던 생선을 팔던 목회를 하던 선교를 하던 동일하게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보는 것이다. 칼빈이 굉장히 강조한 것이다. 중세의 사람들은 수도원에 들어가 경건의 생활을 했지만 칼빈이 주장한 것은 시장 한복판에서 경건이다. 장사하면서 농사를 지으면서 목축하면서 그것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다.
칼빈이 루터보다 더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이다. 칼빈의 뒤를 이어 후예들이 강조한 것은 하나님의 전적주권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어디에도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정말 종교개혁이 인류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어떻게 보면 자연과학이 발달한 것도 종교개혁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에 덕을 입어 발전했던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반기독교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재미있다. 종교개혁 덕에 그것들이 발전했는데 이율배반적이다. 자기 어머니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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