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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목사 “선하시고 정직하신 여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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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1ㆍ 20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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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회기 뉴욕지구한인목사회(회장 정관호 목사)는 회칙개정을 위한 임시총회를 10월 8일(화) 오전  뉴욕늘기쁜교회에서 열었다. 

 

앞서 드려진 예배에서 올해 은퇴한 황상하 목사가 시편 25:1-11 말씀을 본문으로 “선하시고 정직하신 여호와”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예배후 여러 목회자들이 황상하 목사에게 감사의 인사를 나누었다. 과연 어떤 설교내용이었을까?

 

황상하 목사는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선하시고 정직하신 분으로 계시하신 것을 통해 “우리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선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고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나는 선하고 정직하지 못하지만 선하신 하나님에게 편승해서 가면 된다”며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인도하심을 간구해야 하며, 삼라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직하심을 깨닫고 만날 수 있기”를 축복했다.290278c33d3aaefcee5f95e6ecae08df_1728470998_56.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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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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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메시지 내용이다.

 

1.

 

오늘 본문은 다윗의 시인데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과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깨달은 다윗이 그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계시의 내용이다. 그 내용은 절대적인 하나님 앞에 일절 변명의 여지가 없는 한 죄인의 성실하고 정직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난 이후에 하나님 외에는 바랄 것이 없으며, 의지할 곳도 없다고 전제하고 용서와 은총을 간구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아마도 다윗이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를 신뢰하고 따르던 우리아의 아내를 범한 이후에 그 죄를 지적받자 회개한 이후에 이 사실을 깨달은 것 같다. 그래서 다윗이 자신의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그 깨달음이 좀 특별하다.

 

시편 51편 5절에 보니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한다. 보통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생각할 때는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라고 생각하지만, 다윗은 반대로 내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인이라서 죄를 지었다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고 죄 중에 나를 낳았다. 그리고 그 자신도 죄 중에 솔로몬을 잉태했고 솔로몬을 죄 중에 낳았다. 그의 고백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죄악 중에 잉태되고 죄악 중에 태어났고 그 존재 자체가 죄인이란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2.

 

오늘 본문의 핵심이 되는 구절은 8절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니 그러므로 그 도로 죄인을 교훈하시리로다” 이다. 이 말씀은 먼저 다윗 개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계시라는 것은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을 다윗에게 드러내 보여 주셨다. 그리고 다윗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깨달았다. 그것이 바로 8절 말씀, 여호와는 선하시고 정직하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인간의 절대적인 필요,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창조의 하나님으로 당신 자신을 계시할 때에는 그 창조에 대한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고, 구원의 하나님, 치료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공유의 하나님,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남편, 나그네의 친구, 외로운 자의 친구, 그렇게 자기 자신을 계시할 때는 그 계시를 받는 자들의 절실한 형편 때문에 그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시는 것이다. 빛이 필요한 자에게 빛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이 필요하고 절실한데도 빛을 깨닫지 못해서 빛으로 나오지 아니하였다고 하는 것이 요한이 증거한 내용이다. 

 

오늘 8절은 하나님 자신을 선하시고 정직하신 분으로 계시하셨다. 이 계시가 전제하는 것은 다윗은 선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감사하게도 다윗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범죄와 실수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당신 자신을 선하시고 정직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해 주신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저와 여러분이 선하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3.

 

자 그렇다면 하나님은 선하시다고 했는데 선이 도대체 뭔가?

 

우리가 그냥 막연하게 생각하면 다 아는 것 같지만, 질문을 받으면 그 선이 무엇인지 대답하기가 만만치 않다. 선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이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의미이다. 선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선은 하나님의 속성이면서 하나님의 뜻이면서 인간에게 유익한 것이다. 인간에게 좋고 유익한 것이 선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진정 좋고 유익한 선은 하나님 자신임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근데 사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말은 사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을 우리에게 알아듣기 위해 설명하기 위해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선 자체이시고 하나님은 정직 자체이시고 하나님은 사랑 자체이시다. 그래서 요한의 신약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든지, 어떤 역사적 사건을 우리가 대하든지, 어떤 사건 사고를 만나든지, 우리가 자연을 만나든지 간에, 그 가운데 참 아름답고 선한 것을 만날 때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을 우리가 발견해야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와 같은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삼라만상을 바라보았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시19:1~3)” 그는 들었다.

 

4.

 

하나님의 계시는 66권의 특별계시를 통해서도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만, 당신이 창조하신 삼라만상 그리고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와 예술과 학문과 모든 것들을 통해서도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데도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삼라만상을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더군다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을 보고도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지 못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은폐의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은폐 방식을 취하기 때문이다. 계시라는 것은 들어내 보여준다는 말이고 은폐라는 것은 감춘다는 말인데, 드러내 보여주어야 될 계시가 은폐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발생시킨다. 보여주시는데 가려진 것이다. 

 

프랑스의 임마누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가 그 탈무드의 주석가로 알려져 있다. 이 분이 주장한 것 중에 아주 인상적인 것이 있는데 “타인의 얼굴은 하나님의 가면이다”는 얘기를 했다. 레비나스의 깨달은 바에 의하면 여러분 주위에 앉아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 가면을 쓰고 거기 앉아 계신다는 것이다. 이 철학자와 하나님의 계시를 단순히 관념화해서 개념만 해서 설명한 것이 아니고 그것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신 것이다.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고, 그들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내게 하지 않은 거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가까이 계신 어떤 사람과 싸웠다면 여러분 하나님과 싸운 것이다. 어떤 사건 상황에 대해서 여러분이 불평하고 정말 감사하지 못한다면, 그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대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늘 긴장하고 깨어 있어야 할 이유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의 은폐성 때문입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 깨달을 수 있다. 하지만 또 한 편 우리가 그것을 보고 듣고 깨닫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령께서는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깨닫게 해 주시지만 그것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열심히 공부하고 사모하고 노력하는 자에게 보여주시고 듣게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십니다.

 

5.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정직하신 여호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우리가 정직하지도 선하지도 않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선과 악의 중립지대는 없다. 우리는 선하든지 악하든지 둘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우리 모두는 악한 존재들이니다. 다윗처럼 철저하고 절실하게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려야 할 존재들이다. 우리에게 선한 것이 없다.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해 본다면, 남을 해코지하려는 마음만 품고 다니는 그런 존재들이다. 내 이익만 챙기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훔치려고 하고 빼앗으려고 하는 그런 존재들이라는 이야기다. 우리 자신을 조금만 관찰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는 죄를 지어서 죄인인 것이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늘 죄를 짓는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존재가 없다는 것이 본문의 메세지이다. 그래서 1절 말씀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가운데 우러러 본다는 것이 어떤 그 물리적인 형상을 바라본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기에 하나님을 우러러 본다는 말이 하나님의 뜻과 그분의 속성과 그분의 섭리와 계획을 사모하면서 알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뜻 아니겠는가?

 

왜 주님을 우러러 보는가? 내 경험과 내 지혜로는 문제를 풀어갈 수 없기 때문에, 내 인생에 해답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어떤 문제의 해답도 나 자신의 경험과 학자들의 이론과 그 어떤 사상과 철학에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오직 여호와만 바라보는 것이다. 그분께만 해답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어떤 연회에서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살인이 나쁘기 때문에 신이 하지말라고 했느냐, 신이 살인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살인이 나쁘냐?” 유티프론이란 제자가 대답하기를 “그야 살인이 나쁘니까 신이 하지 말라고 했겠지요”라고 했다. 소크라테스는 “살인이 나쁘다는 것을 일깨우는 어떤 기준이 있어서 신이 그 기준에 비추어 보아 살인이 나빠서 하지 말라고 했다면 그 신은 신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니까 다른 제자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신이 살인을 하라고 명령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다. 소크라테스가 대답하기를 “신이 살인을 하라고 명령하면 명령하는 순간 살인이 선이 된다. 그러니까 걱정할 것 없다”라고 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이외의 선이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 이외에 의가 없다. 하나님 자신이 선이요. 하나님 자체가 의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고 그 하나님을 정말 바르게 우리는 믿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된다.

 

6.

 

근데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얻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지만 하지 않는 못된 습관들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공부하는 것이다. 공부를 안 한다. 성경도 읽고, 기도도 늘 하고, 목회도 부지런히 하는데 목사들의 약점은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의사들도 늘 논문을 쓰고, 법조인들도 새로운 법이 자꾸 만들어지기에 계속 공부한다. 교수들도 논문을 계속 발표해야 된다. 그래야 생존한다. 

 

목사들은 신학교 졸업하면 공부할 기회가 없다. 완전히 고립이 되어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는 것이다.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은 공부도 아니다. 인문이다. 뭐 신학교에서 열심히 하신 분들은 모르겠지만 제 경우는 그렇다. 신학교에서 인문을 공부하고 졸업하고 난 다음부터 진짜 공부하는 것이다. 기라성 같은 신학자들, 이 시대를 좌지우지했던 사상가 철학자 정치가들,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원리 정치원리 문화와 예술정신들을 공부해야 된다. 그런 것에 의해서 영향받는 사람들을 가르쳐야 되고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되니, 그런 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된다. 

 

여러분 공부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뛰어난 학자들과 뛰어난 사상가들은 천재들이다. 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보내셨다. 그 사람들의 시리즈 쓴 책들을 읽어보면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코넬루스의 책을 읽어보니 자동적으로 게알더스 보스를 안 읽을 수가 없었다. 게알더스 보스를 읽게 되면 헤르만 바빙크와 아브라함 카이퍼를 보게 되고, 그들을 만나게 되면 칼빈을 보게 되고, 칼빈의 저서인 기독교 강요를 읽어보면 어거스틴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 위에 사도 바울이 있고, 그 위에 예수 그리스도,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시는 거 아니겠는가? 

 

우리가 구체적인 한 말씀을 대할 때에 구체적 말씀만 생각하지 않고,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언약에 조건 안에서 언약의 의무규정으로 구체적 말씀을 주셨으니까, 구체적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생각하고, 그 언약 너머에는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가 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기 전에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신 하나님의 구원행위가 있다. 그 구원의 행위를 기억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행위 그 너머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있다.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든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이든지, 시시때때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이든지 그 너머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우리는 언제나 기억해야 된다. 더듬어 찾아가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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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전제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 스스로를 알지 못한다. 그것의 대표적인 경우가 공산주의 아니겠는가? 공산주의는 무신론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 이론이 아무리 탁월해도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모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면 인간을 모르는 것이다.

 

마르크스와 함께 공산주의의 창시자인 엥겔스는 고등학교 때까지 신실한 기독 청년이었다. 신앙의 시를 쓸 만큼 앵겔스는 아주 독실한 신앙인이었지만, 나중에는 공산주의의 이론이 되는 자본론을 마르크스와 함께 썼다. 하나님으로부터 떠나면 아무리 이상적이고 좋은 방법도 인간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재난이 되고 만다.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목사인 라인홀드 니이버는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An moral man and an immoral society)>라는 책을 썼다. 우리가 다 아는 교리 성경 말씀이지만 그 저서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개인은 순수하고 도덕적인데, 그 순수한 개인이 모인 집단은 비도덕적이라는 것이 충격적이다. 개인은 순수하게 나라에 충성하고 세금도 잘 내고 국가의 일이라면 앞장서서 하는데, 그들이 모인 국가는 이기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도 그럴 수 있다. 성도들이 열심히 충성하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그러는데 그런 교인들이 모여서 이기적인 집단을 이룰 수 있다. 교인들이 순수하다고 해서 교회라는 집단이 순수한 것은 아니다. 국민이 순수하다고 해서 국가가 순수하지 않다. 모든 국가는 이기적입니다. 니이버에게는 고민이었다. 그가 책을 쓰고 난 다음에 친구를 만나서 “내가 책 제목을 잘못 붙였다. ‘도덕적인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가 아니라, ‘비도덕적인 인간과 더 비도덕적인 사회’ 이렇게 붙여야 되었다”라고 했다.

 

그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영국의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이란 책을 썼으며 자본주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했다. 그분이 그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자본주의 인프라는 인간의 이기심이라고 했다. 이기적인 개인들이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기업하고 장사하고 그렇게 하는데 그 사람들이 모여서 공공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래서 아담 스미스는 자본주의에 대한 기능에 대한 설명 가운데 ‘인비지블 핸즈’라는 이야기를 했다. 즉 ‘보이지 않는 손’이다. 과학적으로 1 더하기 1은 2이다. 근데 이기적인 사람이 모여 집단을 이루어서 전체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가? 그걸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래서 그가 도입한 개념이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들이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기적으로 기업을 하고 장사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공공의 이익을 창출한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기능에 대한 설명이다. 저는 애덤 스미스가 얘기했던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을 ‘하나님의 손’이라고 저는 믿는다. 아마도 그도 그렇게 믿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애덤 스미스가 경제학을 공부하기 전에 신학을 공부했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도 잘 모르고, 안다고 해도 별로 관심을 안 기울인다. 그래서 그는 어떤 신학으로 사회적인 어떤 기능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공산주의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상당히 선한 의도로 모든 사람이 같이 노력하고 협력해서 잘사는 세상을 한번 만들어보자고 했지만 본의 아니게 거짓말이 되었다. 본의 아닌 이렇게 인류를 속였으며, 본의 아니게 인류에게 큰 해악을 끼쳤다. 하나님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는 자들이 아주 그럴듯한 이론으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회 과학을 가르치는데, 의도는 좋지만 결국은 사람을 속이고 거짓말 하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선하시고 하나님만이 정직하시다. 하나님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8.

 

우리가 욥을 잘 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엄청난 복을 받았지만 엄청난 고난도 받았다. 욥은 도대체 왜 자신이 이런 일을 당해야 되느냐 고민이 되어서 견딜 수 없었다. 기라성 같은 친구들이 욥이 죄를 지었으니까 그렇다고 했다. 욥기서를 읽어보면 친구들의 말이 구구절절 맞다. 얼마나 똑똑하고 얼마나 스마트하고 얼마나 깊이가 있는지 모른다. 근데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이 욥과 친구들을 비교해서 평가하시는데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같이 정당하지 못함이니라”라고 하셨다.

 

인간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 불완전한 것이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님과 함께하겠다는 베드로의 말이 거짓말이었다. 결코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다. 십자가를 지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고 자신이 막겠다고 했는데 몰라서 거짓말을 하고, 만용을 부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열정도 많고 진정성도 있는데, 열정과 진정성 가지고 우리가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할 수 없다. 기독교의 계시를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직하심은 논리적인 것으로 설명할 수 없고 논리적인 것으로 이해할 수 없다. 

 

길을 갈 때에 오늘 본문을 보면 제가 그런 느낌을 받는다. 하나님만 우러러 본다. 지도도 없고 GPS도 없던 시대에 길을 찾아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제가 백악관을 찾아간다고 치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워싱턴까지 왔는데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물었다. 친구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 물으면 옆에 건물을 가르쳐 주면 길을 가르쳐 주고, 가다가 또 길을 못찾으면 다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지금 어디에 있는데 백악관에 어떻게 가는지 묻는다. 우리 하나님을 믿는 것은 그렇게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는 지식이라는 것이 완전해서, 한번 가르쳐주면 성령이 한번 나한테 역사하고 체험하면 그냥 줄줄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니고, 한발 내딛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한발 내딛고 그 다음 또 성령이 인도에서 하셔야 된단 얘기다. 그 다음에 어떻게 내디뎌야 됩니까?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될까요? 물어야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했을까? 그 다음 스탭을 어떻게 내디뎌야 될지 우리가 모르니까, 어떻게 말해야 될지 모르니까, 어떤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모르니까. 어떤 것이 선하고 어떤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나에게 유익하고 상대에게 모두에게 유익한 것이 모르니까, 두렵고 떨림으로 성능의 인도하심을 우리가 의지해야 되는 거 아니겠는가? 그렇게 해 서 백악관을 찾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성령에 인도하심은 그런 것이다. 한 스텝 내딛고 다음 스텝은 모르는 것이다. 

 

다윗은 내 길을 지도해 주시고 내 길을 인도해 주시고, 소싯적 내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한다. 다윗이 어릴때에 무슨 죄를 많이 지었다 하는가? 참과 거짓, 정직한 것과 정직하지 않은 것이 우리의 상식적인 이해하고 다르다. 그게 뭔가 하면 하나님의 선하심과 하나님의 공의를 모르는 것이 정직하지 못한 것이다. 그 놀라운 사실에 비추어 볼 때의 내 소싯적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덤벙대는 것이 다 죄인 것이다.

 

9.

 

제가 전도사와 강도사 때 설교를 열심히 했는데, 지금 그 설교를 돌아보면 얼마나 부끄러운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얼마나 확신하게 외쳤는지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뜨겁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깨달았으면 얼마나 많이 깨달았고 알면 얼마나 많이 알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다윗이 깨달은 그리고 다윗에게 보여주신 선하고 정직하신 여호와, 그 말은 다윗이 나는 정직하지도 못하고 선하지도 못하다는 말이다.

 

이 말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너도 정직하지 못하고 너도 선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서 하나님 내 길을 인도해 주십시오, 나를 사용해 주십시오 해야 한다. 주위에 있는 모든 분들과의 관계와 여러분의 가정에서 대인관계에서 매일 접하는 모든 삼라만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정직하심을 깨닫고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린 아무리 노력해도 정직해질 수도 없다. 그런데도 왜 우리에게 그걸 요구하시는가?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붙들라는 것이다. 나는 선하지 못하지만 선하신 하나님에게 편승해서 가면 된다. 나는 정직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정직하심에 편승해서 가면 된다. 죄인이기 때문에 내 존재가 정직해질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많이 노력하고 애썼지만 내가 한 것이 아니오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는 조금 바르게 한다고 하고 선한 것을 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 편승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적으로 선한 사람 없다. 정직한 사람은 없으며 다 거짓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이 사실을 통렬하게 깨닫고 받아들이고, 그 다음 스텝을 두렵고 떨림으로 내딛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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