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담임목사 세대교체 이룩하고 은퇴하는 손인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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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2013-12-23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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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인식 목사 북한선교사 파송예배 및 송별예배가 지난 15일 오후 5시 베델한인교회서 열렸다. 이날 ‘감사합니다’라고 쓴 케익 앞에선 후임 김한요 목사(왼쪽부터), 손인식 목사, 손승옥 사모, 그리고 김한요 목사의 부인 김정연 사모.
건강한 담임목사 세대교체 이룩하고 은퇴하는 손인식 목사
“이제 북한을 위한 ‘채찍 선교사’로 살겠습니다”
남가주 어바인에 자리잡고 있는 베델한인교회를 대형 한인교회의 하나로 성장시킨 후 조기 은퇴하는 손인식 목사는 ‘북한을 위한 통곡기도회’를 창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은퇴 후엔 더욱 본격적으로 북한을 위한 사역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히는 손인식 목사, 예수님처럼 열정적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며 후배목회자들에게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라고 당부하는 손인식 목사를 베델한인교회에서 만났다. [이인미 기자]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목사님, 우선 은퇴하시는 소감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있는데 섭섭은 없고 시원합니다. 대충 대충의 성격이 아니기에 23년 동안 목양이라는 중압감이 늘 있었는데 첫째는 긴장에서 풀려나니 시원하고 두번째는 9년째 목회와 KCC를 함께 하다가 하나만 하게 되니 시원하고 후임자가 놀라운 분이 오셔서 시원합니다. 섭섭은 없어요.
-그동안 성공적인 이민목회를 이루어 오셨는데 성공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끼실지 모르지만 그 동안의 목회의 비결이라면?
▶ 성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인본주의가 끼어들 수 없는 신본주의가 목회의 성격이기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두고 제가 뭐라 하기가 부끄럽네요. 남들에게 그런 말을 듣기도 하는데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right time에, right place, right people들을 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돌아온 돌탕’이기 때문에 목회에 힘들었던 점은 있었지만 목회 자체가 괴롭거나 혐오감이 들거나 내가 뭐하러 이런 짓을 하나?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돌탕으로서 그저 감지덕지하며 목회했지요.
또 하나는 내 스타일이 열정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설교를 해도 그저 죽어라고 합니다. 교인들을 사랑하고 키우는 것도 죽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목회하던 부교역자들에게 “무엇이든 적당, 적당히 하려면 짐 싸가지고 나가라” 했습니다.
저는 열정이 없는 사람과는 밥도 한 끼 먹기 싫어합니다. 밥 먹다가 내게 넘치던 열정이 식어버릴까봐 그래요. 한 여자를 사랑해도 열정으로 38년을 사랑했어요. 하하하. . . 그것이 목회에 도움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열정을 좋아하니까요. 열정 가운데 최대열정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신 그리스도의 열정이기에 결국 그 열정, 그걸 본받는 것이지요.
- 목사님을 뵈니까 생각나는 것이 저도 ‘북한 통곡기도’를 함께 하는 기도동역자입니다. 부모님이 함경도 청진 출신이고 청진에 있는 교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교인들 전체가 저희 조부모님, 일가친척들이예요.
▶ 그 이야길 들으니 10여년전 북한에 자주 출입할 때 연길에서 제가 묵던 숙소에서 두 목사님과 같이 있었는데 청진에서 당 업무 차 연길에 왔던 여인이 한두 달 있는 동안 복음을 처음 듣고 세례 받기를 원했어요. 그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학교에 소속된 명단이 아니면 세례를 줄 수 없었기에 제가 세례를 베풀었지요. 청진에서 온 한 50대 아주머니였어요. 그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쏟아내면서 세례를 받던 생각이 나네요. 그녀가 세례 받은 것을 알면 그대로 장성택이처럼 될텐데...어제 일처럼 그런 생각이 납니다.
-은퇴 후 북한 선교사로 헌신하실 예정인데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 지금도 북한 선교이야기를 나눴지만 복음을 위한 선교사입니다. 저를 말할 때 이름 앞에 ‘북한’이 붙은 것은 북한을 위해 기도하며 북한을 열어주소서, 그런 마음을 알기에 교회가 저를 보내면서 ‘북한선교사 파송예배’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 북한에 언제 들어 가냐? 앞으로 북한 많이 왔다 갔다 하시겠네요? 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선교라 하면 빵공장 세우고 옷가지들 고아원에 갖다 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성격이 아니고 북한에 안 들어가는 북한선교사지요. 지금까지 선교활동을 하신 분들은 몇 천 명이 넘을 거예요. 북한을 직접 출입하시거나 두만강, 압록강, 연변에 훈춘, 도문, 연길, 단동까지 그 주변에서 탈북자들 구출을 위해 뛰거나 그들을 위한 교회를 하거나 수도 없이 많지요. 그 중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진 않고 제가 지난 세월 가졌던 경험으로 볼 때 북한에 안 들어가는 선교사, 하나님의 채찍을 드는 선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다시 말하면 북한에 빵이나 옥수수를 가지고 가는 것이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건 하나의 ‘당근 같은 선교’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까지 당근 말고는 해본 적이 없거든요. 우리가 하나 안 해 본 게 ‘채찍’이예요. 하나님의 권세로 결국 북한이 사는 길은 평양의 독재 가문이 없어져 버리는 그것 밖에는 사는 길이 없어요. 그게 존재하는 한 북한의 불쌍한 동족들을 살릴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 평양을 누가 무너뜨리겠어요? 지금까지 다 안 해 봤나요? 육자회담이다, 핵협상이다, 개성공단이다, 금강산이다, 또 중국이다, 미국이다, 러시아다, 남한의 여러 대통령을 통해서 안 해본 게 없이 다 했어요. 그러나 뭐가 됐나요? 오히려 안 된 것들 뿐이예요.
다시 말하면 저는 그렇게 봐요. 북한을 열고 한민족의 역사를 바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힘을 모을 대로 모으고자 합니다. 미국, 한국 또 한인 교포들의 힘을 모아가지고 저 북한과 북한을 감싸고 있는 중국을 무너트려 주옵소서, 하나님의 정권을 행사하여 주옵소서, 또 그렇게 인간을 파멸시키면서 마치 국가인 것처럼 존재할 수 없도록 자꾸 흔드는 거지요. 동독과 서독이 통일 될 때 상황이 동독을 자꾸 흔들었더라구요. 그래서 정당치 못한 정권은 흔들때 반드시 틈을 보이고 허물어지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떨어지게 하려면 흔들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그런 개념의 선교사예요.
-당근도 필요하지만 본질적인 변화를 가능케하는 ‘채찍선교사’군요.
▶ 진정한 당근이 되려면 채찍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저쪽에서도 받으면서 귀하게 여기지요. 채찍이 없이 싸들고 가기만 하면 거지꼴 된 주제에 고맙게 못 받아요. 채찍만 있으면 가혹한 형벌이 되기에 안 되고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면서 밸런스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 그럼 채찍 선교로서의 구체적인 사역방법을 설명해 주신다면?
▶ 연합입니다. 사무엘이 위기 속에서도 딱 하가지 한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아 모이라”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것입니다. 기드온도 모여서 연합하게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채찍은 연합입니다. 통곡기도대회도 연합하여 서로 울며, 하나님 저 북한 땅을 저 대로 그냥 두시렵니까? 그냥 두지 마시고 하나님의 정권을 행사해 주옵소서, 연합하여 기도했던 것이지요. 한국에서 북한 인권법안을 통과하는데 제가 왔다 갔다 하면서 전력을 다 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연합이예요.
2004년 9월 27일에 열린 1,600명의 코리안 어메리칸 목사님들이 미 전역에서 몰려와서 통곡기도회를 열었을 때 그 연합된 힘을 보고 강사로 왔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놀라서 그 다음날 돌아가 3년 반 묶여 있던 북한인권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어요. 대회가 끝나기 전 그 연락이 와서 우리는 쓰러져 울고 붙잡고 끌어안고 울고 손을 들고 울고... 그것이 하나의 기적이었어요. 연합이지요.
또 북한인권 국제대회를 내년 말부터 시작하는데 그것도 연합운동입니다. 북한의 불쌍한 시민들과 지하교회들, 탈북자와 탈북자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마다 다 회장이지 연합이 어렵잖아요. 뜻밖에 일본에도 많아요. 유럽에도 많고 미국에도 많지요. 그런데 힘은 합쳐야 힘이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자기들 하나 가지고는 큰 눈길을 끌지 못하니까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잖아요.
그래서 북한인권 국제대회라는 하나의 플랫홈을 만들어서 스타일이 다르고 분야가 달라도 목적은 같기에 ‘이치 엔 투게더(each and together)하는구나' 라는 인식을 줄 때 그 자체가 온 세계에 메시지로 전달이 되거든요.
또 한 가지 펼쳐나가고자 하는 것은 내년부터는 도시순회를 하면서 KCC 통곡기도운동, KCC지부를 창설하게 됩니다. 뉴욕이나 에틀란타 등 큰 도시도 포함되지만 흩어져 있는 작은도시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북한선교전략은 한 단어로 연합입니다.
-그 연합의 열정으로 인해 교회들 간의 벽들도 다 헐어지는 연합의 파장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 그렇게 연합될 때 소위 부수적인 것들이 씨너지 효과로 나타나 개체교회들의 연합과 신앙개혁운동으로 확산될 수도 있겠지요.
-조기 은퇴하시는데 끝이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마무리가 대단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지 못한 현실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잖아요.
▶ 제가 인수인계하고 마무리하느라 오죽 바빴겠어요. 예상한 것 보다 2-3배는 힘들더라구요. 그러나 언론 방송과의 인터뷰가 꼭 필요하고 보람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인수인계하고 은퇴하는 이 케이스가 싸움과 욕심으로 범벅된 것이 아닌 것은 최소한 분명합니다. 다들 흐믓해 하고 아름답다고 말들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교회들의 은퇴풍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후임목사의 청빙과정을 설명해 주시지요?
▶ 후임자 청빙이 진행되는 동안 두 달 반 동안 제가 없어져 버렸어요. 한국에 다녀왔지요. 하나님이 청빙위원들을 정하고 그들이 선택했다면 그 분이 우리교회의 베스트다, 무조건 동의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사귐을 가졌어요. 김한요 목사님에 대해 들은 적은 있어도 그와 말을 섞어보고 수저를 섞어 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안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는 게 다 내 맘에 들어요. 내가 청빙위원들에게 맡겼으니 그분들의 결정을 좋아해야 하는데 억지로가 아니고 정말 저절로 되었어요.
4개월 동안 동사목회를 했는데 여호수아가 모세로부터 리더쉽을 인수하는데 줄잡아도 15년은 걸렸잖아요. 그것도 일종의 동사목회지요. 그때부터 그가 동사목회자로 취임하는 첫 주일 제가 설교하면서 선포한 것이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 였어요. 그것이 교회가 살고 교인들과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똑같이 모든 것을 나눠서 했어요. 그는 내게 멘티로, 견습생으로 온 것이 아니기에 저는 그를 훈련시키는 입장이 아니라 다만 소개시키는 입장이었어요.
-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는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그 기간 동안은 멘토가 되어주셔도 좋지 않았을까요?
▶ 그가 흥하기 위해서 내가 할 설교의 분량을 대폭 옮겨 드리고 저는 그 분이 설교자로 섰을 때 사회를 봐 드렸더니 교인들이 처음엔 놀라더라구요. 설교자의 자리에 그를 높이고 사회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도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렇게 소개만 하는 것으로도 멘토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은퇴하면 나도 은퇴해요, 멀리서 여기까지 왜 오겠어요? 그런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후임목사님이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1.5세, 30대 부부들에게 시대에 맞는 놀라운 말씀을 파워풀하게 전파하시니 그런 말이 싹 사라졌어요.
-그런 때 혹시 섭섭하지 않으시던가요?
▶ 나는 시원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예요. 하하하. . . 한 가지가 더 남았어요. 가장 마무리가 잘 되어야 하는 것은 내년 1월 1일 부터예요. 저는 생일이 12월 30일이 되어서 올해 말로 아주 딱 끝나게 되거든요. 그래서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면 철저하게 떠나갑니다.
-어디로 가세요?
▶ 그건 비밀이예요. 1/3은 한국에, 1/3은 미국에, 1/3은 유럽이나 전 세계를 돌며 아까 말씀드린 것들을 실행하기 위해 베델교회 예배는 참석도 안하고 사무실 공간도 물론 없고, 교인들과의 관계도 단절해 버릴 것입니다. 저도 제가 독한 줄 이번에 보니 알겠더군요.
ⓒ 크리스천위클리
건강한 담임목사 세대교체 이룩하고 은퇴하는 손인식 목사
“이제 북한을 위한 ‘채찍 선교사’로 살겠습니다”
남가주 어바인에 자리잡고 있는 베델한인교회를 대형 한인교회의 하나로 성장시킨 후 조기 은퇴하는 손인식 목사는 ‘북한을 위한 통곡기도회’를 창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은퇴 후엔 더욱 본격적으로 북한을 위한 사역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히는 손인식 목사, 예수님처럼 열정적으로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이며 후배목회자들에게도 그렇게 열정적으로 살아가라고 당부하는 손인식 목사를 베델한인교회에서 만났다. [이인미 기자]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뵙고 싶었습니다. 목사님, 우선 은퇴하시는 소감을 좀 말씀해 주십시오.
▶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있는데 섭섭은 없고 시원합니다. 대충 대충의 성격이 아니기에 23년 동안 목양이라는 중압감이 늘 있었는데 첫째는 긴장에서 풀려나니 시원하고 두번째는 9년째 목회와 KCC를 함께 하다가 하나만 하게 되니 시원하고 후임자가 놀라운 분이 오셔서 시원합니다. 섭섭은 없어요.
-그동안 성공적인 이민목회를 이루어 오셨는데 성공이란 말에 거부감을 느끼실지 모르지만 그 동안의 목회의 비결이라면?
▶ 성공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인본주의가 끼어들 수 없는 신본주의가 목회의 성격이기에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두고 제가 뭐라 하기가 부끄럽네요. 남들에게 그런 말을 듣기도 하는데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right time에, right place, right people들을 주셨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 자신이 ‘돌아온 돌탕’이기 때문에 목회에 힘들었던 점은 있었지만 목회 자체가 괴롭거나 혐오감이 들거나 내가 뭐하러 이런 짓을 하나?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적이 없어요. 돌탕으로서 그저 감지덕지하며 목회했지요.
또 하나는 내 스타일이 열정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설교를 해도 그저 죽어라고 합니다. 교인들을 사랑하고 키우는 것도 죽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와 함께 목회하던 부교역자들에게 “무엇이든 적당, 적당히 하려면 짐 싸가지고 나가라” 했습니다.
저는 열정이 없는 사람과는 밥도 한 끼 먹기 싫어합니다. 밥 먹다가 내게 넘치던 열정이 식어버릴까봐 그래요. 한 여자를 사랑해도 열정으로 38년을 사랑했어요. 하하하. . . 그것이 목회에 도움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열정을 좋아하니까요. 열정 가운데 최대열정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까지 가신 그리스도의 열정이기에 결국 그 열정, 그걸 본받는 것이지요.
- 목사님을 뵈니까 생각나는 것이 저도 ‘북한 통곡기도’를 함께 하는 기도동역자입니다. 부모님이 함경도 청진 출신이고 청진에 있는 교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면 교인들 전체가 저희 조부모님, 일가친척들이예요.
▶ 그 이야길 들으니 10여년전 북한에 자주 출입할 때 연길에서 제가 묵던 숙소에서 두 목사님과 같이 있었는데 청진에서 당 업무 차 연길에 왔던 여인이 한두 달 있는 동안 복음을 처음 듣고 세례 받기를 원했어요. 그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학교에 소속된 명단이 아니면 세례를 줄 수 없었기에 제가 세례를 베풀었지요. 청진에서 온 한 50대 아주머니였어요. 그렇게 부들부들 떨면서 눈물을 쏟아내면서 세례를 받던 생각이 나네요. 그녀가 세례 받은 것을 알면 그대로 장성택이처럼 될텐데...어제 일처럼 그런 생각이 납니다.
-은퇴 후 북한 선교사로 헌신하실 예정인데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
▶ 지금도 북한 선교이야기를 나눴지만 복음을 위한 선교사입니다. 저를 말할 때 이름 앞에 ‘북한’이 붙은 것은 북한을 위해 기도하며 북한을 열어주소서, 그런 마음을 알기에 교회가 저를 보내면서 ‘북한선교사 파송예배’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 북한에 언제 들어 가냐? 앞으로 북한 많이 왔다 갔다 하시겠네요? 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한선교라 하면 빵공장 세우고 옷가지들 고아원에 갖다 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성격이 아니고 북한에 안 들어가는 북한선교사지요. 지금까지 선교활동을 하신 분들은 몇 천 명이 넘을 거예요. 북한을 직접 출입하시거나 두만강, 압록강, 연변에 훈춘, 도문, 연길, 단동까지 그 주변에서 탈북자들 구출을 위해 뛰거나 그들을 위한 교회를 하거나 수도 없이 많지요. 그 중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진 않고 제가 지난 세월 가졌던 경험으로 볼 때 북한에 안 들어가는 선교사, 하나님의 채찍을 드는 선교사가 되고 싶었어요.
다시 말하면 북한에 빵이나 옥수수를 가지고 가는 것이 선교사로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그건 하나의 ‘당근 같은 선교’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까지 당근 말고는 해본 적이 없거든요. 우리가 하나 안 해 본 게 ‘채찍’이예요. 하나님의 권세로 결국 북한이 사는 길은 평양의 독재 가문이 없어져 버리는 그것 밖에는 사는 길이 없어요. 그게 존재하는 한 북한의 불쌍한 동족들을 살릴 길이 없어요. 그런데 그 평양을 누가 무너뜨리겠어요? 지금까지 다 안 해 봤나요? 육자회담이다, 핵협상이다, 개성공단이다, 금강산이다, 또 중국이다, 미국이다, 러시아다, 남한의 여러 대통령을 통해서 안 해본 게 없이 다 했어요. 그러나 뭐가 됐나요? 오히려 안 된 것들 뿐이예요.
다시 말하면 저는 그렇게 봐요. 북한을 열고 한민족의 역사를 바꾸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기에 힘을 모을 대로 모으고자 합니다. 미국, 한국 또 한인 교포들의 힘을 모아가지고 저 북한과 북한을 감싸고 있는 중국을 무너트려 주옵소서, 하나님의 정권을 행사하여 주옵소서, 또 그렇게 인간을 파멸시키면서 마치 국가인 것처럼 존재할 수 없도록 자꾸 흔드는 거지요. 동독과 서독이 통일 될 때 상황이 동독을 자꾸 흔들었더라구요. 그래서 정당치 못한 정권은 흔들때 반드시 틈을 보이고 허물어지게 되어 있어요.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떨어지게 하려면 흔들어야 해요. 그래서 저는 그런 개념의 선교사예요.
-당근도 필요하지만 본질적인 변화를 가능케하는 ‘채찍선교사’군요.
▶ 진정한 당근이 되려면 채찍이 있어야 해요. 그래야 저쪽에서도 받으면서 귀하게 여기지요. 채찍이 없이 싸들고 가기만 하면 거지꼴 된 주제에 고맙게 못 받아요. 채찍만 있으면 가혹한 형벌이 되기에 안 되고 당근과 채찍을 병행하면서 밸런스를 추구하는 것이지요.
- 그럼 채찍 선교로서의 구체적인 사역방법을 설명해 주신다면?
▶ 연합입니다. 사무엘이 위기 속에서도 딱 하가지 한 것이 있다면 “이스라엘아 모이라”였습니다. 미스바에 모인 것입니다. 기드온도 모여서 연합하게 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있는 가장 큰 채찍은 연합입니다. 통곡기도대회도 연합하여 서로 울며, 하나님 저 북한 땅을 저 대로 그냥 두시렵니까? 그냥 두지 마시고 하나님의 정권을 행사해 주옵소서, 연합하여 기도했던 것이지요. 한국에서 북한 인권법안을 통과하는데 제가 왔다 갔다 하면서 전력을 다 할 것입니다. 그것도 하나의 연합이예요.
2004년 9월 27일에 열린 1,600명의 코리안 어메리칸 목사님들이 미 전역에서 몰려와서 통곡기도회를 열었을 때 그 연합된 힘을 보고 강사로 왔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이 놀라서 그 다음날 돌아가 3년 반 묶여 있던 북한인권 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어요. 대회가 끝나기 전 그 연락이 와서 우리는 쓰러져 울고 붙잡고 끌어안고 울고 손을 들고 울고... 그것이 하나의 기적이었어요. 연합이지요.
또 북한인권 국제대회를 내년 말부터 시작하는데 그것도 연합운동입니다. 북한의 불쌍한 시민들과 지하교회들, 탈북자와 탈북자 가족을 위해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저마다 다 회장이지 연합이 어렵잖아요. 뜻밖에 일본에도 많아요. 유럽에도 많고 미국에도 많지요. 그런데 힘은 합쳐야 힘이지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자기들 하나 가지고는 큰 눈길을 끌지 못하니까요. 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잖아요.
그래서 북한인권 국제대회라는 하나의 플랫홈을 만들어서 스타일이 다르고 분야가 달라도 목적은 같기에 ‘이치 엔 투게더(each and together)하는구나' 라는 인식을 줄 때 그 자체가 온 세계에 메시지로 전달이 되거든요.
또 한 가지 펼쳐나가고자 하는 것은 내년부터는 도시순회를 하면서 KCC 통곡기도운동, KCC지부를 창설하게 됩니다. 뉴욕이나 에틀란타 등 큰 도시도 포함되지만 흩어져 있는 작은도시도 포함됩니다. 그래서 북한선교전략은 한 단어로 연합입니다.
-그 연합의 열정으로 인해 교회들 간의 벽들도 다 헐어지는 연합의 파장을 기대하고 싶습니다.
▶ 그렇게 연합될 때 소위 부수적인 것들이 씨너지 효과로 나타나 개체교회들의 연합과 신앙개혁운동으로 확산될 수도 있겠지요.
-조기 은퇴하시는데 끝이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마무리가 대단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렇지 못한 현실을 우리가 목도하고 있잖아요.
▶ 제가 인수인계하고 마무리하느라 오죽 바빴겠어요. 예상한 것 보다 2-3배는 힘들더라구요. 그러나 언론 방송과의 인터뷰가 꼭 필요하고 보람 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인수인계하고 은퇴하는 이 케이스가 싸움과 욕심으로 범벅된 것이 아닌 것은 최소한 분명합니다. 다들 흐믓해 하고 아름답다고 말들 합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교회들의 은퇴풍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후임목사의 청빙과정을 설명해 주시지요?
▶ 후임자 청빙이 진행되는 동안 두 달 반 동안 제가 없어져 버렸어요. 한국에 다녀왔지요. 하나님이 청빙위원들을 정하고 그들이 선택했다면 그 분이 우리교회의 베스트다, 무조건 동의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리고 사귐을 가졌어요. 김한요 목사님에 대해 들은 적은 있어도 그와 말을 섞어보고 수저를 섞어 본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내가 안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어요. 하는 게 다 내 맘에 들어요. 내가 청빙위원들에게 맡겼으니 그분들의 결정을 좋아해야 하는데 억지로가 아니고 정말 저절로 되었어요.
4개월 동안 동사목회를 했는데 여호수아가 모세로부터 리더쉽을 인수하는데 줄잡아도 15년은 걸렸잖아요. 그것도 일종의 동사목회지요. 그때부터 그가 동사목회자로 취임하는 첫 주일 제가 설교하면서 선포한 것이 “그는 흥하여야 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겠다” 였어요. 그것이 교회가 살고 교인들과 모두가 사는 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똑같이 모든 것을 나눠서 했어요. 그는 내게 멘티로, 견습생으로 온 것이 아니기에 저는 그를 훈련시키는 입장이 아니라 다만 소개시키는 입장이었어요.
- 그는 흥하여야겠고 나는 쇠하여야겠다는 말씀이 감동적입니다. 그 기간 동안은 멘토가 되어주셔도 좋지 않았을까요?
▶ 그가 흥하기 위해서 내가 할 설교의 분량을 대폭 옮겨 드리고 저는 그 분이 설교자로 섰을 때 사회를 봐 드렸더니 교인들이 처음엔 놀라더라구요. 설교자의 자리에 그를 높이고 사회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으로도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렇게 소개만 하는 것으로도 멘토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은퇴하면 나도 은퇴해요, 멀리서 여기까지 왜 오겠어요? 그런 분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후임목사님이 메시지를 강하게 전하고 1.5세, 30대 부부들에게 시대에 맞는 놀라운 말씀을 파워풀하게 전파하시니 그런 말이 싹 사라졌어요.
-그런 때 혹시 섭섭하지 않으시던가요?
▶ 나는 시원하기로 결심한 사람이예요. 하하하. . . 한 가지가 더 남았어요. 가장 마무리가 잘 되어야 하는 것은 내년 1월 1일 부터예요. 저는 생일이 12월 30일이 되어서 올해 말로 아주 딱 끝나게 되거든요. 그래서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면 철저하게 떠나갑니다.
-어디로 가세요?
▶ 그건 비밀이예요. 1/3은 한국에, 1/3은 미국에, 1/3은 유럽이나 전 세계를 돌며 아까 말씀드린 것들을 실행하기 위해 베델교회 예배는 참석도 안하고 사무실 공간도 물론 없고, 교인들과의 관계도 단절해 버릴 것입니다. 저도 제가 독한 줄 이번에 보니 알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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