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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역설적 능력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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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2-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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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이 많거나 공부를 많이 했거나 높은 권력을 가졌거나 인기가 많은 사람이 겸손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나를 칭찬하면 교만하게 될까 조심해야 합니다. 부자, 학자, 권력자 중에 겸손한 사람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스코틀랜드 어느 목사님의 “교인 천 명 이상 모이는 교회 목사는 주님을 교회의 주인으로 인정하기가 어려울 것이다.”라고 했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사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몇몇 큰 교회 목회자들의 태도와 말들 때문에 정말 화가 납니다. WCC를 옹호하고 홍보하던 큰 교회 목사가 돌연 입장을 바꾸는 것이라든가, 아들을 교회 후임자로 앉혀놓고 세습이라는 비난을 받자, 원로목사와 담임목사 사이에 경쟁과 시기로 인한 문제 발생을 예방하는 데는 세습보다 좋은 방법이 없다는 식의 논리를 펴는 경우라든가, 한독선연(한국독립교회선교단체연합회)을 결성하여 무자격자들에게 목사안수를 주는 것이라든가, 성경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도무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닌 주장들을 큰 교회 목회자들에게서 듣게 될 때 나는 화가 납니다. 종교 개혁자들도 말이 거칠었는데, 상식도 없고, 논리도 없고, 무엇보다 성경에 대해 무지하면서 교만했던 교회 지도자들을 상대하여 진리를 위한 싸움을 하자니 답답하고 화가 났을 것입니다.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신학자가 토마스 아퀴나스인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철학자가 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에 루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얼마나 미웠던지 “아직도 죽은 개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자가 있다.”고 하였는데, 그 “개”는 바로 아리스토텔레스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루터가 아리스토텔레스를 지목하여 “개”라고 하였지만 그를 추종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나 가톨릭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분노를 그렇게 표출한 것입니다. 요즘 한국의 큰 교회 몇몇 목회자들이나 직업적인 신학자들의 주장과 논리가 너무 유치하고 엉터리여서 진지하고 차분히 논리적으로 대응하고 싶지가 않고 루터처럼 거친 말로 욕을 해 주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목회자의 주장이 노상 약장수의 논리 수준인데도 수천수만 명의 교인들이 모여들고, 목회자가 온갖 범죄에 연루되었는데도 그의 설교를 들으려고 모여드는 교인들의 태도 또한 한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스도인의 주된 관심은 경건이어야 하는데 이들의 주된 관심은 무엇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는 부하고 강하고 능력이 있어야 인정받지만 그리스도인이 그런 것으로 능력을 인정받으려 하는 것은 세속화 된 때문입니다. 성경은 참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9,10)라고 하였습니다. 진정한 경건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화려함이나 능력이 아니라 무명한 자 같고, 죽은 자 같고, 징계를 받는 자 같고, 근심하는 자 같고, 가난 한 자 같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사람들이 보기에 실패하고 불행한 것 같지만 그와 정반대로 행복과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로 보건데 진정한 경건은 역설적인 능력이 틀림없습니다.

숙련된 은행원은 손끝 감각으로 위조지폐를 가려낸다는데,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주장과 메시지가 성경 전체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의 테두리는 벗어나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큰 교회 목회자들의 메시지는 성경에 충실한 것처럼 하지만 결국은 기복적인 방향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그릇된 의도 때문이든지 아니면 실력이 없든지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전함에 있어서도 자신의 의욕이나 욕심을 좇아가서는 안 되고 무능한 설교가 될 것 같은 염려가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은혜를 끼쳐야 한다는 부담이나 소위 히트 치는 설교를 하기 위해 애쓰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설교자는 말씀을 증거 하는 일에서도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라는 역설적 경건의 능력에 의존해야 할 것입니다. 남이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말이나 아이디어나 자극적인 용어를 만들어 사용하여 성경을 reference로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의 야성을 회복하라!”든지 “예배에 성공하는 비결”이라든지 “성공하기 위한 조건”이라든지 “축복 받는 비결”이라든지 “적극적인 사고방식” 같은 것을 메시지화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정당화하기가 어렵습니다.

신실한 메신저는 은혜 끼쳐야 한다는 부담 대신에 책임 맡은 메시지를 바르게 전달해야 한다는 부담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메신저는 메시지 자체보다 청중에게 어필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고 한 것을 깊이 묵상해보아야 합니다. 유능한 설교자, 은혜를 끼치는 설교자, 능력 있는 설교자가 되려는 생각은 세속적 욕망입니다. 대신에 진실한 설교자, 겸손한 설교자, 성실한 설교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설교자가 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참 능력 있고, 학문이 깊고, 명성을 얻은 분이었습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 믿는 자를 핍박하던 그가 주님을 위하여 죽기를 사양하지 않는 충성스러운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도 교만과 자랑의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이 스스로의 인격과 경건의 능력으로 그런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기 때문에 교만하지 못하고 자랑하지 못하게 강제적(?) 장치(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를 그의 몸에 설치 해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예사롭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바울도 교만하거나 자랑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특별 관리가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조금이라도 자랑하고 싶어 하거나 교만하게 될 만하면 그 가시가 그를 찔렀습니다. 그 가시가 사탄의 사자라고 하였으니 그 고통이 이만저만 한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기독교 역사에서 기여한 역할이 중요하고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그도 교만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바울 다음으로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어거스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매우 큰 영향을 많은 사람에게 끼쳤습니다. 그는 탁월한 독자적 학문의 폭과 깊이 있는 영향을 끼쳤고, 또한 경견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기독교 뿐 아니라 일반 철학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별히 시간에 대한 이해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학자들이 그의 이론을 따르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이방의 시간관은 순환적이고 기독교의 시간관은 직선적이라는 것을 주장한 사람이 바로 어거스틴입니다. 그에게 누가 묻기를 “가장 무서운 죄가 무엇입니까?”라고 하자 “가장 무서운 죄는 교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에게도 어거스틴에게도 칼빈에게도 하나님의 나라와 복음을 위해 일할 능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는” 능력이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약할 때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렀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녀들은 상식도 없고, 학문에 무지하고, 세상 물정도 모르고, 정치, 경제, 문화, 예술도 모르는 자로 살아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성경만 아는 것은 성경을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을 알되 성경을 통해서 세상을 알아야 합니다. 좀 어려운 신학 용어를 빌리면 특별 계시를 통해서 일반 계시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신자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역설적 경건의 능력은 겸손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겸손의 그릇은 참으로 큽니다. 못 담을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은혜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에는 시련과 역경과 고통까지도 넉넉히 담을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교만한 사람도 용납하지만 교만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을 업신여깁니다. 겸손한 사람은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교만은 그릇이 좁고 작습니다. 수용성이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교만의 그릇은 안이 불룩한 그릇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담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교만은 쓸모가 없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은혜를 모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에게는 감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사람이 교만한 사람입니다. 교만은 사람을 무능하게 합니다. 무능한 사람은 교만합니다.

어떤 목사님은 스스로 자기가 리더십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법을 잘 알고, 정보가 많고, 인맥이 많아서 누구 못지않게 상황을 잘 파악하고 지혜롭게 잘 대처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것은 참 수가 낮은 유치한 태도입니다. 사람들은 말은 안 해도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지 않습니다. 말은 안 하지만 내 약점을 모르고 있어서 입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똑똑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약삭빠른 고양이 밤눈 어두운 격입니다. 그러면서 대접 받는 것을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명예와 인기를 좇아갑니다. 주위에 있는 친구나 누구라도 자기보다 더 인정받는 것을 못 견딥니다.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인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지도자로는 더구나 자격 미달입니다.

약할 때에 강하게 된다는 것은 자기에게 능력이 없을 때 강하게 된다는 것인데,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습니다. 잘 고쳐지지 않는 육체의 질병이 있습니다.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근심과 걱정거리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나에게 허락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아픔과 문제가 나를 교만하지 못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특별조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프지 않고, 어렵지 않고, 형통하고, 모든 것이 잘되고, 아쉬운 것이 없다면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습니다. 몸살이라도 나야 기도하고, 혈압이라도 높아지고, 콜레스테롤 이라도 높아져야 하나님께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이고 고백입니다. 의사로부터 “조심하십시오.”라는 말이라도 들어야 겸손하게 되고 기도하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까지 하셔서 우리를 겸손하게 하실까요? 겸손이 하나님 자녀의 진실 된 모습이고 하나님 나라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능력 있던 사람도 교만하게 되면 능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 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 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언 16: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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