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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잘못된 문제 인식과 주님의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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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1-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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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 방송사에서 6부작으로 “아우슈비츠”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였습니다. 1부 비극의 시작, 2부 명령과 복종, 3부 죽음의 공장, 4부 부패, 5부 살인과 음모, 6부 해방과 복수, 이 다큐멘터리는 나치 독일의 만행이 규모나 치밀함이나 비인간적인 면이나 잔혹함이나 비이성적인 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 같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직접 가 보아도 짐작하지 못할 많은 것들을 BBC가 밝혀냈습니다. 하지만 나치가 만행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모든 것을 파괴했기 때문에 그들이 저지른 나쁜 일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 다큐멘터리에 여러 명의 생존한 나치 친위대원들의 증언이 나옵니다. 놀라운 것은, 지금까지 그들은 자기들의 한 일이 정당하고 잘 한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크게 잘못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실제로 유대인들은 나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군인으로서 상부의 명령 때문에 그런 짓을 했지만 실제로 유대인을 적으로 간주했고 또한 증오하고 미워했습니다.

기자가 “당신들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은 어린아이와 여자와 노약자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비인간적인 끔직한 짓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자 “당신들은 유대인들이 얼마나 나쁜지를 잘 몰라서 그런다.”고 하였습니다. 나치 독일이나 친위대원들의 그 같은 주장과 생각이 경악스럽지만 또 한 편 유대인들이 그렇게도 나빴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나는 나쁜 유대인을 단 한 사람 경험했습니다. 아파트에 살 때 바로 옆에 사는 유대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베이사이드 폴리스들이 그가 고약한 사람인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폴리스도 본래 그런 사람이니까 결정적 범죄 사실이 아니라면 이웃인 당신들이 참고 살라고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고약하고 나쁘다고 해도 그들에 대한 나치의 행위가 정당화 될 수 없지만 때로 사람들은 잘못된 문제제기와 그릇된 해결방법을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유대인에게는 민족적으로 비극적인 역사가 많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 제사 때에는 3천명의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학살당하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2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이 학살당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식민 통치 아래서나 전쟁 때 점령자들에게 있어서 피지배자들은 짐승이나 물건처럼 취급 받습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사람을 처분해야 하는 더럽고 귀찮은 쓰레기로 취급하였습니다. 나치가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을 데려오면서 부모와 아이들을 분리하였습니다. 아이들만 수천 명이나 되는데, 열차에 아이들을 실을 때 다리를 들어 던졌습니다. 어떤 아이가 자꾸 시끄럽게 울면 아이 다리를 들고 쇠 덩어리 열차에 메쳤습니다. 그러면 이네 조용해지곤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우슈비츠를 다녀오면서도 경험한 바이지만 다큐멘터리를 보고서도 뭐라고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머리가 멍멍하기만 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1절에 어떤 유대인 두어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서 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빌라도가 제사 드리는 유대인들을 성전에서 살해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목도한 유대인들은 놀랐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온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제물에 피를 섞었다고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성전에서 살해당한 이들은 제사를 드리다가 죽었습니다. 역사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순교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은 빌라도가 제물에 피를 섞었다고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제물에 사람의 피가 묻으면 안 됩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이 손에 피를 묻혀도 안 됩니다. 그렇다고 동족이 제사를 드리다가 살해당하여 죽으면서 흘린 피가 제물에 묻은 것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것은 바른 문제제기라고 할 수 없습니다. 상상하건데 유대인들의 뜻밖의 반응에 빌라도가 놀라고 재미있어 했을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사람 죽은 것을 문제 삼은 것이 아니라 제물에 피 묻은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생존한 나치 친위대원이 기자에게 “당신들은 유대인들을 잘 몰라서 그럽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이들은 사람이 물에 빠져 죽어가도 안식일이기 때문에 건져내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고 지난 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제사장은 손에 피를 묻히면 안 되니까, 레위인 역시 죽은 시체를 만지면 안 되니까, 지금은 죽지 않았지만 살리려고 했다가 죽으면 시체를 만진 것이 되니까, 죽어가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간 것일 수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약한 유대인의 못된 면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점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문제를 아주 잘못된 관점에서 인식하고 제기하고 해결하려고 합니다. 한국 인화학교의 “도가니” 비행에 대한 법원과 검찰과 경찰과 교회와 교육청과 구청과, 관련된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미국판 도가니” 사건도 그렇습니다. 펜실베이니아주립대학의 전직 수비코치였던 제리 샌더스키가 최소 15년간 8명의 어린 소년들을 성추행 또는 성폭행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인화학교 이사장처럼 샌더스키도 불우한 청소년들을 돕기 위해 자신이 세운 자선단체에서 만난 소년들을 성추행 또는 성폭행했습니다. 성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한 학생이 신고를 했는데도 대학은 명예가 실추되는 것을 우려해 샌더스키가 지니고 있던 미식축구팀 샤워장 출입 열쇠를 빼앗고 경고 조치를 내리는 데 그쳤습니다. 뒤늦게 사건이 폭로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파문이 확산되자 펜실베이니아주립대는 특별위원회를 설치해 이번 사건 전반에 대한 의혹을 조사하기로 했습니다. 현재 성폭행 사실을 보고 받았던 대학 당국자 2명이 위증죄로 기소됐고, 성폭행 의혹을 받고 있는 샌더스키는 10만 달러의 보석금을 내고 풀려난 상태입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독일이나 일본이나 다 그놈이 그놈입니다. 그런데 문득 영국의 역사가 허버트 버터필드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누구나 히틀러가 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면 그처럼 되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을 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도무지 다른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면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없는, 편협하고 치우친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이기적인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자신의 그와 같은 면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는 경우가 바르고 정당하고 옳은 줄 아는 것이 문제입니다. 물건이나 일을 사람보다 우선 생각하는 것도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 제물에 피 묻은 것을 문제 삼는 그릇된 가치관을 주님께서는 책망하십니다.

모든 경우에 사람을 우선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가 우선이 아니고, 예배당이 우선이 아니고, 예배가 우선이 아니고, 집이 우선이 아니고, 비즈니스가 우선이 아니고, 자동차가 우선이 아니고 사람이 우선입니다. 사람을 살려야 하고, 사람을 위해야 합니다. 사업이나 선행을 하면서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일은 옳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날마다 그런 것들을 사람보다 우선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사람을 불행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불화, 교회 분쟁, 사회갈등, 이기적인 경쟁 이 모두는 사람을 우선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가복은 2장 27절에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상처주고 상처 입고 불행하게 사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위로하고 배려하고 아껴주고 용납하고 참아주고 용서하고 기다리고 믿어주고 사랑해야 합니다. 제물에 피 묻은 것은 문제 삼으면서 사람 죽은 것은 문제 삼지 않는 그런 태도로 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너무 쉽게 자기는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것으로 생각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거의 많은 경우 사람보다 일이나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나 인기나 원칙이나 전통을 우선시합니다. 사람을 우선 배려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마음입니다. 성전에서 살해당한 유대인들은 무슨 죄로 벌은 받은 것인가에 온통 관심을 가졌던 그들에게 예수님은 열매 맺지 않은 무화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3년이나 주인을 실망시킨 무화과나무는 찍힐 처지에 놓였습니다. 그 때 과수원지기가 나서며 자기가 책임지고 1년 더 노력해보겠다고 하였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잘못을 자기가 떠안고 책임지겠다고 합니다. 자기 잘못이 아닌데 책임지겠다고 나섰습니다. 이 과원지기가 바로 주님입니다. 사랑은 용서하는 것이고 참아주는 것이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죄를 내가 책임지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 잘못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실수와 잘못을 내가 책임지는 것이 바른 문제제기요 문제를 해결하는 주님의 방법입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 눅 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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