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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선지자적 비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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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1-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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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예수님께서 제사장, 왕, 선지자의 직임을 수행하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신약에서는 성도를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를 가리켜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임에 참여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가 왕 같은 제사장이지만 선지자라는 언급은 없습니다. 비록 성경이 성도들에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 선지자니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신자의 책임 중에 선지자적 역할이 가장 요청되는 역할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사장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이미 완성하신 일에 참여는 하는 것이고, 왕의 역할은 그 나라가 완성될 때 온전하게 되는 것이지만, 선지자의 역할은 이 땅에 국한 되면서 예수님의 지상명령과 맥을 같이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의하면 선지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사람들에게 전할 때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1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면서 사람들이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럴 경우 선지자는 성과 없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 일을 해야 합니다.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노력해 볼 수 있겠지만 100% 불가능한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듣지 않는 이들을 불가항력적으로 듣게 하실 뜻도 없으신 데도 선지자는 전해야 합니다. 이런 때 선지자는 철저히 비관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자들을 불순종 하는데 버려두실 것이면서 전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래도 전해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을 선지자적 비관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사람이 혹 더듬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일반 은총을 주신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로마서 1:19-20에“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전도를 받지 않아도 불신자가 정직하게 만물을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핑계치 못한다.”는 말이 정당하게 되려면 앞에 한 말이 일반 은총으로도 하나님을 알 수 있어야 됩니다. 따라서 특별계시가 아니더라도 핑계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을 깨닫는 것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전적부패를 말씀하면서 동시에 더듬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셨다고 합니다. 논리적으로 서로 모순되지만 성령께서는 우리가 다 간파하지 못하는 지혜와 지식으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지만 신자가 아무런 대책 없이 모든 것을 성령께 맡겨놓고 팔짱 끼고 지켜보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닙니다. 신자는 불신자와 정치 경제 문화 등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따른 입장과 태도가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천년왕국에 대한 언급(계 20:1-3)이 있는데, 신학자들에 따라 각기 다른 세 가지 천년왕국설이 있습니다. 천년왕국설은 그 주장에 따라 강조점이 다른데, 공통적인 것은 천년왕국설은 사회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천년왕국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정치, 경제, 문화관이 달라집니다.

전천년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후에 천년 왕국이 온다는 설명인데,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 성도는 하늘로 들림 받아 하늘에서 천년동안 왕 노릇 한다는 입장입니다. 이 입장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 적대세력이고 결국 불타 없어질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세상과 교회를 엄격하게 구별합니다.

후천년설은 천년왕국 후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설입니다. 이 입장은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세상은 점점 좋아진다고 보는데, 사람이 노력하면 천국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고 설명합니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사람들, 좀 진보적이고 세속적인 사람들이 이 설명을 선호합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악이 점점 줄어들고 선이 왕성하게 되어 천년왕국이 이루어지는데, 그 후 잠간 동안 배교가 일어나고 재림이 일어난다고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무천년설은 “천년”이란 상징적이라는 설명입니다. 이 입장은 그렇게 긍정적이지도 않고, 그렇게 부정적이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합니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이 이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마귀에게 모든 영역을 내어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화 창조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문화를 통한 성령의 사역을 인정합니다. 이런 면에서는 긍정적입니다. 긍정적이라는 면에서 약간은 후천년적인 요소가 있기도 합니다. 칼빈과 그의 후예들, 그리고 개혁주의는 무천년설 입장을 취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는 개혁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개혁주의가 취하는 무천년설의 입장에 서서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습니다.

개혁주의를 표방하지만 신학은 거의 전천년설이나 후천년설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된 데는 19세기의 자연과학과 그의 배경이 되는 관념주의 철학과 오늘날의 자본주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보수주의 교회들은 자연과학과 관념주의 철학의 폐해를 인하여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진보적 교회는 관념주의 철학과 자연과학의 영향을 받아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천년설의 입장은 지나치게 비관적도 아니고 지나치게 낙관적도 아닙니다. 궁극적으로는 낙관적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비관적입니다. 현실적으로 인간이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신자는 정의와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에게 회개를 외치라고 하실 때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시면서 외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아무런 긍정적 결과가 없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옳고 정당하고 선한 일을 하라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현실에서 선지자적 비관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당위론 적인 것이지 목적론 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결과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고, 옳고 정당하기 때문에 행동하는, 현실적으로는 비관적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긍정적인 선지자적 비관주의를 견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굳어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 겔 2:7; 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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