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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기득권자의 책임, 신자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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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1-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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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기득권자들의 몫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자본주의 사회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기득권자들에게 돌아가는 그 많은 몫이 바로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인센티브이기 때문입니다. 일한만큼 소득을 얻고 마음껏 그것을 누릴 수 있다는 인센티브가 자본주의의 매력입니다. 자본주의가 그것을 보장하지 않으면 사실 자본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득권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많다는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자칫 사회주의로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노동쟁의가 바로 그 예입니다. 현실적으로 노동쟁의 자체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건전한 노동쟁의는 자본주의의 약점을 보완하는 데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기득권자들은 노동쟁의를 싫어합니다. 노사관계에서 사측은 거의 언제나 노측을 건전하지 못한 집단으로 생각합니다. 노측의 요구도 지나친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노측의 지나친 요구 때문에 기업이 파산하는 경우가 있고, 일체 노동쟁의를 허용하지 않아서 보신과 관료주의와 타성으로 인하여 경쟁력을 잃는 기업과 국가도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건강하려면 기득권자가 그 사회나 집단이 직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희생적으로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라는 뜻의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라는 프랑스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가 아니라 봉건적 귀족의 오랜 유럽의 역사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봉건적 귀족 사회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보다 기득권자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귀족으로 정당하게 대접받기 위해서는 “명예”(노블리스)에 버금가는“의무”(오블리제)를 다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의식이 유럽 사회 상류층의 의식과 행동을 지탱해 온 정신적인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앞장서 나가는 기사도 정신도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은 유럽 귀족 사회의 전통적 모럴로서 기득권자들로 하여금 책임 있는 행동을 하게 하였습니다.

1,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의 이튼 칼리지 졸업생 이천 여명이 전쟁에 나가서 목숨을 잃었는데, 이튼 칼리지는 영국의 지도층 자녀들만 다니는 학교라는 것을 감안할 때 기득권자들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 말만의 책임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가 포클랜드 전쟁에서 위험한 전투헬기 조종사로 참전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평가할 만한 일입니다. 비난 받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철강왕 카네기, 석유재벌 록펠러,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 등이 엄청난 재산을 사회에 기부하는 것도 전통적인 유럽 기득권자들의 사회적 책임의식의 연장선상에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서구사회에서의 부자들의 기부 문화를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구책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그런 자구책은 비판할 일이 아니라 장려해야 할 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회에서든지 노블리스 오블리제 의식은 국민 통합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없는 봉건주의나 자본주의는 사회적 갈등과 무질서를 불러오고 극단적으로는 피를 부르는 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기득권자들의 사회적 책임을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기득권이란 기득권이 없는 자들에게 나눠주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무엇을 나눠주려면 내게 나눠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없는 것을 나눠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주시지 않고 나눠주라고 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먼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 다음에 나눠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은 인간의 선행을 위한 윤리적 행동의 핵심적 교훈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난 후 당신께 예배를 드리도록 요구하셨고,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선한 일이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은 무슨 공로를 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셨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이것은 사회에서 생활하는데도 중요한 원리이고, 교회를 섬기는 신앙생활에서도 중요한 원리입니다. 불만과 불평은 신자의 마땅한 태도가 아닙니다. 모든 신자는 기득권자들입니다. 기득권자들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기대하면서 일하기보다는 모든 어려운 문제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요단강 동편에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 전쟁을 하여 그 나라를 점령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받은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격적으로 가나안에 들어가서 치르게 될 전쟁을 앞두고 하나님께서 주신 독려의 메시지가 이 싸움을 통해 주어졌습니다. 헤스본 왕 시혼이나 바산 왕 옥의 나라를 점령하는 일은 전술전략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이스라엘에게는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나라와 그 나라의 성읍들은 견고했고 쉽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는데 하나님께서 싸워 주셔서 이겼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이 점령한 땅은 기름진 땅이었습니다. 이 때 르우벤과 갓 자손들이 자기들에게 그 땅을 기업으로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요구가 가나안 본토 정복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지파간의 결속과 공동체 의식을 약화시키는 행위로 보고 이들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단 동편 땅을 주면 가나안 본토정복 전쟁이 끝나기까지 앞장서서 용감히 싸울 것이라고 맹세하자 모세가 그들의 맹세를 확인한 후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얻은 기득권은 상당한 기득권입니다. 만약에 다른 지파들이 이 세 지파가 얻은 기득권을 문제 삼았다면 세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을 포기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그 기득권을 허락하셨고 다른 지파들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나는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에서든지 물리적인 환경과 조건이 모든 사람들에게 똑 같이 주어질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정당하지 못합니다. 인간 사회는 어디든지 이러한 정황임을 알아야 하고 또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든지 혜택을 많이 누리는 기득권자들이 있게 마련이고 기득권에서 소외된 계층이 있게 마련입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아파트 내부구조와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같을 수 없습니다. 누리는 혜택도 그렇고 물리적인 환경도 그렇습니다. 어떤 나라는 지하자원이 풍부하고 어떤 나라는 천연자원이 전혀 없습니다.

언젠가 캐나다 Edmonton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곳에서는 비 오는 날 여자들은 하이힐을 신고 외출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이힐에 의해서 유전이 터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과장된 이야기지만 그만큼 석유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국에는 기름 한 방울도 나지 않습니다. 한 편 생각하면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런 불공평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자 집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한 집에 태어납니다. 잘생긴 사람, 못생긴 사람,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노래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 말 잘하는 사람, 잘 못하는 사람, 식성이 좋은 사람, 좋지 못한 사람, 많이 배운 사람, 많이 못 배운 사람, 살결이 고운사람, 거친 사람, 밥을 많이 먹을 수 있는 위대한(?) 사람, 조금 밖에 못 먹는 사람 등.. 이런 차이를 다 없앨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에 절대 평등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절대평등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쟁의는 옳지 못합니다.

다만 한 사회의 기득권자는 그 기득권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지파들이 요단 동편 땅을 얻은 것은 대단한 기득권이고 그 기득권에 따르는 책임은 가나안 본토정복 전쟁에 앞장서는 것이었습니다. 전쟁에 앞장 서는 것은 명분만의 책임이 아닙니다. 현대어로 표현한다면 총알받이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한다면 책임을 피하고 기득권을 포기하는 것이 났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기득권은 책임을 위해 총알받이가 되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속한 사회의 기득권자이며 그 책임은 “십자가의 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 세 지파의 기득권자로서의 책임은 전체 이스라엘을 위해 전쟁에 앞장서는 것이고 신약적으로 말하자면 십자가의 도인데, 그 책임은 기득권자인 신자 자신이 자신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대신 해주시는 일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 동편에서 헤스본 왕 시혼과 바산 왕 옥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 주셨듯이 가나안 정복전쟁에서도 그렇게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영적 기득권자인 신자의 책임으로서의 십자가의 도 또한 하나님께서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 놀라운 사실을 체험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전 1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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