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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불신앙이며 비윤리적이게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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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1-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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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모던 시대정신에 정직하다면 “비윤리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 자체를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던 시대정신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모든 것이 상대적인 상황에서는 절대 가치나 기준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전통적인 의미의 윤리란 존재할 수 없고 모든 “다름”을 존중하는 “관용”만이 최고의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국가”에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이르기까지 실존 세계나 이상세계를 막론하고 가정생활, 경제 활동, 정치 구조에서 윤리적 행동을 요구하는 사회 정의의 원칙들은 강조되어 왔습니다. 윤리 체계란 무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신학적, 인류학적, 우주론적, 사회적 전제들이 작용하여 나온 것입니다. 플라톤을 비롯하여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사상에는 윤리적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 윤리적 의미들이 성경에서 출발한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 정통 신학자들이 주장한 것과는 다르지만 사람은 누구나 어느 시대에서든지 피할 수 없는 도덕적 의무들을 직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윤리적 의무의 성격과 책임을 느끼는 강도는 그 사람의 가치관이나 신앙과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가장 중요하고 깊은 신념, 즉 가치관에 복종하여 행동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깊은 신념이며 가치관이기 때문에 그에 복종하여 행동하게 되고,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삶인 것입니다.

오늘날 다원론적인 사회에서 윤리적 대안들이 증가하지만 근본적인 대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신을 도덕적 기초로 삼지 않고 인간의 자율적인 윤리 체계를 세우는 것이고, 둘째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뜻과 도덕법을 주시고 순종하도록 하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이 서구 문명을 지배할 때는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성경의 답변이 사람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 교회가 구교, 그리스 정교회, 개신교로 나눠진 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의 도덕적 교훈이 윤리적 지혜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9,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서구 사상이 급속도로 세속화 되었고 사람들은 전통적인 도덕을 비판하고 거부하면서 도덕의 기초까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상과 기치관은 세상에만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고 교회 내에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기 계시가 객관적인 도덕적 질서의 유일한 기초임을 확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줄어가고 있습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이 사회에서는 한 번 결혼한 부부가 마이너리티라는 말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신앙과 윤리의 절대적인 법칙으로 믿는 이들이 교회 안에서조차 마이너리티라는 생각에 섬뜩한 느낌을 받습니다.

인간이 범죄 한 이래로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쳐 온 문제는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은 죄의 결과이고, 인간이 스스로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습니다. 아담 하와가 죄를 지은 결과 그들에게 찾아 온 것이 두려움이었고, 가인은 동생을 죽인 후 견딜 수 없는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시므로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가인은 누군가 자기를 죽일 것 같아 두려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무도 가인을 해치지 못하도록 표를 주시고 누구든지 가인을 해치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을 것이라고 엄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인이 하나님의 말씀과 보호를 믿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두려움은 죄의 결과로 왔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보증으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또 다른 불신앙이었습니다.

죄는 두려움을 가져왔지만 두려움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그 믿음의 특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경은 명시적으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71번 하였습니다. 이 숫자는 내가 사용하는 성경 프로그램으로 조사한 결과인데, 정확한 횟수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여러 번 반복하여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보다 큰 존재가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특징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두려움은 하나님보다 크거나 대등한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사람들은 사탄이나 악한 영을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경은 결코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가 존재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래 전에 나온 영화 “엑소시스트”나 “오멘”같은 영화에서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상징되는 선한 영과 사탄의 세력으로 상징되는 악한 영이 싸우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엑소시스트에서는 신부가 악령과 싸우다가 죽습니다. 오멘에서도 사람들이 악령과 싸우는 데 아무리 십자가를 내밀고 성경책으로 도배를 해도 악령을 당할 수가 없습니다. 영화에서 선한 영과 악한 영이 밀고 밀리면서 싸우다가 선한 영이 지기도 합니다. 요즘은 아마도 이런 영화의 발전된 버전이 나왔을 것입니다. 그런 영화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탄이 대등한 것으로 오해를 하게 합니다.

영화는 진리를 전하는 데 관심이 없고 돈을 벌기 위해 흥행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거짓을 진실처럼 꾸밉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의 가르침보다 영화나 소설 같은 것에 영향을 받아서 하나님의 영과 악령이 대등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악령을 두려워합니다. 사탄이 인간보다 강하기는 해도 하나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입니다. 게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사탄은 그 지위와 권세를 박탈당하여 사람들을 위협하고 유혹하고 우는 사자와 같이 으르렁 거리지만 천로 역정에서 기독도를 위협하는 쇠사슬에 단단히 묶인 사자와 같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이 나쁜 것은 그것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앙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대안을 모색하게 되는데, 인간적 대안이란 비윤리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을 통제할 수 없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가인에게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도록 조치를 해 주셨지만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모든 인간을 경계하여 성을 쌓고 무기를 만들어 사람을 죽이고 살인을 정당화하는 인간적 대안을 선택하여 문제를 더 복잡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나아갔고 범죄 한 인류는 그 뒤를 따르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똑 같은 일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경계하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고 그 두려움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야 그럴 수밖에 없지만 신자들과 교회 지도자들까지 거짓말과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그 믿음을 의심하게 합니다. 진정한 믿음은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모든 문제를 맡기고 사랑의 동기와 목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 요일 4:18,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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