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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 은혜를 깨닫게 하는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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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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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분쟁과 자연재해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과 집과 재물을 잃고 고통과 좌절 가운데 신음하며 몸부림 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은 내전을 겪고 있고, 중동의 여러 나라들은 전쟁과 방불한 분쟁을 겪고 있으며, 일본과 아이티를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이 크고 작은 자연재해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뉴욕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자연재해로부터 안전한 편이지만 미국 곳곳에는 거듭되는 홍수와 토네이도의 엄습으로 집이 파괴되고 농경지가 침수되는 일들이 점점 잦아지고 있습니다. 이 순간에도 병원에는 힘겹게 질병과 싸우는 이들이 많습니다. 보지 못하는 사람, 듣지 못하는 사람, 말하지 못하는 사람, 걷지 못하는 사람, 먹지 못하는 사람, 심지어 숨 쉬는 것조차 의술에 의존하여 모진 목숨 연명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 안에서는 정당들이, 집단 안에서는 진영들이, 교회 안에서는 파당들이, 가정에서는 부부를 비롯한 가족들이 극한 대립과 긴장과 갈등과 분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에 그 어디에도 완전한 집단이나 개인은 없지만 분쟁의 요인은 자기는 의인이고 상대는 죄인이라는 편견과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소아기적 사고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의 지식과 경험과 판단과 의견으로 "그렇다" 또는 "아니다"라고 확신하는 개념들이 상대적인 것일 가능성을 언제나 열어 놓는 겸손과 여유가 절실합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나 질병이나 분쟁이나 그 어느 것 하나도 인간이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경험하면서도 겸손해 지지 않는 것을 볼 때 인간이 죄인임이 틀림없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는 일들의 경험을 통하여 겸손해지기만 한다면 시편 기자가 고백했듯이 일련의 자연재난과 전쟁과 분쟁과 질병과 고통도 유익이 될 것입니다. 고난까지도 은혜와 복으로 받을 줄 아는 신앙 인격의 그릇은 겸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낮추시어 겸손케 하심은 은혜를 깨닫게 하는 은혜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은혜"의 개념은 다른 종교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기독교만의 독특하고 심오한  교리입니다. 은혜의 개념을 쉽게 설명하면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대신 해 주는 것입니다. 내가 지불해야 할 돈을 다른 사람이 대신 지불 해 주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대속"이라는 교리적 용어가 은혜를 잘 설명해 줍니다. 인간관계에서도 내가 할 일을 다른 사람이 해주고, 내가 지불할 대가를 다른 사람이 지불해 주어도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만 생각하고 고마워 할 줄 모르면 은혜가 은혜 되지 않습니다. 믿음에 있어서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나 은혜는 그것을 은혜로 깨닫는 사람에게만 은혜입니다. 아무리 은혜가 넘쳐도 그것을 은혜로 깨닫지 못하면 그 사람에게는 은혜가 아닙니다. 바울은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고 하였습니다.

행복을 위해서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은혜를 아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그러기 위해 은혜를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내 남편이 은혜요, 내 아내가 은혜요, 내 자녀가 은혜요, 나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과 건강과 나의 주위에 있는 사람과 모든 사물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아는 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건강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사는 날 동안 얼마나 여러 번 생명을 유예시켜주었는가를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나의 건강의 이유는 식이 요법 때문도 아니고 규칙적인 운동 때문도 아니고 그런 것을 통해 나를 사랑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가 노력을 해서 얻은 모든 것도 노력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돈을 주고 사거나 노력의 대가로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아내의 사랑, 남편의 사랑, 자녀의 효도와 친구의 우정과 의리도 돈을 주고 사거나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 모두는 거저 얻은 은혜입니다. 깨닫고 보면 우리가 은혜 가운데서 헤엄치며 살고 있습니다. 은혜는 다 받고 살지만 은혜를 깨닫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바울은 은혜를 깨닫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았다는 면에서는 누구나 동일하지만 받은 은혜를 깨닫는 은혜가 있어야 은혜가 은혜 됩니다. 이 땅에 재난과 고통이 많기는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이고 그 수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은혜는 아무도 다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비롯하여 보는 은혜, 걷는 은혜, 먹고 마시는 은혜, 듣는 은혜, 말하는 은혜, 부모의 은혜, 나라의 은혜, 교회의 은혜, 이웃의 은혜, 자연의 은혜, 문화의 은혜, 과학의 은혜, 학문과 예술의 은혜, 정치와 경제의 은혜 등 우리가 받은 은혜를 우리는 다 셀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은혜로 받는 데는 두 가지 필요한 절대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는 믿음이고 둘째는 겸손입니다. 믿음이 없다면 겸손도 은혜도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 믿음을 가진 자는 겸손할 수밖에 없고 겸손이라는 인격적 그릇에만이 은혜를 담을 수 있습니다. 겸손은 은혜를 담는 그릇이고 교만에는 절대로 은혜를 담을 수 없습니다. 부부의 관계를 비롯하여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자신을 낮추고 상대를 높여주고 존중할 때 그 상대가 나에게 은혜가 됩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자기의 사도직을 변명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를 사도로 부르셨지만 사람들이 믿지 않자 자기의 사도직의 신적인 근거를 주장하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바울의 자기변명이 그렇게 좋게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사도직 변명은 자기의 의견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마치 팔푼이 같은 존재라고 하였고,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한 짓을 생각할 때 도저히 사도가 될 자격이 없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실적으로 말하자면 자기가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 했지만 그 모두는 자기가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은혜를 깨닫는 은혜, 겸손의 그릇은 그를 반대하고 핍박하는 모든 이들을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 안에서의 할례의 불필요를 단호히 선언하였지만 때로는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고 덕을 세우기 위해 믿음의 아들이요 동역 자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받게 하기도 하였고(행 16:3), 할례 문제가 복음을 왜곡하거나 오해하게 할 때는 헬라인 제자 디도에게 할례를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갈 2:3).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은혜를 인하여 담대했지만 결코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겸손은 놀라운 생산적 에너지를 발산하여 참 복음에서는 일체의 양보와 타협을 하지 않으면서도 덕과 화목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양보하고 희생하였습니다.

그에게는 "내가 했다"는 생각이나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의식이 일체 없었습니다. 그것은, 은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지 자신이 노력하거나 애를 써서 달성하거나 이루어 내는 것이 아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인격이 완전하다는 뜻이 아니라 은혜를 은혜로 아는 겸손의 은혜의 특징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는 사랑 깊으시고 크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수를 다 셀 수 없고 그 지혜를 다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크고 깊어서 깨닫는 자에게는 언제나 흘러넘치는 풍요로운 특징을 나타냅니다. 겸손이 아니면 받아 담지 못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를 겸손케 하는 실패와 고난에도 감사해야만 할 것입니다.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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