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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기독교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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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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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잡으러 온 자들에게 베드로가 칼을 휘두르자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상상보훈에서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도 돌려대라’고 하신, 폭력에 폭력으로 대처하지 말라는 교훈의 실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문자적으로 강조하는 이들을 평화주의라고 합니다. 기독교는 평화주의입니다. 그러나 평화주의가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닙니다. 평화주의는 개인의 태도로서는 옳고 정당합니다. 하지만 신앙 양심상 군 입대와 집총을 거부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행동이기에 공동체의 안전에는 치명적일 수가 있습니다.

이런 평화주의는 너무 지나치게 비현실적이라서 많은 약점이 있고 본의 아니게 악을 조장하고 악한 자를 돕는 결과를 낳습니다. 기독교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합니다. 나 개인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손해보고 참는 것이 가장 고상한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오른 뺨을 칠 때 왼 뺨을 돌려대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어떤 나쁜 사람이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은 힘없고 약한 사람의 뺨을 친다면 우리는 그냥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약한 자가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생명과 물질의 손해를 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은 기독교인의 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그래서 평화주의가 개인적 차원에서는 가장 고상한 태도일지라도 공동체 안에서는 무조건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물리적인 힘을 무조건 나쁘다고 정죄하지 않습니다. 세례 요한이 회개를 외치자 마음에 찔림을 받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군인들에게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눅 3:14절)고 하였습니다. 암시적이지만 세례 요한은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바울도 공권력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는 통치자의 권력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롬 13:4)고 하였습니다. 지도자는 선을 장려하고 악을 억제하는 일에 정당한 권력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사용하는 자입니다. 바울은 국가의 권력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보았습니다. 국가가 악을 억제하기 위해 칼(권력)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국민은 안녕을 보장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웃 나라가 부당하게 침략을 한다면 국가는 국민에게 전쟁에 나아가 싸우라고 명령할 것이고 기독교인을 포함하여 모든 국민은 그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국가가 요구한다고 하여 모든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일으킨 나치의 만행적 전쟁에 참가하도록 요구를 받는다면 기독교인은 신앙 양심을 따라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독일교회가 히틀러를 지지하고 그의 만행에 동조한 것은 참으로 크게 잘못한 것입니다. 국가가 요구해도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는 참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입니다. 이 땅에 온전히 정의로운 국가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국가의 명령이 온전히 정의로울 수는 없고 따라서 어떤 전쟁에 대한 명령도 온전히 정의로울 수는 없습니다. 어떤 전쟁이 조금이라도 정의롭지 못한 것이 그 전쟁에 참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된다고 하면 모든 전쟁은 거부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평화주의자들의 논리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이 거부해야할 전쟁은 그 전쟁이 현저히 악할 때에만 거부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현저히 악한 것이 어떤 것인가를 판단하는 하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따라서 전쟁도 정의로운 전쟁이어야 합니다.‘정의로운 전쟁’이라는 말이 어폐가 있지만, 인류는 철학에서도 기독교에서도 정의로운 전쟁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원하지 않지만 피할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전쟁이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인도 나름대로 입장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현 대에 들어서 기독교계에서는 전쟁과 평화에 대해 두 가지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로운 전쟁론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주의입니다. 이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에서 주류는 정의로운 전쟁을, 비주류는 평화주의를 주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입장 모두 나름대로 일리가 있습니다.

정의로운 전쟁의 이론을 처음 주장한 사람은 희랍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그리고 정의로운 전쟁의 원칙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 한 사람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입니다. 그가 주장한 정의로운 전쟁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쟁의 유일한 정당성은 국가의 명예와 안전을 수호하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전쟁은 모든 외교적 협상이 다 실패했을 때 최후의 선택이어야 한다.

셋째, 전쟁을 하기 전에 반드시 선전포고를 해야 한다.

넷째, 전쟁의 목적은 정복이나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정의로운 평화를 확보하는 것이어야 한다.

다섯째, 전쟁 포로나 항복하는 자는 반드시 보호해야 한다.

여섯째, 전쟁에는 군인만 관계시켜야 한다.

기 독교에서는 어거스틴과 칼빈을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과 신앙고백서에도 전쟁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많은 논의를 통하여 기독교인이 참여해야 할 전쟁, 즉 이를테면 정의로운 전쟁이란 어떤 전쟁일까에 대한 지침이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을 기독교의 정의로운 전쟁, 혹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기독교의 정의로운 전쟁 원칙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전쟁이 불가피함을 결정할 수 있는 합법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둘째, 전쟁을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셋째, 합당한 수단을 사용해야한다.

넷째, 전쟁은 모든 외교적 노력을 다한 후에 최후의 선택이어야 한다.

다섯째, 예측할 수 있는 시간 안에 끝내는 전쟁이어야 한다.

여섯째, 전쟁의 결과는 전쟁 이전의 상태보다 좋아야 한다.

기 독교의 전쟁의 원칙도 키케로의 원칙과 비슷한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둘의 근본적인 차이는 전쟁의 목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키케로는 나라의 명예와 안전을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키케로의 원칙에는 상대 나라의 안전과 명예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전쟁의 목적은 나라의 명예와 안전이 아닙니다. 악을 억제하거나 제거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 차이는 엄청난 차이입니다. 키케로의 이론은 내 나라가 악해도 내 나라의 편에서 싸워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정신은 자기 나라가 하는 전쟁이라도 악한 전쟁에는 참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독일 교회는 나치가 일으킨 전쟁에 참가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독일 교회는 거의 나치를 지지했고 전쟁을 찬성하였습니다. 독일 교회가 그렇게 결정을 한데는 루터교의 이원론이 상당한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교회는 교회이고 정치는 정치로서 상호 별개의 것이라고 하는 이원론이 독일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비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하게 하는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였습니다. 내 나라, 우리나라이기 때문이 무조건 편드는 것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1992년 백악관에 입성한 빌 클린턴 대통령이 신임 주한미국 대사직을 염두에 두고 워싱턴 주의 상원의원인 신효범씨를 인터뷰 했다고 합니다. 클린턴은 신효범 의원에게 “한국과 미국 간에 사건이 발생했을 때에 어느 편에 서겠는가?”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신 의원은 “그 질문은 어머니와 아버지 중 누구를 택할 것이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 대답은 정치인다운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질문에 대한 기독교적인 대답은 “옳은 편에 서겠습니다.”혹은 “정의의 편에 서겠습니다.”입니다. 미국 시민이라고 미국 편에 서고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 편에 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미국 편도 한국 편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정의 편이고 평화의 편이고 사랑의 편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식이 이만큼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쟁과 평화, 경제와 정치, 자연과 문명, 과학과 예술, 사상과 철학 등 온갖 것에 대해 성경적 이해와 안목을 갖도록 배우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앙인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는 거의 모든 나의 설교와 글의 초점을 이 방향에 맞추려고 노력합니다. 바른 성경적 관점을 갖지 못하면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기독교인들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미 국의 정치철학자인 Rudolph J. Rummel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그가 1999년 Peace Magazine May-June호에 “Democracies Don't Fight Democracies”는 글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이론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일리가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가 전쟁을 할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합니다. 미국과 캐나다가 전쟁을 할 가능성 또한 희박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을 가르칩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민주주의가 발전해야 합니다. 북한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려면 북한에 민주주의가 정착할 수 있도록 모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전쟁의 모든 원인은 비민주주의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들이 흔히 “기독교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다,”혹은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가 아니라 구원의 종교다.”라고 하는데 그런 말 너무 쉽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매우 위험한 말이고 또 그런 말을 하는 분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권위에 편승하여 힘겨운 민주주의와 윤리적 책임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무의식적 편의주의(便宜主義)에 빠져 있음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사 랑과 평화는 좋은 것이지만 극악한 전쟁을 막기에는 너무 순수하고 너무 비현실적입니다. 바로 내 눈앞에 야비하고 비열하고 악한 사람이 힘없고 착한 내 가족의 목을 조르고 칼로 찌르려고 한다면 몽둥이로 뒤통수를 후려쳐야 합니다. 불의에 대하여 베드로처럼 칼을 뽑을 수도 있어야 하고, 적이 총을 쏘면 우리도 총을 쏠 수 있어야 합니다. 연평도의 해병대처럼 공격을 받으면서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갓난아기로 축구를 하는 악마와 같은 나치였기에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가 체포되어 죽었습니다.

그의 유품에서 종이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가혹한 고문 때문에‘수배 중인 다른 이들을 배신할 수 있다는 위험 속에서 자살이 어떤 의무가 될 수 있지 않을까?’본회퍼 목사님은 히틀러 암살이 성공할 수 있도록 정말로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만행은 사랑으로 용서하고 참고 견뎌야 할 사항이 아닙니다. 히틀러의 만행이 나만 공격한다면 하나님께 맡기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고문하고 두려움에 떨게 하며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이런 것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하는 것은 비윤리적인 행동이고 사랑에 역행하는 태도입니다. 국가가 불의한 전쟁을 수행할 때는 그리스도인과 양심적인 시민들 모두 그에 항거하고 반전운동을 펼쳐야 합니다. 후에 독일 수상이 되어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빌리 브란트가 좋은 사례인데, 그는 2차 대전 당시 노르웨이로 망명하여 독일 시민권을 포기하고 독일의 패전을 위해 노력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겨 울이 다가오면 감기 예방주사를 맞습니다. 감기 예방주사는 감기 바이러스를 조금 몸에 넣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조금 넣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많이 넣으면 예방이 안 되고 죽습니다. 전쟁도 그렇습니다. 더 큰 악을 제거하기 위한 전쟁이어야 합니다. 전쟁으로 제거해야 할 악보다 전쟁 자체가 더 악하면 안 됩니다.

한반도의 전쟁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는 북한의 민주화와 개방을 유도해야 하는 것은 가장 현실적인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민주주의 국가 간에 전쟁이 일어날 확률은 민주주의 국가와 비민주주의 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확률보다 30% 정도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북 한과 전쟁을 해야 한다면 북한이 저지르는 악이 그 악을 제거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전쟁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악하다는 증거가 있을 때 먼저 모든 외교적 노력을 통해 그 악을 제거하거나 억제하도록 하되 그 노력이 아무런 효과가 없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조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아울러 민주주의의 정신과 윤리적 행동이 전쟁을 예방하는 데 얼마나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가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적 사랑과 신본주의는 어떤 경우에라도 기독교가 대전제로 삼는 것이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기독교가 민주주의의 실현과 윤리적 실천이 기독교의 사랑과 신본주의, 나아가서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키는 실제적인 방법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자! 회개하자!”는 것이 이러한 노력을 피해가려는 종교적 위선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전쟁을 막고 평화를 이루고 지키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우리는 꿈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처럼 꿈을 꾸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견해와 입장과 욕망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시고 결정하시고 행하시는 삶이기에 평화를 꿈꿀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는 민족과 민족이 나라와 나라가 무기를 겨누고 싸우지 않을 평화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가능성은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가능성이며 꿈이요 희망입입니다. 이러한 꿈과 노력은 국가 간의 전쟁만 막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불화와 싸움도 막아낼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화와 갈등과 반목과 싸움을 막고 평화가 넘치게 하실 분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사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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