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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비방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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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 2010-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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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씨가 쓴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다룬 역사소설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70여 년 전에 조선은 병자호란을 맞아 16대 임금인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을 했습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그 해 겨울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던 47일간은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습니다. 청나라 대군의 침략으로 궁을 버리고 남한산성에 숨어야 했던 인조 임금이 힘들었던 것은 청나라 군대의 침약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위기사태를 맞아 결사항전을 고집하는 주전파 김상헌과 살기 위해 화친을 내세우는 주화파 최명길의 첨예한 대립으로 인조는 큰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치욕을 견디며 살아낼 것인가” 아니면 “치욕 대신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풍전등화와 같이 흔들리는 국가의 운명 앞에서 피난 조정은 입으로 말싸움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신하가 임금에게 내장을 토해내듯 진언을 올립니다.

“지금 성 안에는 말(言) 먼지가 자욱하고, 성 밖에는 말(馬) 먼지가 자욱하니 삶의 길은 어디로 뻗어 있는 것이며, 이 성이 대체 돌로 쌓은 성이옵니까, 말로 쌓은 성이옵니까?”

임금을 능멸한 것은 날아오는 청군의 화살이 아니라, 죽자는 것도 살자는 것도 아닌, 고관대신들의 들끓는 말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조정이나 지금의 정치나, 초대 교회나 현대 교회나, 가정이나 직장이 말 문제로 인하여 불화와 갈등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한 마디의 말이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을 뒤집으면 말 한마디가 천 냥 빚을 지게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거의가 말 때문입니다.

장자(莊子)의‘대변불언’(大辯不言)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위대한 주장이나 변론은 말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침노을은 비가 올 것을 말하고, 저녁노을은 날씨가 청명할 것을 말합니다. 봄의 땅은 새싹으로 말하고, 가을 땅은 열매로 말합니다.

시편기자는 말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시 19:1-4) 이 원리가 인간관계서도 적용되었으면 합니다. 옛시조에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서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하였습니다.

고금을 막론하고 말은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인입니다. 말로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덕을 세우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말로 기도하고, 말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인간관계도 말로 이루어집니다. 말은 그 사람의 인격과 사상과 가치관과 철학과 신앙을 나타냅니다. 심지어는 한 사람의 운명도 말에 의해 결정이 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말이 마음에 있으면 사상이요, 말이 입을 통해 나오면 언어이고, 말이 고정되면 뜻이요, 말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것을 행위라고 말합니다. 잠언 기자는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고 하였습니다.

‘침묵은 금이다’는 말이 있지만, 침묵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꼭 필요한 말은 해야 합니다. 우리 민요 중에‘갑돌이와 갑순이’노래가 있는데 그 가사 내용이 바로 한국인의 말의 또 다른 문제점을 잘 드러내 줍니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더래요/ 둘이는 서로 서로 사랑을 했더래요/ 그러나 둘이는 마음뿐이래요/ 겉으로는 음음음 모르는 척했더래요.”

말을 함부로 하거나 감정적으로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한국인들은 말을 안 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말 할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견을 표현하고 설명할 줄을 모릅니다. 어려서부터 그런 훈련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면 버릇없다고 혼나니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 훈련을 받은 셈입니다. 그래서 갑돌이와 갑순이 같은 비극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말이란 할 줄도 알아야 하고 들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말 하는 훈련도 필요하고 듣는 훈련도 필요합니다. 말은 논리적이어야 하고 감정이 적절히 배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사오니.....’라는 기계음 식으로 해서도 안 되고, 감정이 폭발해서 뒷감당 못할 말을 쏟아내도 안 됩니다. 상대방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든 일단은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주장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아도 화를 낼 필요가 없습니다. 한국인의 약점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을 잘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회의나 토론을 잘 못하여 싸움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국회가 난장판이 되도록 싸우는 것도 다 그런 미숙함 때문입니다. 군자화이불동(君子和而不同)요 소인동이불화(小人同而不和)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상대가 나와 달라도 친하게 지내고 소인은 나와 다른 것 때문에 싸운다는 뜻입니다. 대개 싸움은 말 한 마디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말이 문제가 되는 것은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교만 때문입니다. 야고보는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가를 말씀합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곧 율법을 비방하는 것이고, 형제를 판단하는 것은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율법이 하나님 말씀이고 뜻이니까 형제를 비방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구를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비방하고 정죄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입법자와 재판 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지한 가운데 아무 생각 없이 입법자도 되고 재판 자도 됩니다. 하나님 말고는 누구도 사람을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은 마귀의 일을 돕는 것이고,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간을 붙이는 자이며 참소자입니다. 서로 불화하고 싸우고 비방하는 것은 마귀의 일을 돕는 것이고 내가 망하는 것이고 남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상처가 되는 말은 평생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비방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피차 비방하지 말이야 하고, 판단하지 말아야 하고, 존경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격려하여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가가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삶으로, 교회에서나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사랑으로 말하고 이해하고 봉사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결심하면 성령님께서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약 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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