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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WCC,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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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10-10-06

본문

히브리어의 메시야가 헬라말로는 그리스도이고 우리말로는 구세주입니다. 그리스도는 단 한 분 예수님  뿐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십니다. 그분은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고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또 다시 오셔서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 모두를 심판하실 터인데 그를 믿는 자는 구원을 얻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복음의 핵심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신앙 고백의 핵심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고백은 같아도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과 의미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처녀 탄생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다고 해도 그것의 역사성을 믿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자유주의자들은 처녀 탄생과 죽음과 부활의 의미도 믿지 않지만 실존주의에 영향을 받은 이들 중에는 복음의 역사성은 믿지 않고 그 의미만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다 같은 그리스도인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과 이해가 전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똑 같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같아서 평소에는 구별을 할 수가 없지만 심도 있는 신학적 논의에서는 그 다른 생각이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의 모든 대화에는 소통의 한계가 있습니다. 소통의 한계가 생기게 되는 것은 사람들의 이해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이 강조하는 관용은 이해와 생각이 다른 것까지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지만, 그 다름이 무엇에 대한 다름이냐가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생각까지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관용을 복음보다 중요한 상위개념으로 여기는 상대주의적 생각입니다. 상대주의의 복음은 관용입니다. 관용을 가지고 복음의 진리를 판단하는 것을 성경은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세 번“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공생애 3년 초에 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시면서 그 말씀을 하셨고, 두 번째는 공생애 3년째 되는 해 9월쯤에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하셨고, 세 번째는 공생애 마지막 달 베레아에 가셨을 때 그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는 자세하게 알 수 없습니다. 후일 바울은 주님의 이 말씀을 십자가의 도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제자들의 특별한 반응이 없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잘 이해하고 따르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에 대한 제자들의 생각이 예수님과 달랐다는 사실이 십자가에 대한 두 번째 말씀을 하신 때 충격적으로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가셨을 때 제자들에게“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대표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아들입니다.”라고 바른 대답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이 사실을 바로 알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순간 너무도 뜻밖에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는 말씀을 듣게 됩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이 그리스도의 증인을 삼기 위함인데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조금 후에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신 직후 비로소 고난과 죽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무례한 것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을 꾸짖어(‘항변하여’의 원 뜻), 이를테면 십자가의 도를 철회하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의 이 태도는 제자들 모두의 태도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믿는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는 것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구약 성경 신명기 21장 23절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신명기 21장 23절의 “나무”를 십자가로 이해했기 때문에 메시야가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는다는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그 당시 거의 모든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그렇게도 과격하게 반응한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메시야와 십자가는 정 반대 개념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 문제를 바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 들에게는“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습니다(cf. 벧전 2:8,롬 9:33).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을 대표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생각을 드러냈을 때 예수님은 그 다른 생각에 대해 관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도 지엄하게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생각을 한 그들을 사탄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철학과 사상과 이념과 가치관이 다른 것은 어느 정도 관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생각이 그리스도와 다른 것은 관용할 수 없습니다.

지금 한국은 2013년 제10회 WCC 부산총회 개최를 두고 교단들이 찬반의 입장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WCC는 선교와 사회참여를 내세워 세계 교회의 일치를 표방하였으나 한국에서는 아이러니 하게도 WCC로 인하여 교회가 분열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와 교회의 사회 참여는 복음주의 교회가 소홀히 했던 터라 딱히 반대할 명분이 없었고, 그렇다고 WCC가 처음부터 신학적 입장을 천명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활동을 강조하고 나왔기 때문에 나무를 보아 열매를 아는 방식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도 WCC의 정체는 뭐라고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변화무쌍합니다. 그러나  나무를 알아볼 수 있는 열매는 그리 오래지 않아 맺혔습니다. 선교와 교회의 사회참여라는 기치아래 그들의 관용은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생각들까지를 설득력(?) 있게 정당화하였습니다. 1973년 방콕선교대회에는 불교의 스님이 초청되었고 회원들이 절을 방문하였는데 한 신부는 불교의 사원을 둘러보고 난 후 이방인 중에 나타난 성령의 열매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무신론자가 된 것에 감사한다는 시를 썼습니다. WCC는 무신앙(無信仰)도 하나의 신앙으로 인정하고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전도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다른 생각은 숨길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열매는 감출 수 없습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고후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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