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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의식과 Well-D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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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9-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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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이웃에 혼자 사는 한 백인 여자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몇 년 전에는 그녀의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 이웃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난 7일, Labor Day 아침에 집 외벽에 얼룩을 없애기 위해 페인트칠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911 자동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오더니 우리 집 옆에 멈추어서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순간 당황했었는데 911 요원들이 건너 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앰뷸런스가 연거푸 세 대가 오고 또 폴리스가 몰려왔습니다. 이웃 사람들이 모두 나와서 무슨 일인가 궁금해 하면서 웅성이었고 나도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잠시 지켜보다가 하던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쯤 후에 전문 요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그 집에서 시신을 싣고 나왔습니다.

우 리 가족은 이웃 사람들과 비교적 사이좋게 지내는 편인데 그 여자와는 지나가면서 인사한 번 할 기회가 없을 만큼 얼굴 볼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이웃 집 사람이 죽었는데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도대체 얼굴이 떠오르지를 않았습니다. 한 가지 기억이 나는 것은 우리 집 지붕 공사할 때 주위에서 두 사람이 불평을 했는데, 한 백인 남자는 우리 집 지붕 공사 때문에 자기 차가 펑크 났다고 complain을 했고, 지난 주간에 죽은 그 여자는 비닐 조각이 자기 집 앞에 떨어졌다고 complain을 했었습니다.

죽은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지를 않아 기억을 더듬는데 집 사람이 나에게 그 여자가 누구인지 기억나게 하기 위해 “왜, 그 있잖아요. 예쁘게 생기고 쌀쌀맞은 백인 여자, 우리 지붕 공사할 때 complain 하던 여자”라고 이야기 했었습니다. 이웃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나이가 40대이거나 아니면 오십대 초반일거라고 하는데 혼자서 살다가 지병 때문인지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희 집 주위에는 나이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도 많은데 젊은 사람이 그렇게 먼저 갔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한 가을바람에 채 물들지 않은 나뭇잎들이 떨어져 세월을 재촉하는 것만 같은 시절에 덜 익은 과일처럼 떨어진 한 나그네 인생길의 끝을 보며 well-dying을 생각합니다.   

지 난 주간에 우리 미국 교회의 성도 한 분도 세상을 떠났고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 받던 정진경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추기경과 두 분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했을 때는 세상이 온통 떠들썩했지만 왜 목사의 생각이 고려 말의 야은 길재의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라는 싯구에 머물게 되는지 민망하기만 합니다. 어떤 분들은 100세가 넘게 살고 어떤 분들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사람들이 악착같이 아등바등 살지만 목숨 끊어지면 짐짝에 불과 합니다.

요 즘 사람들이 well being에 관심이 많지만, 어떻게 죽을까도 좀 관심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젊은이들과 결혼 적령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결혼에 대한 관심이 많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건강에 대한 관심이 점증(漸增)하며, 경제공황 같은 불경기 때문인지 비즈니스 하는 이들의 마음이 황망하고, 한인 부모들의 자녀 교육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 사회문제가 되고, 무엇보다 well being에 대한 이야기가 인기 있는 주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죽음을 주제로는 아무도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죽음을 싫어하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 왔는데도 죽음 자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터부시합니다. 실제로는 무관심 하지 않으면서 애써 무관심하려고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죽음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의 문제입니다.

그 렇다면 우리는 죽음 자체도 당연히 열린 담론의 주제로 삼아야 할뿐 아니라 긍정적인 주제로 취급해야 할 것입니다. 죽음 자체를 긍정적으로 ㅤㅁㅏㅊ도록 준비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은 비참하게 되고 유족들이 분열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병간호를 누가 어떻게 해야 하나로 다투고, 치료비용 염출 때문에 의가 상하고, 유산분배 때문에  가족들이 법정에 서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죽음 문제에 있어서 통상적인 비극은 죽는 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고 산 자의 문제로만 취급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Well-being이 아니라 Well-dying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에도 품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잘 죽어야 된다는 이야기인데, 잘 죽자면 죽음 자체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존엄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시 116:15). 성경에서도 경건한 자들의 죽음 자체를 하나님께서 귀중하게 보신다는 말씀은 이 말씀이 유일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활이 중요하고 내세가 중요하기 때문에 죽음이 중요하다는 해석은 상식적으로 가능하지만 죽음 자체를 귀한 것이라고 하는 가르침은 성경에서도 많지 않습니다. 여기 경건한 자들은 물론 성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귀중히”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야카르는 “값이나 가치가 높은”, “영광스럽고 찬란한”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귀중히 보시는 죽음을 그를 믿는 신자가 저주스러운 것으로만 여기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인생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한 편 두렵기도 하고 또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죽음 자체는 귀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자는 죽음을 귀중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노력과 자세가 필요할 것입니다.

히 브리서 기자는 신앙의 위인들,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을 열거하고 난 다음 그들의 삶의 특징을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더 나은 본향,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이 현실을 부정적으로 여겼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은 나그네임을 증거하며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은 젊었을 때 그렇게도 자신만을 위하여 아등바등 살았지만 노년에 인생이 나그네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제 아침저녁으로 제법 찬바람이 불어옵니다. 벌써 방송에서는 추석잔치 운운합니다. 명절이 되면 고향 떠난 사람들은 고향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떠나온 고국이 그리워지기도 하지만 우리는 더 나은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성도로서 이 땅에서 사는 것은 temporality, 임시로 사는 것임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젊었을 때의 야곱처럼 이기적으로 살아서는 나그네임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속이고 거짓말 하고 이기적이고 간사하고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친구도 오직 경쟁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사는 것은 나그네 의식을 가진 삶이 아닙니다. 본향을 사모하는 이 나그네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위대한 신앙인들의 삶의 특징이었고, 그 나그네 의식의 삶이 바로 well dying을 위한 최선의 길이며 하나님께서 귀중히 보시는 성도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 히 11:1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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