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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오피니언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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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하2009-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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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년도에 미국에서 개봉한 포세이돈 어드벤처(The Poseidon Adventur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1978년도에 처음 상영되었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뉴욕에서 아테네로 향하던 여객선 포세이돈호가 전복되는 사고를 당합니다. 배 안에는 300여 명의 승객들이 파티를 즐기고 있었는데, 12월 31일 자정을 넘기고 새 해를 맞아 서로 인사를 나누며 한창 파티가 무르익어 가는 중에 해저 지진으로 거대한 괴물 파도가 덮쳐 배가 전복되어 배 밑창이 위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배 안에서 파티를 즐기던 수 백 여명의 승객들은 뒤집혀 거꾸로 된 여객선 안에서 공포와 몸부림과 절망가운데서 우왕좌왕하게 됩니다.

이때 타락한 신부로 낙인찍혀 오지로 가던 프랭크 스콧 신부(진 해커만)가 나서서 모든 승객들에게 뒤집어진 선체 상단으로 올라갈 것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승객들은 그를 믿지 못하고 한곳에 남아있기를 고집합니다. 스콧 신부와 몇몇 사람들이 선체 상단으로 올라간 뒤 거대한 파도가 덮쳐 남아 있던 승객들은 결국 몰살당하고 맙니다. 스콧 신부 일행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어렵게 출구에 다다르지만 증기 밸브가 열리고 주변은 온통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데 스콧 신부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 몸을 던져 공중에 매달린 채 밸브를 잠그고 더 이상 매어달려 있을 수 없어 뜨거운 물에 떨어져 죽고 스콧 신부를 따라온 여섯 명은 구조되어 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배가 뒤집힌 절체절명의 상황 상정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배가 뒤집혀 배 밑창이 위로 올라가고 위쪽이 물속으로 잠긴 상태입니다. 배가 뒤집히기 전까지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신분과 외모를 한껏 뽐내며 즐기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괴물 파도가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흥에 도취되어 파키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포세이돈호는 이 세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괴물파도가 덮쳐서 배가 뒤집혀지자 모든 것이 거꾸로 되어버렸습니다. 배가 뒤집혀 거꾸로 되었기 때문에 배 밑창 쪽으로 가자면 올라가야만 하고 배 선상 쪽으로 가려면 내려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배 밑창으로 가야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배가 뒤집혀 거꾸로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배에서 내려가는 것은 곧 올라가는 것이고 올라가는 것은 곧 내려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전도(顚倒)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가 보여주는 메타포(metaphor.隱喩)입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모든 것이 전도된 상황 아래서의 리얼리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은유(隱喩)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 전복된 것은 여객선 자체뿐만이 아닙니다. 여객선이 전복되는 순간 모든 가치관도 전도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전직 경찰관 출신인 마이크 역인 어네스트 보그나인입니다. 법과 질서의 상징인 경찰 출신인 그가 배가 전복되는 순간부터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무법과 무질서의 화신으로 변합니다. 이 영화는 신부 스콧이라는 인물을 통해 메시지를 주려고 했습니다. 그는 타락한 성직자로 낙인이 찍혀 오지로 가는 길에 포세이돈이라는 여객선을 탔다가 이 위기의 순간에 자기의 목숨을 던져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는 참 된 지도자 상으로 제시됩니다.

영화의 이 같은 의도는 상당히 적중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과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을 공부한 나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주는 메시자가 휴머니즘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매우 악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제작자는 스콧 신부가 과거에 타락한 죄를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살리는 일로 회개하고 변화된 것으로 하여 참 지도자 상으로 제시하습니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타락한 때에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살았고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살리는 일에서도 하나님께 대항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은 이 장면에서 가슴 찡한 인상을 받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휴머니즘의 오만입니다. 스콧 신부의 마지막 대사에서 그 사실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스 콧 신부가 자기 몸을 던져 공중에 매달린 채 뜨거운 증기를 뿜어내는 파이프의 밸브를 잠그면서 “하나님, 무엇을 더 원하십니까? 안 도와 주셔도 됩니다. 여태까지 당신의 도움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순전히 우리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방해나 하지 말아 주십시오. 얼마나 더 죽어야 합니까?”라고 내 뱉습니다. 그리고 그는 떨어져 죽습니다.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숙연하여 지며 휴머니즘의 메시지를 인상 깊게 받지만 이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지 않고 인간 스스로 생존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참 신앙이라고 속이는 것입니다.

창세기 32장에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 사건을 신자가 위기의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으로 이해를 합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또는 무엇보다도 야곱의 생애 전체를 염두에 두고 이 사건을 볼 때에 이 장면은 결코 위기의 순간에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장면이 아닙니다. 씨름을 주도적으로 하는 이는 야곱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자입니다.

구약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남쪽 유다의 죄를 지적하심에 있어서 북쪽 이스라엘의 경우를 들어 지적하셨습니다. 특히 야곱의 죄를 구체적으로 들어 유다를 책망하는데, 야곱의 죄는 첫째로 어머니 배속에서 형의 발꿈치를 밥은 것이고 그 다음의 죄는 힘으로 하나님과 겨누어 이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야곱이 힘으로 하나님과 겨누어 이긴 것을 벌 받을 죄라고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야곱을 축복한 것은 그의 간청에 따른 축복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가 집에서 도망쳐 나올 때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약속하신 대로 복을 주신 것입니다.

그 동안 야곱이 하나님을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의 뜻을 이루는 보조 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란만장한 야곱의 생애를 살펴보면 결국 야곱은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의 페이스에 말려들게 됩니다. 얍복강에서의 씨름은 바로 그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께 대항하는 야곱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좇아가서 그의 꿈과 뜻을 좌절시키시고 항복을 받아내십니다.

포 세이돈 어드벤처의 프랭크 스콧 신부처럼 “하나님, 안 도와 주셔도 됩니다. 여태까지 당신의 도움을 받은 적은 없습니다. 순전히 우리들의 힘으로 여기까지 왔습니다. 방해나 하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내 뱉고 죽는 것은, 죽어도 하나님께 항복하지 않겠다는 불신앙의 극치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야곱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보고 우리 자신에게서 그러한 태도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께 대항하는 만큼 우리의 생애는 험하고 괴로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또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 여호와께서 유다와 논쟁하시고 야곱을 그 행실대로 벌하시며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보응하시리라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나셨고 거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셨나니 -호세아 12: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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